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9. 21:39





썩 꺼져라.





내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테니.





.

첫 인상은 사마귀였다.

그리고 녹티스는 곧 놈을 고작 사마귀 따위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사마귀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습격하지도 않는다.

녹티스는 놈의 얼굴을 응시했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조악한 표현이지만, 방금 지옥에서 뛰쳐 나온 것 같은 면상이다. 고교 시절 프롬프토와 집안의 불을 전부 꺼놓고 함께 봤던, 트라우마 레벨로 끔찍했던 공포 영화보다 그로테스크하다.

녹티스는 지금 당장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야. 난 그저 곤충을 싫어할 뿐이야. 너도 그렇지? 응? 프롬프토.

젠장.

젠장젠장젠장.

이제와서 그럴 수는 없다.

내 얼굴엔 왕자의 체면이라 하는 귀찮은 것이 발라져 있다. 이것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얼굴이 썪어나가기 시작할 터이다. 쿨하고 잘생긴 마스크에 패배자의 낙인이 찍힌다.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무섭다.

면상도 흉상이지만 우선 덩치가 크다.  높이만 해도 8 미터는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크기 뿐만이라면, 놈보다 큰 몬스터도 잡아봤다. 마력을, 세계의 근간을 몸에 걸친 녹티스는 알 수 있었다. 놈의 힘은, 그 절망적일 정도의 힘은 완전히 격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기적적일 정도로.

문득 이 놈의 존재를 몰랐던 척, 알아채지 못한 척 애써 피해다녔던 과거가 떠올랐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놈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소름이 돋고, 암담하고, 볼수록 공포가 깊어질 뿐이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사마귀의 집게 발에 해당하는 앞 발이 몸통에 좌우 세 개 씩, 무려 여섯 개나 된다.  그 앞 발에 달려있는 손톱이랄까, 주먹이랄까. 애초에 저걸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방금 저 게젓갈 같은 놈이 세개의 왼팔과 함께 집게 같은 손톱을 휘두르자 제국 최신예 대량 학살형 마도 아머가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내가 맞는다면 아마 물렁뼈 하나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손톱을 발사하는 공격에 와서는 그저 소름이 돋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면 놈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걸로 내 허리는 절단나겠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 흉흉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글라디오의 하반신 보다도 훨씬 튼실해 보이는 4개의 다리이며, 몸체 뒷 편에는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훨씬 두꺼운 꼬리가 달려 있다. 녹티스는 곧 놈이 가볍게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건장한 마도병 셋이 장작개비 처럼 날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아라네아 같구나. 노력하면 전설의 용기사가 될 수도 있겠어.

자기가 생각해낸 농담에 실없이 웃으며 녹티스는 괜히 우쭐해졌다. 언제 어느 때나 여유를 찾아내는 나의 이 그릇이야말로 왕의 덕목이지. 그렇게 자평해본다. 머릿 속에 세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만, 이 정도로만 하자.

슬슬 농담할 때가 아니니까.

이제 집중하지 않으면 아딘은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고를 덜게 될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열심히 했다. 아직 그 정도 여유는 있다. 그렇게 믿으며, 녹티스는 놈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봤다. 나는 저 무도한 놈에게 마도병처럼 허리를 강제로 접히고 싶지 않으니까.

나굴파르.

사람을 먹고, 시해를 먹고,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그 힘을 흡수하는 존재. 저주스런 시해이면서도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류의 천적. 저 급하고 성질 더러운 리바이어선조차 저 녀석을 쉽게 어쩌지는 못하리라.

꼴 좋다.

내가 오늘 저 놈을 쓰러뜨릴 테니까, 잘 보고 나서 나에게 충성을 맹새하도록. 알았냐? 이 살찐 동갈치 자식아.

.

"정말 저거랑 싸우는 거야?"

프롬프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탄환을 장전하고 있다. 일반인에 불과한 그도 전투를 거듭하며 썩 괜찮은 전사로 성장했다.

녹티스는 이 끈기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프롬프토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녹티스는 누구 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녹트에게 달렸지."

이것은 이그니스다. 안경을 고쳐쓴 왕의 참모는 약점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굴파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통찰력에 녹티스 일행은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척봐도 장난 아닌데. 그래도 물러설 수야 없지."

글라디오가 꿈틀거리는 근육을 갈무리했다. 아직 녹티스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글라디오는 나굴파르가 자신의 투지를 읽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방패. 녹티스가 검을 던지는 순간 뛰어나갈 준비를 해둘 뿐이다.

등 뒤에 있는 친구들을 느낀 녹트가 목소리에서 힘을 풀었다. 들켜도 어쩔 수 없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강한 왕자니까.

그런 걸로 되어 있으니까.

"저 놈 죽이고 등뼈라도 뽑아가면 되겠지."

엔진 블레이드를 소환하며 녹티스가 사소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 할아범, 정체가 뭐야? 왜 저런 걸 알고 있어?"

"내말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냥 뼈나 챙겨다 줘보자고."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을 담았다. 그 가벼운 어조에 녹티스의 어깨도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상대다. 마력이 없다하더라도 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텐데, 친구들은 겁을 먹거나 주눅든 기색이 없어 녹티스는 마냥 든든했다. 나도 좀 더 힘을 내서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고양감이 솟아났다.

할 수 있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쉿."

녹티스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이그니스가 왼손 검지를 입가에 세우며 주의를 촉구했다.

"놈의 등 뒤로 마도 아머가 접근하고 있어. 놈이 돌아서는 순간 돌격한다."

글라디오가 크게 어깨를 돌린다.

"좋아. 한 판 떠볼까."

프롬프토는 잘 숨겨둔 두 번째 총의 장전도 마쳤다.

"언제라도 좋아."

그리고 나굴파르와 마도아머의 교전을 확인. 마도아머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기대하며, 이그니스는 품안에서 꺼낸 마법병을 쥐어 부쉈다.

"가라, 녹트!"

녹티스가 정제하고 이그니스가 재련한 마법의 힘이 엔진 블레이드에 깃들었다. 녹티스는 마력으로 충만해진 엔진 블레이드를 나굴파르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 던졌다.

-그것은 처절한 사투였다.

이 때 녹티스가 사용한 포션과 엘릭서는 실로 48개.

녹티스는 그 외에도 일반인에게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인 제국 마도병 전용 근육 강화제, 흥분제와 같은 전투 약물도 8개나 사용했다.

소중한 엔진 블레이드는 이가 다 빠져 버렸고, 왕가의 힘은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이나 빌렸다.

승부가 났을 때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이그니스. 녹트는?"

"아직 자고 있어."

"어제도 굉장했지, 녹트."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녹티스는 나굴파르를 상대하는 동안 제대로 땅에 내려 서지도 않았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놈의 반격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나굴파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을 쉴 새 없이 이어갔고, 온갖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친구들을 지켜냈다. 방패를 소환해 막아내고, 얼굴을 직접 공격해 시선을 돌리고, 검을 휘둘러 나굴파르가 발사한 손톱들을 튕겨냈다.

과연 영웅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왕자의 형제들은 나굴파르의 힘을 피부로 느끼며 전율하면서도, 왕자의 비호 아래 움츠러드는 일 없이, 최강의 적을 상대로 완벽한 성과를 일궈냈다. 프롬프토의 저격은 나굴파르의 두 눈을 모두 터뜨렸고, 이그니스는 화염으로 놈의 외골격을 무력화시켰으며, 글라디오의 검격은 무방비가 된 몸통을 거의 반절이나 잘라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녹티스 왕자가 힘을 쥐어짜 왕가의 무기를 소환, 나굴파르를 섬멸하는 모습을- 여력을 남긴 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유롭거나 통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글라디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그래."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디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그니스의 표정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서.

"녹트가 소환한 왕의 무기는 틀림없이 열 세개였어."

"그래. 나도 다시 확인했다."

녹티스는 세 친구들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왕의 무기를 수집했다. 그 수량은 분명히 열 개일 터. 프롬프토가 굳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된거야? 설마 세 개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프롬프토다운 말이다.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그니스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중 하나는 '칸나기의 역모'. 루나프레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거야. 칸나기 취임식에서 계승하셨지."

글라디오가 이그니스의 말을 받았다.

"하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이런 젠장. 믿을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글라디오를 힐끗 바라봤다.

"못 알아볼 이유가 없어. 그건 선왕...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말도 안 돼..."

프롬프토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분명히 라디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들었다. 폐하의 검은 분명히 제국이 가져갔다. 마치 전리품을 챙겨 가는 것 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 때 녹티스의 얼굴은- 프롬프토는 절대로 잊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글라디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자 초조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나쁜 버릇이다.

"녹트.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왜 우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거야."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허물을 조용히 질책했다.

"그만. 글라디오. 녹트는 인섬니아의 차기 왕이다. 우린 녹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그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마, 글라디올러스."

그 말에 프롬프토가 어깨를 움찔 거렸다. 이그니스가 가시돋친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녹트가 마력을 넣으면 평범한 음료수가 생명의 물이 되지. 녹트가 축복한 지저분한 깃털 장식에 기원하면 죽어가던 사람도 되살아나. 녹트는 매일 이런 걸 산더미처럼 만들고 있어. 우리가 써야 하니까. 매일 수십개씩 사용하니까. 무거운 무기도 평소에는 녹트가 보관해 주고 있지. 캠핑 도구도, 텐트도 전부. 그리고 우리는 녹트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해."

감정을 드러낸 이그니스는 멈추지 않았다.

"녹트가 사용하는 순간 이동. 한꺼번에 소환하는 왕의 무기. 그것들 모두 엄청난 심력을 필요로 하지. 무사수행? 영광의 상처? 글라디올러스.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녹티스가, 차기왕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그 마지막 말.

그 마지막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글라디오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굴욕적이다. 이그니스."

글라디오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근육이 조여 꿈틀거리고, 얼굴을 길게 수놓은 상처가 일그러진다. 글리디오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새어나왔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아미시티아에게 감히. 레기스 폐하께서 어떤 심정으로 인섬니아를 지키고 계셨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방벽을 치고 계신 것을! 감히,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그 참된 아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마지막에는 거의 사자후와 같은 고함으로 변해 있었다. 글라디오가 자신의 특대검과 방패를 동시에 소환했다.

"따라와. 겁이 난다고는 하지 않겠지."

이그니스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창과 단검을 꺼내들었다.

"얼마든지."

일촉즉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두 사람에게서 여유를 앗아가고 있었다. 녹티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그니스를 격동시켰고, 글라디오의 민낯을 폭로했다.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조용히. 두 사람 모두 다행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다. 상상 이상의 박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프롬프토가- 이토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처음 봤다.

프롬프토가 텐트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녹트의 귀가 잘 안들리게 된 것 말야."

프롬프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그랬으면 지금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봤을 테니까."

프롬프토가 흘린 청천벽력같은 말에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동시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집중력이 흩어져 무기를 현세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뭐?"

"지금, 뭐라고?"

당황한 두 사람에 비해 프롬프토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말한 대로야. 녹트, 귀가 점점 안들리고 있어. 어제도 왕의 힘을 엄청 사용했으니까, 아마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너희 둘은 그런 것도 몰랐나, 하는 비난의 어조가 아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그 뿐이다.

하지만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녹트는 우리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하잖아?"

"어제의 움직임도 청각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하지만 프롬프토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녹트는 언제나 우리들을 신경쓰고 있어. 왕의 힘인지 뭔지로 어떻게든 하고 있겠지. 하지만 잠을 잘 때는 달라. 반응이 다르다고. 요즘에는 정말 죽은 듯이 자. 건드리지 않으면 뒤척이지도 않아."

"..."

"..."

짐작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녹티스는 요즘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아침잠도.

두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프롬프토의 어조는 거의 타이르는 것처럼 바뀌었다.

"이그니스가 말했지. 어려운 일은 전부 녹트가 대신 해주고 있다고. 그 말이 맞다면, 녹트가 자는 동안에는 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는 것도 신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잖아?"

"...미안하다."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냐."

면목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글라디오의 표정도 침울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할 시간이야. 내가 녹트를 깨울테니까. 두 사람, 얼굴이 아직도 험악해. 좀 진정시키고 와. 그 다음부터는 평소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글라디오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그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쭈뼛쭈뼛 다가왔다.

"프롬프토. 미안하다. 너에게만..."

"응? 신경쓰지 마. 이런 건 나에게 맡겨."

어느 새 프롬프토가 예전처럼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이그니스는 겨우 눈치챘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간 프롬프토가 그대로 텐트 안으로 사라지더니, 언제나처럼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프롬프토! 하지마! 하지 말라고!" "우이! 드러!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네!" "너 임마!" "얼른 일어나 잠탱이 왕자님! 지금 몇 신줄 알아?" "아 진짜 바지 벗겨지잖아!" "오늘 초코보 보러 가자고! 어제 약속 했잖아!" "초코보 말고 거울로 니 머리털이나 보라고 이 화상아!" 화를 내며 텐트에서 기어나오는 녹트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프롬프토는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로 녹트와 어울리고 있었다.

당해낼 수가 없다.

결국 글라디오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놈은 당췌... 이길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설핏 알아채고 있었다. 저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프롬프토는 그저 녹티스와, 우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프롬프토는 강하다. 어째서인지 절로 웃음이 흘러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정말이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여유를 발견한 글라디오가 얼마전에 새로 얻은 이마의 상처를 긁적였다. 마침 이그니스도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낸 글라디오가 한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그니스. 저기, 뭐냐."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언제나 그렇듯, 글라디오보다 솔직하고 어른스러웠다.

"미안하다, 글라디오. 진실된 왕의 방패에게 내가 말이 심했다. 우리들 중 녹트가 가진 왕의 자질을 가장 믿고 있는 건 너였지."

글라디오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아버지나 불사장군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 참, 이 놈의 성질 어디가서 갈아마시던가 해야지."

"또 무사수행을 나가겠다고 하면 곤란한데."

"흐하하. 안가 안가. 저것들 두고 내가 어딜가."

녹트는 이제 프롬프토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었다. 땅바닥을 굴러 흙투성이가 된 프롬프토는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왕자의 겨드랑이 분비물을 조합하면 신경작용제를 만들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녹트는 팔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넣었지만, 글라디오가 보기에는 여전히 젓가락 같았다. 언제까지나 빈약한 녀석이다.

그 장난질을 구경하며 이그니스도 간신히 감정을 정리했다. 이 여행, 정말이지 질릴 틈이 없다.

"식사다. 글라디오. 오늘은 채소가 없는 걸로 하지."

글라디오는 참모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했다.

"찬성이다."

그리고 잠시 후 녹티스는 흔한 샐러드 한 조각 없이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특선 가루라 스테이크 두 덩어리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녹티스는 거의 사랑을 고백할 것 같은 눈으로 이그니스를 쳐다봤지만 이그니스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예상대로였다.

스테이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

그리하여, 녹티스 왕자가 계획하고 있던 몬스터 토벌 미션은 모두 종료되었다. 녹티스와 그 동료 헌터들은 이오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베히모스를 쓰러뜨렸고, 몹시 끔찍한 용종과 뱀들을 차례로 사냥했으며, 귀찮게도 하늘로 도망치는 잡것들까지 전부 깔끔하게 처리했다.

마지막에는 임섬니아의 역대 왕들이 지하에 봉인한 모든 잠재적인 위협들을 제거함은 물론, 이 모든 존재들을 전부 합한 것 만큼이나 끔찍한 나굴파르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 망국의 왕자와 그가 목숨보다 아꼈던 세 명의 킹스 글레이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의 추도식에서 밝혀지게 된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2. 26. 23:07
"덴젤."

도시락을 받아들고 돌아선 덴젤을 클라우드가 다시 불러세웠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는 클라우드를 보며, 덴젤이 피식 웃었다.

"새로 만든 거지? 주려면 얼른 줘."

"...자."

클라우드는 덴젤의 손에 꾸러미를 쥐어 주었다. 그 조심스러운 동작에 무심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친구들 반응 보고. 돌아오면 알려줄게."

"그래."

덴젤이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생초콜릿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이걸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그 반응을 물어 클라우드에게 전해야 하는 의뢰가 이번으로 벌써 다섯 번 째다. 덴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솔직히 말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실은 전부터 묻고 싶었다. 덴젤은 단 맛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클라우드의 실력. 마스터 스위츠의 신위. 덴젤은 감히 단언했다. 그의 스위츠를 부정할 수 있는 무뢰배는 엣지에- 미드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고 말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놈은 무례한 놈이다.

"어차피 다들 맛있다고 할텐데."

하지만 클라우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필요해."

보통 클라우드의 표정은 참 읽기 힘들지만 지금 이 얼굴은 덴젤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세븐스 헤븐에 마시러 오는 비공정 아저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피로스의 등짝이라도 쑤시러 가는 표정'이다. 입이 거친 아저씨지만, 그의 말은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 덴젤은 몰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때 클라우드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그야말로 엉뚱한 일을 시작한다.

지난 번에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티파를 깜짝 놀라게 해서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고, 기어이 엉덩이를 걷어차여 벽에 쳐박혔다. 아직도 저기 어디에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게 크게 웃는 클라우드는 그 날 처음 봤다. 얼굴은 물론 온 몸이 새빨개진 티파도. 진풍경이었다.

요컨데 이것은 티파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괜히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전도 못 찾을 일이다.

덴젤은 총명한 아이였다. 그러므로 덴젤은 그 이상 깊게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일에 말려 들었다. 그러나 잘 모르고 약속을 했더라도 약속은 약속이다. 부탁받은 만큼의 일만 해주면 되겠지. 부디 상식 선에서 마무리 되면 좋겠다.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덴젤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부탁한다, 덴젤.

클라우드는 덴젤의 뒷 모습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짓고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산더미 처럼 쌓여있는 식재 사이에서 그는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하얀색 유체가 가득 들어있었고 표면에는 음각으로 글자가 패여 있다. 티파 전용. 클라우드는 병을 조리대에 올려 놓았다. 거의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로 신중한 동작이었다.

다음으로 클라우드는 앙증맞다는 표현이 필요할 만큼 작고 귀여운 스푼을 꺼냈다. 역시 손잡이에는 음각. 클라우드는 티파 전용 스푼에 병안에 들어있는 티파 전용 생크림을 조금 묻혔다.

클라우드는 스푼을 들고 2층에 마련된 침실로 향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클라우드는 스푼에 묻은 생크림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기름칠해두지 않은 경첩에서 다소 거슬리는 소리가 나더라도 티파는 깨어나는 법이 없다. 스푼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진 머리결을 건드려 본다. 반응이 없다. 이어서 클라우드는 조심스럽게 티파의 옆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파가 조금 뒤척였다. 좋아.

살폿 잠이 깬 티파는 침대보를 핥는 버릇이 있다. 이 때다. 클라우드는 스푼에 묻어있는 생크림을 자신의 새끼 손가락에 옮겼다. 그대로 살며시 새끼 손가락을 티파의 입가에 옮긴다.

오물오물.

할짝할짝.

티파의 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그녀의 혀를 타고 입안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클라우드 특제, 티파 전용 잠깨기 생크림을 맛본 잠탱이 여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성공이다.

클라우드는 황송하기 그지 없는 여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티파."

여신이 뒤척이며 한심하게 답했다.

"으으음... 5분만 더..."

"안 돼. 어서 일어나서 밥먹어. 나 늦겠어."

"...이렇게... 후아암... 깨우는 거... 그만 두면 안돼?"

"또. 큰일날 소리 한다."

"치."

신혼 초 클라우드는 티파가 잠결에 내지른 주먹에 입이 돌아갈 뻔 했다. 그 권압에 의해 성대하게 구멍난 벽은 일부러 대충 막아놨다. 언제고 티파를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물론 티파는 맹세코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웃음도 나오지 않는 일이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쉽다.

티파 전용 잠깨기 생크림과 같은 테크닉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생존전략 중 하나인 것이다. 7번가의 잠자는 사자는 클라우드가 아니면 깨울 수 없다.

그렇다.

그런 걸로 해두자.

거기까지 생각한 클라우드가 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그에게 티파의 아침잠을 깨우는 일만큼 즐거운 오락은 달리 없었다. 티파의 잠자는 얼굴도, 수면을 방해받을 때의 못마땅한 표정도 전부 흡족하다. 사랑스럽다.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생각은 없다. 맡길까보냐.

"그만 하고. 일어나."

"후아아."

하품을 참으며 티파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티파는 클리우드에게 몸을 껴안아 오는 듯 싶더니 그의 몸을 타고 영차영차 등 뒤로 이동해 메달렸다. 티파의 길고 매끈한 다리가 클라우드의 허리에 감겼고, 그녀의 숨결이 연인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느낌이 말초신경을 자극하자 클라우드의 사고가 정지. 이성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욕망의 헐떡거림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지금 클라우드의 자제력은 설탕과 베이킹 파우더를 조합해 만든 과자와도 같았다. 조금만 힘이 들어가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정도 자극은 늘 있는 일이다.

나를 신혼 초의 애송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클라우드는 초인적인 자재력으로 검은 욕망을 억눌렀다. 승리한 것이다. 개가를 올려라.

"...티파."

"업어줘."

"이미 업혀 있잖아."

"식당으로~ 고~"

"나참."

남편의 번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티파는 당분간 클라우드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티파를 업은 채로 일어선 클라우드가 문을 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그 사이 잠이 아직 덜깬 티파는 오물오물 거리며 클라우드의 목덜미를 침 범벅으로 만들었다.

티파는 그대로 입술도 때지 않은 채 물었다.

"애들은?"

"화요일이잖아. 현장학습. 벌써 나갔어."

"흐응."

티파가 클라우드의 목에 이빨을 세웠다.

"티파. 아프잖아."

어느새 티파는 더 이상 잠에 취해 있지 않았다.

"애들이 없네."

"응?"

"애들이 없다고. 클라우드."

클라우드는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정보를 해석하기 전에 다리가 멋대로 걸음을 멈췄고, 한 발 늦게 뇌가 상황을 정리했다.

클라우드가 중얼거렸다.

"맞아. 그렇군."

클라우드의 나쁜 손이 슬금슬금 티파의 허벅지를 지나 엉덩이로 옮겨졌다.

하지만 티파가 더 빨랐다.

클라우드의 검은 손이 뻗쳐 오는 그 짧은 순간 티파는 허리에 감아둔 다리를 푸는가 싶더니 그대로 휘리릭 클라우드의 몸을 타고 정면으로 이동. 클라우드에게 앞으로 업힌 상태로 고쳐 메달렸다. 그 엄청난 솜씨. 파도처럼 밀려드는 리비도. 클라우드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클라우드는 티파의 입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그대로 뒷걸음질쳤다. 어찌어찌 침실로 되돌아간 것은 클라우드의 마지막 남은 정신력이 이뤄낸 자그마한 승리였다.

클라우드가 가까스로 침대에 걸터 앉았을 때 티파의 공세는 더욱 격해졌고, 클라우드의 이성은 너덜너덜하게 녹아내렸다. 이런 정신 상태로는 늘 그러던 것처럼 마황을 운용해 문틈에 유사 침묵 마법을 걸어두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곤란하다. 멀어지는 이성 속에서 클라우드는 혀를 찼다. 두 사람은 소음을 많이 내는 편이다.

티파는 클라우드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클라우드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뭐, 아무렴 어때. 집에 우리 말곤 아무도 없는데.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티파는 눈웃음을 지어보였고, 그것으로 클라우드는 티파의 노예가 되었다. 어차피 그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매우 오래 전부터 클라우드는 야외에서도 거침없는 파렴치한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티파는 거실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바렛트를 발견했다.

아차.

어제 바렛트가 돌아와 있었지.

티파는 지금 온몸에 클라우드의 체향을 듬뿍 묻힌 상태였다. 바렛트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것보다 한발 빨리 티파는 그대로 방에 돌아와 쳐박혔다. 그리고 그녀는 바렛트가 외출할 때까지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클라우드는 그제야 방에 침묵 마법을 걸어주었다. 바렛트의 음흉한 미소와 치켜세운 엄지 손가락도 클라우드가 대신 받았다. 때늦은 배려였다.

클라우드는 이 날 간신히 지각을 면했다. 대기줄 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늘의 첫 손님은 서둘러 문을 열고 있는 마스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손님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마스터의 얼굴을 보고, 불경스럽게도, 승천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클라우드의 생초콜릿에 대한 도전은 일곱 번째 시도에서 종료되었다. 꿈결처럼 맛있는 생초콜릿을 받고 그것이 사랑 고백이라고 착각한 여학생이 스스로가 몰모트에 불과했다는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후 덴젤의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아무튼 눈물이 핑 돌고 어금니가 흔들릴 정도의 일격이었다.

상황을 설명하며 뾰루퉁해져서 뺨을 쓰다듬고 있는 덴젤에게 클라우드는 사과하는 대신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덴젤은 클라우드가 작게 "완성됐다"고 중얼 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덴젤은 괴성을 지르며 클라우드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물론 클라우드는 맞아주지 않았다. 이 엉덩이는 티파 전용이니까.

클라우드는 아무튼 발렌타인 데이에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간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 하는 모양이지만 사회 부적응자인 상태로 20년 이상 살아온 클라우드에게 그런 아무래도 좋은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정성스럽게 포장한 생초콜릿을 들고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티파가 기다리는 침실로 향했다. 이걸 먹고난 티파의 기쁜 얼굴을 상상하면서. 오늘은 조금 짖궂은 장난을 쳐도 용서해주지 않으려나.

하지만 티파는 클라우드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신했다.

티파는 배꼽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탱크탑과 속옷을 간신히 가릴 정도로 짧은 숏 팬츠를 입고, 침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실은 늘 있는 일이다. 당황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곧 자신이 당황하게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티파가 다리를 꼬면서 도발적으로 선언했다.

"초콜릿은 내 몸 어딘가에 숨겨놨어."

하, 한 번 찾아보지 그래? 티파도 과연 긴장한 모양이지만, 클라우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예상대로, 완전히 당황한 상태에서, 급기야 손에 들고 있는 생초콜릿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여신의 탱크탑 속 계곡 사이에서 녹아내린 초콜릿이 새하얀 옷감에 갈색 얼룩을 만들어낸 것을 본 탓이었다.

"어, 하나 들켰네."

티파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성욕의 노예가 된 클라우드는 덴젤을 희생양 삼아 정성스레 연성한 생초콜릿에는 시선도 옮기지 않고 티파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티파는 조금 움츠러 들었다.

"앗..."

그러나 기세와는 달리 클라우드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럴 때 클라우드는 침착하게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불을 끄고, 지난 번에는 잊었던 침묵 마법을 이중으로 걸었다. 오늘은 특히 소음을 많이 낼 예정이니까. 물론 클라우드는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여 진지하게 초콜릿을 발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부 일곱 개였다.

그리고 티파는 이런 미친 짓을 다시 하지 않겠다고, 굳이 다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침대보 대신 클라우드의 입술을 오물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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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22. 11:37
하나는 레나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관사로 돌아오고 있었다.

만남 막바지에 레나는 계속 뭔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던 것이 약간 마음에 걸린다. 눈치 빠른 하나는 이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하나는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하나는 공을 던져주면 당장 물어오겠다고 주장하는 듯한 레나의 강아지 같은 눈을 모른 척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

그 때 하나는 관사를 가로질러 달리는 무리를 발견했다. 열과 오를 맞춰, 힘이 느껴지는 구령과 함께 정갈하게 구보하고 있는 그들은 송하나 하사가 이끄는 제 13 메카 소대였다. 하나, 둘, 넷, 여덟, 열 하나. 이럴 수가. 전원이 모여있다.

"어라?"

보통 이 늦은 시간까지 구보하는 것은 하나 자신 뿐이다.

하나는 그녀가 소대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기본 체력, 팀웍,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소대원들 사이의 유대 관계가 한 방에 해결된 모습을 보면서, 활짝 웃었다. 솔선수범한 보람이 있었다. 이 귀여운 녀석들 이제야 철이 들었구나.

"야, 늬들!"

구보를 이끌고 있는 하나의 후임, 김재열 하사가 하나를 알아보고 호령했다.

"전체, 쉬어!"

김 하사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하나를 향해 소대를 정렬시킨다. 그리고 대표하여 거수경례. 손날로 공기를 베어버릴 기세였다.

"충성! 송 하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나가 약간 움찔했다. 이 자식들 왜 이래?

"야, 늬들 혹시 내가 오늘 잠깐 놀러갔다 왔다고 시위하는 거야?"

잠도 안자고 돌아왔는데?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즉답.

김 하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 자발적이라는 건데. 하나는 자신의 소대가 딱히 군율을 위반하거나 군기가 느슨하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다. 사실 훈련이 많으면 많았지 부족하지는 않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대가 더 적극적으로 바뀔 만한 계기가, 오늘 있었다는 이야기일까?

지금까지 없었던 신선한 자극이?

아.

설마.

설마 늬들...

"예 그렇습니다! 오버워치 강습 사령관 님께서 오늘 훈련에 참가하셨습니다!"

이.

이이이!

배신자 놈들이이이이이!

하나는 소대원들을 질책하는 대신 그대로 등을 돌려 뛰어갔다. 나이트 워치 방향이었다.

.

하나가 나이트 워치에 신속하게 침입. 복도에 걷고 있는 오버 워치 요원에게 강습 사령관의 위치를 질의. 곧바로 응접실에 향한다.

송하나 하사가 곧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이미 들어와 버렸지만.

응접실에 모여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오버 워치의 요원들이 일제히 출입구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레나로 시작해서, 목표물인 잭 모리슨 강습 사령관에, 아나 아마리 부사령관, 라인하르트 빌헬름 돌격대장, 앙겔라 치글러 메디컬 치프,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카우보이, 그리고 잘 모르는 고릴라가 있었다.

......

카우보이는 그렇다치고.

'고, 고릴라?'

하나는 비명을 지를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멋적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고릴라에게 다시 한 번 경악했지만, 하나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안면 근육을 단속했다.

지금은 목표물에 집중할 때다. 티타임 중 저 무시무시한 오버 워치 강습 사령관이 바이저를 비롯한 모든 장비를 해제하고 한가롭게 입가를 풀고 있는 지금이, 바로 공격 기회다.

초탄 장전, 발사.

허리를 세우고, 무릎을 붙인다. 오른쪽 팔을 사선으로 곧게 펴고, 오른쪽 발을 가볍게, 하지만 절도 있게 구르며 이와 동시에 팔을 굽혀 손 끝을 눈 썹 옆으로 옮긴다. 일반적인 경례와 각을 잡는 동작이 미묘하게 다른, 오버 워치 특유의 경례법이다.

어떠냐, 강습 사령관. 이것이야말로 9개월전 병동에서 레나 언니에게 직접 전수받은, 그리고 아나 아마리 부사령관님을 한 방에 격침시킨 거수 경례다.

"대한민국 육군 기갑 부대 제 13 메카 소대 소속 송하나 하사입니다. 오버워치 강습 사령관님께 면담을 요청합니다."

보라, 이 완벽한 자기소개를. 발성도 훌륭하고 혀도 깨물지 않았다.

실은 9개월 전에, 레나 언니에게 경례할 때도 속으로는 이것 비슷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저 둔탱이 언니는 전혀, 이만큼도 몰랐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수근수근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오, 저 늠름한 모습 좀 보라지. 경례 하는 것 봤어? 이런 세상에. 레나 보다 훨씬 낫군. 윈스턴? 이제 바나나 안 준다? 난 바나나 안먹는다고 했잖아. 하! 중간 부터는 흔한 잡담이 되어 버렸지만.

"오버워치 강습 사령관 잭 모리슨이다. 환영회 이후 처음이군."

하나는 주임원사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수행했던 오버 워치 환영회를 떠올렸다.

그 부끄러운 안무.

소름돋는 가사.

극심한 오한.

하나는 주임원사와 국가에 대한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초인적인 극기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 꼴을 본 레나는 웃음을 참다 못해 거의 숨이 넘아가기 직전이었다. 그 잠깐 사이 레나는 하나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두고봐. 두고봐, 레나 언니.

다행히 잭은 환영회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앉지. 왜 왔는지도 알 것 같으니. 내게 설명할 시간을 주시게."

잭 모리슨의 음성은 평온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묵직했다. 느낌이 이렇게, 공기에 무게가 생긴 것 같달까. 하나는 차렷 자세로 돌아오며, 무심코 침을 꼴깍 넘겼다.

어느 새 다가온 아나가 하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존경하는 여전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빈 자리에 인도 받은 하나는 그만 최초의 기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심정적으로는 연타석으로 홈런을 얻어맞은 만년 꼴지 야구팀의 에이스가 된 것 같았다.

"제시. 이 아이에게 밀크티를 부탁해도 될까."

"넵. 부사령관님."

아까의 카우보이가 아나 아마리 부사령관님의 지시를 받고 밀크티를 준비해 하나에게 대접했다. 입가에는 그윽한 미소. 하나는 곧 알았다. 이 사람은 부사령관님의 명령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지만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단한 면면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방약무인을 한계까지 찍은 하나라 하더라도 이 앞에서 미쳐 날뛸 만큼의 배짱은 없었다. 지금까지 처럼 일 대 일 상황이라면 대응 방식을 상대의 약점을 찌를 수 있는 페르소나로 바꿔 차근차근 대응할 수 있을 테지만, 이 상황에서 그 전법은 무리다.

그러나 부사령관 아나 아마리는 무척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하나의 고민을 한 눈에 알아챘다. 이 육식 토끼는 오늘 솔져 세븐티 식스를 잡아 먹으러 온 것이다.

"자아, 송하나 하사는 우리 강습 사령관님께 볼 일이 있는 모양이야. 우린 자리를 비켜 주자고."

"네, 부사령관님."

제시라고 불렸던 카우보이가 즉시 일어섰다. 레나는 뾰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으. 전 그냥 저기 구석에 있으면 안돼요?"

"안 돼."

"그냥 공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너처럼 되바라진 공기가 어디있어."

"강습 사령관님이 우리 하나 해코지 하면 어떡하냐구요!"

아나 아마리가 표정을 구겼다. 이러다간 끝이 없다.

앙겔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아나 아마리 부사령관을 거들었다. 레나의 뒷 목을 잡고 응접실 바깥 쪽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수술실에서 단련된 그녀의 체력은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들었죠? 잭. 하나양이랑 싸움붙으면 그냥 맞아요. 치료는 해 드릴테니까."

"치프님! 메르시! 옷 늘어나요! 하나야아아아아아아아아!!!"

라인하르트는 레나가 절규하는 꼴을 보며 웃음을 참지 않으며 "쿠... 타하하하하!" 응접실을 나섰다.

아나 아마리는 겨우 마지막 오버워치에게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자, 윈스턴. 우리도 가지."

"우호우호?"

"얘한테도 다 들켰거든? 이제와서 야생 고릴라 흉내내지마. 이거 원 아까부터 부끄러워 죽겠으니까."

"...네. 죄송합니다 부사령관님."

"사과하지마 이 바보 콤비놈들."

윈스턴은 순순히 응접실을 나서면서도, 레나와 도매금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에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참 표정이 풍부한 고릴라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부사령관님과 고릴라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것으로 겨우, 응접실에는 잭과 하나만 남게 되었다.

잭은 바이저를 꺼내 만지작 거렸다. 주도권을 잡고 싶다면 레나가 이걸 꼭 쓰고 있으라고 했었는데. 잭은 한숨을 쉬며 하나가 눈치채기 전에 다시 바이저를 품안에 갈무리했다.

아무튼 하나로써는 바라마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나 아마리 부사령관님, 존경합니다.

그렇게 하나는 겨우 안심하고 잭과 독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잭 모리슨 강습 사령관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제 13 소대를 쥐고 흔든 일에 대해 항의해야 한다.

하지만 잭은 하나가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실은 아침에 자네의 부대를 방문했었다네. 자네의 허가를 받아 대 옴닉 합동 훈련을 해보려 했던 셈이네만."

잭이 계속 설명했다.

"그리고 자네가 레나와 함께 외출했다는 걸 알았지. 하는 수 없이 돌아오려는데, 자네 휘하의 김 하사가 오버위치의 훈련을 체험해 보고 싶다고 부탁하더군. 눈 빛이 워낙 진지해서 소속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주제넘은 짓을 하고 말았네. 사과하고 싶군."

그렇게 됐던 건가. 재열이 이 눔 자식 오늘 죽었다 복창해라. 하나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하나는 잭 모리슨의 선선한 사과에 약간 감명을 받았다. 오버워치의 수장이 일개 하사관에게 양해를 구한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잭이 화제를 돌렸다.

"실은 방금까지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나가 눈을 깜빡 거렸다. 내 이야기? 이렇게 핵심 멤버들이 전부 모여서 말이야?

"레나 옥스턴과 알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지 않겠나?"

아, 9개월 전의 그 사건을 말하는 걸까. 트레이서와 협력했던. 그거라면 강습 사령관이 파악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하다.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래서 레나에게 자네와의 관계를 묻고 있는 참이었는데, 뭘 착각한건지 자네 동의 없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이제껏 뻗대고 있거든. 원래는 입이 무거운 친구는 아닌데."

언니가 왜 그랬지? 숨길 일도 아닐텐데.

어쩐지 항의하러 왔다가 인사 청문회가 된 것 같은 상황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듣고 싶은 사과도 이미 받았으니까.

하나는 자신의 시점에서 9개월 전 테러리스트의 무장 봉기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했다.

잭은 진지한 얼굴로 이를 경청했다.

.

"제시. 어때."

"설치했습니다, 부사령관님. 수신양호."

"좋아."

"뭔데뭔데??"

"맙소사! 지금 도청기를 설치하신 겁니까?"

"이런, 맥크리. 자네, 강습 사령관을 상대로."

"어르신. 나 부사령관님 명령만 듣는 거 알잖수."

"우와. 저, 저, 말투 바뀌는 것 좀 봐!!"

"어디어디. 좀 들어볼까요."

"어허! 앙겔라! 그건 아니잖아! 당연히 내가 먼저 들어야지."

"부사령관님, 이러려고 우릴 내보낸 거에요?"

"이게 뭐야!! 나 다시 들어갈래!!"

"제시."

"넵, 부사령관님."

"이, 이거놔 이 털보야!! 난 갈거야!! 하나야!! 하나야아아아!!!"

"재갈."

"네."

"나참. 이젠 나도 모르겠군. 아나. 여기 외장 스피커."

"역시 라인하르트야. 요즘 젊은 것들은 도무지 준비성이 부족해."

"동감일세."

.

하나의 설명은 세세하고 명료했다.

기분 탓일까. 잭의 얼굴에 약간 괴로움이 스친 것 같았다.

"그런가. 테러리스트와 교전. 귀대 명령을 무시하고 트레이서를 구출. 게다가 교전 중 부상을 입고 본부와 연락 두절, 심지어 중상을 입고 장기 입원이라. 지금의 계급은 명령 불복종에 의한 강등의 결과겠군."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언을 통해 긍정했다. 군인에게 명령 불복종은 중죄. 그것은 오버워치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자신에 대한 강습 사령관의 평가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 명령 불복종을 하면서까지 레나를 도우려 했는지, 물어봐도 괜찮겠나."

그리고 이는 실은 레나가 하나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너무도 나이브한 이야기다. 어른스럽지 못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리고 하나는 그걸 떠올릴 때마다 자신이 아직 병사로써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차마, 거기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나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저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합니다. 그러기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구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말만을 했다. 가장 중요한 말은 숨길 수 밖에 없다.

잭 모리슨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하나의 말을 풀어냈다.

"레나를 돕는 것은 해야할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숨겨두는 방어적인 답변이 오버워치의 수장을 납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만하군."

잭은 하나의 약점을 정면으로 찔러 들어왔다.

"전장에 선 지 3개월밖에 안된 신참이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건가."

"하지만 해냈습니다."

"확실히 그랬지. 보호하려한 대상에게 보호받으면서 말이지. 거기까지 계산에 있었다는 답을 하려는 것은 아닐테지."

"그것은..."

낮게 깔리는 잭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마치 응접실 공간의 기압이 높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압력에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잭은 하나의 심중을 눈치챘다. 아주 조금이지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네만."

"아니요."

그러나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즉답했다.

"없습니다."

오버워치 앞에서 치기어린 발언을 할 수는 없다. 당장 비웃음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는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없는 자신에게 더 실망했다. 예전에 좀 더 이렇게, 물불 가리지 않던 자신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다. 자신은 이제 10대가 아니고, 전장에 나서는 군인이다.

그러나 하나는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잭은 그 속에 숨겨진 한마디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잭은 고개를 폭 숙이고 있는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짧게 물었다.

"자네가 구했다던 그 노인의 상태는 어떤가."

그러자 하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완전 건강해요! 총에 맞기 전보다요!"

하나는 자신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표정만으로 잭은 이 아이가 가진 용기의 근원을 보았다고 판단했다.

이 아이는 순수하다.

시민을 구하기 위해 테러리스트를 쏜 것도, 트레이서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도, 이 때문에 강등당한 일까지- 이 아이는 전혀 후회하고 있지 않다.

잭은 표정을 풀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잘 알았다. 몰아세우려는 것은 아니었네. 용서하게."

잭 모리슨의 대답은 마치 하나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전 질문도,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하나가 조금은 본심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는 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나는 먼 발치에서 바이저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잭을 봤던 일이 있다. 하나는 바이저 너머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잭을 마지막 타겟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이 역전의 용사는 아나 아마리 이상의 강적이다.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지 않았을까.

강습 사령관의 얼굴에 길게 난 상처는 분명 섬뜩하지만, 하나는 그 안에 새겨진 숨길 수 없는 상냥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직감은 매우 잘 맞는다.

잭은 이야기를 되돌렸다.

"그럼, 다시 정식으로 요청하고 싶군. 남은 일주일간 오버 워치와 합동 훈련을 하면 어떻겠나. 옴닉의 공격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팀웍을 미리 다져두면 작전 수행에 많은 이점이 있을 걸세."

오버 워치의 제안이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김재열 하사 나부랭이가 아닌, 제 13 메카 소대장에게 직접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는 잭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돌이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다짜고짜 나이트 워치에 방문한 것은 사소한 실수에 불과했다.

잭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야말로 오늘 송하나 하사 최대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

"으? 아아아아아!"

하나가 풀 오토로 탄창을 전부 비울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자동으로 날아가는 탄창. 하나는 목표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탄창을 교환했다. 오늘 모의전투에서 4번 전사하고 나서 익힌 생존 기술이다.

"좋군. 아주 좋아."

하지만 잭 모리슨은 하나가 탄창을 교환하는 바로 그 순간 엄폐물에서 뛰쳐 나왔다.

오, 하나님, 제발. 절 도와주셔야 하잖아요.

장전이 끝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찰나 잭의 보디 체크가 작렬했다.

"커헉"

하나가 부웅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물론 그렇다. 솔저 세븐티 식스는 하나를 상대로 절묘하게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방금 전도 그렇다.

잭은 보디 체크를 하는 대신 라이플 한 방으로 하나의 머리를 페인트 투성이로 -물론 이미 엄청나게 더럽혀져 있었지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 뿐인가. 지금의 보디 체크에 잭이 전력을 실었다면, 하나는 틀림없이 내장 파열로 즉사했으리라.

그리고 하나는 이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감히.

감히 나를 얕봐?

가만 안둬.

"가만 안둬------!!!!!!"

하지만 육체는 정신을 대변하지 못한다. 하나의 뇌는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아침에 일어난 일을 보고 있었다.

.

"송하나 하사는 오늘 훈련 중 메카 탑승을 금지하겠다."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같이 훈련하자더니 기갑 부대의 소대장에게 메카를 타지 말라니. 이건 신종 괴롭힘이야?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하나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잭을 올려다 봤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나는 그가 무슨 설명을 해도 들이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말만해. 내가 다 갚아 줄게. 응. 기대하라고.

잭 모리슨의 설명은 무척 간단했다.

"자네의 메카 조종술은 완벽하다. 이미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아, 그러셔? 그럼 나랑 한 판 붙어 볼-

"레헥?"

하나는 자기 소개할 때도 깨물지 않았던 혀를 깨물었다. 저 멀리 풉 하고, 레나 언니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언니, 어제에 이어 두 번째야. 이따 나 좀 봐.

잭 모리슨의 상찬이 이어졌다.

"이 7일간 자네의 훈련은 빠짐없이 지켜봤지. 자네에 비하면 나는 메카에 대해 거의 초심자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얻었다네. 매우 인상깊었다고 해야겠군."

와, 이 아저씬 무슨 칭찬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는 거야! 부끄럽구로!

하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른 오버워치 요원들이 하나를 곁눈질하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잭의 전매특허.

'라이징 패스트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장점을 콕 집어 정면으로 칭찬한다. 그야말로 칭찬을 듣는 상대가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제시의 사정 거리에 들어가면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윈스턴이 또 해냈군. 이 발명이 오버워치를 구원할 거야."

"앙겔라가 없다면 우리 부대는 3일도 버티지 못할 테지."

"레나가 저질러버렸어. 그녀가 우리 모두를 구했어."

"라인하르트 경, 나를 몇 번 살려주었는지 모르겠군. 항상 의지하고 있소."

"자리야. 자네의 근육에는 결점이 없어. 게다가 그 근력. 기적적이야."

가장 악질적인 대목은, 잭에게는 칭찬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잭의 모든 칭찬이 전부 진심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꾸밈없는 태도가 칭찬의 파괴력을 몇 배나 증가시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오버워치의 트리플 S 평가는 잭의 라이징 패스트볼에 달려 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즉,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요원들이 다 거쳐온 길이다. 하지만 하나는 이런 대놓고 하는 칭찬에는 면역이 없는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아, 이번 공은 진짜 완전 한가운데에 꽂혔네요. 윈스턴이 과장스럽게 스트라익 사인을 하자 레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잭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송하나 하사의 지휘 여부에 따라 부대의 생존력이 달라지지. 자네의 취약점은, 자네도 알다시피 메카를 버린 후 갈아탈때까지 가장 크게 드러난다네. 자네가 그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만 키워낸다면, 제 13 소대가 옴닉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불리함은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지."

이 또한 엄청난 칭찬이다. 송하나 하사는 계속되는 상찬에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는 잭 모리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이 바보. 멍청이.

내가 미쳤지.

.

"허우!"

등에 내달리는 충격이 하나를 현실로 되돌려 보냈다. 방금 바람빠지는 소리를 낸 입에서 쓴 맛이 느껴진다.

하나는 땅에 쓸려 나가는 기세를 그대로 이용해서 빙글빙글 몸을 굴려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자세로 쓰러지듯 잭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내달린다. 이것은 잭에게 7번 죽으면서 저절로 습득한 도주 방법이다.

도주하면서 하나는 등 뒤로 재장전해둔 총을 풀 오토로 갈겼다. 잭을 뒤돌아 보는 우는 범하지 않는다. 이 골목은 좁아서 피할 공간이 없다. 이것만으로 견제는 가능할 터. 잭은 탄환을 피해 엄폐할 수 밖에 없었다.

"좋은 판단이다. 송하사."

하나는 아직 자신이 총을 발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총은 상대의 페인트 탄에 피탄되지 않았을 때에만 기능한다. 하지만 하나에게는 아직 자신이 잭에게 한 발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축할 기운도 여유도 없었다.

하나는 전방에 보이는 빨간 우체통 앞으로 숨어들었다. 하나의 체구는 작지만 우체통은 그런 그녀에게도 썩 좋은 엄폐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묵하고 빨간 친구는 하나에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 정도는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하나가 심호흡하면서 생각했다.

반격한다.

반격한다.

반격한다.

하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 밖에 없었다.

.

"T2, E3!"

하나가 헤드셋을 벗어던지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나 잭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헤드셋이 고장났군. 그러므로 하나의 허를 찌르는 지휘력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피아 구별없이 전원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될테니. 아쉽게 됐지만, 이것도 전쟁이다. 이번 생은 포기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자꾸나.

잭이 바람처럼 질주했다.

"윽! 이 아저씬 뭐 이리 빨라!"

완전히 여유를 잃어버린 하나에게서, 예의바른 군인의 모습은 한 조각도 기대할 수 없었다. 어제까지는 그렇게나 각이 잡혀 있었는데. 이런 상황까지 몰렸던 일이 없었던 것이겠지. 무심코 본색을 드러낼 정도로 당황했으리라.

"T2, E3! 이 자식들아 안들려!? 솔져! 십자 포화! 당장!"

""아이아이, 맴!!!!!!""

건물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2기의 메카, 탱고2 김재열 하사와 에코3 최상철 일병이 잭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듯 발포했다. 이들 메카의 융합포는 산탄 계열이다. 전부 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분명히 유효타를 기대할 수 있다.

상대가 잭 모리슨이 아니라면.

잭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탄환 사이를 유영하듯 움직여 피하고, 순식간에 건물의 사각으로 사라져 버린다.

"큭!"

"씨발 이게 말이 돼?!?!"

탱고2와 에코3로써는 잭이 총구의 방향을 확인하고 격발하는 타이밍을 읽어 탄막의 범위를 지극히 정확하게 예측해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하나가 몸을 낮춰 이동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F5는 할아버지를 막아! 전력을 다해 쓰러뜨려!"

하지만 이래서야 적에게 작전을 모두 알려주는 꼴이다.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가상하지만, 슬슬 지휘도 그녀답지 않게 조잡해지고 있다. 라인하르트를 메카 1기로 막을 수 있을리가 없다. 그라면 맨손으로조차 메카를 두동강 낼 수 있으니까.

"A4, B5! 너희들은 털보! 앞 뒤에서 동시 공격!"

맥크리도 귀가 있다면 방금 지시를 들었겠지. 그라면 등 뒤에 벽을 두고 엄폐해 정면으로 돌진할 수 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그는 메카의 조종사들을 직접 노리겠지. 탄환은 두 발이면 충분하다.

너무 궁지에 몰아버렸나. 이제 슬슬 휴식해야 하는 타이밍이군.

잭은 하나에게 가볍게 사격했다. 페인트 탄이 벽에 맞고 하나에게 조금 튄다. "끄악!" 하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계속 도주했다. 끈질기군.

"야 씨발 너희들 뭐해! 솔져가 총쏘잖아 지금! 멀리서 견제도 못해!?"

잭은 하나가 조금씩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잭이 슬금슬금 막다른 곳에 몰아 넣은 하나는 더 이상 도주할 곳이 없어졌다. 하나가 엄폐물로 삼고 있는 나무 상자는, 그야 뭐 페인트탄 한발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심지어 상자 높이가 너무 낮아 하나는 그 안에 엎드리듯 쭈구려 앉아 있었다.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만 됐다. 송하사. 충분히 열심히 했어."

"으으으... 젠장! 죽여!"

비장하고 초라하다.

잭은 피식, 하고.

웃으려다가-

등 뒤에 집결하고 있는 메카 소대를 눈치챘다.

5기.

...

5기라니.

뭐지? 날 견제하던 2기는 둘 째치고, 맥크리와 라인하르트를 상대하던 3기까지?

'상대를 몰아 넣은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 쪽이었나. 이거 걸작이군.'

잭의 상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가 고개를 내밀어 다시 외쳤다.

"늬들 뭐해! 쏴! 죽여!"

그리고는 고개를 폭 숙여 나무 상자 아래로 쏙 들어가 숨는다.

그 모습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잭은 폭소를 터뜨리고 싶은 기분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좋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스위치를 켜고, 잭 모리슨이 솔져 세븐티 식스가 된다. 그리고 그대로 자세를 낮춰 메카 소대에게 돌진. 5기의 메카가 발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니.

콤마 2초.

내가 더 빠르다.

솔져가 마치 지면에 붙어 미끄러지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메카 소대의 중심부까지 이동했다. 메카 소대가 경악하는 가운데, 솔져가 나직하게 감탄했다.

"솔직히 놀랐다."

솔져 세븐티 식스가 마치 멱살을 잡는 것처럼 메카 한 기의 머리를 움켜쥐고, 융합포를 반대로 꺾어 휘두르며 그대로 땅바닥에 메다 꽂았다. 메카에게 맨손으로 기술을 걸어 던져 버린 것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신위에 메카의 조종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이런 기만 전술을 펼치다니."

솔져가 경악해 굳어있는 2기의 메카를 향해 지근 거리에서 총격. 콕핏에 탄환 세례를 받은 메카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군."

패닉에서 벗어난 병사가 부스터를 켜고 돌진. 솔져는 서두르지 않고 메카의 오른 쪽 측면으로 돌아들어가 다리 관절부에 로우 킥. 한쪽 무릎을 꿇고 죽 미끌어지는 메카의 등 뒤로 사격. 탄창 하나를 다 비워버린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아직 상처없이 서 있는 메카를 향해 고정하고 있다. 빈틈 따윈 한 조각도 없었다.

"적을 지칭하는 방식의 차이인가."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물러나는 병사를 앞에 두고 솔져는 마치 마술과 같은 솜씨로 순식간에 재장전. 이번에는 라이플을 견착하고 병사의 미간을 정조준 사격. 단 한 발로 메카는 침묵.

마지막으로 솔져는 처음에 내던져 버린 기체를 차분하게 확인사살함으로써, 혼자서 메카 5기를 전부 정리했다.

그리고 완전히 질려버린 얼굴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마지막 병사를 바라봤다.

"하... 이게 뭐야..."

하나는 분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괴물... 아저씬... 사람도 아냐!"

"그게 패인이군. 맞아. 난 강화 인간이니까. 보통 사람처럼 생각했다면 지는 게 당연해."

그 정도가 아니다. 설령 메카를 타고 싸웠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꺾였다.

하나는 자신이 오늘 처음으로 완패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는 자신이 느끼는 패배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으아! 웃기지마! 다시해!"

오늘 이런 강도의 전투 훈련을 벌써 15회나 수행했다. 잭은 바이저 내장 통신기로 요원들의 의견을 접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잭은 심드렁하게 선언했다.

"오늘은 접는다. 모두 짐싸자."

"아저씨! 한번 만 더!"

잭은 억지를 부리는 하나를 보며 이를 딱 하고 부딛혔다.

.

"야! 늬들 왜 그랬어! 포위하자마자 바로 쏴죽였어야지!"

"소"

"뭐! 소 뭐!"

"송하사님 맞을까봐 그랬지 말임다. 왜 하필 거기 쭈구려 계시지 말임다."

"윽... 우이씨... 저 아저씨 유인하는 게 쉬운 줄 알아! 그래도 쐈어야지! 나 엄폐하고 있었잖아!"

"풉... 상자떼기로 말임까."

"이 자식이 웃어?!"

"송하사님이야말로 왜 안쏘셨슴까?"

"...내 안에 괴물이 늬놈 새끼들 머리통 다 날려 버릴까봐 그랬다! 어쩔래!"

갸갸 소리지르는 하나를 보며 레나는 저대로 졸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폭소함으로써 하나가 폭발하게 만들었다. "아 언니 웃지마! 웃지마!" 레나는 어제 당했던 치욕을 전부 돌려주리라 작정한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일어서려는 하나를 앙겔라는 겨우겨우 뜯어 말렸다.

"일어서면 안돼요 하나양. 진정해요. 치료 효과 떨어니니까."

그녀는 카두세우스 지팡이를 이용해 하나에게 치료용 나노 머신 입자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오늘 맨몸으로 무시무시한 훈련량을 소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신통방통한 입자 덕분이었다. 하지만 흥분한 하나는 금새 그 고마운 입자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 이게 뭐라고 그래요! 내가 좀 많이 썼다구해서 그게 그렇게 아까워요?"

하나는 잔뜩 골이 나 있었지만 앙겔라는 대부분의 환자를 닥치게 만드는 마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이거 1분당 사용료 이천달러예요."

1분마다 최상철 일병의 월급이 삭제된다. 효과는 발군. 그 시끄럽던 하나를 순순히 닥치게 하는 무시무시한 돈의 언령. 그렇게 하나가 기세를 잃어버린 것을 포착한 부하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아, 송하사님 그동안 내숭 떨었던 거 오늘 한 방에 다 날려먹네."

"송하사님 그 때 오버워치 부사령관님께 경례 올려붙이는 거 봤어? 으와. 나 그 때 완전 지려버렸잖냐."

"그게 전부가 아니지 말입니다. 지난 번에 라인하르트 경 구워삶을 때 제가 옆에 있었지 말입니다."

하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우씨! 어젠 아저씨랑 붙어먹더니 오늘은 상관이 눈에 보이지도 않지! 늬들 죽어볼래!"

"붙어먹다니. 하하."

본인이 왔다. 오고 말았다. 하나가 도끼눈을 뜨고 잭을 노려봤다. 거의 원수를 바라보는 눈 빛이었다. 9개월전의 활쟁이 닌자놈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렇게 밉살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의 부하 병사들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편히 쉬고 있던 병사들이 벌떡 일어서서 잭을 열렬히 환영했다.

"강습 사령관님!"

"강습 사령관님!"

"수고하셨습니다!"

이 자식들이 상관은 개무시하더니... 하나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레나는 아예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웃음을 터뜨렸고 앙겔라는 그런 레나를 다독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잭이 담담하게 확인했다.

"코드 네임을 부른 상대에게는 지시대로.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그 반대로. 대전제는 솔저 세븐티 식스의 사살. 틀림없나?"

하나가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정곡을 찔렸을 때의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을, 잭은 어제의 대화 중 알게 되었다. 병사들의 눈에는 경외감이 한층 더 깊어진다. 그 전투 능력에 이 통찰력. 이 사람은, 정녕코 전쟁의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잭이 다시 하나의 반응을 떠봤다.

"이것은... 대 옴닉 기만 전술인가."

그 말에 레나가 웃다 말고 퍼뜩 일어나 앉았다. 대 옴닉 기만 전술.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 하나가 살짝 레나와 눈을 마주 친다. 아주 잠깐 동안.

"부산을 침공하는 옴닉도 어엿한 옴닉이에요. 사람과 똑같죠. 기만 전술이 통할 정도로요."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사람과 똑같다. 하지만 잭은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하나는 자신이 옴닉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생중계하고 있을 정도니, 제대로 진실을 파악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이고 있는 것이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진실을.

"바로 그렇다. 언제 알아챘지?"

"그런 건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부터 알았어요. 죽기 전에 두려움에 떠는 걸 봤으니까요. 그건 절대 프로그램이 아니었어요."

레나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하나를 바라봤다. 그 때, 9개월전에 하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나는 이미 진지하게 잭을 응시하고 있었다. 레나는 하나와 잭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기로 했다.

"맞아. 옴닉은 사람과 똑같이 학습 능력이 있고, 네트웍을 통해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 그 이야기는 곧."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간파당한 기만 전술은 두 번 다시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폐기한 전술은 132가지예요."

잭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아나도, 라인하르트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남아있는 전술도 아직 서른개 정도 있어요. 마지막 전투를 치를 정도는 돼요."

그냥 호기롭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전부 하나가 말한대로일테지.

이 아이.

송하나 하사는 이제 겨우 갓 20세가 넘었음에도 이미 역전의 용사인 것이다.

하나는 옴닉과 싸우는 의미- 즉 옴닉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전장에 선다.

그렇게 가열찬 전쟁을 1년이나 버텨내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지금 이 수준에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오버워치 요원들은, 주로 잭은 그녀에게 가당치도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나가 잭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도, 틀림없이 이런 것이겠지.

"송하나 하사. 다시 한 번 요청하지."

잭이 손을 내밀었다.

"그 전술을 우리와 공유해주게. 다가올 전투에 대한 카드는 많을 수록 좋으니까."

"아저씨들이 따라올 수나 있겠어요?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제 기만 전술에 똑바로 따라오는 병사는 한국에서도 우리 애들 밖에 없다구요?"

하나의 말에 제 13 소대의 얼굴에 자부심이 서렸다. 그럴만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송하나 하나와 함께 한 시간은 훈련과 크고 작은 실전을 합쳐 1000 시간을 훌쩍 넘었다.

하지만 잭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

잭이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상체를 기울여 하나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우리들은 오버워치다."

하나가 웃으며 잭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요. 대신 부산을 침공하는 옴닉은, 이번에 확실하게 전부 없애는 거예요?"

"물론이다."

잭이 씨익 웃었다.

"우리가 한국에 온 이유 중 반은 그거니까."

하나는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반? 겨우 반?" 잭은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부사령관님과 레나 언니가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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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18. 23:14
세실은 기본적으로 예의바르고 조심스럽고 성실한 남자였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세실을 알고 지낸 이후 근 30년 동안 로자는 그가 편한 복장을 입고 있거나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하물며, 벗은 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로자 스스로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암흑기사 시절, 기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세실은 잠들기 직전까지 갑주 차림을 고수하곤 했다. 로자가 가끔씩 그의 숙소에 방문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세실의 갑주를 벗겨내기 위해 어마무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 작업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곤 했다. 불 빛 하나 없는 세실의 침실에서 그의 몸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로자보다 일찍 일어났고, 그녀가 깨어날 때 쯤에는 이미 갑주를 완전히 착용해둔 상태로 대기함으로써 로자를 실망스럽게 만들었다.

왕이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왕으로써의 마음가짐은 정갈한 복장에서부터 비롯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생각이 거의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신하들의 태도에서 자명하게 드러났다. 로자나 세오도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에조차 세실은 빈틈이 없었다. 우아한 복장을 착용한 채 유려한 동작으로 홍차를 마시는 세실을 목도한 신하들은 그 빈틈없고 준비된 자세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휴식 시간을 방해받았음에도 자애로움 그 자체로 신하를 대하며 정무에 임하는 그는 그야말로 성왕. 세실을 상대로 정쟁을 일삼는 신하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누가 성왕의 성실함을 두고 감히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로자는 그녀의 반려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젊고 아름답지만, 세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예전에 즐겨 입던 각종 대담한 복장들은 참아야만 했다. 가끔은 예전처럼 화려한 복장을 입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세실이 진지한 얼굴로 손톱을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로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내인 자신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만큼은 좀 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게 아닌가. 하지만 세실은 이상하게 완고한 면이 있었다. 모든 단편적인 시도를 실패로 날려버린 로자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왕 전용 휴식 공간 창출 프로젝트. 왕과 그가 허락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인공 호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로자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이 안건을 내놓고, 그 근거와 상세 내용을 밝혔다.

1. 신하들의 무능과 횡포가 도를 넘어, 티타임을 즐기는 시간조차 온전히 왕을 쉬게 놔두질 않는다.

2. 몸을 돌보지 않고 정무에 골몰하는 왕에게 신하들의 방해없이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은 필수불가결하다.

3. 예산은 그 동안 비축해둔 왕비 품위 유지비를 사용하며, 따라서 추가 예산 편성은 불필요하다.

세실이 성왕이라면, 이럴 때 로자는 패왕이었다. 그녀가 나선 이상 승산은 없다. 신하들은 얼굴을 흙빛으로 바꾸며 만장일치로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치심 따위 애저녁에 내다 버렸다. 이제 곧 세실의 벗은 몸이 백일하에 들어날 것이다.

.

"응?"

"응, 벗어. 같이 호수에 들어가야지."

로자는 이미 겉 옷을 벗고 수영복 차림으로 세실 앞에 서 있었다. 예전의 백마도사 시절을 연상시키는 눈부신 몸매에 세실은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왕으로써의 위엄을 찾으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부인, 이렇게 갑자기-"

"부인이고 자시고. 얼른 벗어."

"으... 하지만... 왕의... 위엄이..."

세실은, 언제부턴가 로자를 안달나게 만들곤 했다. 나는 전장에서조차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는데, 세실이 나를 망쳐놨다. 로자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물쭈물하는 세실을 바라보며 로자가 말문을 열었다. 다시 열린 것은 왕비의 발언이었다.

"왕의 위엄이 흘러넘치는 폐하께오선."

"응?"

휙휙 급변하는 정세에 세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와의 정사가 계획되어 있는 날에도 정사를 오후 아홉시 까지 보시지요. 그렇게 해가 떨어진 후 들어오셔서, 아녀자에게 수치를 주지 않으려 먼저 방의 촛불을 모두 끄시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용케 미리 준비된 백탕을 찾아 어수를 씻으십니다. 제가 재촉하면, 여인의 은밀한 곳에 손을 대는데 청결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시고 손톱 사이사이까지 모두 닦아내시지요."

"..."

"그리곤 의복을 하나씩 벗고 개켜 침대 구석에 차곡차곡 쌓으시고, 그 이후에는 제 의복을 하나씩 벗기고 개켜 침대 구석에 차곡차곡"

"아, 그래, 알았어, 로자."

"정사를 시작하실 때에는..."

"미안. 알았어. 벗어. 당장 벗는다고."

진작 그럴 것이지. 로자가 표정을 풀고 약간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연애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에, 세실의 표정도 20년 전의 청년처럼 풀어진다.

그렇게 잠시 후 드러난 것은, 전혀 쇠락하지 않은 근육질의 건장한 육체. 4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 없다. 터질 것 처럼 팽팽한 대흉근, 꿈틀거리는 상완, 꽉 조여져 있는 복근과 둔근, 통나무같은 대퇴근.

그리고 로자는 왜 세실이 자신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실..."

그의 온 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언뜻 보더라도 세자리 수는 되는 것 같다. 물론 몸을 맞대고 있으면 그 몸에 나있는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지만 옷 아래 드러난 상처를 본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아군을 신경쓰고, 모든 치명적인 공격을 스스로 받아내며 싸워왔다. 상처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세실은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로자. 후유증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암흑기사 시절에 입었던 상처야. 로자와 함께 있을 때 얻은 상처는 네가 전부 고쳐줘서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았다.

"그런 건 나도 알아. 기사가 상처를 입은 게 뭐 어때서 그래. 숨길 필요는 없었잖아?"

"그건..."

"뼈가 드러나는 상처나, 육체가 결손되는 중상도 숱하게 봐 왔어. 내가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던 거야?"

"...맞아. 로자. 20년 전에는 네가 그런 걸 보면 큰일나는 줄 알았어. 걱정시킬 수 없다고... 내 상처는 나 혼자 전부 짊어지면 된다고. 바보같은 이야기였지."

최전선에서 회복을 담당했던 로자는,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는데.

세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암흑기사의 갑주... 세세한 구조는 잘 모르지? 입을 때 엄청 아프게 되어 있어. 익숙해지는 것 따윈 불가능해. 가능하면 벗고 싶지 않을 정도지. 육체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가까운 분노야말로 암흑기사가 가진 힘의 원천이거든. 그걸 끌어내기 위한 거야. 그래서 그걸 입을 때 내 표정... 로자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로자는 살며시 세실의 손을 잡고 호수로 이끌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와서 위로할 필요는 없다. 이 고백은 세실에게도 난처할 뿐 괴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20년전의, 세실이 가장 힘들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세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로자는 곧 그의 육체를 시각적으로 탐닉할 여유를 되찾았다. 밝은 낮에 그의 몸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간신히 쟁취한 기회를 날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과연 완벽한 육체다.

상처가 있음에도, 아니, 상처가 있기에 오히려.

자상한 아버지, 사려깊은 남편, 현명한 군주. 하지만 그 본질은 상처투성이의, 야만스러운, 전사 중의 전사. 그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 준하는 차이에 로자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로자가 다시금 세실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거야? 우리 결혼한 다음에 말야. 왜 지금까지 벗은 몸을 안보여줬어??"

로자가 이제 대놓고 재촉하자 세실 표정에서 난처함이 깊어졌다.

"그건... 계속 그러다보니 왠지. 봐, 난 사실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어. 그래서 바닥부터 제왕학을 배웠잖아. 그 중에 방중술도 있었다는 건데..."

세실은 자신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약간 멈칫했다. 그러나 오늘의 로자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왜 멈춰? 얼른 이야기해봐. 나 안달나게 하지 말고."

세실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왕이 왕비를 고풍스럽게 안아주는 방법이 말이야, 왕비를 아껴준다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계속 그 역할에 몰입했던 것 같아."

그야...

로자도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로자도 처음에는 그런 제왕학의 세실이 무척 생경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서 무척이나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연예기간까지 합해 20년이나 사랑하는 남성의 실루엣만 보고 밤을 지샜단 말이지.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거야.

잘 익은 사과 같은 로자의 얼굴을 본 세실이 겨우 여유를 되찾았다.

"그래서 여길 만든 거야? 고작 내 벗은 몸을 보려고?"

로자는 세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작이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는 거야. 이 차림 그대로 함께 해변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아마 이 남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세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둘은 호수에 몸을 천천히 담궜다. 물은 약간 차가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두 사람의 체온은 이미 적당히 달아올라 있었다.

로자가 세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세실은 팔을 둘러 로자를 감싸 안았다.

로자가 세실의 가슴에 대고 담담히 고백했다.

"세실, 난 말야, 항상 당신과 이렇게 하고 싶었어. 왕과 왕비라는 직책에 얽메이지 않고 말야. 세실은, 왕 같은 거 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실이 답했다.

녹아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로자. 1년만 지나면 세오도르도 20세가 돼. 그러면. 그 때가 되면."

로자가 세실을 가만히 올려다 봤다.

"난 세오도르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야. 그리고 우린 왕성에서 나가자. 비공정으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마음 가는데로 사는 거야. 어때?"

세실의 물음에 로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상관없다. 세실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어짜피 세실은 그 이후의 인생을 오롯하게 로자를 위해서만 쓰기로 다짐했으니까.

다만 잠시 후 세실은, 이후의 인생 설계와는 별개로, 로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로자? 당신, 수영복 어쨌어?"

로자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실은 그 이상 로자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실이 호수에서 나올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의 입술은 로자의 입술이나 그에 준하는 다른 것으로 막혀 있었다.

세실이 제왕학에서 배운 방중술은, 망극하게도 호수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물론, 세실은 로자가 기대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본질적으로 비할 바 없이 야만스러운 전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해냈던 것이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9. 21:16
티파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녀는 평소에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체온이 높았고, 피부에도 붉은 빛이 감돌았다. 클라우드는 바로 행위를 멈췄다.

티파가 숨을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클라우...드?"

"...티파? 괜찮아?"

"괜찮냐니... 왜... 멈췄어?"

그녀는 자신의 상태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냉큼 그녀를 안아들고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티파가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탱크탑을 배까지 내렸다. 배꼽은 가리지 못했지만. 그 자태에 클라우드는 다시금 끓어올랐으나, 애써 본능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티파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항의하면서도 "나 괜찮은데..." 클라우드가 엄한 표정을 짓자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시질 않았다. 그 모습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클라우드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푹 젖었는데, 닦아 줄까?"

그 발언이 티파의 무엇을 건드렸던 걸까. 티파가 황급히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다다다다닦아? 어어어어어디를??"

클라우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 이마 말이야."

아, 이마... 그래. 이마.

클라우드는 천성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둔감하다. 결혼 이후로 꽤 나아진 편이지만, 당황하거나 심각한 상황에서는 원래 성격이 드러나곤 한다. 티파는 왠지 안타까워 하면서도, 클라우드의 아련한 배려가 간질간질해서 몹시 행복해졌다.

"...응. 그럼 부탁해."

티파는 행복감 속에서 깊이 잠들었다. 클라우드는 티파 앞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갈아주며 밤새도록 자리를 지켰다.

이튿날 아침 몸이 개운해진 티파는 침대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클라우드를 발견했다. 클라우드를 어영차 부축해 침대에 눕힌 티파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한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구경했다. 티파의 얼굴이 욕망으로 끓어오르기 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건강을 회복한 티파에게 영문도 모른 채 꼼짝없이 붙들렸다. 그리고 그 날 마스터 스위츠와 세븐스 헤븐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휴점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7. 20:54
시간은 약 9개월 전으로 되돌아간다.

레나 옥스턴, '트레이서'는 오버워치가 괴멸시킨 테러리스트 조직의 잔당이 한국에 숨어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자들은 몸을 숨기는 것에 누구보다도 능숙하니까.

트레이서는 쓸데없는 일을 지시한 수뇌부에 불평을 쏟아냈지만, 지금은 완전히 체념하고 관광이나 즐길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부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그녀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부산 시 전역에서, 숨어있던 테러리스트들이 일제히 무장 봉기한 것이다. 잔당들을 죄다 끌어모은 건곤일척의 승부에, 트레이서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트레이서의 이성은 테러리스트 진압같은 것은 이 나라 군대에 맡기고 지금 당장 몸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시민들이 위험 지역에서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럴 때 트레이서의 본능은 이성의 방해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트레이서는 몇 번 째인지 모를 테러리스트를 포착했다. 놈은 한 중년 남성의 머리에 머신건을 겨누고 있었다. 트레이서의 눈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트레이서가 양손에 펄스건을 꺼내 쥐고, 머리 위로 풀오토 사격한다. 여기다, 테러리스트. 이 쪽을 봐라.

테러리스트가 그 이질적인 총성을 듣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트레이서를 육안으로 확인하자 마자 놓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섬광처럼 빨랐다. 트레이서가 버스의 사이드 미러, 신호등, 간판을 차례로 밟고 도약하여 자신의 정수리 위에서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테러리스트는 조금도 반응하지 못했다.

펄스 계열 탄환은 총상 그 자체를 태워버린다. 사망한 테러리스트는 출혈은 없었고, 언뜻 보기에는 그저 정신을 놓고 쓰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공포에 떨고있던 민간인이 패닉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트레이서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민간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시간을 조종하는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있다. 사방이 온통 시체로 가득하고 총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녀가 구해낸 시민은 겨우 다섯 명에 불과했다. 민간인이 진정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다시금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곧 트레이서는 또 다른 테러리스트 2인조를 발견했다. 그 앞에 제압되어 있는 사람은 세 명.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과 그를 감싸듯 안고 있는 여성. 나머지 한 명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성. 그 중 노인은 어깨에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 출혈량으로 봐서 총격에 의한 관통상. 노인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이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여성은 테러리스트에게 뭔가를 호소했지만 놈들의 눈은 가학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테러리스트 중 한명은 그녀를 향해 침을 뱉고 비웃고 걷어차기까지 했다.

트레이서는 이를 갈았지만 아까처럼 무턱대고 달려들 수 없었다.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 빈틈없이 사주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섯불리 접근하다가는 잡혀있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노인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위중했던 것이다.

현장에 있는 여성 또한 구타당하면서도 노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결국 노인은 버티지 못하고 과다 출혈에 의한 쇼크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테러리스트는 무엇이 그리도 유쾌한지 폭소를 터뜨렸다.

트레이서는 눈을 치켜 떴다.

사주경계를 하고 있던 테러리스트가 동료가 벌인 소란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 보았다. 이 봐, 좀 조용히 하지 그래. 그리고 그는 곧 동료가 희롱하던 여성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동료의 허벅지에 메달려 있던 홀스터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 탄환에 미간을 꿰뚫렸다. 질척한 뇌수가 터져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에 여성에게 총을 빼앗긴 테러리스트가 반사적으로 머신건을 견착했다. 자세가 나쁘지 않은 걸로 보아 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여성은 테러리스크가 미처 격발하기도 전에 짓쳐들어 그의 턱을 권총으로 후려쳤다. 테러리스크의 턱이 직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장 테러리스트의 손목을 비틀어 머신건을 무장해제하고, 팔꿈치를 역관절로 잡아 꺾으며 억지로 쓰러뜨렸다. 이어서 테러리스트의 뒷 목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체중을 전부 실어 움직임 그 자체 봉쇄한다. 그림 같은 솜씨였다. 무심코 트레이서가 감탄할 정도로.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트레이서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트레이서는 꿈틀거리는 테러리스트의 뒤통수를 용서없이 걷어찼다. 테러리스트를 압박하고 있던 여성은 조금 놀랐지만 트레이서가 아군이라는 사실을 금새 납득한 것 같았다. 트레이서가 쓰러진 테러리스트의 입에 재갈을 물려 자해를 막고 오버워치 요원에게 지급되는 휴대용 구속구로 온몸을 옭아매는 동안, 여성은 창백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쓰러진 노인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트레이서는 노인의 상태를 점검하는 대신 품안에서 응급 구호 장비를 꺼내 발동시켰다. 하나 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럴 때 장비를 아끼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다.

오버워치 의료팀 치프 앙겔라 치글러 박사의 역작, 바이오닉 필드 제네레이터. 공부를 피망보다 싫어하는 트레이서는 바이오닉 필드의 원리 자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 자신은 몇 번이고 이 필드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언제 사용할 수 있는지 정도는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곧 노인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호흡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 기적같은 광경에 여성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아온다. 트레이서도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오버워치의 진정한 강함은 에이전트의 초월적인 힘보다 그들이 갖춘 오버 테크놀로지 장비에서 나온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이 기적을 목도한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트레이서는 곧 테러리스트와 함께 억류되어 있던 남성에게 노인의 후속 조치를 지시했다. 노인을 근처 응급실에 이송할 것. 일단 트레이서는 남자의 명함도 받아 놓았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는다. 민간인에게 조금 과한 처사인지도 모르겠지만, 트레이서는 옆에 주저앉아 있는 여성이 목숨을 걸고 구해낸 노인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성이 노인을 등에 업고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트레이서는 다시금 용감무쌍한 여성을 내려다 보았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지금 막 뱃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게워내고 있었다. 이 장소는 위험하다. 하지만 트레이서는 여성을 재촉하지 않고, 곁에 앉아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손바닥에 온통 박혀 있는 굳은 살과 미세하게 전달되는 떨림을 느끼며 트레이서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 여성은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전투원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트레이서는 팔을 둘러 여성을 살며시 품었다. 주위에 아직 테러리스트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한 번만, 필요하다면 이 여성을 위해 시간 가속기를 쓰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러기에 충분한 일을 해냈으니까.

그러나 시간 상으로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트레이서는 여성의 호흡이 가라앉고 떨림도 잦아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나 빨리 진정하다니.

용기있는, 강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용사다.

트레이서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자리를 옮기지 않을래? 여긴 사방이 터 있어서 위험해."

작은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라면 괜찮을거야."

상업지구의 건물 옥상. 벽이 높아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트레이서가 직접 골랐다. 트레이서가 작은 용사를 껴안고 시간 가속기를 사용한 시프트 몇 번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40층에 달하는 고층 건물의 옥상에 다다른 것이다.

실로 오버워치의 트리플 S급 전투원. 그녀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탄환으로 잡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응?"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트레이서가 용사를 바라봤다.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용사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의지. 이어진 것은 날카롭게 각이 서있는 경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트레이서. 저는 대한민국 육군 기갑 부대 소속 송하나 특무상사입니다. 제 13 메카 (MEKA) 소대의 소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나, 날 알아??"

그 빠릿빠릿한 대응에 오히려 트레이서가 긴장하고 말았다. 트레이서가 횡설수설하며 그녀의 말을 겨우 받아냈다.

"응? 특무... 상사? 군인? 어? 미안하지만 나이...가? 몇 살인데?"

"올해 열 아홉살입니다."

"열......"

트레이서의 혀는 주인을 배신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에게 상관 대접을 받고 있자니 코끝이 간질간질하고 오금이 저려 견딜 수가 없었다. 트레이서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제발 편하게 대화할 수는 없겠느냐고 애원했고, 송하나 특무상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레나 옥스턴. 레나 언니면 될까요?"

레나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나도 하나라고 부를께."

하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다행이다! 저도 실은 딱딱한 건 싫거든요. 입대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 것 치고는 그녀는 이미 훌륭한 군인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전투력하며. 레나는 턱을 집고 기억을 더듬었다.

"메카 소대라면, 역시 그거지? 한국 남쪽 바다 해안선 경비 부대."

"맞아요. 혹시 그 소대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도 들었어요?"

"맞아! 내가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줄게! 한국에서 무슨 첨단 보행 병기 운용 후보로 프로 게이머를 군대로 모셨다는 바보같은 소릴 들었는... 데... 말이야..."

레나가 유쾌하게 병신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에 하나가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리며 난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컹한 해산물이라도 입에 넣은 것 같은 얼굴이다.

레나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녀의 음성이 저절로 낮아진다.

"...그 이야기 진짜였어?"

"네. 3개월 전부터는 전투에도 투입됐어요."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건 겨우 6개월 전이었는데?"

"네에, 맞아요. 그럼 이젠 더 설명할 것도 없겠네요."

"혹시, 전투를 가끔 실시간으로 방송한다는..."

"그 미친년이 나에요. 정훈장교의 제안에 따른 거지만."

레나는 한국의 정훈장교를 만난다면 반드시 바닥에 패대기를 쳐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레나는 하나의 말을 도저히 똑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불과 6개월전에는 프로 게이머였고, 입대 3개월만에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에 투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옴닉은, 전 세계에 널려있는 그런 일반적인 전쟁 상대가 아니다. 옴닉과 싸우는 행위의 끔찍함은 레나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버 워치의 강습 사령관조차 자신보다 옴닉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갓 태어난 옴닉은 어리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하고, 급격하게 학습한다.

무엇보다 옴닉은- 사람과 똑같다.

-그러나 하나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왼쪽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조작하며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고.

"내가 상대하고 있는 옴닉은 진짜 옴닉이 아니에요. 옴닉 정부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냥 옴닉이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죠."

"하나야, 그건."

"언니. 스무고개라면 다음에 언제라도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하나의 말 대로다. 지금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레나는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말을 삼켰다.

하지만 레나는 여전히 한국 정부의 무모하고 비도덕적인 처사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빌어먹을 나라는 아직 20세도 되지 않은 젊은이를 단 6개월 만에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살아있는 병기로 개조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물론.

이 나라는 전쟁 중이다. 침략 전쟁에 대응하고 시민들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이념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하나는 결국 이 나라에 소속된 병사이며, 그 병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악의 판단이 아니다. 적을 섬멸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군인은 필요없는 존재다.

레나는 하나가 아직도 미세하게 경련하는 손을 쥐었다 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레나는 그제야 자신이 정확히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레나는 하나같은 아이가 제 몫을 하는 군인인 상황 그 자체가 싫었다.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하나가 제작 방식에 따라 한 끝 차이로 지성체가 되지 못한 옴닉을 거리낌없이 사살하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도 곧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전쟁 전문가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유능했던 거야. 적당히 요령있게 피했다면, 자기같은 사람이 지금처럼 목숨을 걸고 살아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렇지? 왜 이런 처절한 삶을 살고 있어? 왜 시민으로 남아 있지 않았어?

그리고 레나는 스스로의 순진해 빠진 생각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 강습 사령관님께 늘 지적받고 있는 일이다.

오늘 하나를 만난 것이 전부인 레나에게 이 작은 용사의 삶을 평가할 수 있을 만한 근거도, 이를 재단할 권리도 있을 리가 없다.

쓸데없는 참견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레나가 그녀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옴닉의 가능성?

인명의 존엄성?

남을 해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중요함?

집어 치워, 레나. 넌 결국 이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레나는 당장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것은 테러리스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가 스마트 워치 조작에 골몰하느라 레나의 내적 갈등도 그녀의 표정도 보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이윽고 하나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군의 움직임이 너무 늦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통신 관련 기능이 죄다 먹통이에요."

레나는 하나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리고 조금 발돋움해서 옥상 벽 너머의 거리를 살펴보았다. 아직도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다. 어느 새 총성은 잦아 들었지만, 그것 뿐이다. 모든 상황이 애매하고 수수께끼 투성이다.

하나는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놈들은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방해 전파를 뿌리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군이 상정하지 못한 사태에 대응이 늦는 건 늘 있는 일이지요. 오버워치에게 보이긴 부끄럽지만."

하나가 결연한 눈으로 트레이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작전을 입안하겠습니다. 트레이서."

딱딱한 말투. 어느새 하나는 다시 특무상사가 되어 있었다.

그 늠름한 용태에 강제로 트레이서가 된 레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메카 소대 소대장 D.Va의 작전 설명에 귀를 귀울였다.

.

트레이서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EMP 충격파의 근원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충격파의 세기가 워낙 강했던 탓에 장소를 특정짓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D.Va와 트레이서는 건물의 옥상을 건너다니며 통신기의 노이즈가 심해지는 방향을 찾아냈다.

트레이서의 목표는 EMP 충격파 발생기를 파괴하는 것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한국군은 전략 위성과 송하나 특무상사의 보고 내용을 근거로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곧 테러리스트의 섬멸 작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은 100년 이상의 내전을 겪은 나라다. 매뉴얼 대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만 만들어지고 나면, 이 정도 테러리스트들은 금새 쓸어버릴 것이다. 객관적으로 한국의 군대는 결코 약하지 않다.

곧 트레이서는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이질적인 형태의 트레일러. 일부러 켜둔 통신기의 노이즈도 점점 더 심해진다. 틀림없다. 저 트레일러가 트레이서의 목표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간 트레이서는 지체없이 펄스 그레네이드를 투척했다. 몇 초간의 시간차를 두고 대폭발. 통신기에서 노이즈가 사라진 것을 확인. 더이상의 EMP 충격파는 관측되지 않는다.

"너무 쉬운데."

너무 쉽다.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면 트레이서는 그 즉시 시간 가속기를 사용해 이탈했어야 했다. 하나도 그렇게 조언했던 것도 같다.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역시 난 해결사야."

하지만 트레이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느긋했다. 그리고 그 잠깐 동안의 틈이 치명적이었다.

트레일러가 폭파되는 동시에 거리에 이변.

바리케이트, 일렉트로닉 네트, 그리고 이를 모두 아우르는 에너지 필드가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 트레이서가 서 있는 장소 기준으로, 반경 약 500 미터의 구획이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어서 온 사방에서 들리는 철컥거리는 기분나쁜 금속제 마찰음. 다음 순간 트레이서에게 집중되는 레이저 조준선. 그 수량, 실로 서른 여섯 포인트.

그리고 중무장한 서른 여섯 명의 테러리스트를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착각하게 만드는, 지금 당장에라도 트레이서의 급소를 꿰뚫을 것 같은 살기.

저격수다.

그것도 특등급.

심호흡을 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상대는 초일류. 틈을 보인 그 순간 저격당할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트레이서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저격수의 흉탄이 트레이서의 목을 관통. 울컥, 하고 피를 토하며, 트레이서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진다.

그 와중에 트레이서가 멍하게 생각했다.

저격수의 위치, 10시 방향. 거리 487미터. 사용 무기는 화살. 활로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밖에 없다. 시마다 가문의 필두. 시마다 한조.

필요한 정보는 전부 알았다.

좋아, 시마다 선생. 이제 곧 해결사님께서 네가 네 자신의 이름으로 혀를 차게 만들어 줄거야.

그리고 트레이서가 시간 가속기의 구속을 풀었다.

.

트레이서가 시간의 권능을 되찾는다. 그녀에 의해 되돌려진 시간이, 뿜어져 나오는 피를 함께 되돌린다. 이어서 목에 뚫려 있는 바람 구멍을 막고, 화살을 자신에게 도달하기 100미터 전까지 돌려 보낸다. 저 시마다 가문의 치명적인 화살은 이제 뻔한 텔레폰 펀치로 탈바꿈되었다. 트레이서는 상체를 조금 트는 것만으로 화살을 피해냈다.

그녀는 화살을 피하고 그 즉시 저격수 방향에서 직각 방향으로 도약했다. 제아무리 시마다 한조라 한들 위치를 노출당한 상태에서 그녀를 저격하는 것은 어렵다. 그의 화살이 침묵하는 동안 트레이서의 발 밑으로 비가 오는 것 같은 탄환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단 한 발의 유효 사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트레이서는 공중 제비를 돌며 사방으로 양손의 펄스건을 한 껏 흩뿌려 건재함을 과시하고는 눈 앞의 승용차에 숨어들어 엄폐물로 삼는 동시에 다음 이동 위치를 서치했다. 그녀는 약간의 인터벌도 없이 펄스건으로 좌 전방 빌딩의 2층 창문에 구멍을 내고, 벽을 타고 올라 거의 6미터나 수직 이동했다. 균열이 나있는 창문은 쉽게 깨졌고 트레이서는 무리없이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창졸간에 이어진 테러리스트의 총격은 그녀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고, 테러리스트들은 그녀의 위치를 완전히 놓쳤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 짧은 순간 테러리스트가 세 명이나 당했다는 것이 파악되었을 때에는 과연 목숨을 내놓고 다니던 무법자들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던 탄환이 정확하게 테러리스트들의 머리를 꿰뚫었던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임시 헤드 쿼터에 앉아 이를 보고받은 리더, 보나파르트 나폴리는 헤드셋을 벗어 땅바닥에 내팽겨쳤다.

이것이 오버워치.

이것이 트리플 S급 전투원의 저력.

하지만 적을 칭찬할 여유 따위는 없다. 테러리스트들은 필사적이었다. 이 머나먼 극동에 함정을 꾸며 겨우 트레이서를 붙잡아 넣었다. 여기서 트레이서를 사살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희생된 동료들의 목숨이 돼지 먹이만도 못하게 전락할 것이다.

처음부터 이 구역에 있던 시민들을 내쫓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놈들을 인질로 잡았다라면 제 아무리 트레이서라 한 들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을 터. 그리고 이를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탈론이 그들을 받아 주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 작전을, 저 시마다 가문의 두령이 눈감아 주기만 했었더라면 반드시 그렇게 했었을 것이다.

"민간인과 트레이서를 격리한다. 시마다 가문은 그 이후 참전한다."

한조의 말에 보나파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암살하는 살인자 놈이 이제와서. 한 명을 다구리쳐서 살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니냐고. 이에 대한 한조의 대답을, 당시의 보나파르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오버워치의 정예를 상대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레이서를 상대하기 위해 시마다 일족의 힘이 필요하다는 부관의 조언에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보나파르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곧장 헤드 쿼터의 컴퓨터로 트레이서가 숨어든 건물의 감시 카메라를 해킹. 트레이서가 아직 건물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 시마다 가문의 합류를 기다리라는 한조의 통신을 무시하고, 보나파르트는 12명의 정예를 건물에 투입했다. 근력이 강한 병사를 골라 방탄 장비를 두 배로 덧씌워 뒀다. 트레이서의 펄스건은 생각만큼 치명적이지 않다. 그리고 저 좁은 곳에서 트레이서의 그 잘난 기동력은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트레이서가 그들을 전부 처리하는 것에는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자그마한 몸을 미끄러뜨리듯 움직여 엄폐하고,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으로 피탄 면적을 줄이며, 방탄복이 지키지 못하는 눈을 쏘고, 방탄복의 심장 부위를 일점사하여 꿰뚫고, 펄스건을 뚫고 접근한 테러리스트의 목을 걷어차 부러뜨렸다.

이어서 트레이서는 잔뜩 독이 오른 테러리스트들을 도발. 비상계단으로 유인해 펄스 그레네이드로 세 명을 동시에 폭사시키고, 벽을 타고 달려 무너져버린 계단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테러리스트 사이로 침입, 그 중 한 명의 관절을 잡아 계단 아래로 던져 버린다. 공포에 절어 주춤주춤 물러나는 나머지 한명의 턱에 탄환을 꽂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계단 쪽으로 진입하지 않은 네 명이 전의를 잃지 않은 것은 차라리 기적에 가까웠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쓰러지며, 결국 트레이서를 막다른 방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그들은 트레이서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보나파르트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창백해 졌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통해 이제야 겨우 시마다 한조가 현장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서 이를 갈았다. 그러나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한조의 말에는 허를 찔릴 수 밖에 없었다.

[잘했다.]

"뭐가 어째? 우리쪽 15명이 당했다고!"

[그리고 트레이서를 몰아 넣었지. 네 놈은 트레이서가 지금 껏 몇 명을 죽여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보나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화면 속 한조의 등 뒤에는 어느새 시마다의 에이젼트들이 도착해 있었다. 등에 거대한 활을 메고 있는 흑장속 차림의 닌자가 세 명. 으스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보나파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한조에게 경고했다.

"알고 있겠지? 앞으로 5분 후엔 필드 바깥 발목잡이 부대들도 모두 후퇴시킬 거야. 그 때 이 곳에 군대가 도착한다는 거다. 놈들에게 에너지 필드는 종잇장이나 마찬가지야. 끝장이란 말이다."

한조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뭐, 보고 있으라고.]

.

그대로 창문을 뚫고 도주하려한 트레이서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바깥에 누군가 있다. 그들은 굳이 존재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두 명. 들고 있는 것은 거대한 활. 저 존재감은 틀림없이 시마다 일족. 어중이 떠중이 병사들과는 격이 다른 정예 중의 정예.

뛰쳐 나갔다가는 반드시 저격 당한다. 시간 가속기는 무한정 쓸 수 없고, 아직 적은 상당수 남아있다. 하지만 적은 트레이서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문이 폭발했다.

트레이서의 민감한 청각이 적의 음성을 캐치했다.

"갈래살. 호령이 있을 때까지 연속 발사."

파괴된 문으로 화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트레이서가 갈래살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까지는 10분의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놈들은 한 번에 세 개의 화살을 발사했으며, 이 화살들은 벽에 무작위로 몇 번이나 부딛혀 튕기면서도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순식간에 트레이서가 숨어있던 방은 수십 가닥의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죽음의 공간이 되었다. 한조의 구령은 없었고, 반탄력을 잃어버리는 화살보다 보충되는 화살이 훨씬 많았다.

중과부적이다.

결국 트레이서는 시간 가속기를 최대한 활용해 화살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목숨을 걸고 창 밖으로 뛰어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트레이서에게는 후회에 사용할 찰나의 시간조차 없었다.

트레이서가 타임 패러독스 속에서 열 다섯 번 째 죽었을 때 시간 가속기가 점멸. 이 다음은 없다. 이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프트 두 세번 정도 뿐일까. 트레이서가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죽어있던 헤드셋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 창문에서 떨어져!]

"....!!"

레나는 지체없이 시프트를 사용했다. 창 밖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대폭발. 외벽에 통째로 구멍이 뚫리고, 폭풍의 기세가 갈래살을 휩쓸었다. 이제 거의 100개에 달하던 갈래살들이 나무젓가락처럼 날아갔다.

천재일우의 기회.

트레이서는 전력을 다해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앞으로 당분간은 시프트조차 쓸 수 없다. 어떻게든 저격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분명히 건너편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마다 일족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트레이서는 건너편 건물의 피해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폭발 때문일 것이다. 시마다 일족들은 폭발에 휘말렸을테고. 분명히 송하나 특무상사가 폭발 위치를 절묘하게 조절했으리라.

"언니!"

이제 육성으로도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레이서의 표정에 웃음이 돌아왔다. 정말로, 와주었다. 약속했던 대로. 트레이서가 거의 포기하기 직전에.

"하나야."

그 곳에 있는 것은 전고 3.5 미터의 핑크색 이족 보행형 모빌 아머. 대옴닉 특수 방어 결전 병기.

통칭 메카 MEKA.

하나가 메카를 운용해 레나를 감싸 듯 안아들고 곧바로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 어느새 트레이서를 따라나온 한조와 추종자들이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네 개의 화살.

하지만 그것이 메카나 트레이서에게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디펜스 매트릭스. 메카의 대공 방어 시스템이 화살을 모조리 쏘아 떨어뜨린 것이다. 한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도 안돼.'

시마다 한조는 이 기체를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방어 능력은 스펙상 있을 수 없다. 메카의 디펜스 매트릭스는 완벽하지 않으니까. 이 시스템은 조종자의 동공에 반응하여 그 앞에 성근 대공 탄막을 형성할 뿐이다.

그리고 한조는 결론을 내렸다.

저 조종자의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투박한 화력 관제 시스템으로 시마다의 정수를 격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정면에서의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으리라.

한조는 웃었다.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하나는 대답하지 않고 사격에 들어갔다. 넓게 흩어지는 융합포가 시마다 일족 한 명의 왼쪽 정강이를 뭉게버렸다. 기동력을 잃어버린 닌자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조의 웃음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달려요, 언니!"

잠깐 숨을 돌린 트레이서는 하나의 호령에 맞춰 곧바로 등을 돌리고 내달렸다. 하나는 시선을 한조에게 향한 자세 그대로 메카를 전속력으로 후진시킨다. 하나는 한조와 그의 권속이 날려보내는 화살을 차례로 막아내며, 등 뒤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레나를 따라 그대로 질주했다. 한조는 인정했다. 저건 따라가지 못한다. 이 곳은 저 병사의 앞마당이다. 아마 눈을 감고도 이동할 수 있겠지.

트레이서가 달리며 하나에게 물었다.

"자기, 여긴 어떻게 왔어? 에너지 필드는?"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행 방향에 테러리스트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테러리스트와 한조의 협공을 받는 꼴이 되었다. 트레이서가 약간 낭패한 신음을 흘렸다. 하나는 지금 한조의 움직임에서 눈을 땔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여전히 침착했다.

"언니, 메카에 올라타세요."

트레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메카의 머리에 올라탔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메카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동안, 트레이서는 공간 이동으로 전장에 출연한 2기의 잿빛 메카를 목격했다. 두 기체는 집중 포화를 받으면서도 테러리스트에게 돌격. 이어서 대폭발을 일으킨다. 테러리스트들은 전원 조약돌 처럼 날아갔다.

"특무상사는 총 7기의 메카를 전략 운용할 수 있어요. 지금 타고 있는 게 제 전용기. 에너지 필드를 뚫고 들어오는데 3기를 썼고. 언니를 구하는데 1기. 방금 2기가 마지막이에요."

메카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착지했다. 땅에 내려오면서 트레이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 아이는 이 무시무시한 권한과 함께, 겨우 19살에 이미- 오버워치 특급 요원 레벨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트레이서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느낌 상 이 구획의 테러리스트는 대강 정리했고, 시마다 일족도 셋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로 무서운 것은 한조 뿐이다. 이길 수 있다. 하나와 함께라면.

트레이서는 지극히 냉정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계산했다.

하나가 피를 토하기 전까지는.

"쿨럭"

"하나야?!"

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입가에 길게 이어진 피가 턱을 따라 흘러내려 가슴을 적신다.

"하하... 사실 여기 들어올 때 교전이 조금 있었어요. 그 때 옆구리에 한 방 먹었는데. 제가 이야기 안했던가요?"

트레이서는 하나의 무모한 행동에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왜, 그럼 왜 온거야! 바로 돌아갔어야지! 군대에게 맡겼어야지!"

하나는 잔기침을 하며 눈 앞을 노려보았다.

"레나 언니. 내 뒤를 바짝 따라와요. 화살은 제가 전부 막아낼 테니까, 틈을 봐서 공격해요."

"하나야!!"

한조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두 명의 일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입가에는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미소.

그리고 하나의 기체 또한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나야, 제발!!!"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한조와의 마지막 대면 이후 레나는 메카에서 축 늘어진 하나를 꺼내 안고 인생 최고의 속도로 병원까지 질주했다. 하나의 출혈은 계속 되었고, 레나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허파가, 심장이, 온 혈관이 산소를 갈구했다. 부족하다. 하지만 레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때 한조는 한 마디만을 남겼다.

"다음에는 내 화살을 막지 못할 것이다."

하나가 침침해진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는 이미 한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군대에 포착될지도 모른다던지, 하나가 만전의 상태일 때 싸우고 싶었던 것인지.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에게는 한조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다 아무 말도 돌려주지 못한 분함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그... 씨발 새... 아... 짜증나..."

"하나야, 이제 됐어! 말하지마! 힘을 아껴!"

"안돼... 나... 레나 언니랑... 스무고개 해야돼... 나... 할 말...이... 옴...닉..."

"알았어! 내가 스무고개든 이백고개든 해줄게!"

"여러분... 나... 아파요..."

"하나야!"

"언니... 저 앞에... 의료 센... 제... 지..."

"알았어! 알았어알았어알았어!"

저 앞에 의료 센터 말이지!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저길 가서, 의사를 붙잡고! 총으로 위협해서라도!

레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 하나님, 제발.

재발 하나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다음 순간 레나가 의료 센터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머뭇거리는 놈이 있으면 내가 총으로 쏴버릴-

"이 새끼들아! 특무상사님 오셨다!"

셈이었으나, 사자후를 터뜨린 의료 센터 치프 닥터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레나는 라인하르트처럼 돌진해 온 치프 닥터에게 황망하게 하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마치 지금까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뭐야 이 사람, 예지능력자라도 되는 거야?

그리고 하나는 그 뒤로 우르르 몰려온 의료진에게 물샐틈 없이 포위 당했다.

"특무상사님! 조금만 참아요!"

"의료 침대 수용 완료!"

"아씨 걸리적 거리잖아요! 저리 좀 가라고!"

그리고 레나는 치프 닥터에게 밀쳐져 흐물흐물 쓰러졌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지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함소리와 서슬퍼런 압박에 레나는 방금 시마다 일족에게 궁지에 몰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혈관 잡았다! 피 어딨어 빨리 내놔 이 새끼야!"

"혈압 103/40! 계속 떨어집니다!"

"아이고 특무상사님!"

"너 이 새끼 지랄하지 말고 수혈팩 눌러! 짜 넣으라고! V-Tec 오면 너부터 죽을 줄 알아!"

"거기 너! 피! 피 더 갖고와!!!"

"네!!!!!"

"특무상사님!"

"정신, 정신 차리세요!"

"특무상사님!"

"!!!!! 혈압, 상승합니다!!!!!!"

"조오오아아아! 지혈! 어떻게 됐어!"

"30초만 주십시오!"

"너 이 씨발 새끼야 인사고과!"

"아, 아아아아아 잡았, 잡았습니다!"

"으랏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기까지 듣고 레나는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허물어졌다. 아무튼 그녀 역시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녀의 눈에 바닥에 써있는 의료 센터의 이름이 들어왔다

하나사랑 의료원.

......

...맞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는 거지?

우와, 진짜, 이거 장난 아니네.

그리고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입에 걸려 있는 것은 하나가 이제 안전해졌다는 기쁨에 대한 미소가 절반.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비뚤어진 경련이 절반.

레나는 그 후 장장 여덟시간 동안 응급실 바닥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골아 떨어졌다. 시간 가속기가 기동 가능 상태로 돌아오면서 그 여파로 그녀의 몸이 잠깐 흐려지는 대사건도 있었으나, 놀랍게도, 아무도 그녀의 이상 상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후 레나는 찬바닥에 너무 오랫동안 얼굴을 대고 있어서 일어날 때 입이 비뚤어지는 줄 알았다고 술회했다.

정신을 차린 송하나 특무상사가 의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의사들은 하나의 추상같은 비난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하나의 전의를 상실시킴과 동시에 레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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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26. 22:07
지금도 레나는 자신이 이룩해낸 업적을 믿을 수 없었다. 정부를 은근히 압박해서, 송하나 하사의 외박을 얻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레나는 동료들 사이에서 해결사로 통하며, 그 별명처럼 그녀는 남의 부탁은 흔쾌히 받아 해결해 주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누군가를 강제하거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에는 매우 서툴렀다. 그래서 레나에게는 한국 정부에게서 직접 얻어낸 하나의 외박 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쾌거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무리하게 정부를 압박한 것은 옴닉 섬멸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에게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매일같이 녹초가 될 정도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하나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탓도 컸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녀는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언젠가 반드시 경을 칠 날이 올 거라고, 강습 사령관은 늘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그녀가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몸에서 시간 가속기를 떼어놓고서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된 그녀가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철칙이다.

그렇게 하나와 만날 약속을 잡아둔 날이 오늘이다. 그리고 레나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해둔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11시에 하나와 이곳에서 만나서 부산의 명물 크림치즈 츄러스 딜럭스페셜을 먹기로 했다. 레나가 병사들에게 직접 수소문해서 알아낸 것인데, 이 츄러스는 레나가 부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5분 후면 하나가 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날 것이다. 레나는 하나를 밖에서 만날 생각에 완전히 흥분해서, 계속 그 모퉁이를 응시한지 이제 거의 30분이나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를 기다리면서, 레나는 문득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나는 외박 허가가 떨어지더라도 부대 밖으로 나서는 것 보다, 숙소에 틀어박혀 신작 게임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레나 그 자신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녀와 직접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는 열심히 스스로를 설득하고, 억지를 부려 하나를 숙소 밖으로 끌어내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른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하나와 약속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상태를 앙겔라에게 들키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앙겔라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그녀가 머리에 걸치고 있는 특유의 고글 이외에, 지금 입고 있는 속이 살짝 비치는 니트와 상아색 가디건, 숏 팬츠와 샌들, 파랗게 칠한 네일은 모두 앙겔라가 골라준 것이다. 앙겔라가 하나의 나이 대에 맞춰 조언한 복장이긴 하지만 레나에게는 매우 잘 어울렸다. 이제 그녀는 오버워치의 정예라기 보다는 하나의 평범한 동급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레나의 상념은 11시 정각 알람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았던 하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1시 5분.

10분.

레나가 갈증으로 속이 타들어가고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는 모퉁이로 돌아 들어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레나는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향해 외쳤다.

"하나야!"

레나가 붕붕 손을 흔들자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내가 그렇게 반가운가? 레나가 다음 말을 자아내기도 전에 하나의 오른손이 거의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급?!"

"언니. 제 이름 너무 크게 부르면 안돼요.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요."

"으급 으급"

"좋아요."

하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그녀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티셔츠에 야구팀 이름이 재봉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스키니진, 발에는 길거리에서 산 것 같은 심플한 스니커. 그냥 요 앞에 잠깐 도리토스나 마운틴듀라도 사러 나온 것 같은 복장이었지만, 레나는 하나가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나의 시선이 하나의 얼굴로 옮겨졌다. 머리카락은 동글게 말아 뒷 머리 쪽에 고정시키고, 목에는 언제나 잊지 않는 토끼귀 헤드셋. 영내에서 얼굴에 그려두고 다니는 특유의 페인팅은 깨끗하게 지워뒀고, 약간 어두운 색이 들어가 있는 썬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그제서야 레나가 겨우 알아챘다.

"아, 맞어. 자기 유명인이었지. 후훙"

"왜 언니가 뿌듯해 해요? 게다가 언니가 훨씬 유명인이거든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하나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카운터에 앉아있던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눈매에는 자글자글한 주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는 중년의 여성은 이 가게의 점주님인 같았다. 아까부터 하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걸 보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에는 접시.

그 위로 음식을 한 아름 쌓여 있다.

레나가 약간 당황했지만 "아, 아직 시키지 않았는데..." 점주님은 척척 산더미 같은 음식을 내려 놓았다. 4인용 테이블의 낙낙한 넓이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실버 메달 논스파클링 애플 쥬스 두 병.

초컬릿 쿠키.

치즈 케익.

슈크림 빵.

머핀.

햄치즈 베이글.

그리고, 따끈따끈한 치즈크림 츄러스 딜럭스페셜 6개.

레나의 입을 쩍 벌렸다.

"헛."

심지어 츄러스의 길이는 거의 5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적이 너무 많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디바와 트레이서로는 역부족. 단 것을 많이 먹지 못하는 앙겔라 박사님도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국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래. 라인하르트나 윈스턴. 최소한 솔져 세븐티 식스의 위장이 필요하다.

레나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점주님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나의 머리에 손을 뻗었지만, 이내 움찔 하고 멈췄다. 아마도 함께 앉아 있는 손님을 의식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점주님의 손을 자신의 머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머리 모양이 온통 헝클어지도록 문질렀다. 점주님의 얼굴에 홍조. 표정은 애저녁에 무너졌고, 칠칠치 못한 팔불출 같은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으므로, 레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마워요 이모."

하나의 살가운 대응에 점주님이 진심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점주님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달라며 카운터로 되돌아 갔다. 무서운 아이. 육식 토끼. 이미 점주님도 손에 넣은 지 오래구나.

레나가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행동에 돌입했다.

"언니, 식기 전에 먹어요."

하나가 직접 츄러스를 냅킨에 감싸 레나의 손에 쥐어준다. 레나가 츄러스를 조심조심 받았다. 냅킨은 이미 기름으로 번들번들해진 상태였다. 이런 기름 투성이 밀가루 덩어리를 세 개나 해치워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 츄러스에 온통 새까맣게 묻어 있는 이 결정체들은 흑설탕이며, 원통형으로 비어있는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하얀 것은 뜨끈뜨끈하게 덥힌 크림치즈였다. 그리고 레나는 이 음식의 이름이 매우 명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에게 차마 츄러스의 열량을 물어볼 수 없다. 레나에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잠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하나는 이미 츄러스 하나를 해치우고 다음 희생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레나는 무심코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신경 뉴런의 작용에 따른,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초 연산이 레나의 두뇌를 자극했다. 결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뇌는 거부했다. 이것은 불량식품이며, 이것을 섭취하면 앞으로 한 달간 샐러리만 먹어야 한다. 그러자 본능이 답했다. 건강해 지려면 식이요법은 집어치우고 유산소 운동을 해라. 그리고 레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고, 본능이 개가를 올렸다. 입술이, 코와 허파꽈리가, 혀의 돌기가, 식도가, 위장과 대장의 융털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확보하라.'

'남은 츄러스를 확보하라.'

곧 하나와 레나는 경쟁적으로 츄러스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하나는 토끼가 풀을 갉아먹 듯 빠르게 입을 움직였고 레나는 성큼성큼 베어 물어 거의 씹지도 않고 삼켰다. 용호상박. 무적의 용과 최강의 호랑이가 자웅을 겨루니 츄러스가 남아날 리 없었다. 츄러스가 전부 없어지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레나는 츄러스 하나의 열량이 천 이백 킬로 칼로리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곧 그녀는 시간 가속기의 도움없이 기지까지 뛰어가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레나는 하나가 초컬릿 쿠키를 위시한 잔당들을 소탕하는 동안 츄러스 하나를 더 시켜 먹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

"후아. 잘 먹었다."

하나가 배를 쓰다듬었다. 다른 한 팔로는 레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레나도 하나에게 붙들려 있지 않은 팔로 아랫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너무 먹었다. 후회된다. 하지만 후회도 하지 않는 인생이 재미있을 리 없다. 너무 거창한 곳까지 확대된 생각이 너무 어이없어서 레나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다음은 어디 갈까요?"

하나의 물음에 레나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나는 이미 오늘의 모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자타공인. 그녀는 해결사였다.

그리고 레나가 안내해 도착한 곳에서 하나는 거의 괴성을 내지를 뻔 했다.

'우와! 우와우와우와!'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머리통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날려보낸다는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이 자신을 게임센터에 대려다 줬다는 사실을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그냥 게임 센터가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감정이 폭발했다.

"언니가 여길 어떻게 알았어요?! 언닌 영국인이고! 게이머도 아니잖아요!?"

레나가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이래뵈도 촉이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자기가 좋아할 만한 게임 센터라면 아무리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겠더라고."

하나는 레나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헐 감동이야 언니 사랑해요!"

레나가 고르고 고른 장소는 부산 게이머들의 은밀한 장소였다.

통칭 성지.

굳이 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지만, 게임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면 감히 발을 딛지도 못한다는 특별한 게임 센터. 하나더러 굳이 자신의 숙소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이곳일 것이다. 그녀는 게이머의 정열과 투쟁심이 휘몰아치는 이곳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게임 센터안에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피끓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거의 귀기까지 느껴지는 광경에 레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하나도 게임 센터에 들어선 이후로는 안색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두리번 거리는 레나를 뒤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걸어 증강 현실 콘솔 앞에 섰다.

MEKAGE.

한국 굴지의 게임사에서 MEKA 부대를 소재로 제작한, 최대 6 대 6까지 가능한 다인수 대전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 매니악한 현실 재현도 덕분에 발매 초기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나, 이후 굴지의 프로게이머인 송하나의 편애와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재조명되었고, 지금은 그 자유로운 완성도가 차고 넘칠 정도로 재평가받았다.

곧 전설적인 프로게이머인 하나를 알아본 몇몇 게이머들이 흠칫 놀랐지만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가까이 오거나 아는 채 하기는 커녕 인사를 건내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하나의 인기를 잘 알고 있는 레나는 이 분위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가 일단 콘솔 하나를 골라 자리에 앉자 나머지 11개의 빈 자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꽉 채워졌다. 마치 그들은 행동을 통해 하나의 인기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묵묵히 증거하는 수도승 같았다.

게임 매니아들이 숫기가 없다는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너무 데면데면하다. 그에 반해 그들의 하나에 대한 시선은 꽤나 노골적이다. 아까부터 이곳의 게이머들은 사욕으로 질척이는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나는 곧 그것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과장된 감이 있지만, 레나는 이런 눈을 잘 알았다.

전장에서 늘 보는 눈이다.

살기.

기백.

투쟁심.

호승심.

이를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레나의 소박한 의문과 질려버린 것 같은 기색을 감지한 하나가 소곤소곤 설명했다.

"여기선 절 이기지 못하면 저에게 말을 걸지 못해요. 제가 그렇게 정했어요."

그러나 레나의 의문은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나의 의아한 표정을 읽어낸 하나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성지는 제가 키운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제 말이 곧 법이란 말씀."

"뭐야아?"

"제가 인기가 좀 많아요."

인기가 많다.

과연 그 말은 납득할 수 있다.

게이머 입장에서 하나는 동경의 대상이다. 희귀한 여성 게이머인데다가 게임 실력은 초일류. 온갖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실력으로 시끄러운 게이머들을 닥치게 만들고, 여세를 몰아 그런 룰을 만들었으리라. 나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대충 그런 일이라도 있었겠지.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수 많은 전장에 섰으면서도, 이제껏 무패.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상대팀을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유린하고 있었다. 너무도 리얼한 게임성. 그리고 하나는 실존하는 MEKA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은 필요없었다. 하나는 침묵을 지킨 채 팀원들이 두서없이 내뱉는 말을 독자적으로 분석하여, 팀원들을 효과적으로 보조함과 동시에 적을 섬멸하고 있었다. 함께 전장에 서있는 게이머들의 면면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실력에 대한 경이와 존경. 하나는 매일 4시간 이상 군용 MEKA를 운용해 실전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레벨이 틀려도 너무 틀렸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뒤에서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레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나도 조금 즐길 수 있는 편이 좋겠지.

레나는 하나의 상대편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 중 한명에게 다가가 무언의 압력. 기세에 눌린 게이머가 시뮬레이터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레나가 고글을 내려 쓰고 콘솔에 게임 코인을 넣는다.

의외의 전개에 반대편에서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이 게임 꽤 어려운데 괜찮겠어요?"

하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미묘.

우려.

흥분.

기대.

아무래도 좋았다. 레나는 대답하는 대신 팀원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토끼는 내가 잡아둘게. 그럼 이길 수 있겠어?"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레나에게 시선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레나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 게이머가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뻐끔이고 있는데, 레나의 정체를 결정짓는 아이템이 레나의 가방에서 출격, 팔을 타고 이동. 이윽고 흉부에 도달해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장착되고 있었다.

파란 플라즈마를 내뿜는 그것은 트레이서의 상징- 시간 가속기였다.

하나를 포함한 갤러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곧 비명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트트트트트레이서?"

"진짜야? 오버워치가 성지에 왔어?"

그러나 아무도 스마트폰을 꺼내거나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레나는 그들의 인내심에 조금 놀랐다. 이것도 하나가 만든 성지의 룰인 걸까.

"할 수 있어! 저 토끼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고!"

트레이서와 함께하는 팀원들의 사기가 성층권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오늘 꼭 하나를 꺾어야만 했다.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울분과 희망을 토해낼 때가 왔다.

"난 인사할 거야!"

"나도!"

"난 싸인 받을 거야!"

"악수! 악수를 요구한다!"

"풍선껌을 가보로 삼겠어!"

그것 참 소박해 돌아가시겠네! 레나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스틱을 잡았다.

게임 시작 30초 전.

레나가 조용히 선언했다.

"해결사가 왔어."

.

"푸풉"

하나는 완전히 그로기 상태가 된 일행을 부축해서 성지로부터 3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겨우 앉힌 참이었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방금 실패했다.

"꺄하하하하하하!!!!!!"

"이제 그만 웃어 자기야..."

다섯 번이나 계속된 대전 중 트레이서는 손도 발도 내밀지 못했다. 싸움꾼 토끼를 잡아두긴 커녕 그녀가 지휘하는 다섯 명의 팀원 중 누구 한 명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들은 위대하신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을 거리낌없이 유린했고, 한 번씩 돌아가며 죽였다. 무서운 놈들이다.

그 무서운 놈들의 필두에 서있는 무서운 토끼가 겨우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언니.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거예요? 조작법 좀 외워온 걸로 진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나가 두서없이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의 초점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으으으... 오버워치 중에서도 난 적응력과 동체 시력이... 반응... 속도가..."

"시간 가속기 이야긴 안해요?"

"컥..."

하나가 짖궂게 웃으며 레나의 말을 끊고 추가타를 날렸다. 나 이거 알아. 레나가 몽롱한 머리로 기억해냈다.

지난 번 게임 방송에서 봤어.

"비전투 상황 중 민간인 앞에서 시간 가속기를 조작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거 맞죠?"

공중 컴보야. 공중에 띄워놓고 죽을 때까지 패는 거지.

"자기야... 제발... 응?"

이 아이는 악마다. 게임 감각으로 사람을 손쉽게 파괴한다. 레나의 정신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레나의 한심한 얼굴을 본 하나의 표정도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이 언니, 연상 맞아? 뭔데 이렇게 귀여워?

"오구오구."

하나가 레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애기 이렇게 여려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그 참담한 패배감.

레나는 오버워치의 험난한 미션 중에도 이런 실패는 겪어본 일이 없었다.

최소한 시간 가속기가 있는 한, 그녀는 자신이 질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 가속기를 이용해 피탄 직전에 회피 기동을 섞어 넣으며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 오는 레나를 2인 1조로 구성된 하나의 팀원들이 침착하게 응격했다. 어쨌든 게임 속의 메카는 현실 속의 트레이서 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시간 가속기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굳건하게 버텨낸 적들은 무력해진 레나의 기체를 손쉽게 사냥했다.

그 방약무도한 전투력.

레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돼. 뭐야. 진짜 민간인을 군대로 키우고 있는 거야? 한국 정부의 의도가 정말 그거야?"

"그 병크 얘길 왜 해요? 아오."

레나는 쓴웃음을 짓는 하나를 올려다보며, 하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레나의 정신은 도저히 진지한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하나에게 어리광 부리더라도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레나는 하나의 품 안으로 더 깊숙히 파고 들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레나를 받아들였다.

포근하고 기분 좋다.

레나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한심해 보이겠지.

아무렴 어때.

하나의 체향을 듬뿍 느끼면서, 어느 새 레나는 하나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과거로 날아갔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은.

애틋하고 귀여운, 그리고 강인한- 신병 시절의 하나가 그녀의 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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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9. 23:10
".......려."

용기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시련의 산에서 보일 리 없는 자신의 고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생각해주던 단단하고 후덕한 기관장. 다정하고 우직한, 라이벌이자 친구인 성왕. 그리고-

언제까지나 하얗고 아름다운 그녀.

".......신 차려."

그녀의 장점을 꼽자면 용기사는 밤을 꼬박 샐 수도 있었다.

그녀는 단지 아름답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녀는 바론 왕국 최고의 명사수였고, 그 이상으로 뛰어난 백마도사였다. 무수한 적군을 쏘아 떨어뜨렸고, 그 보다 많은 아군을 치료하고 지켜냈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백마도사는 가장 죽음과 근접해 있는 존재다. 필연적으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많은 가까운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초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가장 무섭고 두려운 싸움에는 항상 그녀가 함께 했다.

".. 인, 정신 차려."

그 바보 같은 놈은 그녀의 진가를 모른다. 그녀의 강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새장 속에 가둬 지키려 할 뿐이다. 내가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 나야말로, 나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린다.

"카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카인이 눈을 번쩍 떴다. 방금 꾼 꿈을 되새겨보려 노력했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용기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태양의 역광 속에 그림자를 발견했다. 휘몰아치는 투기. 위협적. 그는 무의식 중에 창을 뻗으려다가 간신히 멈췄다. 상대는 적일지도 모른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인은 더이상 스스로의 의지가 담기지 않은 창을 내찌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역광 속에서 걸어왔다. 금발. 녹색 눈동자. 선이 가늘고 날카로운 인상. 압도적인 위압감에 비해 체구는 의외로 작다. 등에 걸치고 있는 것은, 그 왜소한 몸으로는 도저히 휘두를 수 없을 것 처럼 생각되는 거대한 검. 그 뒤에 있는 것은, 마치 산처럼 쌓여있는 이미테이션- 적들의 시체. 그 중에는 대단히 거대한 크리쳐도 있었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군. 퇴행인가."

"퇴행."

"이 세계로 소환된 전사는 정신이 불안정하지. 지금 당신처럼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너는 누구지? 저 이미테이션들은 네가 다 해치운 건가?"

"클라우드다. 놈들이 스스로 내 검에 뛰어들어 죽어주지는 않더군."

클라우드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카인이 적의 정체를 잊어버리지 않은 것은 꽤 고무적이며, 체력이 회복되면 곧 기억도 돌아올 거라고 전망해 주었다.

"설 수 있겠나?"

"큭..."

카인은 상체를 일으키는 것 조차 힘겨워 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육체는 죽기 직전까지 파손되어 있었다. 지금 정신을 차리고,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할 수 없군."

클라우드가 카인을 훌쩍 들어올려 등으로 옮겼다. 카인은 꼼짝없이 클라우드에게 업히게 되었다. 그리고 카인은 누군가에게 업혔던 기억이 없었다. 카인이 항의했다. 아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봐.

하지만 성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급격하게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클라우드는 담담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기억나지 않겠지만 넌 나를 구하려다 다쳤다. 내가 돕는 것은 당연하지. 조금 쉬어두는게 좋아."

클라우드의 음성에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설득력이 있었다.

카인은 다시 잠에 빠졌다.

.

카인은 여섯 시간을 내리 골아 떨어졌다. 그가 일어났을 때 클라우드는 아직도 걷고 있었다. 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체력이었다. 카인은 이 강건한 병사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클라우드. 클라우드 스트라이프."

클라우드는 카인이 몇 시간 전에는 알려주지 않았던 자신의 성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클라우드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기억해냈나. 꽤 회복된 것 같군."

"내려줘. 걸을 수 있다. 어깨는 조금 더 빌려야 겠지만."

"좋을 대로."

클라우드가 카인을 등에서 내려 주었다. 카인은 약간 휘청였지만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클라우드는 손에 아무렇게나 쥐고 있던 가죽 거치대를 다시 등에 걸고, 그대로 검을 고정했다. 거치대와 함께 쥐고 있던 카인의 창은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카인은 그제야 클라우드의 복장도, 무기도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라우드의 어깨에 빌려 조심스럽게 이동하면서 카인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된거지?"

"이 세계에서 둘이 함께 여행을 하기 시작한 후 일주일 째, 이미테이션의 매복에 걸렸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이미테이션 중에 카오스의 복제가 섞여 있었지."

데스페라도 카오스의 이미테이션. 정신를 잃기 전에 봤던 그 거대한 크리쳐를 말하는 것 같았다. 카인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녀석이었어. 넌 결정적인 순간에 날 감싸고 쓰러졌다."

그렇다면.

카인이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있지?"

클라우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억을 되찾았거든. 그 기억으로부터 얻어낸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카인이 클라우드의 설명을 따라잡지 못했다. 기억으로부터 얻어낸 힘이라니? 카인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클라우드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 세계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나는 원래 세계의 기억을 되찾았다.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내가 가장 강했던 시기를. 그리고 그 때의 힘을 쓸 수 있게 된거지."

"그것만으로 그렇게 강해진다는 건가?"

복제라고는 하지만, 저 데스페라도 카오스와 단기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클라우드가 답했다.

단 한마디였다.

"골베자."

카인의 등에 소름이 돋아난다.

골베자.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이름. 애써 숨겨왔던 비밀을 파해쳐내고, 이리저리 비틀고- 나를 조종하는데 사용한 이름이다. 그는 아직도 카인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생각해봐. 그 녀석은 원래 세계에서도 그렇게 강했나?"

카인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골베자는 강하다. 그러나 카인은 자신의 창을 걸고 단언할 수 있었다. 녀석의 강함은 이상하다.

"원래 놈은 극도로 단련되었지만, 결국에는 흑마도사일 뿐이었다. 접근하면 승산이 있었지. 힘으로는 그 부하에게도 못 미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 애초에 그 체격은 사람인 것 같지도 않아. 게다가 그 완력에 염동력. 설사 그 데스페라도 카오스의 이미테이션이라 해도 지금의 골베자를 당해낼 수는 없을 터. 그래, 마치-"

스스로 정리하면서 카인은 문득 깨달았다. 그 골베자와 비슷할 만큼 강한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카인은 반 강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골베자는 자신이 모르는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때의 강함을 그 몸에 익힌 것이다.

클라우드가 조용히 정리했다.

"이제 납득한 것 같군. 참고로 말하자면, 내 '지금' 이름은 클라우드 L. 스트라이프다."

클라우드가 굳이 강조하자 카인이 그 작은 차이를 잡아냈다.

"L?"

클라우드가 담담히 답했다.

"내 아내의 성이다."

카인은 입을 딱 벌렸다.

아내?

설마?

이 녀석이?

카인의 본능은 그 이상 가까이 가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인의 정신은 수용 한계치를 넘어 너덜너덜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이미 이지적인 판단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대로 그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말았다.

"상대는?"

"소꿉친구다."

결정타였다.

카인은 정신적으로 졸도했다.

힘이 쭉 빠진 그는 다시 클라우드의 등에 편하게 업혀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용기사에게 남은 마지막 한조각의 긍지는 그를 황폐한 정신 속에서도 계속 자력으로 걷게 만들었다. 실로 초인적이었다.

.

날이 어두워졌고, 클라우드는 노숙을 제안했다. 카인은 말 없이 수긍했다. 잠깐동안 클라우드는 산더미같은 장작을 준비하고, 나무 열매를 따고, 산짐승을 잡아왔다. 여유롭게 준비하는 그를 보며 카인은 약간 자괴감을 느꼈다.

카인의 시선을 느낀 클라우드가 카인을 바라보았다.

"육체적으로 약해져서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거다. 지금은 회복하는 것만 생각해."

"여유가 넘치는군."

"아내의 지론을 말해줬을 뿐이야."

그리고 카인은 다시 침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라우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기억을 찾는다면 강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묻고 싶은 얼굴이군. 하지만 묻지 않아. 그게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할 일이니까. 그렇지?"

비로 그렇다.

마음을 완전히 읽혀버린 카인이 고개를 들었다. 클라우드가 그런 카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자존심의 덩어리같은 카인. 과연 골베자가 말했던 대로야."

카인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그래. 나는 골베자와 함께 행동한 때도 있었다. 네 이야기는 그 때 들었지. 그는 네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젠 알 것 같군."

카인의 표정은 용기사의 투구에 가려 읽을 수 없었다. 차를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용기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나."

클라우드가 담담하게 서술했다.

"친구를 두 번이나 배신하고, 그 연인을 탐했다."

카인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클라우드에게 그 일은 골베자에게 세뇌당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을 가리지는 못한다. 

골베자는 카인의 심층 심리를 꿰뚫고 교묘히 그를 조종했다. 카인의 배신에는 자신의 의지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

카인은 아직 그녀에 대한 마음을 털어낼 수 없다. 고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지 모를 이곳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낼 수 있으니까. 그녀의 눈 빛도, 입술도, 하물며 솜털 하나 하나까지. 세뇌가 완전히 풀린 이후 그녀를 취하고 싶다는 생각은 맹세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얼굴이 멋대로 떠오르는 것은, 카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카인인 클라우드의 말에 불쾌함을 느끼지도, 분노하지도, 말을 되돌려주지도 않았다. 전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죄이기 때문이다.

클라우드는 입을 다물어버린 카인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카인의 마음을 읽어냈다.

"카인.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건가?"

카인이 차분하게 그 말을 받았다.

"죄는 사라지지 않아. 각자 그 그림자를 지고 걸어갈 뿐이다."

그 표정에 떠오른 것은 의지. 결의. 그리고 순수.

클라우드의 눈에는 이채.

"명답이다."

클라우드가 미소지었다.

"카인.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를 잘 알아."

골베자는, 동료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네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너는 반드시 원래 세계의 기억을 되찾을 거다."

누구보다도 고결한, 그렇기에 죄를 외면하지 않고 살아간 용기사의 이야기를.

"조바심 내지 않아도, 너는 강해진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카인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줄 수 없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걸어갈 힘에 보탤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조차. 그것이 다름아닌 용기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렇지만 클라우드는, 그럼에도 카인의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을 말해줄 수 있었다.

"너는 끝내 친구들을 지켜냈으니까."

클라우드가 웃었다. 카인은 그 얼굴에서, 한순간 뿐이지만, 자조적인 상처를 읽어냈다. 카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도 나와 같다. 그 또한 나처럼 짊어지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클라우드의 말에는 맥락도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카인은 그의 눈에서 진실된 마음과 그 이상의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카인은 처음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둘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함께 다시금 길을 걸은지 3일 째.

돌연 클라우드가 멈춰섰다.

"여기까지다, 카인."

카인이 뒤를 돌아봤다. 그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상태였다.

"저 앞으로 3 킬로미터 정도. 너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있는 것 같다."

카인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밝아졌다.

"세실인가."

클라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애석하지만 나는 그 쪽 방향이 아니라서."

카인이 조용히 말했다.

"티파를 찾으러 가는군."

클라우드가 깜짝 놀랐다.

"티파를 알고 있었나."

"티파가 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도 같군. 티파는 나에게 포션을 나눠줬었지. 너처럼."

그리고 카인은 크게 놀랐다.

클라우드가 경악한 얼굴로 카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티파가, 너에게 포션을 줬다고? 나처럼? 정말인가? 티파가, 설마 긴급 상황이라고는 해도 나 아닌 다른 녀석과- 아니, 그전에, 기억하고 있었나? 아니야, 있을 수 없어. 넌 분명히 정신을 잃고 있었을 텐데."

클라우드가 완전히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저 표정에 떠오른 것은 분노인가, 체념인가, 그것도 아니면 수치심인가. 카인은 또 다시 클라우드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었다.

"? 티파가 나에게 포션을 끼얹어 준게, 뭐 문제라도 있는 건가?"

클라우드가 그 말에 표정 변화를 멈췄다.

"포션을 끼얹어 줬어?"

"아예 병으로 후려칠 기세였지. 너도 나에게 포션을 뿌려줬을 터. 깨어났을 때 포션향이 남아있어서 알아챌 수 있었다."

"어? 아아. 그랬지. 맞아."

클라우드는 그 때 카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고, 포션은 복용했을 때 가장 효과가 뛰어나며, 당시 카인은 스스로 포션을 삼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카인은 사소한 것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클라우드. 고마웠다."

침착함을 되찾은 클라우드가 그 손을 맞잡았다.

"다음 번에 만나면 꼭 한 번 겨뤄보고 싶군."

"기대하게. 강해져 있을테니."

그대로 클라우드는 왔던 길을 되짚어 떠났다. 카인은 클라우드가 세실을 찾아줬던 것 처럼 티파를 곧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과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이를 통해 서로의 기억을 찾고, 강해져서- 원래의 세계에 돌아가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의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들이 다시 만나 자웅을 겨루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생각치 못한 형태로 목숨을 건 대결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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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FF. 성왕과 병사  (0) 2017.03.13
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7. 22:27
"못 참아!"

유피가 선언했다. 칠리 소시지를 손님에게 건네던 클라우드가 움찔하며 그녀를 돌아봤다.

"진정해라. 유피. 화낼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저 불쌍한 빈센트는 아직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오.

오오오.

온다.

온다온다온다!

클라우드는 아무것도 모른채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티파를 덮쳐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유피가 폭발했다.

"못 참아~~~~~~~!!!!!!!"

닌자 마스터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인을 맺는다. 풍신의 술법에 화둔이 섞여 대폭발. 그리고 순간적으로 과소모된 산소가 저기압을 발생시키고, 주변의 공기를 끓어들여 2차 폭발. 세븐스 헤븐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다. 구멍 투성이가 된 천정을 비상구 삼아 도주하는 그림자가 하나. 그리고 이를 뒤쫒는 사람이 하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그 여자를 각오해 못참아 죽여버릴거야!"

유피의 말은 중간부터 비문이 되었다. 그녀는 정말 화가 났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혼을 의식의 흐름에 맡겨 아무렇게나 단어를 내뱉는다. 그리고 이 모습이야말로 유피의 분노가 정수리까지 차올랐다는 증거.

빈센트는 혀를 찼다. 이 상태가 되면 그녀는 힘이 다할 때 까지 날뛰고 나서야 겨우 가라앉는다. 저 멀리 망연자실한 티파가 주저 앉고, 클라우드의 눈이 녹색 레이저를 내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빈센트는 그 두 사람에게 사과할 시간이 없었다. 유피가 침천본의 수법으로 수리침을 던져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수법의 두려운 점은, 정말로 천개의 비수를 던진다는 것이다. 의복에 무기를 숨기는 요령은 불과 일주일 전에 알려줬을 뿐이다. 그리고 유피는 천재적인 학생이었다. 빈센트는 괜한 것을 가르쳐 줬다고 때늦게 후회했다.

"전부 피했어? 피하지 말고 맞아!"

유피가 드디어 정신줄을 놓았다. 그녀의 공격을 정통으로 받으면 빈센트도 그냥 끝나지는 않는다.

다음 무기는 저 작은 몸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풍마수리검이다. 지향성을 가진 거대한 날붙이가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쇄도. 빈센트는 허리가 잘려나가기 직전에 케르베로스의 총신으로 풍마수리검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는 낭패한 심정으로 다섯 번 더 똑같은 곡예를 펼쳐야 했다. 그 짧은 사이에 유피는 풍마수리검을 다섯개나 더 던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빈센트으으으으으으으!!!!!!!"

그리고 빈센트를 따라잡으며 유피가 마지막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 꺼림직한 느낌 때문에 저 세퍼 세피로스와 싸웠을 때 이후로는 손에 쥐어본 일이 없는 무기였다.

불구대천.

그러므로 유피는 이제 빈센트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유려한 공격이 마치 춤을 추는 것 처럼 이어졌다. 열 번의 공격이 마치 한 동작과 같이 이어졌고, 연계가 끝났다 싶으면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일격 일격이 필살의 급소를 노리고 전개되자 제 아무리 빈센트라 한들 진땀을 흘리며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급기야 왼 쪽의 기계팔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빈센트의 등에도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오래 끌 수 없는 싸움이다. 결국 빈센트는 승부를 걸었다. 유피에게 돌진. 기계팔로 유피의 불구대천을 쥐고, 동시에 유피의 몸안으로 파고 들어 오른팔로 유피의 허리를 껴안는 것처럼 감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피의 다리 사이에 오른 쪽 다리를 끼워넣는다.

유피의 기세가 빈센트의 다리에 가로 막혀 두 사람은 마치 탱고를 추는 것 같은 동작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화려하게 쓰러졌다. 빈센트는 기세를 조절해 유피를 감싸안는 형태로 간신히 유피의 쿠션이 되어줄 수 있었다.

"유피."

"그래! 가! 가라고! 루크레치아를 보러 가는데 왜 나한테 보고 씩이나 하는 거야!"

"유피."

"왕복 세 달이라고! 그래! 돌아와서 날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마!"

"유피. 그러니까 같이 가자."

"그래! 같이 가자! ...어?"

그제야 유피는 빈센트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약간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빈센트가 있었다.

"같이 가자, 유피."

"어? 같이?"

"루크레치아에게 널 소개해 주고 싶다."

"어? 어어어어어어어?"

유피는 다시 한번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빈센트는 그녀가 완전히 당황했을 때에도 맥락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꼭 껴안은 채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빈센트, 이 개자식아. 내가 몇 번을 말해. 그 말을 먼저 하란 말이야."

저 뒤에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던 클라우드의 혼잣말이 공허하게 밤하늘에 흩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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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7. 20:45
라인하르트 빌헬름은 정신 세계도 그 육체 만큼이나 강철같은 사내였다. 그는 군대에 성별이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무기를 들어야 한다면, 그 의지를 가진 자를 존중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강습 사령관만큼 하나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의지. 만약 확인 결과 그녀의 의지가 준비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다. 단지 그 뿐인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긍지높은 오버워치의 원로 멤버로써, 송하나 하사에게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첫 날은 정말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영부영 지나가 버리고 말았지만,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제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라인하르트가 그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때, 마침 송하나 하사가 각이 잔뜩 잡혀있는 정갈한 군복 차림의 젊은 병사와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가 입고 있는 복장- 투박하면서도 요상하게 화려한 저것은 결코 정비복이나 군복이 아닐 것이다. 어제 입고 있던 것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멋을 부린 복장이다.

그녀가 라인하르트를 알아보고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나는 오버워치다. 그렇게 대답해줘야 했을 텐데, 그 살가운 모습에 라인하르트의 눈매는 이미 펀치 드렁커처럼 풀려있었다.

신장 8피트, 몸무게 600 파운드의 '초인 병사' 라인하르트가 발산하는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은 하나와 동행하던 병사가 홀로 받아내야 했다. 그는 거의 혼절할 것 같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이 가엾은 병사에게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못했다.

하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할아버지! 오른팔! 앞으로 나란히!"

"? 앞으로 나란히?"

"아이참. 팔을 앞으로 뻗어 보시라구요!"

라인하르트가 영문을 모른 채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송하나가 점프. 라인하르트가 뻗은 통나무같은 팔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우와! 대박! 이거봐 상철아 이것봐!!!"

최상철 일병은 존경하는 송하사가 타국의 전쟁 영웅에게 저지르고 있는 이 거대한 무례함에 정신이 거의 나가버릴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이미 불로 달군 베이클라이트 합금강처럼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사도로 중무장한 그가 설마 손녀 뻘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송하나 하사에게 무력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을 하나 뿐이다. 최일병에게 자신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씨발 팔뚝 완전 코끼리 앞다리 같아! 할아버지 나랑 결혼해요!"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폭발했다.

"타하하하하하하!"

라인하르트가 호쾌하게 웃으며 팔을 휭휭 좌우로 흔들었다. 사이즈가 두배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 손녀와 놀아주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겁을 잔뜩 집어먹은 최일병의 눈에는 라인하르트가 하나를 거의 내동댕이 치는 것처럼 보였다.

"꺄하하하하하하!"

송하나 하사도 흥겨운 홍소를 내질렀다. 최상철 일병은 이제 탈영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박사님 저 왔어요!"

오버워치가 부산 중장갑 보병대의 일각에 체류하기 시작한지 3일째. 이미 하나는 오버워치 임시본부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했다. 특히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의무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의무실 책임자인 앙겔라는 오늘에야말로 하나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나양. 여기 놀러 오면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요?"

"사랑을 담아서, 디바!"

"말을 좀 듣는 척이라도 해봐요."

앙겔라는 눈을 치켜 떴다. 하지만 하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앙겔라는 레나가 왜 하나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는 그녀를 꼭 닮았다.

"후흥. 그래도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나는 상의를 접어 올렸다.

"제대로 다쳐서 치료받으러 온거니까요!"

왼쪽 옆구리가 완전히 쓸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앙겔라가 숨을 들이켰다. 이 아이는 대체 뭘 자랑하고 있는 거람.

"하나양! 그걸 왜 지금 보여주는 거예요!"

"헤헤. 별거 아녜요. 팀원들과 훈련하다가 조금 실수했어요. 낙법하는 걸 잊어서."

앙겔라는 약간 놀랐지만 사실 대단한 상처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 숨을 내쉬고 주섬주섬 약병을 꺼내 들었다. 앙겔라 특허품, 무통 소독약. 리터당 십만 달러나 하는 약품이다. 그것을 아낌없이 환부에 펴바르고 말라붙은 혈액을 조심스럽게 거즈로 닦아낸다. 마지막으로 씻겨 나가지 않은 모래를 극세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내고 습포를 넉넉하게 잘라 상처를 감싸듯 붙여 응급 처치를 종료. 하나는 완전히 홀려버린 것 같은 눈망울로 앙겔라를 바라봤다.

"우와- 뭐죠 이거? 하나도 안아프고. 손 재주 완전 섬세하고. 박사님은 너무 이쁘고."

하나의 장난스러운 어투에 앙겔라의 얼굴이 조금 험해졌다.

"이런 상처를 입을 정도로 훈련하는 것은 말도 안돼요. 그게 다 미숙하다는 증거죠. 다음에 다쳐서 돌아오면 무통 소독약 같은 건 어림도 없어요. 에틸 알콜로 상처를 절여보면 다음 번엔 절대로 다치고 싶지 않아질 테니까, 한 번 만 더 다쳐서 돌아오세요. 알았어요?"

앙겔라의 엄한 질책에 되려 하나는 PX 특산 냉동 닭강정을 배가 터질 때까지 흡입한 것처럼 만족스런 얼굴을 해 보였다. 앙겔라의 위협은 하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평소의 악마적인 독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앙겔라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앙겔라의 으름장에 위축되는 대신 만면에 웃음을 짓고 상체를 앙겔라 쪽으로 기울였다.

"박사님은 제가 걱정돼요? 막 밤에 잠도 안오고 그래요?

여기까지다. 앙겔라는 오늘 더이상 심각한 얼굴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나와 함께 있으면 그녀의 악마적 본성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그녀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질문을 되돌려 준다.

"라인하르트씨에게 청혼했다면서요? 기사도를 조각해 만든 것 같은 딱딱한 분인데, 괜찮겠어요?"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배시시 웃으며 손사레쳤다.

"에헤이. 아녜요. 할아버지와는 그냥 즐기는 사이예요. 제 진짜는 박사님이죠."

하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앙겔라의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 그녀가 앙겔라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당돌한 말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 아이의 정체는 대체 뭘까. 오늘 아침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멍청하게 풀어졌던 것도 이해가 간다.

앙겔라가 하나에게 받아칠 말을 고르는 사이에 의무실에 손님이 한 명 더 찾아왔다. 아니, 실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이 공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다. 이런 기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각 종 기인이 서식하고 있는 오버워치 내에서도 한 명 밖에 없다.

"너무해! 자기, 나도 그냥 엔조이였어?"

아마도 오버워치에서 하나와 가장 먼저 접촉한 에이젼트. 레나 옥스턴, 더 트레이서.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지, 그녀는 방금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가 약간 뜨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레나 옥스턴이 미소로 미묘한 표정을 숨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짜잔! 해결사가 왔어요!"

레나는 하나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다가와 그대로 하나를 등뒤에서 껴안는다 싶더니, 그녀의 팔이 뱀같은 움직임으로 슬리핑 초크를 시전, 하나의 목을 사정없이 조여들어왔다.

거의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아 하나가 항복의 표시로 정신없이 레나의 팔에 탁탁 건드렸으나 레나는 요지부동. 하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얼레에? 내가 느껴지긴 하는 거야, 자기? 어떻게 3일이 지나도록 한 번을 안 찾아와? 순진한 어른이들한테 추파나 날리고. 자기 그래도 되는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문란하네?"

레나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녀는 하나가 자신을 뒷전으로 밀어뒀던 것이 진심으로 분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는 레나의 말에 미안한 마음을 품는 대신 손가락으로 트레이서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트레이서의 품 안에서 겨우 빠져 나온 하나는 켁켁 거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레나로부터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면서 말했다.

"레나 언니는 이미 어장 관리중이니까요."

"그런 말 하는 순간 이미 관리의 의미가 없는 거 아냐?"

그리고 곧 사냥하는 트레이서와 도망치는 토끼에 의해 의무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물론 하나가 맨몸으로 레나에게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앙겔라는 그들이 뒤엉켜 쓰러지는 것 까지만 확인하고, 의무실을 나섰다. 나올 때 방을 정리해두라는 말을 남겨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

잭 모리슨은 이 7일 동안 송하나 하사가 이끄는 MEKA 소대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일과는 훈련용 메카의 정비로 시작해서 전투 훈련으로 끝났다. 잭은 군의 허가를 받고 택틱컬 바이저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모든 내용을 영상화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지금 훈련은 1대 다수 상황의 전투였고, 송하나 하사가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인기척이 있었다.

"강습 사령관."

"부 사령관."

"또 그 아이의 전투 훈련을 보고 있어?"

"그래. 넌 처음이겠군."

"저 누더기 같은 기계로 훈련하는 건가. 마음이 짠해질 정도네."

"예산 문제로 정규 기체는 훈련 때 사용 허가가 나오지 않는 것 같더군. 오후에 전투 훈련에 대비하여 훈련기를 정비하는 것에 오전 일과를 전부 할애하고 있어."

잭은 아나의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비효율적인 일과를 송하나 하사의 자발적인 지시 하에 묵묵히 수행하고 있어. 성실하고 좋은 병사들이야. 명령체계도 확고하고. 송하나 하사에 대한 평가를 상향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잭은 하나를 오버워치에 넣는 것을 여전히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실하게 송하나 하사를 평가한다. 이 고지식한 면 만큼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나도 강습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공유했다.

"MEKA 부대의 전투 훈련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송하나 하사의 작품이라더라군. 공격, 수비 패턴이나 경호 및 소대 이동, 거점 확보 및 저지 등, 전부. 기체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프로그램으로 명성이 자자해. 이제는 부산 뿐만 아니라 전국의 부대가 송하나 하사의 방식을 피드백 받아 차용하고 있는 것 같아."

"..."

"열의가 있어. 승부욕도 있고. 그냥 철없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아."

"라인하르트는 둘 째 날에 이미 함락됐고. 그 까칠한 치글러 박사도 이젠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더군. 레나는 아예 그 아이와 붙어다니는 것 같고."

잭이 바이저와 마스크 너머로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녀석은 토끼다.

하지만 보통 토끼가 아니다.

"다음은 당신 차례겠군. 아나."

"다음은 당신 차례야. 난 이미 만나봤으니까."

잭이 그제서야 아나를 돌아봤다.

"라인하르트에게처럼 어리광 부리며 다가오면 머리 위에 호두라도 올려 놓고 저격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나한텐 그 방법이 안 통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더라고. 영민한 아이야."

계산해서 한 일이 아니다. 잭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는 감이 좋은 아이니까.

"어디서 알았는지 오버워치식 경례를 올려 붙이더라. 기특하기도 하지. 그래서 반대로 내가 저격 훈련을 시켜줬어."

아나 아마리의 개인 저격 교습이라니. 오버워치 대원들이라면 목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원하는 일일텐데. 잭은 쓴웃음을 지었다.

잭 모리슨은 다시 고개를 돌려 훈련장을 내려다 봤다. 메카에서 내린 하나가 자신의 메카를 미끼로 상대편의 뒤를 기습. 혼란에 빠진 상대의 정면에서는 원격 조종 상태의 메카가 풀 오토로 사격. 상대의 기체를 온통 페인트 투성이로 만들었다. 관전하던 스쿼드로부터 환성이 터져나온다.

"저격 훈련 결과 궁금하지 않아?"

"그런 건 훈련하는 것만 봐도 알아. 당신은 결코 저 아이에게 저격총을 들게 하지 않을테지. 괴물이 될테니까."

잭이 계속해서 냉정하게 송하나 하사의 전력을 분석했다.

"저 유연한 사고 방식과 전투 능력은 이미 트레이서와도 비견될 수 있을 것 같군. 한국 정부는 저 아이덕에 목숨을 건진 거나 마찬가지야. 저 머저리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게 참 한심하군."

"너무 날세우지마. 그 놈들이 바보인 탓에 우리가 저 아이를 모실 수 있게 된 것도 있잖아. 흥. 그 좆만도 못한 주임원사놈. MEKA 부대가 궤도에 올랐으니, 까다로운 여성 하사 따위는 필요없어졌다고 지껄이더군. 누구 덕분인지도 모르고. 확 고자로 만들어 주려다 참았어. 어짜피 뱃살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을테니까."

잭은 아나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역전의 병사를 하루 아침에 함락시키다니. 육식 동물이 따로 없다. 하필이면 육식 토끼라니.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잭은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아냐. 나는 아직 저 아이를 오버워치에 들이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어."

"그래. 그래서 레나 말대로 바이저와 마스크를 계속 쓰고 다니시겠지."

아나가 쿡쿡 거리며 웃자 잭이 이빨을 딱 부딛혔다. 말이 궁할 때 무심코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잭이 껄끄러운 화제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적 옴닉 부대의 습격 예상 시기는 산출됐나."

"한국군이 제공한 자료를 분석하자면, 아무리 빨라도 15일 뒤야. 정부 놈들 그렇게 숨이 넘어가더니."

한국 정부는 단단히 아나 아마리의 눈 밖에 난 모양이다. 그들은 오버워치 대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이번 옴닉의 발생 규모는 생각보다 클 것이라는 것 같다. 전투가 보름 후라고 하니 쓸데없는 대기 시간이 생길 것 같지만, 최소한 늦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잭은 계속 전투 훈련을 참관했다. 그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다음 번에는 오버워치와 합동 훈련이라도 구상해 봐야겠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육식 토끼에게 자신도 이미 절반 쯤 넘어갔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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