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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7. 6. 1. 21:17




왕께서는 조간을 드리운 채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돌연 말을 꺼냈다.




배를 준비해. 알티시에로 간다.




그 때의 울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루나프레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두웠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달 빛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다.

카멜리아 대사와의 회담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딱딱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와 서릿발 같은 대사님의 위압감을 어찌어찌 견뎌낸 뒤로 루나프레나는 가벼운 피로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알티시에가 제국으로부터 루나프레나를 보호하는 것은 그녀가 수신 리바이어선을 소환하는 날 까지인 것으로 합의되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카멜리아 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알티시에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이니까. 그 이상 알티시에가 루나프레나의 안전을 지켜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루나프레나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운명에 묶여 있는 칸나기이므로.

오히려 루나프레나는 알티시에를 걱정하고 있었다. 수신 리바이어선의 성정은 격하기가 그 짝을 찾을 수 없어 검신 바하무트가 한 수 접어줄 정도다. 겐티아나님이 직접 루나프레나에게 경고할 지경이었으니까. 제국의 공격과 상관없이 알티시에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루나프레나에게는 이 우울함을 날려보낼 비장의 마법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수첩을 꺼내 펴들었다. 이 수첩은 녹티스와 주고 받은 문장으로 가득차 있다.

한장씩 넘기며 익숙한 필체를 눈으로 쫓았다. 매일매일, 몇 번이고 읽었다. 이미 그 눈에, 가슴에, 영혼에 새긴 반려의 글자들.

칸나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녹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떠오른다.

무시무시한 시해의 습격을 받아 정신과 육체에 상처를 입은 자그마한 소년. 제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년. 그 아버지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소년. 그럼에도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관심이 고파서- 편식을 고치지 않았던 소년.

그리고, 크리스탈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소년.

한기가 들었다.

그런 소년에게 자신은 말했다. 세상을 지켜달라고. 그리고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 맹세가 어떤 의미인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조금씩 떨려오는 루나프레나의 눈에, 녹티스 왕자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곧 만날 수 있겠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이제 이 수첩조차 자신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녹티스...님..."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수첩을 적셨다.

그를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먼 발치에서 얼굴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이 허락된다면.

하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루나프레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숨죽여 울었다.

이대로 리바이어선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녹티스님이 신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녹티스님께서 크리스탈의 힘을 이어받지 않게 된다면.

그 분께서는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될까?

이제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묻어나오려 할 때, 창밖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루나프레나의 어깨를 감싸안고 살며시 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루나프레나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팔방이 바다인 자그마한 섬 알티시에 자치구에서는 일년 내내 해풍이 불어온다. 제법 찬 바람이다. 그런 알티시에에서 이와 같은 훈풍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바람은 아까부터 계속 불어오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따스한 바람을 타고, 푸른 색의 꽃 잎이 한들 한들 날아들고 있었다.

"...지르의 꽃 잎?"

녹티스 왕자의 눈동자 색을 닮은, 지르의 꽃. 루나프레나는 자신의 방에 언제나 이 꽃을 장식해 두곤 했다. 그녀는 그 꽃을 통해 녹티스 왕자가 자신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 어린 아이 같은 망상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루나프레나는 그 습관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그 부끄럽고 아련한 지르의 꽃 잎이 눈 앞에 있다. 있을 수 없는 바람을 타고 창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 몽환적인 광경에 경도된 루나프레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꽃을 거의 손에 쥐는 순간.

빛과 함께 내려선 존재가 있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칸나기였다. 그녀는 그 빛이 마력 폭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빛이 잦아들자 마력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꽃 잎과 함께 루나프레나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아, 됐다. 진짜 되네."

빛과 함께 나타난 그는 그 자신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이 분은. 루나프레나는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와! 역시 나 쩔어. 진짜 쩔어."

신이 직접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기쁨이 피어 오른다. 기억 속의 소년이 마음을 열고 나서 보여주곤 했던 장난스러운 미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꿈인가.

그것도 아니면 환상인가.

분명히 이것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감상에 젖어 정신을 놓은 탓이다.

그 분께서 지금 이곳에- 올 수 있을 리 없는 것을.

그러나 루나프레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환상이라도 좋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그저 눈 앞의 기적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루나프레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눈 앞의 청년이 신이 나서 말을 쏟아냈다.

"공기는 말야, 덥히면 떠오른다구. 불꽃으로 그 방향을 조절해서 꽃 잎을 실어 창문으로 날려보낸 거야. 그리고 꽃 잎이 도착한 곳으로 워프한 거지. 언제나 무기를 던져서 워프하는데, 꽃 잎이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맞아! 이 모든 게 루나가 마침 창문을 열어둔 덕분... 루나?"

한 참 떠들고 있던 청년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약혼자를 내려다 봤다. 그녀의 눈에는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질 무렵 루나프레나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녹티스...님?"

입을 열면 환상이 부서질 듯한.

그래서 차라리 확인하고 싶지 않은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정말... 녹티스 님이세요?"

그 떨리는 목소리에 녹티스가 숨을 들이켰다.

"어... 어, 그래. 나야. 루나."

나란 놈은 인사도 똑바로 못하는 거냐.

칠칠치 못한 녀석이라고, 친구들이 웃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녹티스는 그제야 자신이 루나프레나의 손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와!"

쑥맥 왕자가 손을 놓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오늘 나 완전 구겨지네."

녹티스가 놓아버린 손에 새삼 한기가 느껴졌다. 왕자님의 따스한 손. 체온. 결코 환상이 아니다. 그는 실재하는, 사랑스러운 왕자님이다.

"녹티스님!"

루나프레나가 녹티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녹티스는 기겁했지만 가까스로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녹티스님, 녹티스님, 녹티스님!"

녹티스가 루나프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루나. 오랜만이야."

녹티스가 속삭였다.

"늦어서 미안해."

"흐윽... 녹티스님... 흑..."

녹티스는 루나프레나가 오열을 멈출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이그니스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녹히스님."

녹티스는 공들여 왕의 예복을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품안에서 금 빛 자수가 고급스럽게 수놓여 있는 손수건을 꺼내 건냈다. 루나프레나가 말없이 그걸 받아 들었다.

"크응."

아, 웃으면 안돼. 안돼는데.

녹티스는 눈을 부릎 뜨고 견뎌내려 했지만 입가로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녹티스는 헛기침을 구사해 상황을 모면했다. 이 또한 이그니스에게 배운 기술이다.

루나프레나는 손수건을 녹티스에게 돌려주려다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손수건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눈치였다. 갈팡질팡하던 칸나기님은 흥건해진 손수건을 모르는 척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미칠 것 같다. 행동 하나하나가 녹티스를 자극했다. 이건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루나는 분명히 나보다 4살 연상일 텐데. 그랬을 텐데.

"녹티스님."

루나프레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올곧은 눈으로 녹티스를 응시했다. 손수건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이제 완전히 진정한 모양이었다.

다만 녹티스는 그간 루나프레나의 귀여운 행동을 모르는 척 하느라 심장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는 도저히 약혼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루나프레나가 녹티스를 재촉했다.

"녹티스님. 손을 주세요."

"어? 어어."

녹티스는 순순히 오른손을 루나프레나에게 건냈다. 루나프레나의 양손이 녹티스의 손을 보듬었다. 곱게 자란 왕자님의 손이 이젠 온통 굳은살 투성이다. 가슴이 조금씩 아려온다.

칸나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했다. 그리고 감지해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마력을.

...그리고 거의 말라 비틀어진 생명력을.

곧 그녀는 전부 알아챘다.

"녹티스님께선... 이미 왕이 되신거군요. 먼 곳에서 되돌아 오셨어요."

그것은 겐티아나님의 힘. 시간조차 얼려버리는 얼음신의 숨겨진 권능. 그 힘을 통해 녹티스는 과거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은 루시스에 되돌려줄 빛을 위해. 사람들에게 미래를 돌려주기 위해. 확실한 승리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그 자신의 죽음을 위해.

"그... 맞아. 들켰네."

녹티스는 장난하다 들킨 어린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뾰족해 졌다.

"녹티스님. 앞으로 일어날 일. 전부 알고 계신건가요?"

녹티스는 입을 열었다. 대답은 짧았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태연하세요!"

루나프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랫 동안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 있는 일이다. 녹티스는 눈을 깜빡였다.

"왕의 힘을 얻고 나면 녹티스님은!"

아아, 그렇지. 루나는 자상하니까. 녹티스는 웃었고, 루나프레나는 여전히 왕자님의 표정이 못마땅했다.

"검신이 전부 알려줬어. 다 알고서 돌아온 거야."

루나프레나는 아무 말도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그녀는 시선을 떨궜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녹티스가 황급히 덭붙였다.

"괜찮아! 각오는 되어 있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그 어떤 일보다 두렵다. 녹티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루나프레나의 입이 더듬더듬 고백했다.

"녹티스님... 저는... 녹티스님에게... 그 사실을..."

숨겼어요.

루나프레나는 차마 마지막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어렴풋하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녹티스는 위엄있는 부왕 레기스의 뒤를 잇게 될 거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이 명징한 미래가 된 것은 왕이 되어 세계를 지켜달라고 루나가 부탁했을 때였다.

그렇다. 누군가 루나프레나를 비난할 작정이라면, 그녀가 왕자에게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겼다는 비정함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루나프레나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루나야말로."

루나프레나는 이미 다시 오열하고 있었다. 녹티스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계에 위기가 왔을 때 칸나기는 왕보다 단명하지. 여섯 신을 깨워야 하니까. 제아무리 칸나기라 해도 목숨을 사용해야 하니까. 난 아무 것도 몰랐어. 레이브스가 말해줬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어."

"...저는...!"

"나는 이제 잘 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는지. 아버지나 루나가 날 어떤 마음으로 지켜주었는지."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루나. 그리고 미안해."

그녀를 지켜줄 수 없다. 자신과는 달리, 일찍 철이 들어야만 했던 칸나기. 어려서 부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운명의 희생자.

녹티스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그 무엇 하나 없었다.

친구들. 학교. 취미. 일상. 자유.

그 무엇하나.

그런데도.

"알아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날. 제국군이 테네브라에 성으로 날 노리고 쳐들어 왔을 때. 난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어. 지금 도망가면 안된다고. 루나가 저기 있다고. 루나와 함께 가야 한다고. 하지만 겁이 나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녹티스가 살짝 눈을 문질렀다.

"그 때 루나의 표정. 잊을 수가 없었어."

사실은 기뻤다. 루나가 세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때. 루나처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부상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자신을 의지했다는 사실에 우쭐했다.

이런 한심한 나라도 그녀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은 환상이었다.

그는 무력함에 몸부림쳤다.

루나에게 그런 처연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루나는 나같은 놈을 위해 스스로 제국군에게 잡혔어.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녹티스님..."

"나한테 실망했겠지. 날 싫어하게 됐을 거야. 그렇게 바닥을 파고 있을 때 움브라가 수첩을 가지고 왔어."

제국군을 피해 달아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그 수첩이었다.

'건강하세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수첩에 적힌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구원받았는지. 루나는 상상도 못할 거야."

"녹티스님..."

"그 때 내가 얼떨결에 답장한 게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보고 싶어.'

그 메시지를 봤들 때의 감정을 루나프레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녹티스 왕자님은 모르실 테지. 그 사소한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이 당신 뿐만이 아님을.

그는, 왕자님은 마치 마법 같았다.

루나프레나는 다시 그 수첩이 자신의 보물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았다.

.

녹티스와 루나프레나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조잘거렸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시간을 전부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녹티스님은 아직도 채소 안드시나요?"

"윽..."

채소라니.

녹티스의 얼굴이 녹즙을 마신 것처럼 구겨졌다. 알티시에로 오기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녹티스는 그 때 왕으로써 준엄히 말했다. '몰볼을 갈아 만든 것 같은 그 액체를, 내 한 모금도 마시지 아니할 것인 즉. 삼가 받들도록 하라, 내 충직한 신하여.'

루나는 녹티스의 한심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안돼요, 녹티스님. 이그니스님이 너무 가여워요."

가여워?

이그니스가?

녹티스의 뇌리에 이그니스의 대답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어린애처럼 채소를 들지 아니하시니, 방법이 없는 것을 아뢰오.'

울컥한 녹티스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왜 이그니스 편을 드는 거야. 이그니스가 날 얼마나 못살게 구는 줄 알아?"

"푸흡."

"루나. 웃지 말고 내 편을 들어줘야지."

"그야 물론이죠. 실은요, 전 녹티스님을 이해할 수 있어요. 늘 생각하거든요. 왜 설탕을 먹으면 살이 찌는지."

녹티스가 조금 놀랐다.

"루나도 그런 생각을 다 해?"

"네에, 물론이죠. 칸나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하니까요. 조리장님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케익 같은 것은 거의 못 먹어요. 저도 그래서 가끔 힘들 때 설탕을 먹으면 지방이 분해되고, 근력이 생기고.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답니다."

"신은 왜 맛없는 걸 몸에 좋게 만든 거야."

녹티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루나. 이 다음 연설 때 채소 먹고 싶지 않으면 굳이 안먹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어?"

"아,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꿈을 꾸게 해줘."

"아하, 아하하하하하!"

칸나기는 체통을 잃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뒤에도 끅끅 거리는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온다.

"하아하아... 배... 배 아파... 녹티스님도 참."

웃음를 겨우 멈춘 루나프레나가 올려다보자 녹티스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티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를 애써 참아냈다. 언제까지고 귀여운 사람이다.

"맞다. 프롬프토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물론이지. 걘 나만 있으면- ...그런데 루나가 어떻게 프롬프토를 알아?"

루나프레나는 자신이 프롬프토에게 왕자님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보낸 경위를 설명했다. 과연 녹티스는 눈을 주먹만하게 뜨고 있는 것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자식...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수줍음이 많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

"?"

녹티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루나프레나가 녹티스의 안색을 살폈다.

"녹티스님?"

루나가 이그니스 편을 든다. 그런가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프롬프토가 루나프레나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입이 자꾸만 삐죽거렸다. 결국 녹티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기 말야, 루나가 자꾸 다른 남자 이야길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네?"

"루나가 글라디오 이야기까지 꺼내면 나 진짜 삐칠지도 몰라. 응. 절대로 삐칠 거야."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굳이 그 말을 정면으로 받았다.

"글라디올러스님은 분명히 녹티스님의 검술 선생님이셨죠. 강한 분이라고. 장래가 기대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녹티스가 울컥 했다.

"그런 근육 고릴라 아무 것도 아니거든."

"네에?"

"내가 더 쎄거든. 요전 번에도 이겼거든."

"어머나."

"삐쳤어. 나 삐친다 그랬지. 갈거야."

녹티스가 일어섰다. 그러면서 내심 자신이 대견하다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른스러운 마무리다. 질투를 대의로 승화시켜 루나를 배려한 것이다. 밤이 깊었고, 더 이상 루나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로 아쉽다. 이대로 계속 함께 있고 싶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루나가 "이제 그만 가보시려구요?" 하고 무난하게 배웅해주는 일만 남았다. 녹티스가 그 말을 기다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 씁쓸하긴 하지만. 괜찮다.

루나프레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말을 자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녹티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느새 루나의 눈은 다시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우 그친 눈물이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쏟아질 것만 같다.

왜, 루나가?

어째서. 어째서야.

프롬프토. 글라디오. 이그니스.

너희들 어디 있어.

나 사고쳤어.

.

의연하게 보내 드려야 한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술은 루나프레나의 명령을 거절했고 눈물샘이 멋대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녹티스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루나프레나는 더욱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억지로 목소리를 자아냈다.

"벌써... 가시려구요...?"

글렀다. 하려던 말과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사려깊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곧 이 한심한 미련이야말로 자신의 진심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녹티스님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신을 깨우는 의식보다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을 줄이야.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그... 애들한테도 비밀로 나온 거라서..."

왕자님도 그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루나의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루나프레나는 생애 처음으로, 칸나기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써,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녹티스님. 친구분들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으세요?"

그 분들과는 지금껏 계속 함께 계셨잖아요.

"저와 함께 있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오늘이 지나면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저와 결혼하는 게 싫으세요?"

계속 기다렸는데.

"저는 녹티스님의 무엇인가요? 왕의 칸나기? 스쳐지나간 사람? 짜증나고 히스테릭한?"

"루나!"

녹티스가 충동적으로 루나프레나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니야!"

녹티스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나 폼잡고 있지만 미칠 것 같고! 루나와 결혼하는 거 절대 정략 결혼 같은 거 아니고! 나 계속 좋아서! 부끄러워서 내색은 못했지만 내 행운 전부 다쓴 것 같고! 그래서!"

루나프레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조금 신음소리를 냈지만 녹티스는 알아채지 못했다.

"나, 나 계속 루나와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나 그깟 수신의 가호 같은 거 필요없는데 루나를 막을 수 없고! 사명이 있으니까! 그래도 놓고 싶지 않은데! 루나와 결혼하고 싶은데!"

녹티스는 자신이 완전히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진심이다. 그것을 루나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녹티스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녹티스의 고백이 멈췄다. 왕자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뇌가 공회전을 반복했다. 더이상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부담스러운 침묵. 그 어둠을 뚫고, 루나가 입을 열었다.

"녹티스님은 왜 말과 행동이 다르세요?"

아직 조금 찌르는 듯 새침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음색이 담겨있었다.

"루나?"

루나프레나는 녹티스에게 대답하는 대신 결심을 굳혔다. 칸나기는 왕을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혼돈에 빠진 왕에게 바른 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루나프레나가 살짝 발돋움 했다. 그녀의 얼굴이 녹티스의 얼굴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녹티스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갛게 달아 올랐고, 체온이 급상승했다. 이 방 어딘가에 불꽃의 신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 이놈, 이프리트. 아덴의 개가 되어 이 나를 암살하러 왔느냐.

그러나 이래봬도 녹티스는 온갖 수라장을 거쳐온 일류 전사였다. 일촌간파가 그의 장기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달아날 필요는 없다. 그는 루나처럼 발돋움했다. 입술은 다시 녹티스와 루나의 키 차이만큼 벌어졌다.

진정한 왕께서 펼쳐낸 절묘한 방어.

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망극하게도 왕자님께옵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었도다.

루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이 늦은 밤에 제 방에 창문을 통해 찾아들어오시고선."

루나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것이야말로 다음 공격의 준비 자세. 최후의 통첩.

"아무 것도 이루지 않고, 이 방을 나가시겠다구요? 그것이 루시스 왕인가요?"

뾰족한 단어에 비해 루나의 어조는 장난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녹티스가 평정을 찾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컥."

루나는 녹티스의 한심한 반응에 설핏 미소를 지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가 공세를 이어갔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니야!"

녹티스가 소리를 지르곤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루나프레나의 고운 눈썹이 짖궂게 휘어졌다.

"그게 아니라?"

왕자가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런 거... 처음..."

"네에?"

"소설이나 뭐 그런 건 봤지만... 이럴 때 어떻게... 잘... 몰라서..."

루나프레나가 입을 딱 벌렸다.

"하, 한 번도요?"

"으..."

"어머나."

이 왕자님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이 반응은 진짜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밤에 약혼자의 방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혹 뒤에 이어질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생각해 두지 않은 채, 녹티스는 그저 루나를 만나러 온 것 뿐이다.

그저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루나프레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지르의 꽃이 만개하는 것 같은 눈웃음을 녹티스는 홀린 것 처럼 내려다 보았다.

아아.

루나다.

그 어린 시절, 자신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준 그녀다. 그녀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녹티스는 이제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루나가 한 번 더 발돋움 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한심스럽게도 아직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나의 입술이 녹티스의 입술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맙소사. 그 감촉에 녹티스는 거의 현왕의 검을 소환할 뻔 했다. 부드러움. 촉촉함. 루나의 입술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녹티스는 본능이 지시하는 대로 루나를 격렬하게 끌어 안았다. 너무 강한 자극이 녹티스의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무의식 중에 루나의 혀를 거칠게 유린하고, 그녀의 타액을 마시고, 그녀를 벽까지 밀어붙혔다. 루나프레나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이 등을 쓸어내리고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다.

몰라. 이젠 모르겠다. 그저 이대로-

"앗..."

그러나 루나의 신음 소리에 녹티스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루나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은 녹티스를 형용할 수 없는 죄악감에 빠지게 했다.

"하아하아... 녹... 녹티스님..."

"...루나. 미안해. 난..."

루나는 계속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걱정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겨우 숨을 고르고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볼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녀는 녹티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저기... 입 맞출 때... 숨은 어떻게 쉬는 거에요?"

? 그런 걸 물어도.

녹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 코로? 쉴 수 있잖아?"

루나는 입맞춤의 여운에 취해 아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에 숨을 쉴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맞네..."

녹티스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루나도 책으로 배웠구나.

나처럼.

그리고 녹티스의 표정이 괴상하게 흔들렸다. 뱃속에서,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려 하는 어떤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이다.

그 모습을 보며 루나프레나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다가 이내 체념한 것처럼 말했다.

"괜찮아요. 웃으셔도."

녹티스는 허리를 꺾어대며 폭소했다. 루나프레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녹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결국 왕을 따라 킥킥거리며 웃고 말았다.

아, 어쩌지.

이제 뭘 하면 되지.

앞 일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

녹티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평온한 날이었다.

루나프레나는 잘 놔뒀던 정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화장까지 마친 채 평소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녹티스의 잠든 얼굴을 줄곧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위대한 루시스의 차기 국왕을 더 당혹케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푹 자고 일어난 녹티스는 어느덧 시간이 정오를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선 자신의 명운이 이미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친구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을 테니까.

녹티스는 즉시 피부에 불꽃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말라붙어 있는 온갖 체액과 얼룩을 불태워 닦아냈다. 땀, 타액, 그리고- 여러가지.

저 멀리 날아가 있는 속옷을 주워 입고, 부끄러워 할 틈도 없이 구깃구깃해진 왕의 예복을 갖춰 입은 녹티스는 주저하면서도 루나프레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 답례로 그녀의 가벼운 입맞춤을 받았다.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 이 기억을 양분 삼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모두 견뎌내고 말 것이다.

녹티스는 문을 열고 루나프레나의 침실을 나섰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패착이었다. 들어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늘 생각이 짧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왕의 참모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벽에 기대어 왕을 기다리고 있던 이그니스가 서서히 벽에서 떨어져 녹티스에게 다가왔다. 그 바로 뒤에는 쓴 웃음을 짓고 있는 프롬프토. 복도 끝에는 팔짱을 낀 채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글라디오.

무표정한 참모의 얼굴을 보며 왕은 생각했다.

프롬프토. 글라디오. 이 자식들아. 보고만 있지 말고 날 구해.

하지만 둘은 왕의 필사적인 텔레파시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녹트."

이그니스의 낮은 목소리가 녹티스의 상념을 박살냈다.

위기. 경고. 이성이 피신을 제안했으나 본능이 위협에 쪼그라들어 녹티스를 단단히 구속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이그니스는 확인차 물었다. 이미 정황근거는 뚜렷하다. 다만 왕의 대답이 필요할 뿐이다.

"너 설마 칸나기 님께..."

"으익?"

"파, 파, 파, 파, 파렴치한 짓을...!"

너무도 큰 충격에 말을 더듬는 이그니스를 처음 본 것은 녹티스가 아직 열살일 때 였다. 그 때 철없는 왕자는 장난감 칼춤이 지나쳐 루시스의 건국 신화를 묘사한 명화를 훼손했었다. 그걸 수선하느라 왕자의 참모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녹티스는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일처럼?

아니, 아무리 그 정도는 아니지.

왜냐하면.

나와 루나는 어제.

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은 왕자의 나쁜 버릇이다. 녹티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루나프레나의 난처한 얼굴이 점점 발갛게 물들었다. 이를 목격한 이그니스의 얼굴에 노기가 쌓여 가는 것을 보며 녹티스는 식은 땀을 흘렸다.

이그니스가 선언했다.

"글라디올러스 아미시티아. 왕을 포박한다."

"...녹트. 미안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글라디오가 복도 끝에서 거리를 한 순간에 좁혀 녹티스를 등 뒤에서 붙잡았다. "다." 왕의 방패의 시련을 거친 그는 더욱 민첩하고 완벽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양팔까지 완전히 붙들린 녹티스는 이젠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의 뇌리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그 입 뿐이었다.

"너 임마, 왕의 방패!"

그러나 글라디오는 그야말로 완전히 작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을 대량으로 방출하지 않는 한 그를 떨쳐낼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친구들에게 영구 제명을 당하고 말 것이다.

프롬프토가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잘못 했잖아. 포기해, 녹트."

그는 녹티스를 결코 편들 수 없는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운 것 같았다. 은연중에 조금 감정이 쌓여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녹티스의 배신감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녹티스는 발악했다.

"지, 짐은 루시스의!"

"짐은 뭔 짐이야. 빼짝 말라서 무겁지도 않은게."

"조용히 해, 녹트!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제국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그깟 놈들 내가..."

"녹트!"

루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왕과 젊은 킹스 글레이브들의 꽁트를 지켜보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녹티스님을 구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오직 그녀 뿐이다.

"저, 저기..."

조금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칸나기의 음성. 킹스 글레이브 전원이 루나프레나를 돌아봤다. 글라디오에게 꽉 붙들려 있는 녹티스는 덩달아 회전. 반 강제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 보게 된 허당 왕자는 이제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루나프레나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친구분들, 언제나 녹티스님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칸나기가 고개를 숙이자 젊은 킹스 글레이브들은 어쩔 줄 모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칸나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녹티스님을 놔 주실 수 없을까요. 따지고 보면 제가..."

유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으니까.

이그니스와 글라디오가 시선만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글라디오가 나직하게 녹티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발광하지 말고. 알아들었냐."

녹티스는 소금이라도 한 덩어리 삼킨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글라디오의 강철같은 근육의 감옥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굴욕. 왕권에 대한 도전. 왕의 방패가 보여준 방자함! 내 결코 잊지 않으리. 골수에 새겨 두리라!

"녹티스님."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녹티스에게 루나프레나가 다가왔다. 글라디오에게 붙들려 있었던 상완에 칸나기의 힘을 불어넣어 근육통을 희석시키고,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녹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씩씩 거리고 있는 왕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저, 저. 한심한 꼬락서니하곤. 이그니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그니스가 고개를 숙였다.

"칸나기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시길. 알티시에 대사께는 양해의 말씀을 올려 두었습니다. 이 근처를 제국군이 침범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어서 글라디오도 사죄 말씀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우리 왕이 저기... 바보는 맞지만... 근본이 나쁜 놈은 아닙니다."

루나프레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이그니스님. 글라디올러스님. 감사합니다."

왕의 참모와 방패가 사과하는 동안 쭈뼛쭈뼛 기회를 엿보던 프롬프토가 앞으로 나섰다.

"칸나기님! 저는 프롬프토 아르젠툼인데요!"

"아, 플라이나를 지켜주셨던."

루나프레나가 그를 바로 알아보고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프롬프토님. 녹티스님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프롬프토는 감격에 젖어 펑펑 울어버릴  뻔 했다. 하지만 그는 햇병아리라 한들 어엿한 사진사. 힘들 때 일수록 포착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루나프레나님. 이것을..."

그 손에는 사진이 세 장 들려 있었다. 루나프레나님의 거처에 녹티스를 포획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사진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루나프레나가 한장 한장 확인했다.

녹티스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진이 한장.

쫙 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멋지다기 보다 부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한장.

친구들 세 명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한장.

"아..."

루나프레나의 입가에 미소. 눈가에는 눈물이 걸렸다.

"고맙습니다. 프롬프토님. 평생 간직할게요."

이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이란 말인가.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자태에 프롬프토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물러섰다.

루나프레나는 눈가를 닦고 자세를 단정히 했다.

"이그니스님. 글라디올러스님. 프롬프토님. 앞으로도 녹티스님을 잘 지켜주세요."

왕을 지킨다.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왕의 방패가 대표로 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이그니스와 프롬프토의 눈에도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왠지 녹티스가 곁에서 완전히 대화에서 소외된 상태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지만, 루나프레나는 그에게 섯불리 주의를 줄 수 없었다. 선왕 레기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녹티스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관대했으므로.

.

그렇게 녹티스 왕자와 킹스 글레이브는 알티시에 대사 관저에서 3일 동안을 신세지게 되었다. 카멜리아 대사는 펄펄 뛰었지만 결국 그들의 체제를 허락했다.

그들은 루나프레나와 함께 세계의 위기, 왕이나 칸나기의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음은 물론 특별한 일은 조금도 없는 시시한 나날을 보냈다. 이그니스의 요리를 맛보며 녹티스와 루나프레나는 연신 웃었다. 그런 둘을 프롬프토는 사진에 담있고, 글라디오는 그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짧은 시간이었고, 모두가 더없이 행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굴레의 끝에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

그리고 운명의 날, 루나프레나는 시민들의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세계의 위기. 어둠의 위협. 인지를 초월한 신의 뜻을 말씀으로 전환하는 칸나기의 연설은 대개 비유와 암시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시민들은 오늘의 연설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칸나기께서 모든 사람들이 들었으면 한다고 하셨음에도, 선뜻 와닿지 않는 말씀 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애로우신 당대 칸나기님은 신의 뜻을 곡해하는 사람들을 경계해 선문답을 자제해 왔으니까.

하지만 시민들이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했다.

그 연설에 담긴 암시. 즉 앞으로 일어날 일. 적이 가진 절망스러운 힘과 강대한 어둠의 군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되찾아야 하는 새벽의 빛. 오늘 칸나기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실은 녹티스를 향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왕을 향한 격려였으며 당부였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약속된 왕과 칸나기의 맹세였기 때문이다.

루나프레나의 의연한 눈빛을 마주하며 녹티스는 다시 의지를 굳혔다.

걱정하지마, 루나.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에게 다가올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철이 들기도 전에 이미 그 운명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의 그 올곧은 마음과 그녀가 겪었을 슬픔이 못내 안타까웠다. 미처 참아내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녹티스는 눈물을 닦아내는 대신 반려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눈물은 곧 멈췄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9. 21:39





썩 꺼져라.





내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테니.





.

첫 인상은 사마귀였다.

그리고 녹티스는 곧 놈을 고작 사마귀 따위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사마귀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습격하지도 않는다.

녹티스는 놈의 얼굴을 응시했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조악한 표현이지만, 방금 지옥에서 뛰쳐 나온 것 같은 면상이다. 고교 시절 프롬프토와 집안의 불을 전부 꺼놓고 함께 봤던, 트라우마 레벨로 끔찍했던 공포 영화보다 그로테스크하다.

녹티스는 지금 당장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야. 난 그저 곤충을 싫어할 뿐이야. 너도 그렇지? 응? 프롬프토.

젠장.

젠장젠장젠장.

이제와서 그럴 수는 없다.

내 얼굴엔 왕자의 체면이라 하는 귀찮은 것이 발라져 있다. 이것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얼굴이 썪어나가기 시작할 터이다. 쿨하고 잘생긴 마스크에 패배자의 낙인이 찍힌다.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무섭다.

면상도 흉상이지만 우선 덩치가 크다.  높이만 해도 8 미터는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크기 뿐만이라면, 놈보다 큰 몬스터도 잡아봤다. 마력을, 세계의 근간을 몸에 걸친 녹티스는 알 수 있었다. 놈의 힘은, 그 절망적일 정도의 힘은 완전히 격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기적적일 정도로.

문득 이 놈의 존재를 몰랐던 척, 알아채지 못한 척 애써 피해다녔던 과거가 떠올랐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놈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소름이 돋고, 암담하고, 볼수록 공포가 깊어질 뿐이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사마귀의 집게 발에 해당하는 앞 발이 몸통에 좌우 세 개 씩, 무려 여섯 개나 된다.  그 앞 발에 달려있는 손톱이랄까, 주먹이랄까. 애초에 저걸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방금 저 게젓갈 같은 놈이 세개의 왼팔과 함께 집게 같은 손톱을 휘두르자 제국 최신예 대량 학살형 마도 아머가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내가 맞는다면 아마 물렁뼈 하나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손톱을 발사하는 공격에 와서는 그저 소름이 돋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면 놈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걸로 내 허리는 절단나겠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 흉흉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글라디오의 하반신 보다도 훨씬 튼실해 보이는 4개의 다리이며, 몸체 뒷 편에는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훨씬 두꺼운 꼬리가 달려 있다. 녹티스는 곧 놈이 가볍게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건장한 마도병 셋이 장작개비 처럼 날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아라네아 같구나. 노력하면 전설의 용기사가 될 수도 있겠어.

자기가 생각해낸 농담에 실없이 웃으며 녹티스는 괜히 우쭐해졌다. 언제 어느 때나 여유를 찾아내는 나의 이 그릇이야말로 왕의 덕목이지. 그렇게 자평해본다. 머릿 속에 세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만, 이 정도로만 하자.

슬슬 농담할 때가 아니니까.

이제 집중하지 않으면 아딘은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고를 덜게 될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열심히 했다. 아직 그 정도 여유는 있다. 그렇게 믿으며, 녹티스는 놈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봤다. 나는 저 무도한 놈에게 마도병처럼 허리를 강제로 접히고 싶지 않으니까.

나굴파르.

사람을 먹고, 시해를 먹고,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그 힘을 흡수하는 존재. 저주스런 시해이면서도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류의 천적. 저 급하고 성질 더러운 리바이어선조차 저 녀석을 쉽게 어쩌지는 못하리라.

꼴 좋다.

내가 오늘 저 놈을 쓰러뜨릴 테니까, 잘 보고 나서 나에게 충성을 맹새하도록. 알았냐? 이 살찐 동갈치 자식아.

.

"정말 저거랑 싸우는 거야?"

프롬프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탄환을 장전하고 있다. 일반인에 불과한 그도 전투를 거듭하며 썩 괜찮은 전사로 성장했다.

녹티스는 이 끈기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프롬프토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녹티스는 누구 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녹트에게 달렸지."

이것은 이그니스다. 안경을 고쳐쓴 왕의 참모는 약점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굴파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통찰력에 녹티스 일행은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척봐도 장난 아닌데. 그래도 물러설 수야 없지."

글라디오가 꿈틀거리는 근육을 갈무리했다. 아직 녹티스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글라디오는 나굴파르가 자신의 투지를 읽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방패. 녹티스가 검을 던지는 순간 뛰어나갈 준비를 해둘 뿐이다.

등 뒤에 있는 친구들을 느낀 녹트가 목소리에서 힘을 풀었다. 들켜도 어쩔 수 없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강한 왕자니까.

그런 걸로 되어 있으니까.

"저 놈 죽이고 등뼈라도 뽑아가면 되겠지."

엔진 블레이드를 소환하며 녹티스가 사소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 할아범, 정체가 뭐야? 왜 저런 걸 알고 있어?"

"내말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냥 뼈나 챙겨다 줘보자고."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을 담았다. 그 가벼운 어조에 녹티스의 어깨도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상대다. 마력이 없다하더라도 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텐데, 친구들은 겁을 먹거나 주눅든 기색이 없어 녹티스는 마냥 든든했다. 나도 좀 더 힘을 내서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고양감이 솟아났다.

할 수 있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쉿."

녹티스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이그니스가 왼손 검지를 입가에 세우며 주의를 촉구했다.

"놈의 등 뒤로 마도 아머가 접근하고 있어. 놈이 돌아서는 순간 돌격한다."

글라디오가 크게 어깨를 돌린다.

"좋아. 한 판 떠볼까."

프롬프토는 잘 숨겨둔 두 번째 총의 장전도 마쳤다.

"언제라도 좋아."

그리고 나굴파르와 마도아머의 교전을 확인. 마도아머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기대하며, 이그니스는 품안에서 꺼낸 마법병을 쥐어 부쉈다.

"가라, 녹트!"

녹티스가 정제하고 이그니스가 재련한 마법의 힘이 엔진 블레이드에 깃들었다. 녹티스는 마력으로 충만해진 엔진 블레이드를 나굴파르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 던졌다.

-그것은 처절한 사투였다.

이 때 녹티스가 사용한 포션과 엘릭서는 실로 48개.

녹티스는 그 외에도 일반인에게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인 제국 마도병 전용 근육 강화제, 흥분제와 같은 전투 약물도 8개나 사용했다.

소중한 엔진 블레이드는 이가 다 빠져 버렸고, 왕가의 힘은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이나 빌렸다.

승부가 났을 때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이그니스. 녹트는?"

"아직 자고 있어."

"어제도 굉장했지, 녹트."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녹티스는 나굴파르를 상대하는 동안 제대로 땅에 내려 서지도 않았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놈의 반격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나굴파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을 쉴 새 없이 이어갔고, 온갖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친구들을 지켜냈다. 방패를 소환해 막아내고, 얼굴을 직접 공격해 시선을 돌리고, 검을 휘둘러 나굴파르가 발사한 손톱들을 튕겨냈다.

과연 영웅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왕자의 형제들은 나굴파르의 힘을 피부로 느끼며 전율하면서도, 왕자의 비호 아래 움츠러드는 일 없이, 최강의 적을 상대로 완벽한 성과를 일궈냈다. 프롬프토의 저격은 나굴파르의 두 눈을 모두 터뜨렸고, 이그니스는 화염으로 놈의 외골격을 무력화시켰으며, 글라디오의 검격은 무방비가 된 몸통을 거의 반절이나 잘라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녹티스 왕자가 힘을 쥐어짜 왕가의 무기를 소환, 나굴파르를 섬멸하는 모습을- 여력을 남긴 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유롭거나 통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글라디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그래."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디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그니스의 표정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서.

"녹트가 소환한 왕의 무기는 틀림없이 열 세개였어."

"그래. 나도 다시 확인했다."

녹티스는 세 친구들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왕의 무기를 수집했다. 그 수량은 분명히 열 개일 터. 프롬프토가 굳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된거야? 설마 세 개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프롬프토다운 말이다.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그니스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중 하나는 '칸나기의 역모'. 루나프레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거야. 칸나기 취임식에서 계승하셨지."

글라디오가 이그니스의 말을 받았다.

"하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이런 젠장. 믿을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글라디오를 힐끗 바라봤다.

"못 알아볼 이유가 없어. 그건 선왕...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말도 안 돼..."

프롬프토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분명히 라디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들었다. 폐하의 검은 분명히 제국이 가져갔다. 마치 전리품을 챙겨 가는 것 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 때 녹티스의 얼굴은- 프롬프토는 절대로 잊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글라디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자 초조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나쁜 버릇이다.

"녹트.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왜 우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거야."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허물을 조용히 질책했다.

"그만. 글라디오. 녹트는 인섬니아의 차기 왕이다. 우린 녹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그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마, 글라디올러스."

그 말에 프롬프토가 어깨를 움찔 거렸다. 이그니스가 가시돋친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녹트가 마력을 넣으면 평범한 음료수가 생명의 물이 되지. 녹트가 축복한 지저분한 깃털 장식에 기원하면 죽어가던 사람도 되살아나. 녹트는 매일 이런 걸 산더미처럼 만들고 있어. 우리가 써야 하니까. 매일 수십개씩 사용하니까. 무거운 무기도 평소에는 녹트가 보관해 주고 있지. 캠핑 도구도, 텐트도 전부. 그리고 우리는 녹트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해."

감정을 드러낸 이그니스는 멈추지 않았다.

"녹트가 사용하는 순간 이동. 한꺼번에 소환하는 왕의 무기. 그것들 모두 엄청난 심력을 필요로 하지. 무사수행? 영광의 상처? 글라디올러스.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녹티스가, 차기왕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그 마지막 말.

그 마지막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글라디오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굴욕적이다. 이그니스."

글라디오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근육이 조여 꿈틀거리고, 얼굴을 길게 수놓은 상처가 일그러진다. 글리디오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새어나왔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아미시티아에게 감히. 레기스 폐하께서 어떤 심정으로 인섬니아를 지키고 계셨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방벽을 치고 계신 것을! 감히,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그 참된 아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마지막에는 거의 사자후와 같은 고함으로 변해 있었다. 글라디오가 자신의 특대검과 방패를 동시에 소환했다.

"따라와. 겁이 난다고는 하지 않겠지."

이그니스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창과 단검을 꺼내들었다.

"얼마든지."

일촉즉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두 사람에게서 여유를 앗아가고 있었다. 녹티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그니스를 격동시켰고, 글라디오의 민낯을 폭로했다.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조용히. 두 사람 모두 다행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다. 상상 이상의 박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프롬프토가- 이토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처음 봤다.

프롬프토가 텐트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녹트의 귀가 잘 안들리게 된 것 말야."

프롬프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그랬으면 지금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봤을 테니까."

프롬프토가 흘린 청천벽력같은 말에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동시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집중력이 흩어져 무기를 현세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뭐?"

"지금, 뭐라고?"

당황한 두 사람에 비해 프롬프토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말한 대로야. 녹트, 귀가 점점 안들리고 있어. 어제도 왕의 힘을 엄청 사용했으니까, 아마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너희 둘은 그런 것도 몰랐나, 하는 비난의 어조가 아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그 뿐이다.

하지만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녹트는 우리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하잖아?"

"어제의 움직임도 청각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하지만 프롬프토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녹트는 언제나 우리들을 신경쓰고 있어. 왕의 힘인지 뭔지로 어떻게든 하고 있겠지. 하지만 잠을 잘 때는 달라. 반응이 다르다고. 요즘에는 정말 죽은 듯이 자. 건드리지 않으면 뒤척이지도 않아."

"..."

"..."

짐작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녹티스는 요즘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아침잠도.

두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프롬프토의 어조는 거의 타이르는 것처럼 바뀌었다.

"이그니스가 말했지. 어려운 일은 전부 녹트가 대신 해주고 있다고. 그 말이 맞다면, 녹트가 자는 동안에는 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는 것도 신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잖아?"

"...미안하다."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냐."

면목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글라디오의 표정도 침울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할 시간이야. 내가 녹트를 깨울테니까. 두 사람, 얼굴이 아직도 험악해. 좀 진정시키고 와. 그 다음부터는 평소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글라디오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그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쭈뼛쭈뼛 다가왔다.

"프롬프토. 미안하다. 너에게만..."

"응? 신경쓰지 마. 이런 건 나에게 맡겨."

어느 새 프롬프토가 예전처럼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이그니스는 겨우 눈치챘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간 프롬프토가 그대로 텐트 안으로 사라지더니, 언제나처럼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프롬프토! 하지마! 하지 말라고!" "우이! 드러!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네!" "너 임마!" "얼른 일어나 잠탱이 왕자님! 지금 몇 신줄 알아?" "아 진짜 바지 벗겨지잖아!" "오늘 초코보 보러 가자고! 어제 약속 했잖아!" "초코보 말고 거울로 니 머리털이나 보라고 이 화상아!" 화를 내며 텐트에서 기어나오는 녹트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프롬프토는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로 녹트와 어울리고 있었다.

당해낼 수가 없다.

결국 글라디오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놈은 당췌... 이길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설핏 알아채고 있었다. 저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프롬프토는 그저 녹티스와, 우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프롬프토는 강하다. 어째서인지 절로 웃음이 흘러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정말이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여유를 발견한 글라디오가 얼마전에 새로 얻은 이마의 상처를 긁적였다. 마침 이그니스도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낸 글라디오가 한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그니스. 저기, 뭐냐."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언제나 그렇듯, 글라디오보다 솔직하고 어른스러웠다.

"미안하다, 글라디오. 진실된 왕의 방패에게 내가 말이 심했다. 우리들 중 녹트가 가진 왕의 자질을 가장 믿고 있는 건 너였지."

글라디오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아버지나 불사장군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 참, 이 놈의 성질 어디가서 갈아마시던가 해야지."

"또 무사수행을 나가겠다고 하면 곤란한데."

"흐하하. 안가 안가. 저것들 두고 내가 어딜가."

녹트는 이제 프롬프토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었다. 땅바닥을 굴러 흙투성이가 된 프롬프토는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왕자의 겨드랑이 분비물을 조합하면 신경작용제를 만들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녹트는 팔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넣었지만, 글라디오가 보기에는 여전히 젓가락 같았다. 언제까지나 빈약한 녀석이다.

그 장난질을 구경하며 이그니스도 간신히 감정을 정리했다. 이 여행, 정말이지 질릴 틈이 없다.

"식사다. 글라디오. 오늘은 채소가 없는 걸로 하지."

글라디오는 참모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했다.

"찬성이다."

그리고 잠시 후 녹티스는 흔한 샐러드 한 조각 없이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특선 가루라 스테이크 두 덩어리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녹티스는 거의 사랑을 고백할 것 같은 눈으로 이그니스를 쳐다봤지만 이그니스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예상대로였다.

스테이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

그리하여, 녹티스 왕자가 계획하고 있던 몬스터 토벌 미션은 모두 종료되었다. 녹티스와 그 동료 헌터들은 이오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베히모스를 쓰러뜨렸고, 몹시 끔찍한 용종과 뱀들을 차례로 사냥했으며, 귀찮게도 하늘로 도망치는 잡것들까지 전부 깔끔하게 처리했다.

마지막에는 임섬니아의 역대 왕들이 지하에 봉인한 모든 잠재적인 위협들을 제거함은 물론, 이 모든 존재들을 전부 합한 것 만큼이나 끔찍한 나굴파르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 망국의 왕자와 그가 목숨보다 아꼈던 세 명의 킹스 글레이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의 추도식에서 밝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