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7. 20:54
시간은 약 9개월 전으로 되돌아간다.

레나 옥스턴, '트레이서'는 오버워치가 괴멸시킨 테러리스트 조직의 잔당이 한국에 숨어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자들은 몸을 숨기는 것에 누구보다도 능숙하니까.

트레이서는 쓸데없는 일을 지시한 수뇌부에 불평을 쏟아냈지만, 지금은 완전히 체념하고 관광이나 즐길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부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그녀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부산 시 전역에서, 숨어있던 테러리스트들이 일제히 무장 봉기한 것이다. 잔당들을 죄다 끌어모은 건곤일척의 승부에, 트레이서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트레이서의 이성은 테러리스트 진압같은 것은 이 나라 군대에 맡기고 지금 당장 몸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시민들이 위험 지역에서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럴 때 트레이서의 본능은 이성의 방해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트레이서는 몇 번 째인지 모를 테러리스트를 포착했다. 놈은 한 중년 남성의 머리에 머신건을 겨누고 있었다. 트레이서의 눈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트레이서가 양손에 펄스건을 꺼내 쥐고, 머리 위로 풀오토 사격한다. 여기다, 테러리스트. 이 쪽을 봐라.

테러리스트가 그 이질적인 총성을 듣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트레이서를 육안으로 확인하자 마자 놓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섬광처럼 빨랐다. 트레이서가 버스의 사이드 미러, 신호등, 간판을 차례로 밟고 도약하여 자신의 정수리 위에서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테러리스트는 조금도 반응하지 못했다.

펄스 계열 탄환은 총상 그 자체를 태워버린다. 사망한 테러리스트는 출혈은 없었고, 언뜻 보기에는 그저 정신을 놓고 쓰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공포에 떨고있던 민간인이 패닉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트레이서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민간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시간을 조종하는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있다. 사방이 온통 시체로 가득하고 총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녀가 구해낸 시민은 겨우 다섯 명에 불과했다. 민간인이 진정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다시금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곧 트레이서는 또 다른 테러리스트 2인조를 발견했다. 그 앞에 제압되어 있는 사람은 세 명.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과 그를 감싸듯 안고 있는 여성. 나머지 한 명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성. 그 중 노인은 어깨에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다. 출혈량으로 봐서 총격에 의한 관통상. 노인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이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여성은 테러리스트에게 뭔가를 호소했지만 놈들의 눈은 가학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테러리스트 중 한명은 그녀를 향해 침을 뱉고 비웃고 걷어차기까지 했다.

트레이서는 이를 갈았지만 아까처럼 무턱대고 달려들 수 없었다.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 빈틈없이 사주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섯불리 접근하다가는 잡혀있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노인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위중했던 것이다.

현장에 있는 여성 또한 구타당하면서도 노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결국 노인은 버티지 못하고 과다 출혈에 의한 쇼크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테러리스트는 무엇이 그리도 유쾌한지 폭소를 터뜨렸다.

트레이서는 눈을 치켜 떴다.

사주경계를 하고 있던 테러리스트가 동료가 벌인 소란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 보았다. 이 봐, 좀 조용히 하지 그래. 그리고 그는 곧 동료가 희롱하던 여성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동료의 허벅지에 메달려 있던 홀스터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 탄환에 미간을 꿰뚫렸다. 질척한 뇌수가 터져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에 여성에게 총을 빼앗긴 테러리스트가 반사적으로 머신건을 견착했다. 자세가 나쁘지 않은 걸로 보아 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여성은 테러리스크가 미처 격발하기도 전에 짓쳐들어 그의 턱을 권총으로 후려쳤다. 테러리스크의 턱이 직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장 테러리스트의 손목을 비틀어 머신건을 무장해제하고, 팔꿈치를 역관절로 잡아 꺾으며 억지로 쓰러뜨렸다. 이어서 테러리스트의 뒷 목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체중을 전부 실어 움직임 그 자체 봉쇄한다. 그림 같은 솜씨였다. 무심코 트레이서가 감탄할 정도로.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트레이서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트레이서는 꿈틀거리는 테러리스트의 뒤통수를 용서없이 걷어찼다. 테러리스트를 압박하고 있던 여성은 조금 놀랐지만 트레이서가 아군이라는 사실을 금새 납득한 것 같았다. 트레이서가 쓰러진 테러리스트의 입에 재갈을 물려 자해를 막고 오버워치 요원에게 지급되는 휴대용 구속구로 온몸을 옭아매는 동안, 여성은 창백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쓰러진 노인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트레이서는 노인의 상태를 점검하는 대신 품안에서 응급 구호 장비를 꺼내 발동시켰다. 하나 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럴 때 장비를 아끼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다.

오버워치 의료팀 치프 앙겔라 치글러 박사의 역작, 바이오닉 필드 제네레이터. 공부를 피망보다 싫어하는 트레이서는 바이오닉 필드의 원리 자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 자신은 몇 번이고 이 필드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언제 사용할 수 있는지 정도는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곧 노인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호흡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 기적같은 광경에 여성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아온다. 트레이서도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오버워치의 진정한 강함은 에이전트의 초월적인 힘보다 그들이 갖춘 오버 테크놀로지 장비에서 나온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이 기적을 목도한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트레이서는 곧 테러리스트와 함께 억류되어 있던 남성에게 노인의 후속 조치를 지시했다. 노인을 근처 응급실에 이송할 것. 일단 트레이서는 남자의 명함도 받아 놓았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는다. 민간인에게 조금 과한 처사인지도 모르겠지만, 트레이서는 옆에 주저앉아 있는 여성이 목숨을 걸고 구해낸 노인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성이 노인을 등에 업고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트레이서는 다시금 용감무쌍한 여성을 내려다 보았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지금 막 뱃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게워내고 있었다. 이 장소는 위험하다. 하지만 트레이서는 여성을 재촉하지 않고, 곁에 앉아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손바닥에 온통 박혀 있는 굳은 살과 미세하게 전달되는 떨림을 느끼며 트레이서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 여성은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전투원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트레이서는 팔을 둘러 여성을 살며시 품었다. 주위에 아직 테러리스트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한 번만, 필요하다면 이 여성을 위해 시간 가속기를 쓰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러기에 충분한 일을 해냈으니까.

그러나 시간 상으로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트레이서는 여성의 호흡이 가라앉고 떨림도 잦아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나 빨리 진정하다니.

용기있는, 강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용사다.

트레이서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자리를 옮기지 않을래? 여긴 사방이 터 있어서 위험해."

작은 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라면 괜찮을거야."

상업지구의 건물 옥상. 벽이 높아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트레이서가 직접 골랐다. 트레이서가 작은 용사를 껴안고 시간 가속기를 사용한 시프트 몇 번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40층에 달하는 고층 건물의 옥상에 다다른 것이다.

실로 오버워치의 트리플 S급 전투원. 그녀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탄환으로 잡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응?"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트레이서가 용사를 바라봤다.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용사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의지. 이어진 것은 날카롭게 각이 서있는 경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트레이서. 저는 대한민국 육군 기갑 부대 소속 송하나 특무상사입니다. 제 13 메카 (MEKA) 소대의 소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나, 날 알아??"

그 빠릿빠릿한 대응에 오히려 트레이서가 긴장하고 말았다. 트레이서가 횡설수설하며 그녀의 말을 겨우 받아냈다.

"응? 특무... 상사? 군인? 어? 미안하지만 나이...가? 몇 살인데?"

"올해 열 아홉살입니다."

"열......"

트레이서의 혀는 주인을 배신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에게 상관 대접을 받고 있자니 코끝이 간질간질하고 오금이 저려 견딜 수가 없었다. 트레이서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제발 편하게 대화할 수는 없겠느냐고 애원했고, 송하나 특무상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레나 옥스턴. 레나 언니면 될까요?"

레나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나도 하나라고 부를께."

하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다행이다! 저도 실은 딱딱한 건 싫거든요. 입대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 것 치고는 그녀는 이미 훌륭한 군인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전투력하며. 레나는 턱을 집고 기억을 더듬었다.

"메카 소대라면, 역시 그거지? 한국 남쪽 바다 해안선 경비 부대."

"맞아요. 혹시 그 소대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도 들었어요?"

"맞아! 내가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줄게! 한국에서 무슨 첨단 보행 병기 운용 후보로 프로 게이머를 군대로 모셨다는 바보같은 소릴 들었는... 데... 말이야..."

레나가 유쾌하게 병신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에 하나가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리며 난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컹한 해산물이라도 입에 넣은 것 같은 얼굴이다.

레나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녀의 음성이 저절로 낮아진다.

"...그 이야기 진짜였어?"

"네. 3개월 전부터는 전투에도 투입됐어요."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건 겨우 6개월 전이었는데?"

"네에, 맞아요. 그럼 이젠 더 설명할 것도 없겠네요."

"혹시, 전투를 가끔 실시간으로 방송한다는..."

"그 미친년이 나에요. 정훈장교의 제안에 따른 거지만."

레나는 한국의 정훈장교를 만난다면 반드시 바닥에 패대기를 쳐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레나는 하나의 말을 도저히 똑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아이는 불과 6개월전에는 프로 게이머였고, 입대 3개월만에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에 투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옴닉은, 전 세계에 널려있는 그런 일반적인 전쟁 상대가 아니다. 옴닉과 싸우는 행위의 끔찍함은 레나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버 워치의 강습 사령관조차 자신보다 옴닉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갓 태어난 옴닉은 어리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하고, 급격하게 학습한다.

무엇보다 옴닉은- 사람과 똑같다.

-그러나 하나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왼쪽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조작하며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고.

"내가 상대하고 있는 옴닉은 진짜 옴닉이 아니에요. 옴닉 정부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냥 옴닉이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죠."

"하나야, 그건."

"언니. 스무고개라면 다음에 언제라도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하나의 말 대로다. 지금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레나는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말을 삼켰다.

하지만 레나는 여전히 한국 정부의 무모하고 비도덕적인 처사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빌어먹을 나라는 아직 20세도 되지 않은 젊은이를 단 6개월 만에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살아있는 병기로 개조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물론.

이 나라는 전쟁 중이다. 침략 전쟁에 대응하고 시민들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이념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하나는 결국 이 나라에 소속된 병사이며, 그 병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악의 판단이 아니다. 적을 섬멸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군인은 필요없는 존재다.

레나는 하나가 아직도 미세하게 경련하는 손을 쥐었다 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레나는 그제야 자신이 정확히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레나는 하나같은 아이가 제 몫을 하는 군인인 상황 그 자체가 싫었다.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하나가 제작 방식에 따라 한 끝 차이로 지성체가 되지 못한 옴닉을 거리낌없이 사살하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도 곧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전쟁 전문가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유능했던 거야. 적당히 요령있게 피했다면, 자기같은 사람이 지금처럼 목숨을 걸고 살아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렇지? 왜 이런 처절한 삶을 살고 있어? 왜 시민으로 남아 있지 않았어?

그리고 레나는 스스로의 순진해 빠진 생각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 강습 사령관님께 늘 지적받고 있는 일이다.

오늘 하나를 만난 것이 전부인 레나에게 이 작은 용사의 삶을 평가할 수 있을 만한 근거도, 이를 재단할 권리도 있을 리가 없다.

쓸데없는 참견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레나가 그녀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옴닉의 가능성?

인명의 존엄성?

남을 해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중요함?

집어 치워, 레나. 넌 결국 이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레나는 당장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것은 테러리스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가 스마트 워치 조작에 골몰하느라 레나의 내적 갈등도 그녀의 표정도 보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이윽고 하나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군의 움직임이 너무 늦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통신 관련 기능이 죄다 먹통이에요."

레나는 하나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리고 조금 발돋움해서 옥상 벽 너머의 거리를 살펴보았다. 아직도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다. 어느 새 총성은 잦아 들었지만, 그것 뿐이다. 모든 상황이 애매하고 수수께끼 투성이다.

하나는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놈들은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방해 전파를 뿌리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군이 상정하지 못한 사태에 대응이 늦는 건 늘 있는 일이지요. 오버워치에게 보이긴 부끄럽지만."

하나가 결연한 눈으로 트레이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작전을 입안하겠습니다. 트레이서."

딱딱한 말투. 어느새 하나는 다시 특무상사가 되어 있었다.

그 늠름한 용태에 강제로 트레이서가 된 레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메카 소대 소대장 D.Va의 작전 설명에 귀를 귀울였다.

.

트레이서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EMP 충격파의 근원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 충격파의 세기가 워낙 강했던 탓에 장소를 특정짓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D.Va와 트레이서는 건물의 옥상을 건너다니며 통신기의 노이즈가 심해지는 방향을 찾아냈다.

트레이서의 목표는 EMP 충격파 발생기를 파괴하는 것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한국군은 전략 위성과 송하나 특무상사의 보고 내용을 근거로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곧 테러리스트의 섬멸 작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은 100년 이상의 내전을 겪은 나라다. 매뉴얼 대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만 만들어지고 나면, 이 정도 테러리스트들은 금새 쓸어버릴 것이다. 객관적으로 한국의 군대는 결코 약하지 않다.

곧 트레이서는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이질적인 형태의 트레일러. 일부러 켜둔 통신기의 노이즈도 점점 더 심해진다. 틀림없다. 저 트레일러가 트레이서의 목표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간 트레이서는 지체없이 펄스 그레네이드를 투척했다. 몇 초간의 시간차를 두고 대폭발. 통신기에서 노이즈가 사라진 것을 확인. 더이상의 EMP 충격파는 관측되지 않는다.

"너무 쉬운데."

너무 쉽다.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면 트레이서는 그 즉시 시간 가속기를 사용해 이탈했어야 했다. 하나도 그렇게 조언했던 것도 같다.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역시 난 해결사야."

하지만 트레이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느긋했다. 그리고 그 잠깐 동안의 틈이 치명적이었다.

트레일러가 폭파되는 동시에 거리에 이변.

바리케이트, 일렉트로닉 네트, 그리고 이를 모두 아우르는 에너지 필드가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 트레이서가 서 있는 장소 기준으로, 반경 약 500 미터의 구획이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어서 온 사방에서 들리는 철컥거리는 기분나쁜 금속제 마찰음. 다음 순간 트레이서에게 집중되는 레이저 조준선. 그 수량, 실로 서른 여섯 포인트.

그리고 중무장한 서른 여섯 명의 테러리스트를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착각하게 만드는, 지금 당장에라도 트레이서의 급소를 꿰뚫을 것 같은 살기.

저격수다.

그것도 특등급.

심호흡을 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상대는 초일류. 틈을 보인 그 순간 저격당할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트레이서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저격수의 흉탄이 트레이서의 목을 관통. 울컥, 하고 피를 토하며, 트레이서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진다.

그 와중에 트레이서가 멍하게 생각했다.

저격수의 위치, 10시 방향. 거리 487미터. 사용 무기는 화살. 활로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밖에 없다. 시마다 가문의 필두. 시마다 한조.

필요한 정보는 전부 알았다.

좋아, 시마다 선생. 이제 곧 해결사님께서 네가 네 자신의 이름으로 혀를 차게 만들어 줄거야.

그리고 트레이서가 시간 가속기의 구속을 풀었다.

.

트레이서가 시간의 권능을 되찾는다. 그녀에 의해 되돌려진 시간이, 뿜어져 나오는 피를 함께 되돌린다. 이어서 목에 뚫려 있는 바람 구멍을 막고, 화살을 자신에게 도달하기 100미터 전까지 돌려 보낸다. 저 시마다 가문의 치명적인 화살은 이제 뻔한 텔레폰 펀치로 탈바꿈되었다. 트레이서는 상체를 조금 트는 것만으로 화살을 피해냈다.

그녀는 화살을 피하고 그 즉시 저격수 방향에서 직각 방향으로 도약했다. 제아무리 시마다 한조라 한들 위치를 노출당한 상태에서 그녀를 저격하는 것은 어렵다. 그의 화살이 침묵하는 동안 트레이서의 발 밑으로 비가 오는 것 같은 탄환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단 한 발의 유효 사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트레이서는 공중 제비를 돌며 사방으로 양손의 펄스건을 한 껏 흩뿌려 건재함을 과시하고는 눈 앞의 승용차에 숨어들어 엄폐물로 삼는 동시에 다음 이동 위치를 서치했다. 그녀는 약간의 인터벌도 없이 펄스건으로 좌 전방 빌딩의 2층 창문에 구멍을 내고, 벽을 타고 올라 거의 6미터나 수직 이동했다. 균열이 나있는 창문은 쉽게 깨졌고 트레이서는 무리없이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창졸간에 이어진 테러리스트의 총격은 그녀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고, 테러리스트들은 그녀의 위치를 완전히 놓쳤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 짧은 순간 테러리스트가 세 명이나 당했다는 것이 파악되었을 때에는 과연 목숨을 내놓고 다니던 무법자들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던 탄환이 정확하게 테러리스트들의 머리를 꿰뚫었던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임시 헤드 쿼터에 앉아 이를 보고받은 리더, 보나파르트 나폴리는 헤드셋을 벗어 땅바닥에 내팽겨쳤다.

이것이 오버워치.

이것이 트리플 S급 전투원의 저력.

하지만 적을 칭찬할 여유 따위는 없다. 테러리스트들은 필사적이었다. 이 머나먼 극동에 함정을 꾸며 겨우 트레이서를 붙잡아 넣었다. 여기서 트레이서를 사살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희생된 동료들의 목숨이 돼지 먹이만도 못하게 전락할 것이다.

처음부터 이 구역에 있던 시민들을 내쫓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놈들을 인질로 잡았다라면 제 아무리 트레이서라 한 들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을 터. 그리고 이를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탈론이 그들을 받아 주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 작전을, 저 시마다 가문의 두령이 눈감아 주기만 했었더라면 반드시 그렇게 했었을 것이다.

"민간인과 트레이서를 격리한다. 시마다 가문은 그 이후 참전한다."

한조의 말에 보나파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암살하는 살인자 놈이 이제와서. 한 명을 다구리쳐서 살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니냐고. 이에 대한 한조의 대답을, 당시의 보나파르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오버워치의 정예를 상대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레이서를 상대하기 위해 시마다 일족의 힘이 필요하다는 부관의 조언에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보나파르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곧장 헤드 쿼터의 컴퓨터로 트레이서가 숨어든 건물의 감시 카메라를 해킹. 트레이서가 아직 건물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 시마다 가문의 합류를 기다리라는 한조의 통신을 무시하고, 보나파르트는 12명의 정예를 건물에 투입했다. 근력이 강한 병사를 골라 방탄 장비를 두 배로 덧씌워 뒀다. 트레이서의 펄스건은 생각만큼 치명적이지 않다. 그리고 저 좁은 곳에서 트레이서의 그 잘난 기동력은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트레이서가 그들을 전부 처리하는 것에는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자그마한 몸을 미끄러뜨리듯 움직여 엄폐하고,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으로 피탄 면적을 줄이며, 방탄복이 지키지 못하는 눈을 쏘고, 방탄복의 심장 부위를 일점사하여 꿰뚫고, 펄스건을 뚫고 접근한 테러리스트의 목을 걷어차 부러뜨렸다.

이어서 트레이서는 잔뜩 독이 오른 테러리스트들을 도발. 비상계단으로 유인해 펄스 그레네이드로 세 명을 동시에 폭사시키고, 벽을 타고 달려 무너져버린 계단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테러리스트 사이로 침입, 그 중 한 명의 관절을 잡아 계단 아래로 던져 버린다. 공포에 절어 주춤주춤 물러나는 나머지 한명의 턱에 탄환을 꽂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계단 쪽으로 진입하지 않은 네 명이 전의를 잃지 않은 것은 차라리 기적에 가까웠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쓰러지며, 결국 트레이서를 막다른 방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그들은 트레이서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보나파르트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창백해 졌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통해 이제야 겨우 시마다 한조가 현장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서 이를 갈았다. 그러나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한조의 말에는 허를 찔릴 수 밖에 없었다.

[잘했다.]

"뭐가 어째? 우리쪽 15명이 당했다고!"

[그리고 트레이서를 몰아 넣었지. 네 놈은 트레이서가 지금 껏 몇 명을 죽여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보나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화면 속 한조의 등 뒤에는 어느새 시마다의 에이젼트들이 도착해 있었다. 등에 거대한 활을 메고 있는 흑장속 차림의 닌자가 세 명. 으스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보나파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한조에게 경고했다.

"알고 있겠지? 앞으로 5분 후엔 필드 바깥 발목잡이 부대들도 모두 후퇴시킬 거야. 그 때 이 곳에 군대가 도착한다는 거다. 놈들에게 에너지 필드는 종잇장이나 마찬가지야. 끝장이란 말이다."

한조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뭐, 보고 있으라고.]

.

그대로 창문을 뚫고 도주하려한 트레이서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바깥에 누군가 있다. 그들은 굳이 존재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두 명. 들고 있는 것은 거대한 활. 저 존재감은 틀림없이 시마다 일족. 어중이 떠중이 병사들과는 격이 다른 정예 중의 정예.

뛰쳐 나갔다가는 반드시 저격 당한다. 시간 가속기는 무한정 쓸 수 없고, 아직 적은 상당수 남아있다. 하지만 적은 트레이서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문이 폭발했다.

트레이서의 민감한 청각이 적의 음성을 캐치했다.

"갈래살. 호령이 있을 때까지 연속 발사."

파괴된 문으로 화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트레이서가 갈래살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까지는 10분의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놈들은 한 번에 세 개의 화살을 발사했으며, 이 화살들은 벽에 무작위로 몇 번이나 부딛혀 튕기면서도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순식간에 트레이서가 숨어있던 방은 수십 가닥의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죽음의 공간이 되었다. 한조의 구령은 없었고, 반탄력을 잃어버리는 화살보다 보충되는 화살이 훨씬 많았다.

중과부적이다.

결국 트레이서는 시간 가속기를 최대한 활용해 화살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목숨을 걸고 창 밖으로 뛰어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트레이서에게는 후회에 사용할 찰나의 시간조차 없었다.

트레이서가 타임 패러독스 속에서 열 다섯 번 째 죽었을 때 시간 가속기가 점멸. 이 다음은 없다. 이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프트 두 세번 정도 뿐일까. 트레이서가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죽어있던 헤드셋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 창문에서 떨어져!]

"....!!"

레나는 지체없이 시프트를 사용했다. 창 밖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대폭발. 외벽에 통째로 구멍이 뚫리고, 폭풍의 기세가 갈래살을 휩쓸었다. 이제 거의 100개에 달하던 갈래살들이 나무젓가락처럼 날아갔다.

천재일우의 기회.

트레이서는 전력을 다해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앞으로 당분간은 시프트조차 쓸 수 없다. 어떻게든 저격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분명히 건너편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마다 일족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트레이서는 건너편 건물의 피해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폭발 때문일 것이다. 시마다 일족들은 폭발에 휘말렸을테고. 분명히 송하나 특무상사가 폭발 위치를 절묘하게 조절했으리라.

"언니!"

이제 육성으로도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레이서의 표정에 웃음이 돌아왔다. 정말로, 와주었다. 약속했던 대로. 트레이서가 거의 포기하기 직전에.

"하나야."

그 곳에 있는 것은 전고 3.5 미터의 핑크색 이족 보행형 모빌 아머. 대옴닉 특수 방어 결전 병기.

통칭 메카 MEKA.

하나가 메카를 운용해 레나를 감싸 듯 안아들고 곧바로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 어느새 트레이서를 따라나온 한조와 추종자들이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네 개의 화살.

하지만 그것이 메카나 트레이서에게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디펜스 매트릭스. 메카의 대공 방어 시스템이 화살을 모조리 쏘아 떨어뜨린 것이다. 한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도 안돼.'

시마다 한조는 이 기체를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방어 능력은 스펙상 있을 수 없다. 메카의 디펜스 매트릭스는 완벽하지 않으니까. 이 시스템은 조종자의 동공에 반응하여 그 앞에 성근 대공 탄막을 형성할 뿐이다.

그리고 한조는 결론을 내렸다.

저 조종자의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투박한 화력 관제 시스템으로 시마다의 정수를 격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정면에서의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으리라.

한조는 웃었다.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하나는 대답하지 않고 사격에 들어갔다. 넓게 흩어지는 융합포가 시마다 일족 한 명의 왼쪽 정강이를 뭉게버렸다. 기동력을 잃어버린 닌자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조의 웃음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달려요, 언니!"

잠깐 숨을 돌린 트레이서는 하나의 호령에 맞춰 곧바로 등을 돌리고 내달렸다. 하나는 시선을 한조에게 향한 자세 그대로 메카를 전속력으로 후진시킨다. 하나는 한조와 그의 권속이 날려보내는 화살을 차례로 막아내며, 등 뒤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레나를 따라 그대로 질주했다. 한조는 인정했다. 저건 따라가지 못한다. 이 곳은 저 병사의 앞마당이다. 아마 눈을 감고도 이동할 수 있겠지.

트레이서가 달리며 하나에게 물었다.

"자기, 여긴 어떻게 왔어? 에너지 필드는?"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행 방향에 테러리스트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테러리스트와 한조의 협공을 받는 꼴이 되었다. 트레이서가 약간 낭패한 신음을 흘렸다. 하나는 지금 한조의 움직임에서 눈을 땔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여전히 침착했다.

"언니, 메카에 올라타세요."

트레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메카의 머리에 올라탔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메카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동안, 트레이서는 공간 이동으로 전장에 출연한 2기의 잿빛 메카를 목격했다. 두 기체는 집중 포화를 받으면서도 테러리스트에게 돌격. 이어서 대폭발을 일으킨다. 테러리스트들은 전원 조약돌 처럼 날아갔다.

"특무상사는 총 7기의 메카를 전략 운용할 수 있어요. 지금 타고 있는 게 제 전용기. 에너지 필드를 뚫고 들어오는데 3기를 썼고. 언니를 구하는데 1기. 방금 2기가 마지막이에요."

메카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착지했다. 땅에 내려오면서 트레이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 아이는 이 무시무시한 권한과 함께, 겨우 19살에 이미- 오버워치 특급 요원 레벨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트레이서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느낌 상 이 구획의 테러리스트는 대강 정리했고, 시마다 일족도 셋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로 무서운 것은 한조 뿐이다. 이길 수 있다. 하나와 함께라면.

트레이서는 지극히 냉정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계산했다.

하나가 피를 토하기 전까지는.

"쿨럭"

"하나야?!"

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입가에 길게 이어진 피가 턱을 따라 흘러내려 가슴을 적신다.

"하하... 사실 여기 들어올 때 교전이 조금 있었어요. 그 때 옆구리에 한 방 먹었는데. 제가 이야기 안했던가요?"

트레이서는 하나의 무모한 행동에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왜, 그럼 왜 온거야! 바로 돌아갔어야지! 군대에게 맡겼어야지!"

하나는 잔기침을 하며 눈 앞을 노려보았다.

"레나 언니. 내 뒤를 바짝 따라와요. 화살은 제가 전부 막아낼 테니까, 틈을 봐서 공격해요."

"하나야!!"

한조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두 명의 일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입가에는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미소.

그리고 하나의 기체 또한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나야, 제발!!!"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한조와의 마지막 대면 이후 레나는 메카에서 축 늘어진 하나를 꺼내 안고 인생 최고의 속도로 병원까지 질주했다. 하나의 출혈은 계속 되었고, 레나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허파가, 심장이, 온 혈관이 산소를 갈구했다. 부족하다. 하지만 레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때 한조는 한 마디만을 남겼다.

"다음에는 내 화살을 막지 못할 것이다."

하나가 침침해진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는 이미 한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군대에 포착될지도 모른다던지, 하나가 만전의 상태일 때 싸우고 싶었던 것인지.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에게는 한조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다 아무 말도 돌려주지 못한 분함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그... 씨발 새... 아... 짜증나..."

"하나야, 이제 됐어! 말하지마! 힘을 아껴!"

"안돼... 나... 레나 언니랑... 스무고개 해야돼... 나... 할 말...이... 옴...닉..."

"알았어! 내가 스무고개든 이백고개든 해줄게!"

"여러분... 나... 아파요..."

"하나야!"

"언니... 저 앞에... 의료 센... 제... 지..."

"알았어! 알았어알았어알았어!"

저 앞에 의료 센터 말이지!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저길 가서, 의사를 붙잡고! 총으로 위협해서라도!

레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 하나님, 제발.

재발 하나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다음 순간 레나가 의료 센터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머뭇거리는 놈이 있으면 내가 총으로 쏴버릴-

"이 새끼들아! 특무상사님 오셨다!"

셈이었으나, 사자후를 터뜨린 의료 센터 치프 닥터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레나는 라인하르트처럼 돌진해 온 치프 닥터에게 황망하게 하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마치 지금까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뭐야 이 사람, 예지능력자라도 되는 거야?

그리고 하나는 그 뒤로 우르르 몰려온 의료진에게 물샐틈 없이 포위 당했다.

"특무상사님! 조금만 참아요!"

"의료 침대 수용 완료!"

"아씨 걸리적 거리잖아요! 저리 좀 가라고!"

그리고 레나는 치프 닥터에게 밀쳐져 흐물흐물 쓰러졌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지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함소리와 서슬퍼런 압박에 레나는 방금 시마다 일족에게 궁지에 몰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혈관 잡았다! 피 어딨어 빨리 내놔 이 새끼야!"

"혈압 103/40! 계속 떨어집니다!"

"아이고 특무상사님!"

"너 이 새끼 지랄하지 말고 수혈팩 눌러! 짜 넣으라고! V-Tec 오면 너부터 죽을 줄 알아!"

"거기 너! 피! 피 더 갖고와!!!"

"네!!!!!"

"특무상사님!"

"정신, 정신 차리세요!"

"특무상사님!"

"!!!!! 혈압, 상승합니다!!!!!!"

"조오오아아아! 지혈! 어떻게 됐어!"

"30초만 주십시오!"

"너 이 씨발 새끼야 인사고과!"

"아, 아아아아아 잡았, 잡았습니다!"

"으랏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기까지 듣고 레나는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허물어졌다. 아무튼 그녀 역시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녀의 눈에 바닥에 써있는 의료 센터의 이름이 들어왔다

하나사랑 의료원.

......

...맞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는 거지?

우와, 진짜, 이거 장난 아니네.

그리고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입에 걸려 있는 것은 하나가 이제 안전해졌다는 기쁨에 대한 미소가 절반.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비뚤어진 경련이 절반.

레나는 그 후 장장 여덟시간 동안 응급실 바닥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골아 떨어졌다. 시간 가속기가 기동 가능 상태로 돌아오면서 그 여파로 그녀의 몸이 잠깐 흐려지는 대사건도 있었으나, 놀랍게도, 아무도 그녀의 이상 상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후 레나는 찬바닥에 너무 오랫동안 얼굴을 대고 있어서 일어날 때 입이 비뚤어지는 줄 알았다고 술회했다.

정신을 차린 송하나 특무상사가 의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의사들은 하나의 추상같은 비난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써, 하나의 전의를 상실시킴과 동시에 레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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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26. 22:07
지금도 레나는 자신이 이룩해낸 업적을 믿을 수 없었다. 정부를 은근히 압박해서, 송하나 하사의 외박을 얻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레나는 동료들 사이에서 해결사로 통하며, 그 별명처럼 그녀는 남의 부탁은 흔쾌히 받아 해결해 주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누군가를 강제하거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에는 매우 서툴렀다. 그래서 레나에게는 한국 정부에게서 직접 얻어낸 하나의 외박 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쾌거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무리하게 정부를 압박한 것은 옴닉 섬멸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에게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매일같이 녹초가 될 정도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하나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탓도 컸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녀는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언젠가 반드시 경을 칠 날이 올 거라고, 강습 사령관은 늘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그녀가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몸에서 시간 가속기를 떼어놓고서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된 그녀가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철칙이다.

그렇게 하나와 만날 약속을 잡아둔 날이 오늘이다. 그리고 레나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해둔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11시에 하나와 이곳에서 만나서 부산의 명물 크림치즈 츄러스 딜럭스페셜을 먹기로 했다. 레나가 병사들에게 직접 수소문해서 알아낸 것인데, 이 츄러스는 레나가 부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5분 후면 하나가 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날 것이다. 레나는 하나를 밖에서 만날 생각에 완전히 흥분해서, 계속 그 모퉁이를 응시한지 이제 거의 30분이나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를 기다리면서, 레나는 문득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나는 외박 허가가 떨어지더라도 부대 밖으로 나서는 것 보다, 숙소에 틀어박혀 신작 게임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레나 그 자신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녀와 직접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는 열심히 스스로를 설득하고, 억지를 부려 하나를 숙소 밖으로 끌어내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른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하나와 약속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상태를 앙겔라에게 들키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앙겔라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그녀가 머리에 걸치고 있는 특유의 고글 이외에, 지금 입고 있는 속이 살짝 비치는 니트와 상아색 가디건, 숏 팬츠와 샌들, 파랗게 칠한 네일은 모두 앙겔라가 골라준 것이다. 앙겔라가 하나의 나이 대에 맞춰 조언한 복장이긴 하지만 레나에게는 매우 잘 어울렸다. 이제 그녀는 오버워치의 정예라기 보다는 하나의 평범한 동급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레나의 상념은 11시 정각 알람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았던 하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1시 5분.

10분.

레나가 갈증으로 속이 타들어가고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는 모퉁이로 돌아 들어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레나는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향해 외쳤다.

"하나야!"

레나가 붕붕 손을 흔들자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내가 그렇게 반가운가? 레나가 다음 말을 자아내기도 전에 하나의 오른손이 거의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급?!"

"언니. 제 이름 너무 크게 부르면 안돼요.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요."

"으급 으급"

"좋아요."

하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그녀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티셔츠에 야구팀 이름이 재봉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스키니진, 발에는 길거리에서 산 것 같은 심플한 스니커. 그냥 요 앞에 잠깐 도리토스나 마운틴듀라도 사러 나온 것 같은 복장이었지만, 레나는 하나가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나의 시선이 하나의 얼굴로 옮겨졌다. 머리카락은 동글게 말아 뒷 머리 쪽에 고정시키고, 목에는 언제나 잊지 않는 토끼귀 헤드셋. 영내에서 얼굴에 그려두고 다니는 특유의 페인팅은 깨끗하게 지워뒀고, 약간 어두운 색이 들어가 있는 썬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그제서야 레나가 겨우 알아챘다.

"아, 맞어. 자기 유명인이었지. 후훙"

"왜 언니가 뿌듯해 해요? 게다가 언니가 훨씬 유명인이거든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하나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카운터에 앉아있던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눈매에는 자글자글한 주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는 중년의 여성은 이 가게의 점주님인 같았다. 아까부터 하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걸 보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에는 접시.

그 위로 음식을 한 아름 쌓여 있다.

레나가 약간 당황했지만 "아, 아직 시키지 않았는데..." 점주님은 척척 산더미 같은 음식을 내려 놓았다. 4인용 테이블의 낙낙한 넓이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실버 메달 논스파클링 애플 쥬스 두 병.

초컬릿 쿠키.

치즈 케익.

슈크림 빵.

머핀.

햄치즈 베이글.

그리고, 따끈따끈한 치즈크림 츄러스 딜럭스페셜 6개.

레나의 입을 쩍 벌렸다.

"헛."

심지어 츄러스의 길이는 거의 5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적이 너무 많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디바와 트레이서로는 역부족. 단 것을 많이 먹지 못하는 앙겔라 박사님도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국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래. 라인하르트나 윈스턴. 최소한 솔져 세븐티 식스의 위장이 필요하다.

레나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점주님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나의 머리에 손을 뻗었지만, 이내 움찔 하고 멈췄다. 아마도 함께 앉아 있는 손님을 의식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점주님의 손을 자신의 머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머리 모양이 온통 헝클어지도록 문질렀다. 점주님의 얼굴에 홍조. 표정은 애저녁에 무너졌고, 칠칠치 못한 팔불출 같은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으므로, 레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마워요 이모."

하나의 살가운 대응에 점주님이 진심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점주님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달라며 카운터로 되돌아 갔다. 무서운 아이. 육식 토끼. 이미 점주님도 손에 넣은 지 오래구나.

레나가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행동에 돌입했다.

"언니, 식기 전에 먹어요."

하나가 직접 츄러스를 냅킨에 감싸 레나의 손에 쥐어준다. 레나가 츄러스를 조심조심 받았다. 냅킨은 이미 기름으로 번들번들해진 상태였다. 이런 기름 투성이 밀가루 덩어리를 세 개나 해치워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 츄러스에 온통 새까맣게 묻어 있는 이 결정체들은 흑설탕이며, 원통형으로 비어있는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하얀 것은 뜨끈뜨끈하게 덥힌 크림치즈였다. 그리고 레나는 이 음식의 이름이 매우 명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에게 차마 츄러스의 열량을 물어볼 수 없다. 레나에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잠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하나는 이미 츄러스 하나를 해치우고 다음 희생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레나는 무심코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신경 뉴런의 작용에 따른,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초 연산이 레나의 두뇌를 자극했다. 결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뇌는 거부했다. 이것은 불량식품이며, 이것을 섭취하면 앞으로 한 달간 샐러리만 먹어야 한다. 그러자 본능이 답했다. 건강해 지려면 식이요법은 집어치우고 유산소 운동을 해라. 그리고 레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고, 본능이 개가를 올렸다. 입술이, 코와 허파꽈리가, 혀의 돌기가, 식도가, 위장과 대장의 융털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확보하라.'

'남은 츄러스를 확보하라.'

곧 하나와 레나는 경쟁적으로 츄러스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하나는 토끼가 풀을 갉아먹 듯 빠르게 입을 움직였고 레나는 성큼성큼 베어 물어 거의 씹지도 않고 삼켰다. 용호상박. 무적의 용과 최강의 호랑이가 자웅을 겨루니 츄러스가 남아날 리 없었다. 츄러스가 전부 없어지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레나는 츄러스 하나의 열량이 천 이백 킬로 칼로리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곧 그녀는 시간 가속기의 도움없이 기지까지 뛰어가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레나는 하나가 초컬릿 쿠키를 위시한 잔당들을 소탕하는 동안 츄러스 하나를 더 시켜 먹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

"후아. 잘 먹었다."

하나가 배를 쓰다듬었다. 다른 한 팔로는 레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레나도 하나에게 붙들려 있지 않은 팔로 아랫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너무 먹었다. 후회된다. 하지만 후회도 하지 않는 인생이 재미있을 리 없다. 너무 거창한 곳까지 확대된 생각이 너무 어이없어서 레나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다음은 어디 갈까요?"

하나의 물음에 레나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나는 이미 오늘의 모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자타공인. 그녀는 해결사였다.

그리고 레나가 안내해 도착한 곳에서 하나는 거의 괴성을 내지를 뻔 했다.

'우와! 우와우와우와!'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머리통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날려보낸다는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이 자신을 게임센터에 대려다 줬다는 사실을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그냥 게임 센터가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감정이 폭발했다.

"언니가 여길 어떻게 알았어요?! 언닌 영국인이고! 게이머도 아니잖아요!?"

레나가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이래뵈도 촉이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자기가 좋아할 만한 게임 센터라면 아무리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겠더라고."

하나는 레나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헐 감동이야 언니 사랑해요!"

레나가 고르고 고른 장소는 부산 게이머들의 은밀한 장소였다.

통칭 성지.

굳이 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지만, 게임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면 감히 발을 딛지도 못한다는 특별한 게임 센터. 하나더러 굳이 자신의 숙소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이곳일 것이다. 그녀는 게이머의 정열과 투쟁심이 휘몰아치는 이곳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게임 센터안에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피끓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거의 귀기까지 느껴지는 광경에 레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하나도 게임 센터에 들어선 이후로는 안색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두리번 거리는 레나를 뒤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걸어 증강 현실 콘솔 앞에 섰다.

MEKAGE.

한국 굴지의 게임사에서 MEKA 부대를 소재로 제작한, 최대 6 대 6까지 가능한 다인수 대전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 매니악한 현실 재현도 덕분에 발매 초기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나, 이후 굴지의 프로게이머인 송하나의 편애와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재조명되었고, 지금은 그 자유로운 완성도가 차고 넘칠 정도로 재평가받았다.

곧 전설적인 프로게이머인 하나를 알아본 몇몇 게이머들이 흠칫 놀랐지만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가까이 오거나 아는 채 하기는 커녕 인사를 건내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하나의 인기를 잘 알고 있는 레나는 이 분위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가 일단 콘솔 하나를 골라 자리에 앉자 나머지 11개의 빈 자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꽉 채워졌다. 마치 그들은 행동을 통해 하나의 인기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묵묵히 증거하는 수도승 같았다.

게임 매니아들이 숫기가 없다는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너무 데면데면하다. 그에 반해 그들의 하나에 대한 시선은 꽤나 노골적이다. 아까부터 이곳의 게이머들은 사욕으로 질척이는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나는 곧 그것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과장된 감이 있지만, 레나는 이런 눈을 잘 알았다.

전장에서 늘 보는 눈이다.

살기.

기백.

투쟁심.

호승심.

이를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레나의 소박한 의문과 질려버린 것 같은 기색을 감지한 하나가 소곤소곤 설명했다.

"여기선 절 이기지 못하면 저에게 말을 걸지 못해요. 제가 그렇게 정했어요."

그러나 레나의 의문은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나의 의아한 표정을 읽어낸 하나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성지는 제가 키운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제 말이 곧 법이란 말씀."

"뭐야아?"

"제가 인기가 좀 많아요."

인기가 많다.

과연 그 말은 납득할 수 있다.

게이머 입장에서 하나는 동경의 대상이다. 희귀한 여성 게이머인데다가 게임 실력은 초일류. 온갖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실력으로 시끄러운 게이머들을 닥치게 만들고, 여세를 몰아 그런 룰을 만들었으리라. 나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대충 그런 일이라도 있었겠지.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수 많은 전장에 섰으면서도, 이제껏 무패.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상대팀을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유린하고 있었다. 너무도 리얼한 게임성. 그리고 하나는 실존하는 MEKA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은 필요없었다. 하나는 침묵을 지킨 채 팀원들이 두서없이 내뱉는 말을 독자적으로 분석하여, 팀원들을 효과적으로 보조함과 동시에 적을 섬멸하고 있었다. 함께 전장에 서있는 게이머들의 면면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실력에 대한 경이와 존경. 하나는 매일 4시간 이상 군용 MEKA를 운용해 실전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레벨이 틀려도 너무 틀렸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뒤에서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레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나도 조금 즐길 수 있는 편이 좋겠지.

레나는 하나의 상대편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 중 한명에게 다가가 무언의 압력. 기세에 눌린 게이머가 시뮬레이터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레나가 고글을 내려 쓰고 콘솔에 게임 코인을 넣는다.

의외의 전개에 반대편에서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이 게임 꽤 어려운데 괜찮겠어요?"

하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미묘.

우려.

흥분.

기대.

아무래도 좋았다. 레나는 대답하는 대신 팀원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토끼는 내가 잡아둘게. 그럼 이길 수 있겠어?"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레나에게 시선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레나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 게이머가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뻐끔이고 있는데, 레나의 정체를 결정짓는 아이템이 레나의 가방에서 출격, 팔을 타고 이동. 이윽고 흉부에 도달해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장착되고 있었다.

파란 플라즈마를 내뿜는 그것은 트레이서의 상징- 시간 가속기였다.

하나를 포함한 갤러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곧 비명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트트트트트레이서?"

"진짜야? 오버워치가 성지에 왔어?"

그러나 아무도 스마트폰을 꺼내거나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레나는 그들의 인내심에 조금 놀랐다. 이것도 하나가 만든 성지의 룰인 걸까.

"할 수 있어! 저 토끼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고!"

트레이서와 함께하는 팀원들의 사기가 성층권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오늘 꼭 하나를 꺾어야만 했다.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울분과 희망을 토해낼 때가 왔다.

"난 인사할 거야!"

"나도!"

"난 싸인 받을 거야!"

"악수! 악수를 요구한다!"

"풍선껌을 가보로 삼겠어!"

그것 참 소박해 돌아가시겠네! 레나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스틱을 잡았다.

게임 시작 30초 전.

레나가 조용히 선언했다.

"해결사가 왔어."

.

"푸풉"

하나는 완전히 그로기 상태가 된 일행을 부축해서 성지로부터 3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겨우 앉힌 참이었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방금 실패했다.

"꺄하하하하하하!!!!!!"

"이제 그만 웃어 자기야..."

다섯 번이나 계속된 대전 중 트레이서는 손도 발도 내밀지 못했다. 싸움꾼 토끼를 잡아두긴 커녕 그녀가 지휘하는 다섯 명의 팀원 중 누구 한 명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들은 위대하신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을 거리낌없이 유린했고, 한 번씩 돌아가며 죽였다. 무서운 놈들이다.

그 무서운 놈들의 필두에 서있는 무서운 토끼가 겨우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언니.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거예요? 조작법 좀 외워온 걸로 진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나가 두서없이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의 초점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으으으... 오버워치 중에서도 난 적응력과 동체 시력이... 반응... 속도가..."

"시간 가속기 이야긴 안해요?"

"컥..."

하나가 짖궂게 웃으며 레나의 말을 끊고 추가타를 날렸다. 나 이거 알아. 레나가 몽롱한 머리로 기억해냈다.

지난 번 게임 방송에서 봤어.

"비전투 상황 중 민간인 앞에서 시간 가속기를 조작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거 맞죠?"

공중 컴보야. 공중에 띄워놓고 죽을 때까지 패는 거지.

"자기야... 제발... 응?"

이 아이는 악마다. 게임 감각으로 사람을 손쉽게 파괴한다. 레나의 정신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레나의 한심한 얼굴을 본 하나의 표정도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이 언니, 연상 맞아? 뭔데 이렇게 귀여워?

"오구오구."

하나가 레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애기 이렇게 여려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그 참담한 패배감.

레나는 오버워치의 험난한 미션 중에도 이런 실패는 겪어본 일이 없었다.

최소한 시간 가속기가 있는 한, 그녀는 자신이 질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 가속기를 이용해 피탄 직전에 회피 기동을 섞어 넣으며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 오는 레나를 2인 1조로 구성된 하나의 팀원들이 침착하게 응격했다. 어쨌든 게임 속의 메카는 현실 속의 트레이서 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시간 가속기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굳건하게 버텨낸 적들은 무력해진 레나의 기체를 손쉽게 사냥했다.

그 방약무도한 전투력.

레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돼. 뭐야. 진짜 민간인을 군대로 키우고 있는 거야? 한국 정부의 의도가 정말 그거야?"

"그 병크 얘길 왜 해요? 아오."

레나는 쓴웃음을 짓는 하나를 올려다보며, 하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레나의 정신은 도저히 진지한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하나에게 어리광 부리더라도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레나는 하나의 품 안으로 더 깊숙히 파고 들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레나를 받아들였다.

포근하고 기분 좋다.

레나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한심해 보이겠지.

아무렴 어때.

하나의 체향을 듬뿍 느끼면서, 어느 새 레나는 하나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과거로 날아갔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은.

애틋하고 귀여운, 그리고 강인한- 신병 시절의 하나가 그녀의 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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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7. 20:45
라인하르트 빌헬름은 정신 세계도 그 육체 만큼이나 강철같은 사내였다. 그는 군대에 성별이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무기를 들어야 한다면, 그 의지를 가진 자를 존중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강습 사령관만큼 하나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의지. 만약 확인 결과 그녀의 의지가 준비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다. 단지 그 뿐인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긍지높은 오버워치의 원로 멤버로써, 송하나 하사에게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첫 날은 정말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영부영 지나가 버리고 말았지만,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제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라인하르트가 그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때, 마침 송하나 하사가 각이 잔뜩 잡혀있는 정갈한 군복 차림의 젊은 병사와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가 입고 있는 복장- 투박하면서도 요상하게 화려한 저것은 결코 정비복이나 군복이 아닐 것이다. 어제 입고 있던 것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멋을 부린 복장이다.

그녀가 라인하르트를 알아보고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니. 나는 오버워치다. 그렇게 대답해줘야 했을 텐데, 그 살가운 모습에 라인하르트의 눈매는 이미 펀치 드렁커처럼 풀려있었다.

신장 8피트, 몸무게 600 파운드의 '초인 병사' 라인하르트가 발산하는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은 하나와 동행하던 병사가 홀로 받아내야 했다. 그는 거의 혼절할 것 같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이 가엾은 병사에게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못했다.

하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할아버지! 오른팔! 앞으로 나란히!"

"? 앞으로 나란히?"

"아이참. 팔을 앞으로 뻗어 보시라구요!"

라인하르트가 영문을 모른 채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송하나가 점프. 라인하르트가 뻗은 통나무같은 팔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우와! 대박! 이거봐 상철아 이것봐!!!"

최상철 일병은 존경하는 송하사가 타국의 전쟁 영웅에게 저지르고 있는 이 거대한 무례함에 정신이 거의 나가버릴 것 같았다.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이미 불로 달군 베이클라이트 합금강처럼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사도로 중무장한 그가 설마 손녀 뻘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송하나 하사에게 무력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을 하나 뿐이다. 최일병에게 자신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씨발 팔뚝 완전 코끼리 앞다리 같아! 할아버지 나랑 결혼해요!"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폭발했다.

"타하하하하하하!"

라인하르트가 호쾌하게 웃으며 팔을 휭휭 좌우로 흔들었다. 사이즈가 두배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 손녀와 놀아주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겁을 잔뜩 집어먹은 최일병의 눈에는 라인하르트가 하나를 거의 내동댕이 치는 것처럼 보였다.

"꺄하하하하하하!"

송하나 하사도 흥겨운 홍소를 내질렀다. 최상철 일병은 이제 탈영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박사님 저 왔어요!"

오버워치가 부산 중장갑 보병대의 일각에 체류하기 시작한지 3일째. 이미 하나는 오버워치 임시본부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했다. 특히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의무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의무실 책임자인 앙겔라는 오늘에야말로 하나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나양. 여기 놀러 오면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요?"

"사랑을 담아서, 디바!"

"말을 좀 듣는 척이라도 해봐요."

앙겔라는 눈을 치켜 떴다. 하지만 하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앙겔라는 레나가 왜 하나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는 그녀를 꼭 닮았다.

"후흥. 그래도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나는 상의를 접어 올렸다.

"제대로 다쳐서 치료받으러 온거니까요!"

왼쪽 옆구리가 완전히 쓸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앙겔라가 숨을 들이켰다. 이 아이는 대체 뭘 자랑하고 있는 거람.

"하나양! 그걸 왜 지금 보여주는 거예요!"

"헤헤. 별거 아녜요. 팀원들과 훈련하다가 조금 실수했어요. 낙법하는 걸 잊어서."

앙겔라는 약간 놀랐지만 사실 대단한 상처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 숨을 내쉬고 주섬주섬 약병을 꺼내 들었다. 앙겔라 특허품, 무통 소독약. 리터당 십만 달러나 하는 약품이다. 그것을 아낌없이 환부에 펴바르고 말라붙은 혈액을 조심스럽게 거즈로 닦아낸다. 마지막으로 씻겨 나가지 않은 모래를 극세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내고 습포를 넉넉하게 잘라 상처를 감싸듯 붙여 응급 처치를 종료. 하나는 완전히 홀려버린 것 같은 눈망울로 앙겔라를 바라봤다.

"우와- 뭐죠 이거? 하나도 안아프고. 손 재주 완전 섬세하고. 박사님은 너무 이쁘고."

하나의 장난스러운 어투에 앙겔라의 얼굴이 조금 험해졌다.

"이런 상처를 입을 정도로 훈련하는 것은 말도 안돼요. 그게 다 미숙하다는 증거죠. 다음에 다쳐서 돌아오면 무통 소독약 같은 건 어림도 없어요. 에틸 알콜로 상처를 절여보면 다음 번엔 절대로 다치고 싶지 않아질 테니까, 한 번 만 더 다쳐서 돌아오세요. 알았어요?"

앙겔라의 엄한 질책에 되려 하나는 PX 특산 냉동 닭강정을 배가 터질 때까지 흡입한 것처럼 만족스런 얼굴을 해 보였다. 앙겔라의 위협은 하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평소의 악마적인 독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앙겔라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앙겔라의 으름장에 위축되는 대신 만면에 웃음을 짓고 상체를 앙겔라 쪽으로 기울였다.

"박사님은 제가 걱정돼요? 막 밤에 잠도 안오고 그래요?

여기까지다. 앙겔라는 오늘 더이상 심각한 얼굴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나와 함께 있으면 그녀의 악마적 본성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그녀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질문을 되돌려 준다.

"라인하르트씨에게 청혼했다면서요? 기사도를 조각해 만든 것 같은 딱딱한 분인데, 괜찮겠어요?"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배시시 웃으며 손사레쳤다.

"에헤이. 아녜요. 할아버지와는 그냥 즐기는 사이예요. 제 진짜는 박사님이죠."

하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앙겔라의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 그녀가 앙겔라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당돌한 말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 아이의 정체는 대체 뭘까. 오늘 아침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멍청하게 풀어졌던 것도 이해가 간다.

앙겔라가 하나에게 받아칠 말을 고르는 사이에 의무실에 손님이 한 명 더 찾아왔다. 아니, 실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이 공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다. 이런 기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각 종 기인이 서식하고 있는 오버워치 내에서도 한 명 밖에 없다.

"너무해! 자기, 나도 그냥 엔조이였어?"

아마도 오버워치에서 하나와 가장 먼저 접촉한 에이젼트. 레나 옥스턴, 더 트레이서.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지, 그녀는 방금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가 약간 뜨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레나 옥스턴이 미소로 미묘한 표정을 숨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짜잔! 해결사가 왔어요!"

레나는 하나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다가와 그대로 하나를 등뒤에서 껴안는다 싶더니, 그녀의 팔이 뱀같은 움직임으로 슬리핑 초크를 시전, 하나의 목을 사정없이 조여들어왔다.

거의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아 하나가 항복의 표시로 정신없이 레나의 팔에 탁탁 건드렸으나 레나는 요지부동. 하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얼레에? 내가 느껴지긴 하는 거야, 자기? 어떻게 3일이 지나도록 한 번을 안 찾아와? 순진한 어른이들한테 추파나 날리고. 자기 그래도 되는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문란하네?"

레나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녀는 하나가 자신을 뒷전으로 밀어뒀던 것이 진심으로 분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는 레나의 말에 미안한 마음을 품는 대신 손가락으로 트레이서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트레이서의 품 안에서 겨우 빠져 나온 하나는 켁켁 거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레나로부터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면서 말했다.

"레나 언니는 이미 어장 관리중이니까요."

"그런 말 하는 순간 이미 관리의 의미가 없는 거 아냐?"

그리고 곧 사냥하는 트레이서와 도망치는 토끼에 의해 의무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물론 하나가 맨몸으로 레나에게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앙겔라는 그들이 뒤엉켜 쓰러지는 것 까지만 확인하고, 의무실을 나섰다. 나올 때 방을 정리해두라는 말을 남겨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

잭 모리슨은 이 7일 동안 송하나 하사가 이끄는 MEKA 소대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일과는 훈련용 메카의 정비로 시작해서 전투 훈련으로 끝났다. 잭은 군의 허가를 받고 택틱컬 바이저의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모든 내용을 영상화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지금 훈련은 1대 다수 상황의 전투였고, 송하나 하사가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인기척이 있었다.

"강습 사령관."

"부 사령관."

"또 그 아이의 전투 훈련을 보고 있어?"

"그래. 넌 처음이겠군."

"저 누더기 같은 기계로 훈련하는 건가. 마음이 짠해질 정도네."

"예산 문제로 정규 기체는 훈련 때 사용 허가가 나오지 않는 것 같더군. 오후에 전투 훈련에 대비하여 훈련기를 정비하는 것에 오전 일과를 전부 할애하고 있어."

잭은 아나의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비효율적인 일과를 송하나 하사의 자발적인 지시 하에 묵묵히 수행하고 있어. 성실하고 좋은 병사들이야. 명령체계도 확고하고. 송하나 하사에 대한 평가를 상향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잭은 하나를 오버워치에 넣는 것을 여전히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실하게 송하나 하사를 평가한다. 이 고지식한 면 만큼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나도 강습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공유했다.

"MEKA 부대의 전투 훈련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송하나 하사의 작품이라더라군. 공격, 수비 패턴이나 경호 및 소대 이동, 거점 확보 및 저지 등, 전부. 기체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프로그램으로 명성이 자자해. 이제는 부산 뿐만 아니라 전국의 부대가 송하나 하사의 방식을 피드백 받아 차용하고 있는 것 같아."

"..."

"열의가 있어. 승부욕도 있고. 그냥 철없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아."

"라인하르트는 둘 째 날에 이미 함락됐고. 그 까칠한 치글러 박사도 이젠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더군. 레나는 아예 그 아이와 붙어다니는 것 같고."

잭이 바이저와 마스크 너머로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녀석은 토끼다.

하지만 보통 토끼가 아니다.

"다음은 당신 차례겠군. 아나."

"다음은 당신 차례야. 난 이미 만나봤으니까."

잭이 그제서야 아나를 돌아봤다.

"라인하르트에게처럼 어리광 부리며 다가오면 머리 위에 호두라도 올려 놓고 저격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나한텐 그 방법이 안 통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더라고. 영민한 아이야."

계산해서 한 일이 아니다. 잭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는 감이 좋은 아이니까.

"어디서 알았는지 오버워치식 경례를 올려 붙이더라. 기특하기도 하지. 그래서 반대로 내가 저격 훈련을 시켜줬어."

아나 아마리의 개인 저격 교습이라니. 오버워치 대원들이라면 목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원하는 일일텐데. 잭은 쓴웃음을 지었다.

잭 모리슨은 다시 고개를 돌려 훈련장을 내려다 봤다. 메카에서 내린 하나가 자신의 메카를 미끼로 상대편의 뒤를 기습. 혼란에 빠진 상대의 정면에서는 원격 조종 상태의 메카가 풀 오토로 사격. 상대의 기체를 온통 페인트 투성이로 만들었다. 관전하던 스쿼드로부터 환성이 터져나온다.

"저격 훈련 결과 궁금하지 않아?"

"그런 건 훈련하는 것만 봐도 알아. 당신은 결코 저 아이에게 저격총을 들게 하지 않을테지. 괴물이 될테니까."

잭이 계속해서 냉정하게 송하나 하사의 전력을 분석했다.

"저 유연한 사고 방식과 전투 능력은 이미 트레이서와도 비견될 수 있을 것 같군. 한국 정부는 저 아이덕에 목숨을 건진 거나 마찬가지야. 저 머저리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게 참 한심하군."

"너무 날세우지마. 그 놈들이 바보인 탓에 우리가 저 아이를 모실 수 있게 된 것도 있잖아. 흥. 그 좆만도 못한 주임원사놈. MEKA 부대가 궤도에 올랐으니, 까다로운 여성 하사 따위는 필요없어졌다고 지껄이더군. 누구 덕분인지도 모르고. 확 고자로 만들어 주려다 참았어. 어짜피 뱃살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을테니까."

잭은 아나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역전의 병사를 하루 아침에 함락시키다니. 육식 동물이 따로 없다. 하필이면 육식 토끼라니.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잭은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아냐. 나는 아직 저 아이를 오버워치에 들이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어."

"그래. 그래서 레나 말대로 바이저와 마스크를 계속 쓰고 다니시겠지."

아나가 쿡쿡 거리며 웃자 잭이 이빨을 딱 부딛혔다. 말이 궁할 때 무심코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잭이 껄끄러운 화제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적 옴닉 부대의 습격 예상 시기는 산출됐나."

"한국군이 제공한 자료를 분석하자면, 아무리 빨라도 15일 뒤야. 정부 놈들 그렇게 숨이 넘어가더니."

한국 정부는 단단히 아나 아마리의 눈 밖에 난 모양이다. 그들은 오버워치 대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이번 옴닉의 발생 규모는 생각보다 클 것이라는 것 같다. 전투가 보름 후라고 하니 쓸데없는 대기 시간이 생길 것 같지만, 최소한 늦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잭은 계속 전투 훈련을 참관했다. 그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다음 번에는 오버워치와 합동 훈련이라도 구상해 봐야겠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육식 토끼에게 자신도 이미 절반 쯤 넘어갔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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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6. 8. 4. 20:52
옴닉 사태.

기계들이 학습을 거듭해 자아를 각성, 인류를 상대로 선전포고한 그 전대미문의 사건은 전세계를 전쟁으로 몰아 넣었다. 이후 인간과 옴닉 사이에 화평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건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라고 평가받았을 정도로, 전쟁은 길고 참혹했다. 전쟁은 언제나 똑같다. 근본적으로 형용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미증유의 재난으로부터 30년. 세계 각국은 아직도 그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한국은 그 대표적인 나라였고, 그 중에서도 부산은 특히 최전선에 해당했다.

인간과 옴닉 사이에 표면상으로나마 화평이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부산에서는 옴닉의 크고 작은 공격이 끊이질 않았다. 놈들은 수가 많았고, 무모하고 집요했다. 심지어 특유의 성장형 인공지능을 통해 패배로부터 교훈을 얻고 성장하기까지 했다.

옴닉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이 옴닉들은 엄밀하게 말해 옴닉이 아니며, 30년전의 옴닉 사태 중 만들어진 자율 사고형 병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 말의 사실 여부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한국의 시민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옴닉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인간과 옴닉 사이에 완전한 화평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어떤 상징처럼 보였다.

결국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는 이 옴닉제 병기들의 생산 플랜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거대한 플랜트가 부산 해운대 앞 어딘가에 있으며, 그 위치를 특정짓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생산된 병기들은 이미 옴닉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미리 프로그램된 지령에 의해 끊임없이 부산을 습격하고, 사상자를 내고 있다는 것.

한국 정부는 물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불가해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 채 20년이나 휘둘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더이상 정공법으로는 점점 진화해 나가는 옴닉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는 항상 극적인 타결책을 도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제안하는 방식은 대개 기상천외한 자충수로 끝나곤 했던 것이 그 두 번째 문제였다. 정부가 나서 국가 레벨로 헛물을 켤 때 마다 막대한 세금이 낭비되었고, 한국군은 물론이고 UN 연합군의 소중한 병력이 희생당했다. 한국에 대한 UN의 신뢰평가는 최저 수준을 갱신했고, 국내 여론은 늘 들끓기만 했다.

그리고 그 한국 정부가 최근 마지막으로 시행한 극약처방은 문자 그대로 절찬리에 전세계로 상영되고 있었다.

"극약처방은 염병. 병크지 그게."

풍선껌을 씹으며 험한 군대 용어를 인터넷 용어와 접목시키는 그녀는 바로 그 병크의 중심지에 있었다. 이른바 태풍의 핵. 그 태풍 속에서 그녀는 홀로 완전히 태평하게 지내고 있었다.

송하나 하사. 20세.

그녀는 군 정책에 따라 거의 반강제로 입대한 프로 게이머였다.

그랬다.

한국 정부는 군용 중장갑 기동 부대에 사용되는 주력 고기동 병기의 조종사로 프로 게이머들을 기용했다. 한국 정부는 프로 게이머들의 뛰어난 반사 신경과 판단력이라면 능히 최첨단 병기를 수족과 같이 다뤄 옴닉의 파멸적인 잔병들과 겨룰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

날렵하고 매끈한 유선형의 비행 물체가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거대한 동체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낮은 고도에서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는 이것은 오버워치 전용 전략 비행 요새로, 명칭을 나이트 워치라고 한다. 나이트 워치는 낮은 고도로 날면서 제트 기류를 타지 않고도 시간 당 3천 킬로미터 이상을 비행할 수 있다. 최첨단 스텔스 도료를 도포하여 군용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이 기체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오버워치가 전세계를 무대로 전장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나이트워치 한켠에 마련된 브리핑룸에서는 20년만에 다시 발족한 신생 오버워치의 일일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국제법에 따라 UN의 재가를 얻지 못했기에 그 영향력은 영광스럽던 과거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으나, 그 누구도 오버워치의 힘을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최근 몇 건의 군사 작전을 통해 신생 오버워치는 그 힘을 스스로 증명해냈던 것이다.

이들의 다음 행선지는 한국이었다. 오버워치는 한국의 옴닉 사태를 중대하게 생각하고 한국 정부에 공투 의사를 타진했다. 그리고 UN의 지원도 거의 끊긴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결국 협상은 타결. 한국 정부는 오버워치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들이 공약대로 옴닉의 전멸시켰을 때에 대한 대가도 정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화면에 표기되고 있는 자료 영상과 오버워치 요원들이 손에 들고 있는 리포트는 그 전폭적인 지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자료들이야말로 이들의 두통을 유발하는 원흉이었다.

"프로 게이머? 하. 그런 병신같은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니."

오버워치 강습 사령관 잭 모리슨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에 깊게 베어 있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은 비단 60에 가까운 그의 나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군대 경험도 없는 젊은이들을 고작 훈련 3개월 만에 실전에 투입했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라인하르트 빌헬름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을 넘어 은근한 분노까지 서려 있었다. 그 역시 잭을 따라서 노쇠한 육체를 이끌고 최근 오버워치에 복귀한 참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오버워치에 돌아온 이유는 그가 가진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분개를 참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는 정의로웠다.

"빌헬름. 혈압 올라가요. 참아요."

주의를 주는 목소리의 주인은 앙겔라 치글러. 코드명은 메르시. 오버워치의 주치의이자 전장에 함께 서는 의무총괄담당자. 오버워치의 천사적 악마라 불리우는 그녀는 부상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피아식별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애롭고, 다쳐서 돌아온 환자를 협박한다는 점에서 자비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손을 거치면 어지간한 부상은 대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치된다.

"그래도 귀엽게 생긴 아이네요. 표정도 좋고. 트라우마는 없어 보여요. 최전선에서 1년이나 살아 남았는데, 정말 기적같은 일이군요."

치글러의 말에 잭이 다시 자료화면을 주시했다. 옴닉을 상대하는 송하나 하사의 전투 영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영상은 딱히 군사 기밀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전투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해서 전세계에 중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신력과 배포 만큼은 한 사람 몫을 하는 병사 수준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한국 정부가 이런 기행을 눈감아주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잭이 한숨을 쉬며 옆을 돌아봤다. 그 방향에는 움찔, 하고 몸을 떠는 자그마한 그림자가 있었다.

"레나. 슬슬 설명해봐. 왜 우리가 저 아이를 오버워치에서 스카웃해야 하는지 말이야."

그렇다.

부산의 옴닉 퇴치 지원은 송하나 하사를 오버워치에 영입하기 위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레나 옥스턴, 코드명 트레이서에 의해 입안된 것이다.

레나가 과장스럽게 웃으며 양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얏호- 해결사가 왔어요-"

그리고 잭의 상처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짓이야."

"...예전엔 잘 받아주셨는데. 대장님 역시 변했어요."

잭이 이빨을 딱 부딛혔다. 그 모습을 보며 레나가 오히려 활짝 웃었다. 20년전의 사건 이후로 훈훈한 외모와 쾌활한 성격을 모두 잃어버린 잭을 예전과 완전히 똑같이 대하는 전우는 레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시간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일까. 잭은 그런 그녀를 거북해 하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아니, 밀어내지 못했다. 레나 옥스턴은 그런 점에 있어서도 해결사였다.

레나는 분위기를 바꾸고 잭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나는 용기있는 아이에요. 나는 그 아이처럼 강한 사람은 오래간만에 봤어요."

"설명이 되지 않아, 트레이서. 이전 임무에서 스쳐 지나간 것은 알고 있지만, 넌 상세 사항은 무엇하나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 그래서는 승인할 수 없어."

트레이서는 여유를 잃지 않고 답했다.

"어차피 같은 전장에 서게 되면 확인하게 될 거에요. 그 때 직접 판단하시는 건 어때요?"

잭이 팔짱을 꼈다.

"굉장한 자신감이군. 하지만 늙은 개가 예언하나 하지. 내가 저 아이를 오버워치에 넣는 일은 없을 거다. 이번 원정은 부산의 옴닉 사태를 평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강습 사령관의 선언이 너무 고압적이었을까. 트레이서는 미간을 좁혀 심각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대장님."

이젠 대장이 아니라 강습 사령관이다. 하지만 잭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짐짓 표정을 굳히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 다음 뜬금 없이 이어진 말은 잭을 격침시켰다.

"무게 잡고 이야기를 하실 땐 말예요, 다음부턴 꼭 바이저랑 마스크를 쓰세요. 꼭이에요."

"뭐야?"

그리고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폭우가 둑을 무너뜨린 것 같은 기세였다.

조금 불쾌해진 잭이 눈을 부라렸을 때 이미 트레이서는 그 곳에 없었다. 시간 가속기를 사용해 이 장소를 벗어난 것이다. 이럴 때의 그녀는 그 누구도 포착할 수 없다.

젊잖은 라인하르트는 괜히 헛기침하며 모르는 척 했지만 이곳에는 강습 사령관을 비웃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전쟁 영웅이 한 명 더 있었다.

"하하하하하! 맞아. 잭은 생긴 게 강아지 새끼마냥 순해서. 맨 얼굴로는 영 박력이 없단 말야."

오버워치 부사령관, 아나 아마리였다. 그녀 역시 라인하르트와 마찬가지로 60세를 넘었으며,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고, 셀 수 없는 강적들을 상대해온 진짜배기 병사였다.

아나의 웃음에 라인하르트의 숨통도 트였다. 이내 걸걸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까부터 입가는 계속 실룩거리고 있었다. 오랜 친구의 체면을 봐서 참고 있었던 것이겠지.

"크하! 위대하신 강습 사령관님! 또 당했구만! 타하하하하하!"

잭 모리슨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 있으면 그는 마치 20년 전으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그렇게 세상을 부정하며 온갖 음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노병은 불편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모두들 정말이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나 뿐인가. 오버워치의 강습 사령관은 약간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진짜야. ...난 저 아이를 차마 오버워치에 넣을 자신이 없어."

잭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실제로 봐야 겠지만 실력은 나쁘지 않아. 그리고 오버워치는 만성 인원부족이지.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

아나와 라인하르트도 진중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은 폭주하고 있는 옴닉 뿐이겠지. 저 아이는 실시간으로 전투 장면을 송출할 정도니까, 그저 게임 감각으로 옴닉을 사냥하고 있을 뿐일 거야.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게 된다면 저 아이는 분명히 사람도 쏘게 될테지. 전쟁의 진실을 알게 되는 거야. 그걸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군."

실은 모두 알고 있다. 잭 모리슨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쯤은. 전성기 시대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늘 안 좋은 쪽으로만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잭은 너무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살아왔다. 아나가 잭의 생각을 정지시켰다.

"그래, 강습 사령관님. 당신이 말한 대로야. 우리 임무는 옴닉의 생산 플랜트를 파괴하는 거야. 다른 건 일단 잊어 버리자구."

라인하르트도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차피 선택은 그 아이가 하는 거야. 게다가 우린 그 아이를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지. 레나 말대로 판단은 그 때 가서 해도 늦지 않네. 무엇보다."

라인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트레이서를, 레나 옥스턴을 믿어. 허튼 소리를 할 친구는 아니야."

잭은 아무 말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동료들도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일일 브리핑은 해산. 모두 각자 위치로 이동했다. 잭은 혼자 브리핑룸에 남았다.

그는 의자를 뒤로 늘여뜨려 천장을 올려다 봤다. 한국에 도착할 때 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 있다. 잭은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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