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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13 DDFF. 성왕과 병사
  2. 2016.09.18 파판전력60분. 상처 (FF4)
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13. 23:57
클라우드는 살짝 혀를 찼다.

아무래도 카인에게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준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갈 수록 그는 친숙했던 성기사의 기운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폭신폭신한 어둠이 강한 빛에 감싸여 균형을 이루는, 특이하고도 신비한 기감.

틀림없다. 이 앞에 카인이 찾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앞에 있었던 것은 누구였을까. 어째서 내가 이걸 착각해 버린 걸까. 지금쯤 카인은 그 사람과 만났을까.

뭐, 큰 문제야 있으려고. 다름 아닌 저 자상한 성기사와 닮은 사람일 터이다. 클라우드는 꼬리를 무는 생각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성기사가 티파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클라우드는 곧 익숙한 공간의 균열을 감지했다. 패왕 엑스데스가 세계 곳곳에 내놓은 상흔은 지금처럼 찢어지곤 한다. 그리고 차원의 틈새에 대량으로 서식하는 꺼림직한 존재들을 토해낸다.

구조적으로 돌맹이나 마찬가지인 무기질적 존재이면서도, 근처의 유기 생명체를 흉내내는 것을 통해 성장하는 이율배반적인 존재.

이미테이션.

그 상세는 완전히 수수께끼이다. 다만 알려진 것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흉내낸 존재들을 증오하고 배척한다는 것 정도다.

클라우드는 즉시 전력으로 질주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보폭을 고려하면 날아올랐다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60초가 채 지나기 전에 클라우드는 검을 쥐고 서 있는 은발의 기사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안도했다. 성기사는 건재. 이미 쓰러져 있는 이미테이션이 다섯 개체. 서 있는 이미테이션은 두 개체에 불과했다. 클라우드는 처음부터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테이션이 발생한 그 순간 성기사가 내뿜은 기세는 마치 산을 움직이고 달을 기울게 할 것 같았으니까.

이제 클라우드는 다른 의미로 의아함을 느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과 해답이 교차했다. 저 성기사의 압도적인 기량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나머지 이미테이션들이 아직도 서 있을 수 있는가. 성기사가 등 뒤에 용기사를 감싸면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용기사는 왜 이곳에 있는가. 분명히 그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을 터이다.

아니,

아니다!

"...세실...! 뒤를 조심해!"

그건 카인이 아니야!

이미테이션이다!

클라우드는 속도를 한계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피와 마황과 심장이 들끓고, 허파가 산소를 게걸스럽게 갈구하고, 빠른 속도로 손상되는 근육이 고통 속에서 아우성친다.

맞출 수 있을까? 클라우드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기사의 정면으로 동시에 쇄도한 두 이미테이션들에게 세실이 출수하는 동안, 가짜 카인의 창은 이미 세실의 등뒤로 뻗어 이미 갑주에 닿고 있었다.

클라우드는 눈을 찌푸렸다. 저 위치는 심장 쪽이다. 치명상인 것이다. 클라우드와 세실의 시선이 교차했다. 세실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드에게는 그 미소를 해석할 여유가 없었다.

섬전과도 같은 세실의 일격은 두 이미테이션의 목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갔다. 간신히 도달한 클라우드는 가짜 카인에게 모든 체중과 운동 에너지를 실어 일섬했다.

굉음.

거의 공간이 찢어져 그 틈새에서 새로운 이미테이션이 쏟아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파공성.

클라우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세실의 검이 클라우드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가로 막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릴 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짜 카인을 지켜준 것이다.

클라우드의 아미가 찌뿌려졌다. 성기사와 용기사의 사정은 골베자에게 들어 대충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바보 자식! 사람이 좋은 것에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미소짓고 있는 세실의 표정은 평온했다.

도저히 심장을 손상당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시선이 가짜 카인의 창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의심했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가짜 카인의 창끝은 세실의 등에 겨우 닿아 있을 뿐이다.

설마 이미테이션이, 살의를 억제하고, 공격을 멈췄다?

클라우드의 뇌가 포화상태에 빠져 설명을 요구하려는 때에, 타이밍 좋게 머리 위로 맑은 목소리가 흘러 내려왔다.

"젊은 전사여. 그만 투기를 풀어주시게. 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으이."

그 위엄. 카리스마.

소싯적 싸가지가 없기로 그 왼편에 서있을 자가 없었던 클라우드조차 무심코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 목소리였다.

아니다.

이 자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성기사가 아니다.

같은 영혼을 지녔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완숙한 존재다. 그러므로, 아무 문제도 없다. 클라우드는 힘을 풀고 손상된 근섬유에 마황을 돌려 신진대사를 촉진시켰다.

세실 너머에서 무너져내린 용기사는 잔뜩 억눌린 한 마디 만을 남겨놓았다.

나를, 나를 보지 마라.

거짓된 용기사는 등을 돌려 하늘로 사라졌다.

.

피차 설명할 것이 많았다.

클라우드는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면서, 먼저 이 세계에 대해 설명했다. 두 신들의 싸움에 사용될 장기말로써, 이세계로부터 소환된 전사들. 신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한 죽을 수 없으며, 그 대신 죽을 때마다 전세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법칙 등.

대강의 일을 전해 들은 눈 앞의 남자, 성왕 세실 B. 하비는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전설의 디시디아인가. 이야기가 복잡해졌군."

놀랍게도 이 자는 지금까지 클라우드가 알고 있던 성기사 세실 하비의 미래인 것 같다. 그릇이 큰 줄은 어렴풋 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왕까지 되신 모양이다. 그에 따라 범상치 않은 지식을 쌓아두신 것 같다.

이 지옥같은 곳에 떨어진 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클라우드라 한들 이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드가 물었다.

"알고 있는 건가?"

그러나 세실은 부정했다.

"아니, 내가 살고 있던 미시디아란 곳에서 읽은 책에 인용되어 있었을 뿐이야. 자네가 설명한 것 이상의 정보는 없네."

이제와서 새삼 실망스러울 일도 없다.

클라우드는 요리에 눈을 돌렸다. 세실과 함께 발견한 새둥지에서 가져온 알이다. 초코보 수정란 만큼은 아니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 비슷한 풍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클라우드는 돌을 깎아 만든 접시에 오믈렛을 담아 세실에게 건냈다. 절묘하게 덥힌 접시는 따끈한 오믈렛의 온기를 효과적으로 보존해주고 있었다.

"고맙네."

세실은 요리를 받아들고 턱을 쓰다듬었다.

"끝없는 싸움에, 죽지는 않더라도, 기억과 힘이 깎여나간다는 것인가. 흠. 골치아픈 일이로고. 곁에 로자가 있었다면 걱정할 일이 없겠지만."

로자. 성기사 시절에 맺어진 반려인가. 세실이 웃는 낯을 보였다.

"자네, 정말로 이곳에서 나와 함께 싸워왔던 것이로군. 슬슬 믿을 수 밖에 없겠어."

"하지만, 이런 곳에 당신의 아내가 함께 있다해도 좋은 일은 없어. 두렵고, 무슨 일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흥. 모르는 소리. 힘들 때 함께 있지 않고서 어찌 반려라 할 수 있겠는가."

세실이 코웃음쳤다. 클라우드는 눈썹을 조금 들어올렸다. 세실이 가끔 보여주던 치기어린 표정이다. 클라우드는 그가 언제 이런 얼굴을 보여주는지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녀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완벽한 전사 중 한 명일세. 오히려 우리가 그녀의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야."

클라우드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뒤에 이어질 말도 알고 있다. 괜한 말을 했다고 자각한다.

"아, 그래. 알았어. 알고 있어. 성왕."

"흠.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인데, 그녀는."

"왕국 제일의 명사수이자 회복술사라지. 공격 마법은 하나 밖에 모르지만 위력은 절륜. 공성전에 중용될 정도라 했던가."

"뭐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긴, 내가 말하지 않았을리 없지. 우주를 뒤져도 그런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니."

이번에는 클라우드가 코웃음칠 차례였다. 당신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 예전의 애송이가 아니다.

"후. 내 아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군."

검은 병사의 자심감 넘치는 발언은 겸양과 성실의 화신에게 불신과 호승심을 심었다.

"호오..?"

"당신 세계라면 또 모르겠지만 감히 우주를 들먹인다면 어쩔 수 없지. 별의 심장부에서 표류하던 나를 목숨을 걸고 꺼내준 사람이 바로 내 아내다. 티파 S. 록하트라 하지."

성왕은 물끄러미 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옳거니. 저것은 그저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저 눈은, 자신과 같다. 진심으로 제 아내가 우주 제일이라 믿는 것이다.

설마.

설마 이 자는, 하늘이 주신, 세상 끝에서 온 내 호적수란 말인가.

세실의 눈이 지엄해졌다.

"이름을 클라우드경이라 했던가. 괜찮겠나? 이 나를 진심으로 만들어도."

"겨우 식전 요리를 대접했을 뿐이다. 당신이 내 진심을 이끌어낼 수나 있을 것 같아?"

클라우드의 도발에 세실은 호기롭게 웃었다. 이미테이션과 싸울 때 보다 전의에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클라우드는 실소했다.

진심으로 나를, 티파를 이길 생각인가.

어리석다. 가소롭다. 박살을 내주마, 바론의 성왕 나으리.

그리고 둘은 검을 사용하지 않는 전투를 시작했다.

혀는 보통 보드랍고 유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검보다도 단단해 진다. 상황에 따라서 혀는 병장기보다 치명적인 것이다.

클라우드가 포문을 열고, 세실이 응사했다.

"내 아내는 천사다. 폐인이 된 나를 포기하지 않고 간호해 줬지. 지금의 나는 티파가 만들었다."

"자애, 긍휼, 헌신을 3대 덕목으로 삼는 백마도사의 정점 앞에서 그 성정을 논하는가."

"티파는 밝고 활달하여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옛말에 인자무적이라 하더군."

"로자는 그 존재 자체로 왕국의 사기를 드높힌다. 칭송받아 마땅하다."

"옥의 티라면 너무 예쁘다는 것이겠지. 매일 질투가 날 정도다."

"하하하하. 날 믿게, 젊은 친구. 그 이야기는 감히 하지 않는 편이 나을 터."

"내가 방황하던 때에도 티파는 흔들리지 않고 기다려줬다. 내가 다시 고백할 때까지, 몇 년이나."

"몇 년이고 뭐고, 로자는 내가 성인이 되는 날까지 기다려줬다."

"...?"

"그 날 처음 맺어졌지."

"..."

"그 이야기가 아니었나?"

"...아니다, 성왕. 아니다."

"..."

"..."

"내가 성왕이라 불릴 즈음 로자는 패왕이라 불리웠지. 보통은 무엇을 빼앗을 때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다."

"..."

"그리 부끄러워하지 말게.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지 않은가."

"누가 부끄러워 한다는 거야."

"후후후. 자네 차례일세."

"...큭."

"흐하하. ...흠?"

"...먹었군."

"이, 이건..."

"티파는 방금 당신이 삼킨 오믈렛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렸다."

"..."

"왜."

"...이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이런 절품을 어떻게 만들었지? 그 어떤 시행착오도 없이?"

"...? 실패한 건 지금 내가 먹고 있다만?"

"허어... 그게... 그것도 이미 충분히 훌륭해 보인다만... 아니 그보다, 처음 본 사람에게 굳이 잘 만든 쪽을... 설마, 몸에 배어있는 이 배려 또한 아내의 지도 편달 덕분이라고...?"

"크게 말해. 중얼거리지 말고."

"무례한지고. 난 아직 지지 않았다."

"큭큭큭."

"후... 내 아내는 나와 둘째를 만들기 위해 왕성에 호수를 팠다."

"크헉..."

그 설전은 식사를 마치고, 함께 저녁 거리를 사냥하고, 사냥한 사슴을 정통 붉은날개 방식으로 호쾌하게 구워 먹은 뒤, 화톳불을 남겨 노숙을 준비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몇 시간 째 웃을 때 귀엽다는 둥, 머리결이 비단결같다는 둥 미취학 아동의 논리가 사용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길 즈음 피를 튀기지 않는 싸움이 종료되었다.

강맹한 전사들이었다. 하룻밤을 샌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성왕과 병사는 해가 뜨는 방향으로 삼일 밤낮을 더 걸었다.

이미테이션의 습격은 다섯 번이나 있었지만 세실과 클라우드는 서로 협력하여 이를 격퇴했다. 클라우드는 세실이 펼치는 공방위일체의 바론 왕국 정통 검기에 매료되었고, 세실은 클라우드의 변화무쌍한 분리합체검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요리는 대개 클라우드의 몫이었다. 짐승의 목을 따고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굽는 야만스런 방식은 처음 한 번만 호쾌하게 느꼈을 뿐이다.

클라우드는 그 사실에 큰 불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클라우드는 저 반대편에 있을 용기사의 존재를 떠올리고 낭패한 기분을 느꼈다. 세실과 함께한 기묘한 여행에 정신이 팔려 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약 7일 거리 정도 뒤에, 그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세실의 표정이 의문을 떠올렸다.

"카인? 그라면 4일 전에 봤지 않은가. 7일이라니."

"세실. 그 놈은 이미테이션이야. 진짜 카인이 아니다."

세실은 조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닐세. 그는, 설령 자네 말대로 이미테이션이라 하더라도- 카인의 파편을 가지고 있어. 난 알 수 있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지?"

"죄책감. 그는 몇 번이고 나를 찌르려 했다가 실패했네. 마지막 것은 자네도 봤을 테지. 이미테이션과는 나도 이미 꽤 상대해 봤지. 이젠 나도 확신할 수 있네."

클라우드는 그 가짜 카인이 세실의 심장을 거의 꿰뚫을 뻔한 장면을 떠올리고 조금 아찔해졌다. 클라우드가 세실을 똑로 쳐다보며 말했다.

"성왕 나으리. 다신 그러지 마.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텐데."

"어차피 죽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 남자는 대담한 건지 어수룩한 건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숨을 쉬는 클라우드를 보며 세실이 빙그레 웃었다.

"나와 내 친구의 관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어느 정도는. 골베자가 이야기해줬으니까."

"형님의 지인이셨는가... 이거, 실례가 많았다."

"신경쓰지마. 피차 서로 돕고 있으니."

"형님은 강령하신가."

"물론이다.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

세실은 그리운 눈을 하고 산 너머를 바라보았으나 그 이상 골베자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세실은 친구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카인이 날 공격한다면, 난 받아줄 수 밖에 없다네. 상처가 많았던 녀석이야. 모두 내 탓이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녀석에게 내 존재가 가장 큰 상처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이."

"세실. 카인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알고 있네. 카인은 전부 떨쳐냈고, 기어이 나를 구해주었지. 하지만 이곳은 전설의 디시디아. 어떤 카인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니."

"엉뚱한 생각하지 마, 세실 하비."

클라우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도저히 혼자 놔둘 수가 없군. 또 그런 소리만 해봐. 그 카인이 나타났을 때 내가 베어버릴 테니까."

친구를 베어버리겠다는 흉흉한 말에 세실은 분개하는 대신 웃는 얼굴을 돌려주었다.

"자네 아내. 티파님이라 했던가. 꼭 한 번 뵙고 싶군."

"뭐야 갑자기. 싫어. 안보여준다."

"자네가 그런 기특한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아내의 영향일 테지. 반드시 그럴 테지. 하하하. 꼭 뵙고 인사하고 싶으이."

"..."

클라우드는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은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귀찮은 일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이야기가 꼬이기 전에, 클라우드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카인을... 만나러 가지 않을 건가. 널 찾고 있는데."

"자네가 날 닮은 기세를 느꼈다 했지. 문제 없네. 필시 그 기세는 내 아들의 것일 테니."

"아들?"

"세오도르 B. 하비. 바론의 현 국왕이라네. 적룡왕이라 불리울 만큼 용맹하고, 내 친구와도 막역한 사이지. 걱정하지 말게. 충분히 제몫을 다할 터이니."

"국왕."

"내 아들이니 당연하지. 왜 그러는가?"

"...당신 올해 나이가?"

"내일 모레 오십일세."

"......."

클라우드는 정신적으로 입을 딱 벌렸다. 왠지 말이 고풍스럽다 했지만, 나이가 오십? 스스로 하늘의 뜻을 알아챈다는 그 오십? 그 얼굴로? 나와 동년배인 아들이 있다고? 농담이지?

세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거리며 웃었다.

"신경쓰지 마시게, 젊은 전사여. 내가 원래 동안이라는 이야긴 많이 듣는다네."

이런 패배감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이후 클라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미테이션의 대군을 분쇄하며 계속 걸었다. 세실은 딱히 괘념치 않고 클라우드의 등 뒤를 지켰다.

말 없는 행군은 성왕과 병사가 거대한 크레이터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를 조사하던 클라우드는 대뜸 환성을 내질러 세실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틀림없다. 이것은 티파의 흔적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성왕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 날 클라우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귀신같은 감각으로 사냥한 거북이형 몬스터를 부위별로 해체하여 열 다섯 가지의 신묘한 요리를 만들었고, 정통 바론식 요리를 재해석 하여 믿기 힘들 정도로 바삭바삭한 사슴 통구이를 대령했다. 산더미처럼 채집한 버섯과 산야채는 영롱한 칠색 빛의 스프가 되었고, 사탕수수를 졸여 만든 과자에 천연꿀을 발라 구운 후식이 화룡점정이었다. 세실은 아귀처럼 음식에 달려 들었다. 성왕의 혀에 돋은 돌기가 환호성을 울렸고, 위장의 융털이 전에 없이 폭주했다.

클라우드는 음식을 과흡입하고 완전히 뻗어버린 성왕 대신 불침번을 섰다. 바라던 바였다. 어차피 오늘 클라우드는 잠을 잘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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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FF. 병사와 용기사  (0) 2016.08.09
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18. 23:14
세실은 기본적으로 예의바르고 조심스럽고 성실한 남자였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세실을 알고 지낸 이후 근 30년 동안 로자는 그가 편한 복장을 입고 있거나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하물며, 벗은 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로자 스스로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암흑기사 시절, 기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세실은 잠들기 직전까지 갑주 차림을 고수하곤 했다. 로자가 가끔씩 그의 숙소에 방문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세실의 갑주를 벗겨내기 위해 어마무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 작업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곤 했다. 불 빛 하나 없는 세실의 침실에서 그의 몸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로자보다 일찍 일어났고, 그녀가 깨어날 때 쯤에는 이미 갑주를 완전히 착용해둔 상태로 대기함으로써 로자를 실망스럽게 만들었다.

왕이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왕으로써의 마음가짐은 정갈한 복장에서부터 비롯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생각이 거의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신하들의 태도에서 자명하게 드러났다. 로자나 세오도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에조차 세실은 빈틈이 없었다. 우아한 복장을 착용한 채 유려한 동작으로 홍차를 마시는 세실을 목도한 신하들은 그 빈틈없고 준비된 자세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휴식 시간을 방해받았음에도 자애로움 그 자체로 신하를 대하며 정무에 임하는 그는 그야말로 성왕. 세실을 상대로 정쟁을 일삼는 신하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누가 성왕의 성실함을 두고 감히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로자는 그녀의 반려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젊고 아름답지만, 세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예전에 즐겨 입던 각종 대담한 복장들은 참아야만 했다. 가끔은 예전처럼 화려한 복장을 입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세실이 진지한 얼굴로 손톱을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로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내인 자신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만큼은 좀 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게 아닌가. 하지만 세실은 이상하게 완고한 면이 있었다. 모든 단편적인 시도를 실패로 날려버린 로자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왕 전용 휴식 공간 창출 프로젝트. 왕과 그가 허락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인공 호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로자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이 안건을 내놓고, 그 근거와 상세 내용을 밝혔다.

1. 신하들의 무능과 횡포가 도를 넘어, 티타임을 즐기는 시간조차 온전히 왕을 쉬게 놔두질 않는다.

2. 몸을 돌보지 않고 정무에 골몰하는 왕에게 신하들의 방해없이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은 필수불가결하다.

3. 예산은 그 동안 비축해둔 왕비 품위 유지비를 사용하며, 따라서 추가 예산 편성은 불필요하다.

세실이 성왕이라면, 이럴 때 로자는 패왕이었다. 그녀가 나선 이상 승산은 없다. 신하들은 얼굴을 흙빛으로 바꾸며 만장일치로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치심 따위 애저녁에 내다 버렸다. 이제 곧 세실의 벗은 몸이 백일하에 들어날 것이다.

.

"응?"

"응, 벗어. 같이 호수에 들어가야지."

로자는 이미 겉 옷을 벗고 수영복 차림으로 세실 앞에 서 있었다. 예전의 백마도사 시절을 연상시키는 눈부신 몸매에 세실은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왕으로써의 위엄을 찾으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부인, 이렇게 갑자기-"

"부인이고 자시고. 얼른 벗어."

"으... 하지만... 왕의... 위엄이..."

세실은, 언제부턴가 로자를 안달나게 만들곤 했다. 나는 전장에서조차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는데, 세실이 나를 망쳐놨다. 로자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물쭈물하는 세실을 바라보며 로자가 말문을 열었다. 다시 열린 것은 왕비의 발언이었다.

"왕의 위엄이 흘러넘치는 폐하께오선."

"응?"

휙휙 급변하는 정세에 세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와의 정사가 계획되어 있는 날에도 정사를 오후 아홉시 까지 보시지요. 그렇게 해가 떨어진 후 들어오셔서, 아녀자에게 수치를 주지 않으려 먼저 방의 촛불을 모두 끄시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용케 미리 준비된 백탕을 찾아 어수를 씻으십니다. 제가 재촉하면, 여인의 은밀한 곳에 손을 대는데 청결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시고 손톱 사이사이까지 모두 닦아내시지요."

"..."

"그리곤 의복을 하나씩 벗고 개켜 침대 구석에 차곡차곡 쌓으시고, 그 이후에는 제 의복을 하나씩 벗기고 개켜 침대 구석에 차곡차곡"

"아, 그래, 알았어, 로자."

"정사를 시작하실 때에는..."

"미안. 알았어. 벗어. 당장 벗는다고."

진작 그럴 것이지. 로자가 표정을 풀고 약간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연애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에, 세실의 표정도 20년 전의 청년처럼 풀어진다.

그렇게 잠시 후 드러난 것은, 전혀 쇠락하지 않은 근육질의 건장한 육체. 4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 없다. 터질 것 처럼 팽팽한 대흉근, 꿈틀거리는 상완, 꽉 조여져 있는 복근과 둔근, 통나무같은 대퇴근.

그리고 로자는 왜 세실이 자신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실..."

그의 온 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언뜻 보더라도 세자리 수는 되는 것 같다. 물론 몸을 맞대고 있으면 그 몸에 나있는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지만 옷 아래 드러난 상처를 본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아군을 신경쓰고, 모든 치명적인 공격을 스스로 받아내며 싸워왔다. 상처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세실은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로자. 후유증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암흑기사 시절에 입었던 상처야. 로자와 함께 있을 때 얻은 상처는 네가 전부 고쳐줘서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았다.

"그런 건 나도 알아. 기사가 상처를 입은 게 뭐 어때서 그래. 숨길 필요는 없었잖아?"

"그건..."

"뼈가 드러나는 상처나, 육체가 결손되는 중상도 숱하게 봐 왔어. 내가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던 거야?"

"...맞아. 로자. 20년 전에는 네가 그런 걸 보면 큰일나는 줄 알았어. 걱정시킬 수 없다고... 내 상처는 나 혼자 전부 짊어지면 된다고. 바보같은 이야기였지."

최전선에서 회복을 담당했던 로자는,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는데.

세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암흑기사의 갑주... 세세한 구조는 잘 모르지? 입을 때 엄청 아프게 되어 있어. 익숙해지는 것 따윈 불가능해. 가능하면 벗고 싶지 않을 정도지. 육체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가까운 분노야말로 암흑기사가 가진 힘의 원천이거든. 그걸 끌어내기 위한 거야. 그래서 그걸 입을 때 내 표정... 로자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로자는 살며시 세실의 손을 잡고 호수로 이끌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와서 위로할 필요는 없다. 이 고백은 세실에게도 난처할 뿐 괴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20년전의, 세실이 가장 힘들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세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로자는 곧 그의 육체를 시각적으로 탐닉할 여유를 되찾았다. 밝은 낮에 그의 몸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간신히 쟁취한 기회를 날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과연 완벽한 육체다.

상처가 있음에도, 아니, 상처가 있기에 오히려.

자상한 아버지, 사려깊은 남편, 현명한 군주. 하지만 그 본질은 상처투성이의, 야만스러운, 전사 중의 전사. 그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 준하는 차이에 로자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로자가 다시금 세실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거야? 우리 결혼한 다음에 말야. 왜 지금까지 벗은 몸을 안보여줬어??"

로자가 이제 대놓고 재촉하자 세실 표정에서 난처함이 깊어졌다.

"그건... 계속 그러다보니 왠지. 봐, 난 사실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어. 그래서 바닥부터 제왕학을 배웠잖아. 그 중에 방중술도 있었다는 건데..."

세실은 자신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약간 멈칫했다. 그러나 오늘의 로자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왜 멈춰? 얼른 이야기해봐. 나 안달나게 하지 말고."

세실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왕이 왕비를 고풍스럽게 안아주는 방법이 말이야, 왕비를 아껴준다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계속 그 역할에 몰입했던 것 같아."

그야...

로자도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로자도 처음에는 그런 제왕학의 세실이 무척 생경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서 무척이나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연예기간까지 합해 20년이나 사랑하는 남성의 실루엣만 보고 밤을 지샜단 말이지.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거야.

잘 익은 사과 같은 로자의 얼굴을 본 세실이 겨우 여유를 되찾았다.

"그래서 여길 만든 거야? 고작 내 벗은 몸을 보려고?"

로자는 세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작이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는 거야. 이 차림 그대로 함께 해변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아마 이 남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세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둘은 호수에 몸을 천천히 담궜다. 물은 약간 차가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두 사람의 체온은 이미 적당히 달아올라 있었다.

로자가 세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세실은 팔을 둘러 로자를 감싸 안았다.

로자가 세실의 가슴에 대고 담담히 고백했다.

"세실, 난 말야, 항상 당신과 이렇게 하고 싶었어. 왕과 왕비라는 직책에 얽메이지 않고 말야. 세실은, 왕 같은 거 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실이 답했다.

녹아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로자. 1년만 지나면 세오도르도 20세가 돼. 그러면. 그 때가 되면."

로자가 세실을 가만히 올려다 봤다.

"난 세오도르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야. 그리고 우린 왕성에서 나가자. 비공정으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마음 가는데로 사는 거야. 어때?"

세실의 물음에 로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상관없다. 세실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어짜피 세실은 그 이후의 인생을 오롯하게 로자를 위해서만 쓰기로 다짐했으니까.

다만 잠시 후 세실은, 이후의 인생 설계와는 별개로, 로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로자? 당신, 수영복 어쨌어?"

로자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실은 그 이상 로자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실이 호수에서 나올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의 입술은 로자의 입술이나 그에 준하는 다른 것으로 막혀 있었다.

세실이 제왕학에서 배운 방중술은, 망극하게도 호수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물론, 세실은 로자가 기대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본질적으로 비할 바 없이 야만스러운 전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해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