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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7.03.09 FF15. (1) 녹티스 2
posted by nameless7777 2019. 1. 7. 12:21
녹트가 돌아온다면.

"녹트가 돌아온다면 역시 캠핑이지. 요즘에는 오프 로드카에 물건을 잔뜩 싣고 다니는 게 대세야. 아직도 밤엔 위험해서 칸나기의 수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좋아졌지. 어차피 뭐가 문제야. 루시스의 빛께서 함께 하시는데. 왕이 모는 차에 타고 캠핑하러 가다니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건 우리들 밖에 없을 거야."

"녹트가 돌아온다면 난 낚시를 배울 거다. 그동안 어째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내가 잡은 물고기가 더 많다면 녹트가 요리를 배울지도 모르지."

"녹트가 돌아온다면 같이 사진을 찍을거야! 녹트가 귀찮아해서 그렇지 감각은 있어. 어설픈 테크닉에 구애받지 않고 피사체 본연의 아름다움이랄까, 그걸 꾸밈없이 정확하게 프레임에 담아낸다구. 오싹하지. 나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으음."

"응? 글라디오?"

"조금 생각해봤는데, 역시 아니야. 원한다면 왕께선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아도 돼. 요즘 나오는 오프로드 카는 내가 앉아 있기에도 커. 운전 내가 하지 뭐. 그러다 길잃은 베히모스가 있으면 넓적다리 살을 좀 얻어서."

"또 컵라면인가."

"컵라면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

"흠. 그렇군. 나도 녹트에게 요리를 강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요리든 녹트가 가장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니까."

"이그니스는 이제 콩으로도 스테이크를 굽는다지. 미친. 시드할배가 어찌나 자랑하던지."

"맛은 그냥 보통이다."

"어련하시겠어. 군사님께서 만든 스타일리시한 콩 스테이크라니. 내 컵라면에 넣어줘도 좋아."

"글라디오 컵라면 진짜 좋아하는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그래.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이 200장도 안된단 말야.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않아? 그래도 단체 사진은 내가 제일 잘 찍으니까. 녹트가 너무 수고하지 않아도 돼."

"녹트에게 달렸지."

"응."

"맞아."

"..."

"..."

"..."

"...우리... 이길 수 있을거야. 그렇지?"

"물론이다. 내 방패에 걸고."

"반드시."

.

희끗희끗하게 눈이 흩날리는 밤, 코르는 비어있는 왕좌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왕좌의 주위는 꽃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까마득한 과거 연인 관계 였던 왕과 칸나기가 맺었다고 전해지는 영혼의 결혼식을 연출한 것이다. 녹티스님과 루나프레나님도 반드시 그러했을 것이다. 영혼의 합일을 이룬 그들은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인섬니아를 굽어 살필 것이다. 그렇게 소망하면서. 그래서 꽃들은 몹시 아름답고 허무했다. 114대 루시스 왕 그 자신처럼.

궁 바깥에서는 목전으로 다가온 시해 대군의 마지막 습격에 대비한 바리케이트와 대형 트랩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1년 전에 글라디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실무에서 벗어난 코르에게는 실질적으로 할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틈도 없다. 그리고 이제와서 뒤돌아 볼 수도 없다. 투쟁과 싸움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한 자기 위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코르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젊었을 때 그는 늘 초조했다. 결국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경호를 내팽겨친 뒤 초대 왕의 방패 길가메시에게 도전했다. 코르는 위대한 검성의 팔은 거두었음에도 승리하지 못했다. 돌아와 생각하면 이유는 명백하다. 치기어린 코르의 검에는 절박함이 부족했다.

왕의 방패가 누릴 수 있었던 명예도 그를 비켜갔다. 왕께서는 코르가 자신을 보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킹 레기스의 방패 클라루스. 그는 행복한 자다. 평생을 충실하게 살았다. 그래, 죽음 조차 그를 축복했다. 그는 모시는 왕의 눈 앞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으므로.

클라루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로, 코르는 스스로 글라디올러스의 이정표가 되었다. 아이리스가 어엿한 전사가 되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지켜 주었다. 글라디오는 젊은 나이에 이미 코르 장군을 넘어 검성 길가매시를 발 아래 두었고, 악마 살해자라 불리우는 아이리스의 명성도 그에 못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코르 그 자신의 명예가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코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군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시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정돈된 기감이 등 뒤로 느껴졌다. 코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 장소에 그 만큼 어울리지 않았던 자도 드물 것이다.

"제네럴 로키."

"코르 장군."

로키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 강한 그가 고개를 숙이는 상대는 코르가 유일하다. 결국 로키는 코르를 이길 수 없었다. 시해를 상대로 함께 싸우게 된 지금 더이상 코르와 겨룰 수도 없게 되었다. 코르에게 호승심을 가지고 있었던 로키는, 그러나 더이상 그 사실이 그렇게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그 코르 장군이 엄한 목소리로 로키를 맞이했다.

"왕께서 거하시는 자리요. 그에 맞는 경의를 요구하지."

"그 왕이 없어서야 의미가 없지 않겠소. 게다가 내 왕이 아닌 것을 어쩌겠소."

로키는 짐짓 무심한 척 코르의 심경을 건드렸다. 오랜 습관같은, 그러나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다.  코르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자 로키는 이내 후회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빛을 가져오셨지. 경솔했소. 내 사과하리다."

로키가 순순히 사과하자 코르도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제네럴 로키야말로 이곳엔 무슨 일이신가."

"오랜 숙적이자 맹우가 와 있다는 데, 내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오래간만에 뵙소. 코르 장군."

"그만. 난 더 이상 장군이 아니니."

"그 무슨. 장군은 언제까지나 맹장이오 영걸이니. 다시는 그런 말씀 꺼내지 마시오."

로키는 아직 젊었다.

그러므로 그 언행이 몸에 맞지 않을 법도 했으나, 이제는 제법 태가 나는 것이 과연 제국 굴지의 가문을 이끄는 당주다웠다. 그 많은 시련들이 이 사내를 착실히 단련시켰던 것이다. 코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를 본 로키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불사장군께서 오셨으니 왕도 방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겠구려."

코르는 자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마음을 후벼 꺼내는 일은 있다.

불사장군.

그 빌어먹을 불사장군.

"나는 실패자다. 이제는 무엇하나 할 줄 모르고, 지금까지 무엇하나 이루지 못한."

불타오르는 것 같은 코르의 눈동자에 로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코르 장군이 평정을 잃었다? 그 냉철한 코르가?

이 내가 그 정도의 실수를 한건가?

아니다.

이상하다.

오늘 코르는 명백하게 이상하다.

"코르 장군...?"

"불사장군이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야. 아군의 시체로 쌓아올린 끔찍한 별명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래, 12년 전 그 날까지."

로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로키는 지금, 코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나는 그 운명의 날 왕께 주제넘게도, 새벽이 밝아오면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로키는 목울대에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로키의 침묵 속에 코르가 자신의 허물을 입에 담았다.

"새벽이 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처연한 목소리에 힘이, 분노가 서렸다.

"제네럴 로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물으셨나."

코르는 선언하는 것 처럼 말했다.

"나는 불사장군으로써가 아니라 전사로써 이곳에 왔다네. 이번에야말로 신명을 다해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야. 거짓된 조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기 위해. 왕께서 찾아 주신 빛을 잇기 위해. 그것을 왕께 고하러 왔을 뿐."

코르는 로키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로키는 왜 자신이 잠자코 코르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것은 유언이었다.

.

인섬니아의 전역에서는 레스탈툼으로의 피난이 한창이었다. 아이리스는 길게 늘어선 차량과 탑승 대기 중인 피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섬니아 시민들의 면면은 굳어있었고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으나 질서를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왕께서 탈환한 땅의 시민으로써 의식이 높았고, 왕궁 경비대가 체계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데몬 슬레이어로 이름높은 아이리스가 곁에서 호위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 데몬 슬레이어는 과연 늠름했다. 시민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을 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나 부관, 가령 글라디오나 탈코트라면 그 표정에 한 조각 회한이 떠올라 있음을 알아챘으리라.

아이리스는 자기 분석에 객관적인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지 똑바로 알고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다름아닌 코르에 대한 불만이다. 그의 검이 지금 그녀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렸다. 살짝만 꺼내보아도 눈부신 검신이 나타난다. 빈틈없이 손질되어 있는 검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것이 마치 코르를 상징하는 것 같아 화가 나면서도 흐뭇하다.

아이리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미소를 짓는 지난한 기술을 성공시켰다. 거울을 보면 스스로의 얼굴이 어떤 지경일지 상상하고 있을 무렵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이다.

"의외네. 좀 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데몬 슬레이어가 역전의 용사를 맞이했다.

"아라네아."

아라네아는 아이리스는 피난민들을 레스탈툼까지 지키며 호송하는 경비 대장을 맡았다는 보고를 듣고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아이리스는 시해를 맨손으로도 때려 죽이는, 그야말로 무문의 상징 아미티시아 가문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완력을 지닌 전사다. 이 실력에 이런 인선은 어떻게 봐도 차별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명하복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행히도 아이리스의 얼굴을 덮고 있는 그늘은 생각보다 옅어 보였다. 아라네아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리스."

용기사 아라네아를 보고 있으면 아이리스는 자신이 아직도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렇다. 아이리스는 아라네아의 강함, 늠름함, 배포, 포용력,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부러웠다. 아쉽지만 글라디올러스가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간다. 아니, 아쉬울 것이 무엇인가. 딱히 아이리스와 아라네아 사이에 달라질 것은 없다.

아라네아의 시선이 아이리스의 허리에 머물렀다.

"코르 장군이 주셨다던 검이구나. 이어받기로 결심했다더니."

"떠넘긴 거죠. 딸을 족쇄로 묶다니 이게 아버지가 할 일이야? 나같은 딸내미가 생겼으면 기뻐서 울어 보이지는 못할 망정."

그 날.

시해의 대규모 공습을 앞두고, 겨우 용기를 낸 아이리스가 코르에게 아버지라 불러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본 그 날.

잠시 아이리스를 응시하던 코르는 신중한 동작으로 검을 풀어 아이리스에게 건냈다. 엉겁결에 검을 받아든 아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저기, 코르... 아... 저씨?"

아.

인자한 눈이다.

아이리스가 코르의 표정을 알아보았다. 아이리스가 어리광을 부릴 때 늘 보여주는 얼굴이다.

코르가 답했다.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있는 선물이 달리 없구나. 내게 가장 소중했던 것이다."

명도 코테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선왕 레기스의 가호를 받았던 둘도 없는 검이다.

그런 검을 넘겨 받는다.

그 속의 의미를 몰라서야 전사로써의 자격이 없다. 아이리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코르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코르의 미소가 깊어졌다.

이것으로 둘의 관계는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코르는 모든 변변치 않은 아버지가 그러는 것 처럼 그녀의 감동을 단칼에 박살냈다.

"그 검에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전장에 나서는 것을 금지한다. 알겠니, 아이리스?"

표정은 자상한 아버지 그대로였다.

그는 진정으로 아이리스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없어.

나는 데몬 슬레이어다.

그딴 배려 따윈 필요없어!

그 날의 일을 떠올린 것만으로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분노로 넘실거렸다. 아라네아는 그 눈을 보고 알아챘다.

아차, 그렇구나.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아라네아는 자신이 정식으로 창을 배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너처럼 꽃같은 아가씨가, 그 가녀린 팔로, 우락부락하고 머저리같은 사내들 사이에서. 그래, 분명 그 때의 나는 지금 아이리스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라네아는 그런 아버지를 뿌리치는데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 머저리같은 사내들- 하이윈드가의 사병들을 모조리 거꾸러뜨려야 했던 것이다. 그 끔찍한 기억이 아라네아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내가 괜한 화제를 꺼낸 건 아닐까.

"그... 저기... 괜찮겠어?"

아라네아가 조심조심 물었다. 그녀의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을 보며 아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이럴 때 그렇게나 강단있는 용기사경은 본인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도 면목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이리스는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도 거리낄 것도 없다고 설명하는 대신 자세를 잡고 발도했다.

검을 뽑는 소리 대신, 지축을 울리는 기세와 소리를 가르는 충격파만 남는, 글레이브의 검기.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뿌려진 쾌검이 검집으로 납도되는 순간은 아라네아 정도 되는 전사가 아니면 인식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공간을 갈라버리는 검.

역전의 글레이브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피난민의 호위 대장은 탈코트가 맡기로 했어요. 시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쯤은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아이리스가 검을 놓고 팔짱을 끼며 진심을 드러냈다.

"내가 가긴 어딜가. 딸내미가 그간 뭘 연습하는지도 모르는 아빠 주제에 폼 잡긴. 내가 수염 다 뜯어버릴거야."

아이리스는 이미 검에 숙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선에 나설 수 있다.

싸울 심산인 것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다.

아라네아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리스를 껴안아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멋지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는 팔짱낀 자세 그대로 아라네아의 상찬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아라네아가 아이리스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소박한 의문을 담았다.

"코르 경의 수염은 엄청 짧은데... 그걸 어떻게 뜯으려고?"

아이리스가 콧김을 후웅 내뱉었다.

"짧으면 좋죠. 더 아플테니."

아라네아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저 바다 건너에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에게 짧은 수염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

"웻지."

"빅스."

"뭐하는 거야, 이런 곳에서."

웻지는 턱끝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낚시대를 가리켰다.

"낚시? 잡히긴 하는 거야?"

크리스탈룸의 지하 수로. 그야 물이 흐르고 있긴 하지만, 문명의 때에 찌든 콘크리트로 둘러쌓여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이 곳에서 설마 낚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왕께서 발견한 낚시 스폿 중 하나라더군. 의외로 꽤 잡힌다는 거야. 이그니스경이 알려줬다."

"재상님이? 하하. 고마운 일이네."

"그래. 이그니스경이 장소를 말해주고 아가씨가 날 이리로 쫒아냈어."

"아아. 아가씨가. 그것 참."

기쁘고... 배알 꼴리는 일이네.

아무리 둘만 있고 싶었기로서니.

"아가씨는 정말 언제까지나 아가씨구나."

강한 자는 남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참지 않는다. 그리고 아라네아는 그들 중 가장 강하다.

"동감이다.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기분 탓이냐? 왠지 이를 갈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 아니다."

"이런, 웻지. 등을 밀어드린 건 우리야. 잊지마."

빅스의 너스레에 쿡, 하고 웻지가 웃었다. 무뚝뚝한 웻지에게 농담을 걸어주는 넉살좋은 녀석은 아라네아 용병단에서 빅스가 유일하다.

한숨을 내쉬며, 웻지가 회상했다.

"설마 10년이나 걸리다니. 아가씨가 못하는 게 다 있었지."

"그래... 그 용기사로 이름높은 전사 중의 전사가 꽃을 받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꼴하곤."

"이그니스경, 여기에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눈이 안보이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누가 아니래. 아가씨가 불에 타서 사라졌을 테니까 말야."

그런 아가씨가 지금은 완전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아서, 도를 넘어선 애정 행각으로 사방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니.

처량하기 이를데 없는 웻지를 보며 빅스가 배를 잡고 과장되게 웃었다.

그 폭소가 잦아들었을 때 빅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웻지는 잠자코 빅스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이윽고 빅스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아가씨를... 지켜낼 수 있으려나? 내 감이 그래. 이번엔 정말 위험하다고."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이다. 고작 이 이야길 하려고 그렇게 빙빙 돌아오다니. 그러나 웻지는 빅스를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빅스의 이런 면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웻지는 담담하게 빅스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지 않나. 이미 오래전부터 아가씨는 우리 손을 떠났다."

아픈 곳을 찔린 빅스가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야 그렇지! 나도 알아. 그래도."

"아가씨는 아가씨다?"

"맞아, 그 뭐냐, 아버지의 마음? 같은 거?"

드디어 웻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한심한 녀석, 내가 잘 봐주려 해도.

"관둬, 죽는다."

웻지의 짧은 제지가 빅스를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아, 그렇지. 어르신과 사이가 안좋았지."

"딱 이 문제로."

"맞아. 우리들 전부 때려눕히고 어르신과는 그 자리에서 의절했지. 뭐야, 나 지금 죽을 뻔 했구나. 죽는 거 정말 쉽네."

"잘 아는 놈이."

"하하..."

실없이 웃기 시작한 빅스에게 눈을 한 번 흘겨준 웻지는 다시 한 번 낚시대를 바라보았다. 낚시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 평온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큰 놈이 걸릴 모양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걱정하지 마라, 빅스."

"웻지?"

"마침 때가 됐군. 도착했을 거야. 물건을 보러 가자."

"물건?"

"네 걱정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물건."

"진짜? 진짜냐? 그런 게 있어?"

"허둥거리지 마라. 경망스럽긴."

"웻지!"

웻지는 조심스럽게 낚시대를 챙겼다. 왕이 낚시 초보일 때 사용했다던 귀중한 물건인 모양이다. 상하게 하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그니스가 신신당부했다. 그는 왕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예외없이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 처럼 행동했다. 아라네아의 눈 빛 공격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이 낚시대를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의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

웻지는 기회가 허락했을 때 왕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봐두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빈약하고 여리여리했지만 인상이 밝고 예쁘장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가 그의 감상이었을 뿐이다. 설마 그 선이 가는 청년이 이오스에 빛을 되돌려 줄 영웅왕이었을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웻지는 아라네아 용병단의 격납고로 방향을 잡고 느긋하게 걸었다. 그런 그를 보다못한 빅스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귀찮은 녀석이다.

.

붉게 물든 황혼의 노을과 함께 그들은 찾아왔다.

작은 놈들도 있고 큰놈들도 있었다. 땅을 파고 드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놈들도 있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은 생명체에 대한 집착과 분노와 살의를 두르고, 지평선을 새까맣게 채워 건재함을 과시했다.

지금껏 살아남아 시해를 상대해왔던 글레이브 이하 인섬니아의 병사들은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적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수문장이 죽고, 진형이 무너지고, 메인 게이트가 수비 기능을 상실하기까지 한시간으로 충분했다.

목숨을 잃은 전우들을 뒤로 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은 직감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오늘, 잠들지 않는 도시, 인섬니아는 멸망한다.

우리들은 전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8. 4. 4. 18:45
"슬슬 프롬프토 녀석이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듣자니 지금 햄머해드에 머물고 있는 것 같더군."

"녀석, 시드니에게 가능성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벌써 12년째야.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게."

"글쎄. 서로 마음은 있는 것 같다만."

"뭐? 서로? 프롬프토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글라디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크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만."

"...하하."

"그보다 슬슬 이야기가 나올 때인가."

"그래. 앞으로 2개월 이내에 마지막 토벌이 있을 거야. 남아있는 시해들도 이번이 끝이다. 자세한 것은 프롬프토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봐야 알겠지만."

"길었군."

"그래."

"드디어 그 녀석에게... 면목을 세울 수 있겠어."

"2년이나 걸렸으니까. 슬슬 좀이 쑤셔서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가능성은 있어. 이번엔 왕도에 전부 모일테니. 뭣하면 왕좌 앞에서 기도라도 해볼까."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매력적인 이야기야."

.

프롬프토는 고열을 동반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신탁과 함께 찾아오는 고열은 늘 새롭고 고통스럽다. 이제 곧 뇌를 부수기라도 할 것 처럼 기승을 부리곤 한다. 하지만 신탁은 이미 받았다. 이제 고통이 잦아져야 할 타이밍일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면.

슬슬 타임 리미트인지도 모른다.

원형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근본은 클론. 이제 세포 분열에 한계가 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가령, 지금 당장이라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프롬프토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졌어야 할, 들릴 이유가 없는 환청.

유쾌한 듯 음험하며 꺼림직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검은 찌꺼기 같은, 불길한, 실은 목소리조차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병원체에 불과하면서도 신조차 타락시킬 수 있는.

그저 끔찍한 어떤 것.

- 아, 프롬프토. 가엾은 프롬프토.

시해의 숙주.

- 자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 놈이다.

- 바스티엘에게 실험체를 하나 내놓으라 했었지. 상황을 봐서 왕자님 척추라도 부러뜨리라고 지령을 내릴까 했었는데.

꺼져. 내 머릿속에서 나가.

- 정에 이끌려 절친이 되어버릴 줄이야. 우와, 놀랐어. 아저씨 정말 놀라버렸지 뭐야.

당장 나가!

- 그래서야 명령을 들어줄 리 없잖아. 결국 말야, 허리 아래가 거대한 뱀으로 된 무서운 시해를 즉석에서 만들어서 말야. 아, 끔찍했지 그건. 왕자를 앉은 뱅이로 만들 때 유모를 죽이고 말았지 뭐야. 어쩔 수 없었어. 힘조절이 잘 안됐거든.

그만 둬!

- 찌꺼기 주제에, 너 때문에 애꿎은 사람 하나 죽었잖아? 미안하지? 응? 그래, 사람이 미안해 할 줄도 알아야지. 아차, 실례. 사람이 아니었지.

아딘!

아딘 이즈니아!

프롬프토는 분노 속에서 몸부림쳤다. 마치 코스탈 타워 심층부에서 자바워크의 앞발에 짓눌렸을 때 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다. 하지만 그 때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뭐야?

이거 대체 뭐야?

정신 차려!

아딘은 죽었어!

2년전에!

녹트와 함께!

- 불쌍하게도. 우리 찌꺼기군이 어차피 살아봐야... 응? 앞으로 10년이나 버티겠어? 그러고보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 누구더라, 그 여자, 이름이. 그래, 아무튼 죽기 전에 그 여자 옆에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대려와 줄까?

으아아아아아아!

- 어이쿠 이거. 아저씨 놀랐잖아. 무심코 찔러 버렸는 걸. 이거 어쩌나. 상처, 괜찮겠어?

겨우 생각났다.

이것은 7년 전의 기억이다.

프롬프토가 고대 인섬니아 유적을 찾아 에오스를 이잡듯 여행하던 시절. 고문서를 수집하고, 왕가의 기적에 대해 조사하고, 크리스탈의 권능에 대해 연구했다.

녹트를 살릴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그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다.

그리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그가 나타났다.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고고학자도 뭣도 아닌 프롬프토가 왕가의 흔적을 차례차례 찾아냈던 것이다.

마치 이끌리는 것 처럼.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다만 프롬프토는 그것이 친구의 인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프롬프토 답다면 프롬프토 다운 생각이다.

어리석었다.

피를 토하며 프롬프토가 무릎을 꿇었다.

- 안돼지 안돼. 아저씨, 약속해 버렸단 말이지. 지금 죽으면 안돼.

건드리지마!

날 건드리지마!

- 하하. 괜찮아. 그냥 조금 돌연변이로 만드는 것 뿐이야. 회복력이 좋아지고, 늙지 않게 돼. 이런. 아저씨 누구에게 선물을 주는 거 5년 만이야.

안돼!

- 괜찮다니까. 아프지 않아. 너희들은 내가. 흠, 그렇지.

아딘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 내가 우선 진정한 왕이 된 그 놈의 팔 다리를 떼어 낼거야. 그러고 나서 내장을 파헤치고, 겨우 숨만 붙여 놓은 다음에.

아딘의 눈에서, 입에서, 온갖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 내렸다.

- 그 다음에 그 놈 눈 앞에서 너희들을 한데 뭉쳐 시해로 만들거야. 어때. 기대되지?

프롬프토.

어이, 프롬프토!

- 쉬이이. 좀 자고 나면 개운할 거야. 그래, 새로 태어난 것처럼.

프롬!

.

"프롬!"

프롬프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온다.

"커흐."

"프롬."

청량감이 서려있어야 할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다. 또 걱정하게 만들고 말았다. 프롬프토는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을 맞잡았다. 놈은 사라졌다. 나는 지금 현실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두통이 가시는 것이 느껴진다.

"신디."

침침한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시야 가득하게 시드니의 얼굴이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긴장한 프롬프토는 손에서부터 그 영향이 나타난다. 프롬프토가 시드니와 맞잡은 손에 힘을 뺐다. 하지만 이를 보충하려는 것처럼 시드니의 손에 힘이 실렸다.

마치 프롬프토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신디. 손에, 땀이..."

"바보. 왜 그런 걸 신경쓰는 거야."

"하하..."

"괜찮은 거야?"

"응. 신디가 손을 잡아줘서. 아픈 거 다 날아갔어."

"또 그런 식으로. 장난치지 말고."

"아닌데. 진짠데."

"그만. 슬슬 화가 나려고 하거든."

시드니가 프롬프토의 머리칼을 잡아 살짝 잡아 당겼다.

"아야."

"봐. 너 머리칼이."

"응?"

시드니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프롬프토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프롬프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넌 잘 모르겠지만 자주 이래. 며칠 지나면 돌아와. 안심해."

프롬프토는 내심 놀랐지만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몇 년이나 신탁을 받아와서 관록이 붙은 것일까.

그리고 신디는 프롬프토가 받은 신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 기적을 몇 번이나 목도한 그녀는 프롬프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녀는 프롬프토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롬프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다만 프롬프토는 그 사실이 그저 기쁘고 또 애달팠다.

그리고 프롬프토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신디."

"응?"

"이제... 가봐야겠어."

"왜? 이렇게 갑자기?"

"예감이 좋지 않아. 빨리 친구들에게 알려줘야 해."

"어제까지는 괜찮았다가, 지금 안된다는 거야?"

"응."

"왜 그러는지, 말해줄 수는 없고?"

"...응."

"..."

"..."

"넌."

"..."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신디."

"중요한 건 무엇하나 말해주지 않아."

"...신디."

"휴우."

"저기... 미안해. 하지만..."

"언젠간 말해 줄거야?"

"...그건."

"됐어. 내가 바랄 걸 바래야지. 안그래?"

"미안. 미안해."

"언제."

"응?"

"언제 돌아올거야?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아, 맞아.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프롬프토가 시드니의 말을 되뇌였다. 마지막이다.

"어차피."

"...무슨 말 했어?"

"아냐, 아무 것도."

"그러시겠지. 차 태워줄 테니까, 샤워라도 하고 나와."

"신디."

"응?"

"매번 고마워. 그리고..."

"됐네요."

살짝 웃으며 시드니가 프롬프토의 손을 놓고 떠나갔다.

그 온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프롬프토는 멀뚱히 지켜봤다. 그리고 내려온 신탁을, 검신 바하무트의 음성을 되살린다.

'인섬니아로 향하라'

'다가올 그 때를 생명을 다해 대비하라'

'시해의 군세는...'

프롬프토는 머리를 감싸쥐고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그렇다.

어차피.

손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신디. 어쩌지. 큰일났어."

시드니는 백미러를 통해 프롬프토를 흘깃 바라봤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뭐. 왜."

그리고 시드니의 대응은 적절했다.

"나 졸려."

프롬프토는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킹스 글레이브."

"안돼. 내가 자면 안돼잖아. 신디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시드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이나 못하면."

시드니가 운전하는 차량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가, 프롬프토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잠들기 싫어하는 꼬마아이 같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시드니는 정말로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프롬프토의 정신이 절벽에 매달렸다.

안돼.

자면 안돼.

아까 꿈의 뒷이야기로 연결될 것 같다고.

그 개자식이 있다고.

무섭다고.

...

-아니.

아니야.

너무 두려워서 잊고 있었어.

그거 아니잖아?

그 다음 분명히, 분명히!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프롬프토는 골아 떨어졌다.

잠든 그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

- 커흑

아딘 아즈니아가 검은 피를 뿌리며 뒤로 죽 밀려났다.

프롬프토는 간신히 눈을 떴다.

믿을 수 없었다.

아딘의 머리가 반 쯤 으깨져 있었다. 입가의 미소 또한 사라져, 시해의 음험함만이 남아 있다.

- 어라, 이거 힘 쌘 돼지 새끼가 행차하셨네.

그 앞에 떠 있는 것은, 밝고 푸르게 빛나는- 왕의 병장. 거대한 둔기. 프롬프토에게는 그것에 스치기만 해도 죽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거대한 날이 네개나 얽혀 있는 살벌한 십자 수리검이 나타났다. 그것은 곧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화전하며 날아들어 아딘의 오른 팔을 잘라 버렸다.

- 겁많고 수줍은 공주님께서도 오셨고.

그럼에도 아딘은 이제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았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등 뒤에 나타난 대검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뚫고 나왔을 때에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 그래, 동생아. 네가 오지 않을 리 없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찌르는 방식이 아주 훌륭해.

그리고 그 상처 속에서 아딘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오히려 기쁨. 열락. 그리고 조용히 침잠해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분노.

거듭된 출혈에 체력이 떨어진 프롬프토가 그 소름끼치는 심연에 삼켜지기 직전에, 눈 앞이 푸르게 밝아졌다.

이건-

프롬프토는 이 것이 무엇인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하. 왕자께서 친구를 지키기 위해 아비를 보냈나. 이거이거. 역시 대단하시구만 그래, 응?

부왕의 검.

마지막의 마지막에 레이부스가 전해준,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프롬프토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부왕의 검이 한바퀴, 프롬프토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마치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 처럼.

그리고 목소리를 전했다.

프롬프토는 몽롱한 가운데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검을 잡아, 프롬프토.

프롬프토는 눈물 속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너야?

정말 너야, 녹트?

손에 쥔 검은 따스했다. 곧 강대한 마력이 프롬프토 안으로 스며들었다.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됐다. 어두컴컴한 시야도 금새 밝아졌다. 마력은 신기하다. 위대하고 신성스럽다.

분명 일반인은 쥘 수 조차 없고, 휘두를 때 마다 생명력이 소모된다던 검이었을 텐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정말이야.

녹트야. 녹트가 여기 있어.

- 흥.

그리고 아딘의 전신에서 검은 투기가 폭발했다.

아딘을 견재하던 세 왕의 무구들이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프롬프토는 이제 아딘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녹트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부왕의 검은 터질 것 처럼 빛을 발했고 아딘의 검은 투기는 프롬프토를 감히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 과연 레기스. 뒈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팔팔하네. 정말 아쉬워.

어느 새 아딘은 육체를 전부 회복해두고 있었다.

뇌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뭉게진 머리는 물론, 의복까지 말끔히.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 처럼.

프롬프토는 긴장하며 부왕의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 왜? 한 번 해보려고? 그만둬 그만둬. 친구가 지켜준 몸을 소중하게 여겨.

아딘이 느릿느릿하게 떨어뜨린 중절모를 집어 먼지를 털어냈다. 시해의 모습도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사람좋은 아저씨의 얼굴로 프롬프토를 바라보고 있다.

구역질 날 것 같았다.

- 이거이거. 선물, 아저씨가 받고 말았네.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이게 레기스 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너무 욕심부릴 수도 없는 일이고.

개자식.

이 개자식.

그 말의 의미를 이 때의 프롬프토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악당은 넘어져도 맨손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아딘은 끝을 알 수 없는 악당이었다. 이 때 아딘이, 자신을 공격한 세 역대왕에게 씻을 수 없는 저주를 심어놓은 것도,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지금의 프롬프토는 알 수 없었다. 프롬프토는 그저 자신이 그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 유의미한 만남이었어, 프롬프토오. 감사의 의미로 이제 찌꺼기라는 말은 안할테니까.

프롬프토는 입을 꾹 닫고 참아냈다. 이 놈은 변덕쟁이다. 언제 돌변할 지 모르니까.

아딘은 그런 프롬프토를 보고 피식 웃으며 사라졌다. 프롬프토는 아딘이 자신을 죽이려면 이미 몇 번이나 죽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력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친구가, 아주 소중한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녹트, 녹트, 녹트!

그에 대답하듯 부왕의 검이 날아올라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수염, 그거 안어울려.

프롬프토는 사라져가는 부왕의 검을 보며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 때부터였다.

프롬프토는 신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

시드니는 잠든 프롬프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경련하기 시작하는 프롬프토를 보고 시드니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차를 갓길에 세웠다. 비오듯 땀을 흘리는 프롬프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며, 시드니는 그저 프롬프토가 홀로 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다.

아침과 같았다. 프롬프토는 가위에 눌린 것 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시드니는 프롬프토의 손을 잡고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프롬. 프롬. 시드니에게만 허락된 그의 애칭이었다.

하지만 프롬프토는 깨어니지 않았다.

그리고 곧 시드니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 방울, 프롬프토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던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그를 마음 속 깊이 웃게 하는 것은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다. 그러나 자신할 수 있다. 그를 얼빠진 얼굴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은은하게 미소짓게 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하지만.

프롬프토를 울게 만드는 것은-

"짜증나네."

조금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럴 수 밖에.

프롬프토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존재를.

녹티스 루시스 체럼을.

"죽은 사람을... 이길 수도 없고."

시드니는 프롬프토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급기야 절친의 이름을 웅얼거리기 시작한 프롬프토를, 시드니는 언제까지고 눈에 새겨 두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글라디오는 하얗게 탈색된 프롬프토의 머리칼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퀭한 눈과, 미묘하게 헐떡이는 호흡을 발견했다. 곧 그는 프롬프토의 모든 것이 3개월 전과는 현격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얼굴에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옆에 침착하게 앉아있는 이그니스에게 인사를 건낼 여유도 없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눈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뭐야. 어떻게 된거야, 프롬프토!"

우와, 창문 떨리는 것 좀 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프롬프토가 이마를 짚었다.

"아, 정말. 글라디오. 실내에서 무슷 짓이야. 가뜩이나 머리가 울리니까 조용히 좀 말해줘."

"프롬프토!"

이그니스가 손을 들어 글라디오를 제지했다. 그래도 이럴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그니스가 유일하다.

글라디오는 폭풍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프리트를 쓰러뜨리고, 차례차례 막아서는 3인의 역대왕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 순간, 루시스의 거짓된 왕을 치기 위해 마지막 문을 열 때-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글라디오의 험악한 얼굴이 프롬프토는 오히려 기뻤다. 친구들의 걱정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 것보다 문제는 인섬니아야."

그런 것이라니.

글라디오의 손이 테이블 모퉁이를 으깨 부숴 버렸다. 그러나 프롬프토도 이그니스도 애써 이를 무시했다.

"신탁에 따르면, 시해의 마지막 군세가 전부 모인다는 것 같아. 집결 장소는 인섬니아. 아마도 왕좌. 여기까지는 지난 번 신탁과 같아. 하지만 숫자가."

'...지금까지 토벌한 것 보다 많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해들을 지금까지 몇 만 필이나 해치웠다. 이렇게나 많은 시해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일은 아니다. 밤은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하니.

지금껏 쓰러뜨린 것보다 많은 시해들이 남아 있을 줄이야.

글라디오가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진짜냐고..."

이그니스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틀림없겠지. 2년 동안 우리는 프롬프토의 신탁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까."

프롬프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은 거짓말을 한 일이 없어. 이번에도 확실할 거야."

"글라디오. 모든 글레이브에게 소집 명령. 경계를 두배로 늘리고. 이틀 뒤 계엄령 선포. 비전투원은 일주일 안에 레스탈룸으로 피난시킨다."

루시스 재상 이그니스의 지령에 글라디오의 고개는 끄덕거리는 대신 프롬프토를 향했다. 표정은 여전히 험악하다.

"난 절대로 참가할 거야. 레스탈룸 따위엔 안가. 기어다니면서라도 싸울 테니까."

"프롬프토!"

"글라디오, 그만. 프롬프토... 그 몸으로 괜찮겠어?"

프롬프토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 적당히 도망다닐 테니까. 그런 거 잘 하잖아, 내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프롬프토는 글라디오 이상으로 완강하다. 꺾을 수 없다.

글라디오는 표정을 더욱 엄격하게 굳혔다.

"프롬프토. 절대로. 절대로 내 앞에 나서지마."

"네에,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스 전체의 두뇌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군들을 총동원해 대응책을 모색해야할 때다.

가용 전투 인원. 배치. 트랩과 바리케이트 준비. 병참. 고려해야할 것은 넘칠 만큼 많았다.

상황은 좋지 않다.

절망적이라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프롬프토는 그저 이것이 끝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저 느낌이다. 흉일지 길일지조차 알 수 없다. 신탁에 대한 일이 아니기에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굳이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늘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째서 일까. 프롬프토는 그 어떤 때보다 녹트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혹시 그런 걸까.

녹트가 저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posted by nameless7777 2017. 6. 1. 21:17




왕께서는 조간을 드리운 채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돌연 말을 꺼냈다.




배를 준비해. 알티시에로 간다.




그 때의 울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루나프레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두웠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달 빛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다.

카멜리아 대사와의 회담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딱딱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와 서릿발 같은 대사님의 위압감을 어찌어찌 견뎌낸 뒤로 루나프레나는 가벼운 피로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알티시에가 제국으로부터 루나프레나를 보호하는 것은 그녀가 수신 리바이어선을 소환하는 날 까지인 것으로 합의되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카멜리아 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알티시에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이니까. 그 이상 알티시에가 루나프레나의 안전을 지켜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루나프레나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운명에 묶여 있는 칸나기이므로.

오히려 루나프레나는 알티시에를 걱정하고 있었다. 수신 리바이어선의 성정은 격하기가 그 짝을 찾을 수 없어 검신 바하무트가 한 수 접어줄 정도다. 겐티아나님이 직접 루나프레나에게 경고할 지경이었으니까. 제국의 공격과 상관없이 알티시에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루나프레나에게는 이 우울함을 날려보낼 비장의 마법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수첩을 꺼내 펴들었다. 이 수첩은 녹티스와 주고 받은 문장으로 가득차 있다.

한장씩 넘기며 익숙한 필체를 눈으로 쫓았다. 매일매일, 몇 번이고 읽었다. 이미 그 눈에, 가슴에, 영혼에 새긴 반려의 글자들.

칸나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녹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떠오른다.

무시무시한 시해의 습격을 받아 정신과 육체에 상처를 입은 자그마한 소년. 제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년. 그 아버지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소년. 그럼에도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관심이 고파서- 편식을 고치지 않았던 소년.

그리고, 크리스탈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소년.

한기가 들었다.

그런 소년에게 자신은 말했다. 세상을 지켜달라고. 그리고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 맹세가 어떤 의미인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조금씩 떨려오는 루나프레나의 눈에, 녹티스 왕자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곧 만날 수 있겠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이제 이 수첩조차 자신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녹티스...님..."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수첩을 적셨다.

그를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먼 발치에서 얼굴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이 허락된다면.

하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루나프레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숨죽여 울었다.

이대로 리바이어선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녹티스님이 신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녹티스님께서 크리스탈의 힘을 이어받지 않게 된다면.

그 분께서는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될까?

이제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묻어나오려 할 때, 창밖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루나프레나의 어깨를 감싸안고 살며시 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루나프레나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팔방이 바다인 자그마한 섬 알티시에 자치구에서는 일년 내내 해풍이 불어온다. 제법 찬 바람이다. 그런 알티시에에서 이와 같은 훈풍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바람은 아까부터 계속 불어오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따스한 바람을 타고, 푸른 색의 꽃 잎이 한들 한들 날아들고 있었다.

"...지르의 꽃 잎?"

녹티스 왕자의 눈동자 색을 닮은, 지르의 꽃. 루나프레나는 자신의 방에 언제나 이 꽃을 장식해 두곤 했다. 그녀는 그 꽃을 통해 녹티스 왕자가 자신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 어린 아이 같은 망상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루나프레나는 그 습관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그 부끄럽고 아련한 지르의 꽃 잎이 눈 앞에 있다. 있을 수 없는 바람을 타고 창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 몽환적인 광경에 경도된 루나프레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꽃을 거의 손에 쥐는 순간.

빛과 함께 내려선 존재가 있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칸나기였다. 그녀는 그 빛이 마력 폭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빛이 잦아들자 마력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꽃 잎과 함께 루나프레나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아, 됐다. 진짜 되네."

빛과 함께 나타난 그는 그 자신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이 분은. 루나프레나는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와! 역시 나 쩔어. 진짜 쩔어."

신이 직접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기쁨이 피어 오른다. 기억 속의 소년이 마음을 열고 나서 보여주곤 했던 장난스러운 미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꿈인가.

그것도 아니면 환상인가.

분명히 이것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감상에 젖어 정신을 놓은 탓이다.

그 분께서 지금 이곳에- 올 수 있을 리 없는 것을.

그러나 루나프레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환상이라도 좋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그저 눈 앞의 기적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루나프레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눈 앞의 청년이 신이 나서 말을 쏟아냈다.

"공기는 말야, 덥히면 떠오른다구. 불꽃으로 그 방향을 조절해서 꽃 잎을 실어 창문으로 날려보낸 거야. 그리고 꽃 잎이 도착한 곳으로 워프한 거지. 언제나 무기를 던져서 워프하는데, 꽃 잎이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맞아! 이 모든 게 루나가 마침 창문을 열어둔 덕분... 루나?"

한 참 떠들고 있던 청년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약혼자를 내려다 봤다. 그녀의 눈에는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질 무렵 루나프레나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녹티스...님?"

입을 열면 환상이 부서질 듯한.

그래서 차라리 확인하고 싶지 않은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정말... 녹티스 님이세요?"

그 떨리는 목소리에 녹티스가 숨을 들이켰다.

"어... 어, 그래. 나야. 루나."

나란 놈은 인사도 똑바로 못하는 거냐.

칠칠치 못한 녀석이라고, 친구들이 웃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녹티스는 그제야 자신이 루나프레나의 손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와!"

쑥맥 왕자가 손을 놓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오늘 나 완전 구겨지네."

녹티스가 놓아버린 손에 새삼 한기가 느껴졌다. 왕자님의 따스한 손. 체온. 결코 환상이 아니다. 그는 실재하는, 사랑스러운 왕자님이다.

"녹티스님!"

루나프레나가 녹티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녹티스는 기겁했지만 가까스로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녹티스님, 녹티스님, 녹티스님!"

녹티스가 루나프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루나. 오랜만이야."

녹티스가 속삭였다.

"늦어서 미안해."

"흐윽... 녹티스님... 흑..."

녹티스는 루나프레나가 오열을 멈출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이그니스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녹히스님."

녹티스는 공들여 왕의 예복을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품안에서 금 빛 자수가 고급스럽게 수놓여 있는 손수건을 꺼내 건냈다. 루나프레나가 말없이 그걸 받아 들었다.

"크응."

아, 웃으면 안돼. 안돼는데.

녹티스는 눈을 부릎 뜨고 견뎌내려 했지만 입가로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녹티스는 헛기침을 구사해 상황을 모면했다. 이 또한 이그니스에게 배운 기술이다.

루나프레나는 손수건을 녹티스에게 돌려주려다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손수건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눈치였다. 갈팡질팡하던 칸나기님은 흥건해진 손수건을 모르는 척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미칠 것 같다. 행동 하나하나가 녹티스를 자극했다. 이건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루나는 분명히 나보다 4살 연상일 텐데. 그랬을 텐데.

"녹티스님."

루나프레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올곧은 눈으로 녹티스를 응시했다. 손수건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이제 완전히 진정한 모양이었다.

다만 녹티스는 그간 루나프레나의 귀여운 행동을 모르는 척 하느라 심장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는 도저히 약혼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루나프레나가 녹티스를 재촉했다.

"녹티스님. 손을 주세요."

"어? 어어."

녹티스는 순순히 오른손을 루나프레나에게 건냈다. 루나프레나의 양손이 녹티스의 손을 보듬었다. 곱게 자란 왕자님의 손이 이젠 온통 굳은살 투성이다. 가슴이 조금씩 아려온다.

칸나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했다. 그리고 감지해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마력을.

...그리고 거의 말라 비틀어진 생명력을.

곧 그녀는 전부 알아챘다.

"녹티스님께선... 이미 왕이 되신거군요. 먼 곳에서 되돌아 오셨어요."

그것은 겐티아나님의 힘. 시간조차 얼려버리는 얼음신의 숨겨진 권능. 그 힘을 통해 녹티스는 과거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은 루시스에 되돌려줄 빛을 위해. 사람들에게 미래를 돌려주기 위해. 확실한 승리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그 자신의 죽음을 위해.

"그... 맞아. 들켰네."

녹티스는 장난하다 들킨 어린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뾰족해 졌다.

"녹티스님. 앞으로 일어날 일. 전부 알고 계신건가요?"

녹티스는 입을 열었다. 대답은 짧았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태연하세요!"

루나프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랫 동안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 있는 일이다. 녹티스는 눈을 깜빡였다.

"왕의 힘을 얻고 나면 녹티스님은!"

아아, 그렇지. 루나는 자상하니까. 녹티스는 웃었고, 루나프레나는 여전히 왕자님의 표정이 못마땅했다.

"검신이 전부 알려줬어. 다 알고서 돌아온 거야."

루나프레나는 아무 말도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그녀는 시선을 떨궜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녹티스가 황급히 덭붙였다.

"괜찮아! 각오는 되어 있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그 어떤 일보다 두렵다. 녹티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루나프레나의 입이 더듬더듬 고백했다.

"녹티스님... 저는... 녹티스님에게... 그 사실을..."

숨겼어요.

루나프레나는 차마 마지막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어렴풋하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녹티스는 위엄있는 부왕 레기스의 뒤를 잇게 될 거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이 명징한 미래가 된 것은 왕이 되어 세계를 지켜달라고 루나가 부탁했을 때였다.

그렇다. 누군가 루나프레나를 비난할 작정이라면, 그녀가 왕자에게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겼다는 비정함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루나프레나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루나야말로."

루나프레나는 이미 다시 오열하고 있었다. 녹티스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계에 위기가 왔을 때 칸나기는 왕보다 단명하지. 여섯 신을 깨워야 하니까. 제아무리 칸나기라 해도 목숨을 사용해야 하니까. 난 아무 것도 몰랐어. 레이브스가 말해줬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어."

"...저는...!"

"나는 이제 잘 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는지. 아버지나 루나가 날 어떤 마음으로 지켜주었는지."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루나. 그리고 미안해."

그녀를 지켜줄 수 없다. 자신과는 달리, 일찍 철이 들어야만 했던 칸나기. 어려서 부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운명의 희생자.

녹티스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그 무엇 하나 없었다.

친구들. 학교. 취미. 일상. 자유.

그 무엇하나.

그런데도.

"알아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날. 제국군이 테네브라에 성으로 날 노리고 쳐들어 왔을 때. 난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어. 지금 도망가면 안된다고. 루나가 저기 있다고. 루나와 함께 가야 한다고. 하지만 겁이 나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녹티스가 살짝 눈을 문질렀다.

"그 때 루나의 표정. 잊을 수가 없었어."

사실은 기뻤다. 루나가 세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때. 루나처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부상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자신을 의지했다는 사실에 우쭐했다.

이런 한심한 나라도 그녀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은 환상이었다.

그는 무력함에 몸부림쳤다.

루나에게 그런 처연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루나는 나같은 놈을 위해 스스로 제국군에게 잡혔어.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녹티스님..."

"나한테 실망했겠지. 날 싫어하게 됐을 거야. 그렇게 바닥을 파고 있을 때 움브라가 수첩을 가지고 왔어."

제국군을 피해 달아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그 수첩이었다.

'건강하세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수첩에 적힌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구원받았는지. 루나는 상상도 못할 거야."

"녹티스님..."

"그 때 내가 얼떨결에 답장한 게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보고 싶어.'

그 메시지를 봤들 때의 감정을 루나프레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녹티스 왕자님은 모르실 테지. 그 사소한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이 당신 뿐만이 아님을.

그는, 왕자님은 마치 마법 같았다.

루나프레나는 다시 그 수첩이 자신의 보물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았다.

.

녹티스와 루나프레나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조잘거렸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시간을 전부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녹티스님은 아직도 채소 안드시나요?"

"윽..."

채소라니.

녹티스의 얼굴이 녹즙을 마신 것처럼 구겨졌다. 알티시에로 오기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녹티스는 그 때 왕으로써 준엄히 말했다. '몰볼을 갈아 만든 것 같은 그 액체를, 내 한 모금도 마시지 아니할 것인 즉. 삼가 받들도록 하라, 내 충직한 신하여.'

루나는 녹티스의 한심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안돼요, 녹티스님. 이그니스님이 너무 가여워요."

가여워?

이그니스가?

녹티스의 뇌리에 이그니스의 대답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어린애처럼 채소를 들지 아니하시니, 방법이 없는 것을 아뢰오.'

울컥한 녹티스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왜 이그니스 편을 드는 거야. 이그니스가 날 얼마나 못살게 구는 줄 알아?"

"푸흡."

"루나. 웃지 말고 내 편을 들어줘야지."

"그야 물론이죠. 실은요, 전 녹티스님을 이해할 수 있어요. 늘 생각하거든요. 왜 설탕을 먹으면 살이 찌는지."

녹티스가 조금 놀랐다.

"루나도 그런 생각을 다 해?"

"네에, 물론이죠. 칸나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하니까요. 조리장님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케익 같은 것은 거의 못 먹어요. 저도 그래서 가끔 힘들 때 설탕을 먹으면 지방이 분해되고, 근력이 생기고.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답니다."

"신은 왜 맛없는 걸 몸에 좋게 만든 거야."

녹티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루나. 이 다음 연설 때 채소 먹고 싶지 않으면 굳이 안먹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어?"

"아,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꿈을 꾸게 해줘."

"아하, 아하하하하하!"

칸나기는 체통을 잃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뒤에도 끅끅 거리는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온다.

"하아하아... 배... 배 아파... 녹티스님도 참."

웃음를 겨우 멈춘 루나프레나가 올려다보자 녹티스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티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를 애써 참아냈다. 언제까지고 귀여운 사람이다.

"맞다. 프롬프토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물론이지. 걘 나만 있으면- ...그런데 루나가 어떻게 프롬프토를 알아?"

루나프레나는 자신이 프롬프토에게 왕자님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보낸 경위를 설명했다. 과연 녹티스는 눈을 주먹만하게 뜨고 있는 것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자식...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수줍음이 많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

"?"

녹티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루나프레나가 녹티스의 안색을 살폈다.

"녹티스님?"

루나가 이그니스 편을 든다. 그런가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프롬프토가 루나프레나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입이 자꾸만 삐죽거렸다. 결국 녹티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기 말야, 루나가 자꾸 다른 남자 이야길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네?"

"루나가 글라디오 이야기까지 꺼내면 나 진짜 삐칠지도 몰라. 응. 절대로 삐칠 거야."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굳이 그 말을 정면으로 받았다.

"글라디올러스님은 분명히 녹티스님의 검술 선생님이셨죠. 강한 분이라고. 장래가 기대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녹티스가 울컥 했다.

"그런 근육 고릴라 아무 것도 아니거든."

"네에?"

"내가 더 쎄거든. 요전 번에도 이겼거든."

"어머나."

"삐쳤어. 나 삐친다 그랬지. 갈거야."

녹티스가 일어섰다. 그러면서 내심 자신이 대견하다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른스러운 마무리다. 질투를 대의로 승화시켜 루나를 배려한 것이다. 밤이 깊었고, 더 이상 루나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로 아쉽다. 이대로 계속 함께 있고 싶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루나가 "이제 그만 가보시려구요?" 하고 무난하게 배웅해주는 일만 남았다. 녹티스가 그 말을 기다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 씁쓸하긴 하지만. 괜찮다.

루나프레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말을 자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녹티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느새 루나의 눈은 다시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우 그친 눈물이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쏟아질 것만 같다.

왜, 루나가?

어째서. 어째서야.

프롬프토. 글라디오. 이그니스.

너희들 어디 있어.

나 사고쳤어.

.

의연하게 보내 드려야 한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술은 루나프레나의 명령을 거절했고 눈물샘이 멋대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녹티스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루나프레나는 더욱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억지로 목소리를 자아냈다.

"벌써... 가시려구요...?"

글렀다. 하려던 말과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사려깊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곧 이 한심한 미련이야말로 자신의 진심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녹티스님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신을 깨우는 의식보다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을 줄이야.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그... 애들한테도 비밀로 나온 거라서..."

왕자님도 그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루나의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루나프레나는 생애 처음으로, 칸나기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써,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녹티스님. 친구분들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으세요?"

그 분들과는 지금껏 계속 함께 계셨잖아요.

"저와 함께 있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오늘이 지나면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저와 결혼하는 게 싫으세요?"

계속 기다렸는데.

"저는 녹티스님의 무엇인가요? 왕의 칸나기? 스쳐지나간 사람? 짜증나고 히스테릭한?"

"루나!"

녹티스가 충동적으로 루나프레나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니야!"

녹티스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나 폼잡고 있지만 미칠 것 같고! 루나와 결혼하는 거 절대 정략 결혼 같은 거 아니고! 나 계속 좋아서! 부끄러워서 내색은 못했지만 내 행운 전부 다쓴 것 같고! 그래서!"

루나프레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조금 신음소리를 냈지만 녹티스는 알아채지 못했다.

"나, 나 계속 루나와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나 그깟 수신의 가호 같은 거 필요없는데 루나를 막을 수 없고! 사명이 있으니까! 그래도 놓고 싶지 않은데! 루나와 결혼하고 싶은데!"

녹티스는 자신이 완전히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진심이다. 그것을 루나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녹티스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녹티스의 고백이 멈췄다. 왕자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뇌가 공회전을 반복했다. 더이상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부담스러운 침묵. 그 어둠을 뚫고, 루나가 입을 열었다.

"녹티스님은 왜 말과 행동이 다르세요?"

아직 조금 찌르는 듯 새침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음색이 담겨있었다.

"루나?"

루나프레나는 녹티스에게 대답하는 대신 결심을 굳혔다. 칸나기는 왕을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혼돈에 빠진 왕에게 바른 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루나프레나가 살짝 발돋움 했다. 그녀의 얼굴이 녹티스의 얼굴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녹티스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갛게 달아 올랐고, 체온이 급상승했다. 이 방 어딘가에 불꽃의 신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 이놈, 이프리트. 아덴의 개가 되어 이 나를 암살하러 왔느냐.

그러나 이래봬도 녹티스는 온갖 수라장을 거쳐온 일류 전사였다. 일촌간파가 그의 장기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달아날 필요는 없다. 그는 루나처럼 발돋움했다. 입술은 다시 녹티스와 루나의 키 차이만큼 벌어졌다.

진정한 왕께서 펼쳐낸 절묘한 방어.

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망극하게도 왕자님께옵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었도다.

루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이 늦은 밤에 제 방에 창문을 통해 찾아들어오시고선."

루나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것이야말로 다음 공격의 준비 자세. 최후의 통첩.

"아무 것도 이루지 않고, 이 방을 나가시겠다구요? 그것이 루시스 왕인가요?"

뾰족한 단어에 비해 루나의 어조는 장난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녹티스가 평정을 찾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컥."

루나는 녹티스의 한심한 반응에 설핏 미소를 지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가 공세를 이어갔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니야!"

녹티스가 소리를 지르곤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루나프레나의 고운 눈썹이 짖궂게 휘어졌다.

"그게 아니라?"

왕자가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런 거... 처음..."

"네에?"

"소설이나 뭐 그런 건 봤지만... 이럴 때 어떻게... 잘... 몰라서..."

루나프레나가 입을 딱 벌렸다.

"하, 한 번도요?"

"으..."

"어머나."

이 왕자님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이 반응은 진짜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밤에 약혼자의 방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혹 뒤에 이어질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생각해 두지 않은 채, 녹티스는 그저 루나를 만나러 온 것 뿐이다.

그저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루나프레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지르의 꽃이 만개하는 것 같은 눈웃음을 녹티스는 홀린 것 처럼 내려다 보았다.

아아.

루나다.

그 어린 시절, 자신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준 그녀다. 그녀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녹티스는 이제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루나가 한 번 더 발돋움 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한심스럽게도 아직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나의 입술이 녹티스의 입술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맙소사. 그 감촉에 녹티스는 거의 현왕의 검을 소환할 뻔 했다. 부드러움. 촉촉함. 루나의 입술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녹티스는 본능이 지시하는 대로 루나를 격렬하게 끌어 안았다. 너무 강한 자극이 녹티스의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무의식 중에 루나의 혀를 거칠게 유린하고, 그녀의 타액을 마시고, 그녀를 벽까지 밀어붙혔다. 루나프레나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이 등을 쓸어내리고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다.

몰라. 이젠 모르겠다. 그저 이대로-

"앗..."

그러나 루나의 신음 소리에 녹티스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루나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은 녹티스를 형용할 수 없는 죄악감에 빠지게 했다.

"하아하아... 녹... 녹티스님..."

"...루나. 미안해. 난..."

루나는 계속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걱정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겨우 숨을 고르고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볼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녀는 녹티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저기... 입 맞출 때... 숨은 어떻게 쉬는 거에요?"

? 그런 걸 물어도.

녹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 코로? 쉴 수 있잖아?"

루나는 입맞춤의 여운에 취해 아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에 숨을 쉴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맞네..."

녹티스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루나도 책으로 배웠구나.

나처럼.

그리고 녹티스의 표정이 괴상하게 흔들렸다. 뱃속에서,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려 하는 어떤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이다.

그 모습을 보며 루나프레나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다가 이내 체념한 것처럼 말했다.

"괜찮아요. 웃으셔도."

녹티스는 허리를 꺾어대며 폭소했다. 루나프레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녹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결국 왕을 따라 킥킥거리며 웃고 말았다.

아, 어쩌지.

이제 뭘 하면 되지.

앞 일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

녹티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평온한 날이었다.

루나프레나는 잘 놔뒀던 정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화장까지 마친 채 평소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녹티스의 잠든 얼굴을 줄곧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위대한 루시스의 차기 국왕을 더 당혹케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푹 자고 일어난 녹티스는 어느덧 시간이 정오를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선 자신의 명운이 이미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친구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을 테니까.

녹티스는 즉시 피부에 불꽃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말라붙어 있는 온갖 체액과 얼룩을 불태워 닦아냈다. 땀, 타액, 그리고- 여러가지.

저 멀리 날아가 있는 속옷을 주워 입고, 부끄러워 할 틈도 없이 구깃구깃해진 왕의 예복을 갖춰 입은 녹티스는 주저하면서도 루나프레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 답례로 그녀의 가벼운 입맞춤을 받았다.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 이 기억을 양분 삼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모두 견뎌내고 말 것이다.

녹티스는 문을 열고 루나프레나의 침실을 나섰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패착이었다. 들어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늘 생각이 짧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왕의 참모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벽에 기대어 왕을 기다리고 있던 이그니스가 서서히 벽에서 떨어져 녹티스에게 다가왔다. 그 바로 뒤에는 쓴 웃음을 짓고 있는 프롬프토. 복도 끝에는 팔짱을 낀 채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글라디오.

무표정한 참모의 얼굴을 보며 왕은 생각했다.

프롬프토. 글라디오. 이 자식들아. 보고만 있지 말고 날 구해.

하지만 둘은 왕의 필사적인 텔레파시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녹트."

이그니스의 낮은 목소리가 녹티스의 상념을 박살냈다.

위기. 경고. 이성이 피신을 제안했으나 본능이 위협에 쪼그라들어 녹티스를 단단히 구속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이그니스는 확인차 물었다. 이미 정황근거는 뚜렷하다. 다만 왕의 대답이 필요할 뿐이다.

"너 설마 칸나기 님께..."

"으익?"

"파, 파, 파, 파, 파렴치한 짓을...!"

너무도 큰 충격에 말을 더듬는 이그니스를 처음 본 것은 녹티스가 아직 열살일 때 였다. 그 때 철없는 왕자는 장난감 칼춤이 지나쳐 루시스의 건국 신화를 묘사한 명화를 훼손했었다. 그걸 수선하느라 왕자의 참모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녹티스는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일처럼?

아니, 아무리 그 정도는 아니지.

왜냐하면.

나와 루나는 어제.

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은 왕자의 나쁜 버릇이다. 녹티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루나프레나의 난처한 얼굴이 점점 발갛게 물들었다. 이를 목격한 이그니스의 얼굴에 노기가 쌓여 가는 것을 보며 녹티스는 식은 땀을 흘렸다.

이그니스가 선언했다.

"글라디올러스 아미시티아. 왕을 포박한다."

"...녹트. 미안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글라디오가 복도 끝에서 거리를 한 순간에 좁혀 녹티스를 등 뒤에서 붙잡았다. "다." 왕의 방패의 시련을 거친 그는 더욱 민첩하고 완벽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양팔까지 완전히 붙들린 녹티스는 이젠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의 뇌리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그 입 뿐이었다.

"너 임마, 왕의 방패!"

그러나 글라디오는 그야말로 완전히 작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을 대량으로 방출하지 않는 한 그를 떨쳐낼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친구들에게 영구 제명을 당하고 말 것이다.

프롬프토가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잘못 했잖아. 포기해, 녹트."

그는 녹티스를 결코 편들 수 없는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운 것 같았다. 은연중에 조금 감정이 쌓여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녹티스의 배신감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녹티스는 발악했다.

"지, 짐은 루시스의!"

"짐은 뭔 짐이야. 빼짝 말라서 무겁지도 않은게."

"조용히 해, 녹트!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제국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그깟 놈들 내가..."

"녹트!"

루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왕과 젊은 킹스 글레이브들의 꽁트를 지켜보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녹티스님을 구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오직 그녀 뿐이다.

"저, 저기..."

조금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칸나기의 음성. 킹스 글레이브 전원이 루나프레나를 돌아봤다. 글라디오에게 꽉 붙들려 있는 녹티스는 덩달아 회전. 반 강제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 보게 된 허당 왕자는 이제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루나프레나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친구분들, 언제나 녹티스님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칸나기가 고개를 숙이자 젊은 킹스 글레이브들은 어쩔 줄 모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칸나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녹티스님을 놔 주실 수 없을까요. 따지고 보면 제가..."

유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으니까.

이그니스와 글라디오가 시선만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글라디오가 나직하게 녹티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발광하지 말고. 알아들었냐."

녹티스는 소금이라도 한 덩어리 삼킨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글라디오의 강철같은 근육의 감옥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굴욕. 왕권에 대한 도전. 왕의 방패가 보여준 방자함! 내 결코 잊지 않으리. 골수에 새겨 두리라!

"녹티스님."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녹티스에게 루나프레나가 다가왔다. 글라디오에게 붙들려 있었던 상완에 칸나기의 힘을 불어넣어 근육통을 희석시키고,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녹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씩씩 거리고 있는 왕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저, 저. 한심한 꼬락서니하곤. 이그니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그니스가 고개를 숙였다.

"칸나기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시길. 알티시에 대사께는 양해의 말씀을 올려 두었습니다. 이 근처를 제국군이 침범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어서 글라디오도 사죄 말씀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우리 왕이 저기... 바보는 맞지만... 근본이 나쁜 놈은 아닙니다."

루나프레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이그니스님. 글라디올러스님. 감사합니다."

왕의 참모와 방패가 사과하는 동안 쭈뼛쭈뼛 기회를 엿보던 프롬프토가 앞으로 나섰다.

"칸나기님! 저는 프롬프토 아르젠툼인데요!"

"아, 플라이나를 지켜주셨던."

루나프레나가 그를 바로 알아보고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프롬프토님. 녹티스님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프롬프토는 감격에 젖어 펑펑 울어버릴  뻔 했다. 하지만 그는 햇병아리라 한들 어엿한 사진사. 힘들 때 일수록 포착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루나프레나님. 이것을..."

그 손에는 사진이 세 장 들려 있었다. 루나프레나님의 거처에 녹티스를 포획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사진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루나프레나가 한장 한장 확인했다.

녹티스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진이 한장.

쫙 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멋지다기 보다 부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한장.

친구들 세 명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한장.

"아..."

루나프레나의 입가에 미소. 눈가에는 눈물이 걸렸다.

"고맙습니다. 프롬프토님. 평생 간직할게요."

이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이란 말인가.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자태에 프롬프토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물러섰다.

루나프레나는 눈가를 닦고 자세를 단정히 했다.

"이그니스님. 글라디올러스님. 프롬프토님. 앞으로도 녹티스님을 잘 지켜주세요."

왕을 지킨다.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왕의 방패가 대표로 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이그니스와 프롬프토의 눈에도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왠지 녹티스가 곁에서 완전히 대화에서 소외된 상태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지만, 루나프레나는 그에게 섯불리 주의를 줄 수 없었다. 선왕 레기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녹티스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관대했으므로.

.

그렇게 녹티스 왕자와 킹스 글레이브는 알티시에 대사 관저에서 3일 동안을 신세지게 되었다. 카멜리아 대사는 펄펄 뛰었지만 결국 그들의 체제를 허락했다.

그들은 루나프레나와 함께 세계의 위기, 왕이나 칸나기의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음은 물론 특별한 일은 조금도 없는 시시한 나날을 보냈다. 이그니스의 요리를 맛보며 녹티스와 루나프레나는 연신 웃었다. 그런 둘을 프롬프토는 사진에 담있고, 글라디오는 그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짧은 시간이었고, 모두가 더없이 행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굴레의 끝에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

그리고 운명의 날, 루나프레나는 시민들의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세계의 위기. 어둠의 위협. 인지를 초월한 신의 뜻을 말씀으로 전환하는 칸나기의 연설은 대개 비유와 암시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시민들은 오늘의 연설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칸나기께서 모든 사람들이 들었으면 한다고 하셨음에도, 선뜻 와닿지 않는 말씀 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애로우신 당대 칸나기님은 신의 뜻을 곡해하는 사람들을 경계해 선문답을 자제해 왔으니까.

하지만 시민들이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했다.

그 연설에 담긴 암시. 즉 앞으로 일어날 일. 적이 가진 절망스러운 힘과 강대한 어둠의 군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되찾아야 하는 새벽의 빛. 오늘 칸나기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실은 녹티스를 향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왕을 향한 격려였으며 당부였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약속된 왕과 칸나기의 맹세였기 때문이다.

루나프레나의 의연한 눈빛을 마주하며 녹티스는 다시 의지를 굳혔다.

걱정하지마, 루나.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에게 다가올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철이 들기도 전에 이미 그 운명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의 그 올곧은 마음과 그녀가 겪었을 슬픔이 못내 안타까웠다. 미처 참아내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녹티스는 눈물을 닦아내는 대신 반려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눈물은 곧 멈췄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9. 21:39





썩 꺼져라.





내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테니.





.

첫 인상은 사마귀였다.

그리고 녹티스는 곧 놈을 고작 사마귀 따위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사마귀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습격하지도 않는다.

녹티스는 놈의 얼굴을 응시했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조악한 표현이지만, 방금 지옥에서 뛰쳐 나온 것 같은 면상이다. 고교 시절 프롬프토와 집안의 불을 전부 꺼놓고 함께 봤던, 트라우마 레벨로 끔찍했던 공포 영화보다 그로테스크하다.

녹티스는 지금 당장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야. 난 그저 곤충을 싫어할 뿐이야. 너도 그렇지? 응? 프롬프토.

젠장.

젠장젠장젠장.

이제와서 그럴 수는 없다.

내 얼굴엔 왕자의 체면이라 하는 귀찮은 것이 발라져 있다. 이것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얼굴이 썪어나가기 시작할 터이다. 쿨하고 잘생긴 마스크에 패배자의 낙인이 찍힌다.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무섭다.

면상도 흉상이지만 우선 덩치가 크다.  높이만 해도 8 미터는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크기 뿐만이라면, 놈보다 큰 몬스터도 잡아봤다. 마력을, 세계의 근간을 몸에 걸친 녹티스는 알 수 있었다. 놈의 힘은, 그 절망적일 정도의 힘은 완전히 격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기적적일 정도로.

문득 이 놈의 존재를 몰랐던 척, 알아채지 못한 척 애써 피해다녔던 과거가 떠올랐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놈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소름이 돋고, 암담하고, 볼수록 공포가 깊어질 뿐이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사마귀의 집게 발에 해당하는 앞 발이 몸통에 좌우 세 개 씩, 무려 여섯 개나 된다.  그 앞 발에 달려있는 손톱이랄까, 주먹이랄까. 애초에 저걸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방금 저 게젓갈 같은 놈이 세개의 왼팔과 함께 집게 같은 손톱을 휘두르자 제국 최신예 대량 학살형 마도 아머가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내가 맞는다면 아마 물렁뼈 하나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손톱을 발사하는 공격에 와서는 그저 소름이 돋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면 놈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걸로 내 허리는 절단나겠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 흉흉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글라디오의 하반신 보다도 훨씬 튼실해 보이는 4개의 다리이며, 몸체 뒷 편에는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훨씬 두꺼운 꼬리가 달려 있다. 녹티스는 곧 놈이 가볍게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건장한 마도병 셋이 장작개비 처럼 날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아라네아 같구나. 노력하면 전설의 용기사가 될 수도 있겠어.

자기가 생각해낸 농담에 실없이 웃으며 녹티스는 괜히 우쭐해졌다. 언제 어느 때나 여유를 찾아내는 나의 이 그릇이야말로 왕의 덕목이지. 그렇게 자평해본다. 머릿 속에 세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만, 이 정도로만 하자.

슬슬 농담할 때가 아니니까.

이제 집중하지 않으면 아딘은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고를 덜게 될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열심히 했다. 아직 그 정도 여유는 있다. 그렇게 믿으며, 녹티스는 놈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봤다. 나는 저 무도한 놈에게 마도병처럼 허리를 강제로 접히고 싶지 않으니까.

나굴파르.

사람을 먹고, 시해를 먹고,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그 힘을 흡수하는 존재. 저주스런 시해이면서도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류의 천적. 저 급하고 성질 더러운 리바이어선조차 저 녀석을 쉽게 어쩌지는 못하리라.

꼴 좋다.

내가 오늘 저 놈을 쓰러뜨릴 테니까, 잘 보고 나서 나에게 충성을 맹새하도록. 알았냐? 이 살찐 동갈치 자식아.

.

"정말 저거랑 싸우는 거야?"

프롬프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탄환을 장전하고 있다. 일반인에 불과한 그도 전투를 거듭하며 썩 괜찮은 전사로 성장했다.

녹티스는 이 끈기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프롬프토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녹티스는 누구 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녹트에게 달렸지."

이것은 이그니스다. 안경을 고쳐쓴 왕의 참모는 약점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굴파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통찰력에 녹티스 일행은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척봐도 장난 아닌데. 그래도 물러설 수야 없지."

글라디오가 꿈틀거리는 근육을 갈무리했다. 아직 녹티스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글라디오는 나굴파르가 자신의 투지를 읽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방패. 녹티스가 검을 던지는 순간 뛰어나갈 준비를 해둘 뿐이다.

등 뒤에 있는 친구들을 느낀 녹트가 목소리에서 힘을 풀었다. 들켜도 어쩔 수 없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강한 왕자니까.

그런 걸로 되어 있으니까.

"저 놈 죽이고 등뼈라도 뽑아가면 되겠지."

엔진 블레이드를 소환하며 녹티스가 사소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 할아범, 정체가 뭐야? 왜 저런 걸 알고 있어?"

"내말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냥 뼈나 챙겨다 줘보자고."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을 담았다. 그 가벼운 어조에 녹티스의 어깨도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상대다. 마력이 없다하더라도 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텐데, 친구들은 겁을 먹거나 주눅든 기색이 없어 녹티스는 마냥 든든했다. 나도 좀 더 힘을 내서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고양감이 솟아났다.

할 수 있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쉿."

녹티스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이그니스가 왼손 검지를 입가에 세우며 주의를 촉구했다.

"놈의 등 뒤로 마도 아머가 접근하고 있어. 놈이 돌아서는 순간 돌격한다."

글라디오가 크게 어깨를 돌린다.

"좋아. 한 판 떠볼까."

프롬프토는 잘 숨겨둔 두 번째 총의 장전도 마쳤다.

"언제라도 좋아."

그리고 나굴파르와 마도아머의 교전을 확인. 마도아머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기대하며, 이그니스는 품안에서 꺼낸 마법병을 쥐어 부쉈다.

"가라, 녹트!"

녹티스가 정제하고 이그니스가 재련한 마법의 힘이 엔진 블레이드에 깃들었다. 녹티스는 마력으로 충만해진 엔진 블레이드를 나굴파르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 던졌다.

-그것은 처절한 사투였다.

이 때 녹티스가 사용한 포션과 엘릭서는 실로 48개.

녹티스는 그 외에도 일반인에게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인 제국 마도병 전용 근육 강화제, 흥분제와 같은 전투 약물도 8개나 사용했다.

소중한 엔진 블레이드는 이가 다 빠져 버렸고, 왕가의 힘은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이나 빌렸다.

승부가 났을 때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이그니스. 녹트는?"

"아직 자고 있어."

"어제도 굉장했지, 녹트."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녹티스는 나굴파르를 상대하는 동안 제대로 땅에 내려 서지도 않았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놈의 반격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나굴파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을 쉴 새 없이 이어갔고, 온갖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친구들을 지켜냈다. 방패를 소환해 막아내고, 얼굴을 직접 공격해 시선을 돌리고, 검을 휘둘러 나굴파르가 발사한 손톱들을 튕겨냈다.

과연 영웅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왕자의 형제들은 나굴파르의 힘을 피부로 느끼며 전율하면서도, 왕자의 비호 아래 움츠러드는 일 없이, 최강의 적을 상대로 완벽한 성과를 일궈냈다. 프롬프토의 저격은 나굴파르의 두 눈을 모두 터뜨렸고, 이그니스는 화염으로 놈의 외골격을 무력화시켰으며, 글라디오의 검격은 무방비가 된 몸통을 거의 반절이나 잘라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녹티스 왕자가 힘을 쥐어짜 왕가의 무기를 소환, 나굴파르를 섬멸하는 모습을- 여력을 남긴 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유롭거나 통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글라디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그래."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디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그니스의 표정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서.

"녹트가 소환한 왕의 무기는 틀림없이 열 세개였어."

"그래. 나도 다시 확인했다."

녹티스는 세 친구들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왕의 무기를 수집했다. 그 수량은 분명히 열 개일 터. 프롬프토가 굳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된거야? 설마 세 개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프롬프토다운 말이다.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그니스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중 하나는 '칸나기의 역모'. 루나프레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거야. 칸나기 취임식에서 계승하셨지."

글라디오가 이그니스의 말을 받았다.

"하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이런 젠장. 믿을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글라디오를 힐끗 바라봤다.

"못 알아볼 이유가 없어. 그건 선왕...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말도 안 돼..."

프롬프토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분명히 라디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들었다. 폐하의 검은 분명히 제국이 가져갔다. 마치 전리품을 챙겨 가는 것 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 때 녹티스의 얼굴은- 프롬프토는 절대로 잊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글라디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자 초조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나쁜 버릇이다.

"녹트.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왜 우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거야."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허물을 조용히 질책했다.

"그만. 글라디오. 녹트는 인섬니아의 차기 왕이다. 우린 녹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그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마, 글라디올러스."

그 말에 프롬프토가 어깨를 움찔 거렸다. 이그니스가 가시돋친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녹트가 마력을 넣으면 평범한 음료수가 생명의 물이 되지. 녹트가 축복한 지저분한 깃털 장식에 기원하면 죽어가던 사람도 되살아나. 녹트는 매일 이런 걸 산더미처럼 만들고 있어. 우리가 써야 하니까. 매일 수십개씩 사용하니까. 무거운 무기도 평소에는 녹트가 보관해 주고 있지. 캠핑 도구도, 텐트도 전부. 그리고 우리는 녹트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해."

감정을 드러낸 이그니스는 멈추지 않았다.

"녹트가 사용하는 순간 이동. 한꺼번에 소환하는 왕의 무기. 그것들 모두 엄청난 심력을 필요로 하지. 무사수행? 영광의 상처? 글라디올러스.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녹티스가, 차기왕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그 마지막 말.

그 마지막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글라디오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굴욕적이다. 이그니스."

글라디오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근육이 조여 꿈틀거리고, 얼굴을 길게 수놓은 상처가 일그러진다. 글리디오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새어나왔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아미시티아에게 감히. 레기스 폐하께서 어떤 심정으로 인섬니아를 지키고 계셨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방벽을 치고 계신 것을! 감히,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그 참된 아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마지막에는 거의 사자후와 같은 고함으로 변해 있었다. 글라디오가 자신의 특대검과 방패를 동시에 소환했다.

"따라와. 겁이 난다고는 하지 않겠지."

이그니스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창과 단검을 꺼내들었다.

"얼마든지."

일촉즉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두 사람에게서 여유를 앗아가고 있었다. 녹티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그니스를 격동시켰고, 글라디오의 민낯을 폭로했다.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조용히. 두 사람 모두 다행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다. 상상 이상의 박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프롬프토가- 이토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처음 봤다.

프롬프토가 텐트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녹트의 귀가 잘 안들리게 된 것 말야."

프롬프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그랬으면 지금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봤을 테니까."

프롬프토가 흘린 청천벽력같은 말에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동시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집중력이 흩어져 무기를 현세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뭐?"

"지금, 뭐라고?"

당황한 두 사람에 비해 프롬프토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말한 대로야. 녹트, 귀가 점점 안들리고 있어. 어제도 왕의 힘을 엄청 사용했으니까, 아마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너희 둘은 그런 것도 몰랐나, 하는 비난의 어조가 아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그 뿐이다.

하지만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녹트는 우리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하잖아?"

"어제의 움직임도 청각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하지만 프롬프토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녹트는 언제나 우리들을 신경쓰고 있어. 왕의 힘인지 뭔지로 어떻게든 하고 있겠지. 하지만 잠을 잘 때는 달라. 반응이 다르다고. 요즘에는 정말 죽은 듯이 자. 건드리지 않으면 뒤척이지도 않아."

"..."

"..."

짐작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녹티스는 요즘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아침잠도.

두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프롬프토의 어조는 거의 타이르는 것처럼 바뀌었다.

"이그니스가 말했지. 어려운 일은 전부 녹트가 대신 해주고 있다고. 그 말이 맞다면, 녹트가 자는 동안에는 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는 것도 신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잖아?"

"...미안하다."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냐."

면목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글라디오의 표정도 침울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할 시간이야. 내가 녹트를 깨울테니까. 두 사람, 얼굴이 아직도 험악해. 좀 진정시키고 와. 그 다음부터는 평소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글라디오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그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쭈뼛쭈뼛 다가왔다.

"프롬프토. 미안하다. 너에게만..."

"응? 신경쓰지 마. 이런 건 나에게 맡겨."

어느 새 프롬프토가 예전처럼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이그니스는 겨우 눈치챘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간 프롬프토가 그대로 텐트 안으로 사라지더니, 언제나처럼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프롬프토! 하지마! 하지 말라고!" "우이! 드러!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네!" "너 임마!" "얼른 일어나 잠탱이 왕자님! 지금 몇 신줄 알아?" "아 진짜 바지 벗겨지잖아!" "오늘 초코보 보러 가자고! 어제 약속 했잖아!" "초코보 말고 거울로 니 머리털이나 보라고 이 화상아!" 화를 내며 텐트에서 기어나오는 녹트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프롬프토는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로 녹트와 어울리고 있었다.

당해낼 수가 없다.

결국 글라디오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놈은 당췌... 이길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설핏 알아채고 있었다. 저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프롬프토는 그저 녹티스와, 우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프롬프토는 강하다. 어째서인지 절로 웃음이 흘러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정말이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여유를 발견한 글라디오가 얼마전에 새로 얻은 이마의 상처를 긁적였다. 마침 이그니스도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낸 글라디오가 한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그니스. 저기, 뭐냐."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언제나 그렇듯, 글라디오보다 솔직하고 어른스러웠다.

"미안하다, 글라디오. 진실된 왕의 방패에게 내가 말이 심했다. 우리들 중 녹트가 가진 왕의 자질을 가장 믿고 있는 건 너였지."

글라디오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아버지나 불사장군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 참, 이 놈의 성질 어디가서 갈아마시던가 해야지."

"또 무사수행을 나가겠다고 하면 곤란한데."

"흐하하. 안가 안가. 저것들 두고 내가 어딜가."

녹트는 이제 프롬프토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었다. 땅바닥을 굴러 흙투성이가 된 프롬프토는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왕자의 겨드랑이 분비물을 조합하면 신경작용제를 만들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녹트는 팔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넣었지만, 글라디오가 보기에는 여전히 젓가락 같았다. 언제까지나 빈약한 녀석이다.

그 장난질을 구경하며 이그니스도 간신히 감정을 정리했다. 이 여행, 정말이지 질릴 틈이 없다.

"식사다. 글라디오. 오늘은 채소가 없는 걸로 하지."

글라디오는 참모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했다.

"찬성이다."

그리고 잠시 후 녹티스는 흔한 샐러드 한 조각 없이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특선 가루라 스테이크 두 덩어리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녹티스는 거의 사랑을 고백할 것 같은 눈으로 이그니스를 쳐다봤지만 이그니스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예상대로였다.

스테이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

그리하여, 녹티스 왕자가 계획하고 있던 몬스터 토벌 미션은 모두 종료되었다. 녹티스와 그 동료 헌터들은 이오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베히모스를 쓰러뜨렸고, 몹시 끔찍한 용종과 뱀들을 차례로 사냥했으며, 귀찮게도 하늘로 도망치는 잡것들까지 전부 깔끔하게 처리했다.

마지막에는 임섬니아의 역대 왕들이 지하에 봉인한 모든 잠재적인 위협들을 제거함은 물론, 이 모든 존재들을 전부 합한 것 만큼이나 끔찍한 나굴파르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 망국의 왕자와 그가 목숨보다 아꼈던 세 명의 킹스 글레이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의 추도식에서 밝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