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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09 죄인 이야기. 01
  2. 2018.03.09 죄인 이야기. 프롤로그 2
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9. 19:56
익숙한 적막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홀로 구속구에 전신을 묶인 채 상태로 독방에 구금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기사단장 4명과 특무대를 구성. 모두의 힘을 합해 악마신 아스모데우스를 토벌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인류 최대의 숙적을 쓰러뜨린 특무대장을 이렇게 취급해도 괜찮은 건가.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죄인이니까.

게다가 그 전투 중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번에야말로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장차 신의 도구로 사역당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터.

"쓸모없어졌군."

그렇게 중얼거린 때였다. 독방의 문이 열렸다.

"당치 않습니다."

붉은 기사 정복에 딱 벌어진 어깨. 균형잡힌 몸매에 1.9 미터에 달하는 큰 키. 정돈되어 있는 기감. 등에 메고 있는 것은 가문의 주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창. 스쳐 지나가게 되면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될 법한 남자다.

"랜슬롯 경."

붉은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이란 칭호가 오늘처럼 부끄러웠던 날은 없습니다."

"괜찮다면 상황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대장이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지 3일 지났습니다. 신전과 기사단 설득에 시간이 걸려 모시러 오는 것이 늦었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방금 눈을 떴을 뿐입니다."

어느 새 다가온 붉은 기사가 구속구를 하나 하나 풀기 시작했다. 섬세한 손길이다. 부상자인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겠지. 죄인인 나에게 조차 그 성정을 바꾸지 않는다. 랜슬롯 경이 기사 중의 기사라 불리우는 이유다.

랜슬롯 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흠.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랜슬롯 경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대장은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어떻게 말입니까."

랜슬롯 경은 계속 구속구를 풀어내며 말했다.

"그 날의 전투 영상을 전부 일반 공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특무대 사이의 불협화음과 추태까지 전부."

랜슬롯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당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공개해 버려도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랬다면 대장은 지금쯤 마을 꼬마들 사이에서 신의 사도라 불리우고 있었겠지요. 안심하십시오. 원로회의 늙은이들도 그 영상이 공개되면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정말이지 아둔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해 주기로 했다.

"뒷 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각오한 바입니다."

"기사단장들의 반발이 있었을텐데요."

"만장일치였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상쇄될 정도의 공입니다. 공을 취해 나눈다면 넷이서 기사단의 중추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지 않은 일로 권력을 잡아봐야 그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경솔한 짓을 하셨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경은 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구속구를 풀어내는 손이 멈췄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 경고했다.

"제 몸에 걸려있는 금제는 그대로 입니다. 이는 신께서 아직 제 원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음을 증명합니다."

"그런 정도로 제가 일을 그르칠 거라 생각하십니까. 신께서 가라사대, 원죄를 거둘 수는 없으나, 사람으로써 사람의 법도를 따를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 신탁이 있다니. 너무 상황이 형편 좋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저는 대장의 원죄에는 관심 없습니다. 어차피 이 몸은 그 날 이미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당신이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면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구속구가 전부 풀렸다. 나는 땅에 내려섰다. 손목을 주물거리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그 날의 전투를 마음 속으로 다시 그려 본다. 랜슬롯 경이 곁에 있었고, 테스타롯사 경과 조르쥬 경이 지원해 주었다. 게다가 숨통을 끊은 것은 멜리나 경이다. 내 마지막 발차기는 그저 화풀이에 불과했다.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 것은 내가 아니다. 실로 그렇다.

내 말에 랜슬롯 경이 눈이 크게 떴다가, 가늘게 좁혔다가, 가볍게 탄성을 냈다. 뭔가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이다.

"과연. 대장 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대장이 없었다면 우린 전부 죽었습니다."

이 또한 모두가 인정한 사실입니다, 하고 랜슬롯 경이 덧붙였다. 늘 생각하지만 겸손함이 지나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랜슬롯 경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랜슬롯 경은 존경할 만한 기사다. 내가 특무대장이 되었을 때 경은 기사단장이면서도 나를 대등한 전사로 대우해 주었다.

심지어 죄인에 지나지 않는 나와 함께 전술을 연구하고, 창술을 연마했으며, 진심으로 나를 따라와 주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실력자란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가.

그랬다. 그에게 조금만 야심이 있었더라면. 아깝고도 아까운 인재다. 내가 입밖에 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랜슬롯 경의 표정이 신묘해졌다.

"그...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던가. 랜슬롯 경이 말하기 괴로운 것처럼 말했다.

"이제 대장에게 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박하고 완고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어가봐야 더이상 그에게 먹힐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방을 걸어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나에게 랜슬롯 경은 황송스럽게도 가문의 창을 빌려주었다. 랜스 오브 카인이 지팡이 대신으로 사용된 일은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리라. 심지어 나는 방금 전까지 공식적으로 죄인이었다.

"저에게 날붙이를 쥐어주시면 어찌합니까."

"무한한 영광입니다."

틀렸다. 아까부터 뭔가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방 바깥에는 세 명의 기사가 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멜리사 경. 테스타롯사 경. 조르쥬 경.

왕성이 자랑하는 4인의 기사단장이 모두 모인 것이다. 죄인인 내가 이 사람들을 이끌고 아스모데우스 토벌 특무대를 구성했다는 것이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테스타롯사 경. 무탈하셨습니까."

그는 검은 갑주를 입었던 쌍검 기사. 테스타롯사 가문의 가주. 나이는 이미 장년에 접어들었으나 갑주 착용자의 기량은 신체의 노쇠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수십년의 경험을 통해 쌍검 뿐만 아니라 투검, 박투 등 다방면에 걸쳐 전투 기술을 숙련해두고 있다.

다만 그의 갑주는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때는 미처 신경쓰지 못해 나에겐 다소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테스타롯사 경이 감개무량한 눈 빛으로 오른손을 쥐고 심장에 올려 붙였다.

"목숨을 빚졌소이다. 내 이 은혜는 평생을 통해 갚을 것이니."

전에는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아 주었기에, 이 태도의 변화가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무사해 보여 다행이다.

테스타롯사 경으로써도 아직 내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 였으리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와 교대하는 것처럼 근육질의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몸은 괜찮냐? 이런 비실비실한 놈이 아스모데우스와 일기토를 벌였다니."

키가 2미터를 훌쩍 넘는 궁기사 조르쥬 경이다. 기사답지 않은 언행은 그의 의복 같은 것이다. 그는 예의를 중시하는 기사단에서 단지 실적만으로 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스모데우스를 애꾸로 만든 강궁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한결 수월했습니다."

조르쥬 경의 푸른 갑주가 마음을 먹고 저격을 시작하면 그것은 천재지변에 가깝다. 누구도 그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켁. 그만둬 그만둬."

조르쥬 경은 손사래를 치고 뒤로 물러섰다.

"대장."

고개를 돌린 곳에는 멜리사 경이 있었다. 가벼운 예장에 허리춤에 얇은 레이피어를 차고 있을 뿐이지만 그 기백은 틀림없는 기사단장의 그것이다.

"멜리사 경."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저 무시무시한 노란 갑주의 장착자일 거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랜슬롯 경이나 테스타롯사 경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녀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일격에 목숨을 빚지고 있다.

그녀가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이건... 상상 이상이군요."

"?"

"마음에 직접 울리는 플러팅이라니."

"네? 지금 무슨 말씀을..."

등 뒤로 랜슬롯이 필사적으로 손사레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세로 손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니까.

조금 추울 정도였다. 슬슬 그만뒀으면 한다.

"뭐, 좋아요. 랜슬롯 경을 가장 존경하는 대장. 저도 대장에게 그 존경이란 걸 받고 싶네요."

어라. 내가 그런 말을 입밖에 냈던가.

"멜리사 경!"

랜슬롯 경이 그 답지 않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랜슬롯 경은 헛기침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대장을 숙소로 모십시다. 멜리사 경. 대장에게 간단한 회복 법술을 부탁합니다."

멜리사 경의 눈썹이 묘하게 휘어졌다.

"그런 것은 섬세하고 남자다운 기사 중의 기사께서 하셔야 할... 아, 네, 알았어요. 농입니다. 그리 노려보실 것까지야."

그리고 나는 전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9. 19:08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왔다.

척추가 기능을 잃기 시작하고 있었다. 등뼈에 손상을 입었는데도 무리하게 움직인 탓이다. 허리 아래의 감각은 거의 없어진 상태다.

눈이 침침해지고 졸음이 온다.

그렇게 잠이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슬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어째서 그들은 나에게 회복 법술을 걸어 주지 않는 것일까. 마력이 떨어졌을리는 없을 터.

나는 내버려둔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 안돼! 이 자는 죄인이야!

청각 기능에 손상이 있어서 소리를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마치 귀에 확성기를 대고 힘껏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상을 입은 고막이 터질 지경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 똑바로 말해! 대장이다! 대장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이기지 못했다! 여기까지 해내지 못했다고!

- 그걸 보고도 그러는 거야? 맨몸으로 아스모데우스와 겨루는 걸 보고도? 이 자는 인간이 아냐! 아스모데우스도 없는 지금 이 자가 회복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 그만, 그만!

- 그렇잖아! 우리가 이 자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너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넌더리가 난다. 그러나 익숙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신탁의 형태로 나에게 불리한 이야기라도 들었을 것이다. 오라클이라 불리는, 위대한 신의 음성이 뇌리에 직접 꽂히는 것이다.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로 이름 높은 그들 역시 인간이다.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이해한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아스모데우스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 !? 뭐, 뭐야?

슬슬 그들도 눈치를 챈 것 같다.

- 아스모데우스? 살아있는 거야?

- 아직 이런 투기를? 말도 안돼!

끔찍하게 압축된 근육 덩어리 같은 4미터의 육체. 여섯 개의 팔. 더이상 신으로써의 지성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 같은, 광기로 덧칠된 눈.

악마신 아스모데우스가 그 거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로부터 느껴지는 투기는 한 번 쓰러지기 전에 비하면 허세에 가깝다. 마지막 발악일 뿐이다. 그에 반해 이쪽은 기사단장급 전투 갑주 4기가 모두 건재하다. 그러므로 전원이 달려들면 승산이 있다. 몇 번이고 해왔던 일이다.

하지만 성대가 갈려나간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단장들이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온 역전의 용사들 답지 않게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허나 아직 죽을 수 없다. 이들 또한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시민들을 위해 기꺼이 사지로 뛰어든 이들을. 기사단장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지휘를 받아들이고, 특무대로써 기꺼이 자살 임무에 참가한 전사 중의 전사들을.

- 이럴수가?

- 대, 대장!

기사단장들은 아스모데우스가 부활한 것 보다 내가 일어선 것이 더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런 그들에게 최소한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투기를 돌려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3분이 고작이다. 그러니까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아스모데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진형을 잡았으면 좋겠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일격이 강한 개체를 포위하는 것으로. 이왕이면 순간 화력이 높은 2번 패턴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때 멈춰있던 4기의 전투 갑주들이 나를 중심으로 포메이션을 잡기 시작했다. 손가락 가득히 투척용 단검을 꼽아둔 검은 갑주가 내 오른 편에, 그레이트 보우를 장착한 푸른 갑주가 내 왼편에. 다른 갑주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은 거대한 노란 갑주는 후방으로 이탈. 마지막으로 4미터가 넘는 장창을 쥔 붉은 갑주는 내 바로 옆에 섰다.

놀랍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포메이션 2. 내가 원하던 그 진형이다.

과연 기사단장들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력이 없어 전투 갑주를 입지 못하는 나를, 재능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기사단장들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를 자각한다면 나도 편해질 텐데. 방금과 같은 의심도, 견제도 필요없어질 것이다. 보통이라면 직접 말해줘도 괜찮겠지만 죄인에게 그런 입은 달려있지 않다.

붉은 갑주가 말없이 나에게 창을 내밀었다. 붉은 갑주의 창에 내장되어 있는 내 전용 창이다. 붉은 갑주의 거대한 창에 비하면 길이도 반도 안되고 두께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제 부터 나는 이 비루한 창을 들고 3미터에 가까운 거인 병기와 호흡을 맞춰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야 한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합격에 임하기 위해서 나는 붉은 갑주 보다 네 배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노란 갑주의 기척이 사라진 순간.

나는 붉은 갑주와 돌격했다. 질풍 같은 찌르기로 정면에서 동시에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 들어간다. 아스모데우스는 여섯 개의 팔뚝을 들어올려 두 창격을 한 번에 받아냈다. 강철을 두들긴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팔뚝을 타고 진동이 올라온다. 이 악마신의 육체는 죽었다 살아난 주제에 아직도 이런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건 이미 근육이 아니다.

하지만 실망할 틈이 없다. 그대로 나는 반시계 방향으로, 붉은 갑주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들며 가열찬 공격을 이어간다. 그대로 악마신을 중심에 두고 놈의 앞뒤에서, 좌우에서 끊임없이 공격한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강적을 상대하는 상황을 상정한 진형이다. 이를 위해 나는 붉은 갑주 사용자에게서 속성으로 창술을 배웠고, 그는 내 변칙적인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단련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붉은 갑주는 내 공격에 정확하게 맞춰 찌르고 후려치고 베어냈다. 붉은 기사단 특유의 묵직한 연격이 아스모데우스의 움직임을 사방에서 원천 봉쇄한다. 마치 사이에 거울을 둔 것 같은 완벽한 타이밍. 연습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정확한 합격. 붉은 갑주는 이런 극한 상황에 와서 비결을 깨달은 모양이다.

아스모데우스는 생각치도 못한 협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놈은 150회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처음으로 얼굴에 창을 허용한 악마신이 주춤 거리는 동안 나와 붉은 갑주는 놈의 좌우에 자리 잡고 투기를 끌어 올렸다. 투기를 타고 내장에 고여있던 피가 역류해 올라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지른 창격에 온몸을 비틀어 얻어낸 회전력이 합쳐져 악마신의 팔을 헤집어 뜯어 낸다. 내가 두 개. 붉은 갑주가 한 개. 호승심이 강한 붉은 갑주의 탑승자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웃어 보이는 대신 머금고 있던 피를 뱉어냈다.

한 번 더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다. 나와 붉은 갑주는 뒤로 크게 물러났다. 팔을 잃어버린 아스모데우스가 고통과 황망함 속에서 표적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사선이 열렸다.

검은 갑주가 투검. 동시에 푸른 갑주가 재어두고 있던 화살을 릴리즈. 아스모데우스는 검은 갑주가 던진 다섯 개의 투검은 쳐내고 그 사이에 눈앞까지 쇄도한 화살은 손바닥으로 막아낸다. 하지만 푸른 갑주의 사격을 그런 식으로 막아낼 수 없다. 고룡조차 일격에 꿰뚫는 그의 강궁은 그대로 놈의 손바닥을 뚫고 오른쪽 눈에 작렬했다.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경악. 타들어가는 고통.

숨길 수 없는 분노.

---------!

곧 고막이 터져버린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포효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악마신의 마지막 남은 오른 팔이 땅을 가격. 엄청난 마력의 이동이 느껴진다. 거의 동시에 원거리 지원팀이 위치한 땅이 날카롭게 융기. 두 전투 갑주를 공격했다. 검은 갑주는 이를 가까스로 회피. 푸른 갑주도 급히 움직였지만 화살을 쏜 직후 였기에 반응이 늦다. 왼 팔과 다리가 산산조각난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충분하다. 그는 할 일을 마쳤다.

나와 붉은 갑주는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정면으로 돌아 합격을 재개. 놈이 움직이지 못하는 푸른 갑주를 노리지 못하도록 잡아둔다.

아스모데우스는 눈에 박힌 화살을 억지로 떼어내고 통나무같은 팔을 휘둘러 반격.우리들은 동시에 땅에 달라붙는 것처럼 몸을 숙여 그 충격파까지 여유있게 회피. 놈의 시야가 화살에 당해 절반으로 줄었기에 대응은 한층 수월했다. 그 사이 쌍검을 뽑아든 검은 갑주가 아스모데우스의 등 뒤로 쇄도. 포메이션 2-2. 3대 1로 포위 공격한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

위기감을 느낀 아스모데우스가 투기를 폭발시킨 것이다. 칼날 같은 투기가 전신을 통해 전방위로 방출된다. 나와 민감하게 움직임을 맞추고 있던 붉은 갑주는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검은 갑주는 그러지 못했다. 전신을 꿰뚫린 갑주는 힘없이 허물어졌다. 탑승자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는 없다. 살아 있기를 바랄 밖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전개였던 탓이리라. 붉은 갑주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그리고 악마신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덤벼든 놈의 주먹이 붉은 갑주에게 작렬. 견고하기 짝이 없는 미스릴제 창을 부러뜨리고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놈이 흉부를 노리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그곳에는 탑승자의 본체가 있다. 이 공격을 받았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나는 창을 반대로 돌려 날이 없는 부분으로 붉은 갑주를 밀어내듯 쳐냈다. 붉은 갑주는 땅에 긴 자국을 남기며 죽 밀려났다. 그리고 배틀 필드에는 이제 아스모데우스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분노에 가득찬 핏발 선 외눈. 등을 통해 전율이 달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창을 땅에 던져 꼽으며 도발했다. 와라. 이제 난 맨손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쿵쿵쿵쿵 달려온다. 그리고 놈의 오른팔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피하는 대신 양팔을 교차시켜 막아낸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던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굉음.

나를 중심으로 지면이 함몰했고, 나는 발목까지 땅에 삼켜졌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줄을 놓고도 내가 악마신의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낸 상황에 당황한 것이리라.

모자란 놈.

그래서야 등에 특대검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어느 새 세로로 길게 휘둘러진 특대검이,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를 깊게 갈라버렸다. 그 일격은 놈의 뇌를 부수고 등뼈를 조각조각 내며 땅에 떨어져, 지면에도 깊은 검흔을 남겼다. 아스모데우스는 치명상을 받은 다음에야 등 뒤에 노란 갑주의 존재를 알아챘다.

아스모데우스 만큼이나 거대한 노란 갑주는 그 거체에 어울리는 육중한 특대검을 다뤄 기사단장의 갑주 중에서도 돌출된, 그야말로 최강의 일격을 뿜어낸다. 그리고 특기는 그 거체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은밀 기동. 그 언밸런스한 조합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약해진 아스모데우스 따위, 실로 일격에 격침시킬 정도다. 단지 이 한 방을 위해 노란 갑주는 전장을 크게 돌아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를 잡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포메이션 2의 숨겨진 핵심. 노란 갑주의 화력에 의존한 일발역전의 대악마 전술이다.

주요 내장 기관을 파괴당한 아스모데우스는 절명. 그 거체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놈의 관자놀이를 겨냥해 힘껏 돌려 찼다. 목이 꺾여 나가며 아스모데우스는 옆으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그냥 놔둬도 됐을 텐데,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몸도 정상이 아닌데 쓸데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 대장!

터져버린 고막 사이로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천천히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