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9. 19:08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왔다.

척추가 기능을 잃기 시작하고 있었다. 등뼈에 손상을 입었는데도 무리하게 움직인 탓이다. 허리 아래의 감각은 거의 없어진 상태다.

눈이 침침해지고 졸음이 온다.

그렇게 잠이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슬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어째서 그들은 나에게 회복 법술을 걸어 주지 않는 것일까. 마력이 떨어졌을리는 없을 터.

나는 내버려둔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 안돼! 이 자는 죄인이야!

청각 기능에 손상이 있어서 소리를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마치 귀에 확성기를 대고 힘껏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상을 입은 고막이 터질 지경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 똑바로 말해! 대장이다! 대장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이기지 못했다! 여기까지 해내지 못했다고!

- 그걸 보고도 그러는 거야? 맨몸으로 아스모데우스와 겨루는 걸 보고도? 이 자는 인간이 아냐! 아스모데우스도 없는 지금 이 자가 회복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 그만, 그만!

- 그렇잖아! 우리가 이 자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너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넌더리가 난다. 그러나 익숙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신탁의 형태로 나에게 불리한 이야기라도 들었을 것이다. 오라클이라 불리는, 위대한 신의 음성이 뇌리에 직접 꽂히는 것이다.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로 이름 높은 그들 역시 인간이다.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이해한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아스모데우스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 !? 뭐, 뭐야?

슬슬 그들도 눈치를 챈 것 같다.

- 아스모데우스? 살아있는 거야?

- 아직 이런 투기를? 말도 안돼!

끔찍하게 압축된 근육 덩어리 같은 4미터의 육체. 여섯 개의 팔. 더이상 신으로써의 지성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 같은, 광기로 덧칠된 눈.

악마신 아스모데우스가 그 거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로부터 느껴지는 투기는 한 번 쓰러지기 전에 비하면 허세에 가깝다. 마지막 발악일 뿐이다. 그에 반해 이쪽은 기사단장급 전투 갑주 4기가 모두 건재하다. 그러므로 전원이 달려들면 승산이 있다. 몇 번이고 해왔던 일이다.

하지만 성대가 갈려나간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단장들이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온 역전의 용사들 답지 않게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허나 아직 죽을 수 없다. 이들 또한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시민들을 위해 기꺼이 사지로 뛰어든 이들을. 기사단장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지휘를 받아들이고, 특무대로써 기꺼이 자살 임무에 참가한 전사 중의 전사들을.

- 이럴수가?

- 대, 대장!

기사단장들은 아스모데우스가 부활한 것 보다 내가 일어선 것이 더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런 그들에게 최소한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투기를 돌려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3분이 고작이다. 그러니까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아스모데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진형을 잡았으면 좋겠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일격이 강한 개체를 포위하는 것으로. 이왕이면 순간 화력이 높은 2번 패턴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때 멈춰있던 4기의 전투 갑주들이 나를 중심으로 포메이션을 잡기 시작했다. 손가락 가득히 투척용 단검을 꼽아둔 검은 갑주가 내 오른 편에, 그레이트 보우를 장착한 푸른 갑주가 내 왼편에. 다른 갑주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은 거대한 노란 갑주는 후방으로 이탈. 마지막으로 4미터가 넘는 장창을 쥔 붉은 갑주는 내 바로 옆에 섰다.

놀랍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포메이션 2. 내가 원하던 그 진형이다.

과연 기사단장들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력이 없어 전투 갑주를 입지 못하는 나를, 재능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기사단장들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를 자각한다면 나도 편해질 텐데. 방금과 같은 의심도, 견제도 필요없어질 것이다. 보통이라면 직접 말해줘도 괜찮겠지만 죄인에게 그런 입은 달려있지 않다.

붉은 갑주가 말없이 나에게 창을 내밀었다. 붉은 갑주의 창에 내장되어 있는 내 전용 창이다. 붉은 갑주의 거대한 창에 비하면 길이도 반도 안되고 두께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제 부터 나는 이 비루한 창을 들고 3미터에 가까운 거인 병기와 호흡을 맞춰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야 한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합격에 임하기 위해서 나는 붉은 갑주 보다 네 배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노란 갑주의 기척이 사라진 순간.

나는 붉은 갑주와 돌격했다. 질풍 같은 찌르기로 정면에서 동시에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 들어간다. 아스모데우스는 여섯 개의 팔뚝을 들어올려 두 창격을 한 번에 받아냈다. 강철을 두들긴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팔뚝을 타고 진동이 올라온다. 이 악마신의 육체는 죽었다 살아난 주제에 아직도 이런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건 이미 근육이 아니다.

하지만 실망할 틈이 없다. 그대로 나는 반시계 방향으로, 붉은 갑주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들며 가열찬 공격을 이어간다. 그대로 악마신을 중심에 두고 놈의 앞뒤에서, 좌우에서 끊임없이 공격한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강적을 상대하는 상황을 상정한 진형이다. 이를 위해 나는 붉은 갑주 사용자에게서 속성으로 창술을 배웠고, 그는 내 변칙적인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단련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붉은 갑주는 내 공격에 정확하게 맞춰 찌르고 후려치고 베어냈다. 붉은 기사단 특유의 묵직한 연격이 아스모데우스의 움직임을 사방에서 원천 봉쇄한다. 마치 사이에 거울을 둔 것 같은 완벽한 타이밍. 연습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정확한 합격. 붉은 갑주는 이런 극한 상황에 와서 비결을 깨달은 모양이다.

아스모데우스는 생각치도 못한 협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놈은 150회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처음으로 얼굴에 창을 허용한 악마신이 주춤 거리는 동안 나와 붉은 갑주는 놈의 좌우에 자리 잡고 투기를 끌어 올렸다. 투기를 타고 내장에 고여있던 피가 역류해 올라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지른 창격에 온몸을 비틀어 얻어낸 회전력이 합쳐져 악마신의 팔을 헤집어 뜯어 낸다. 내가 두 개. 붉은 갑주가 한 개. 호승심이 강한 붉은 갑주의 탑승자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웃어 보이는 대신 머금고 있던 피를 뱉어냈다.

한 번 더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다. 나와 붉은 갑주는 뒤로 크게 물러났다. 팔을 잃어버린 아스모데우스가 고통과 황망함 속에서 표적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사선이 열렸다.

검은 갑주가 투검. 동시에 푸른 갑주가 재어두고 있던 화살을 릴리즈. 아스모데우스는 검은 갑주가 던진 다섯 개의 투검은 쳐내고 그 사이에 눈앞까지 쇄도한 화살은 손바닥으로 막아낸다. 하지만 푸른 갑주의 사격을 그런 식으로 막아낼 수 없다. 고룡조차 일격에 꿰뚫는 그의 강궁은 그대로 놈의 손바닥을 뚫고 오른쪽 눈에 작렬했다.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경악. 타들어가는 고통.

숨길 수 없는 분노.

---------!

곧 고막이 터져버린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포효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악마신의 마지막 남은 오른 팔이 땅을 가격. 엄청난 마력의 이동이 느껴진다. 거의 동시에 원거리 지원팀이 위치한 땅이 날카롭게 융기. 두 전투 갑주를 공격했다. 검은 갑주는 이를 가까스로 회피. 푸른 갑주도 급히 움직였지만 화살을 쏜 직후 였기에 반응이 늦다. 왼 팔과 다리가 산산조각난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충분하다. 그는 할 일을 마쳤다.

나와 붉은 갑주는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정면으로 돌아 합격을 재개. 놈이 움직이지 못하는 푸른 갑주를 노리지 못하도록 잡아둔다.

아스모데우스는 눈에 박힌 화살을 억지로 떼어내고 통나무같은 팔을 휘둘러 반격.우리들은 동시에 땅에 달라붙는 것처럼 몸을 숙여 그 충격파까지 여유있게 회피. 놈의 시야가 화살에 당해 절반으로 줄었기에 대응은 한층 수월했다. 그 사이 쌍검을 뽑아든 검은 갑주가 아스모데우스의 등 뒤로 쇄도. 포메이션 2-2. 3대 1로 포위 공격한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

위기감을 느낀 아스모데우스가 투기를 폭발시킨 것이다. 칼날 같은 투기가 전신을 통해 전방위로 방출된다. 나와 민감하게 움직임을 맞추고 있던 붉은 갑주는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검은 갑주는 그러지 못했다. 전신을 꿰뚫린 갑주는 힘없이 허물어졌다. 탑승자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는 없다. 살아 있기를 바랄 밖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전개였던 탓이리라. 붉은 갑주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그리고 악마신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덤벼든 놈의 주먹이 붉은 갑주에게 작렬. 견고하기 짝이 없는 미스릴제 창을 부러뜨리고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놈이 흉부를 노리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그곳에는 탑승자의 본체가 있다. 이 공격을 받았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나는 창을 반대로 돌려 날이 없는 부분으로 붉은 갑주를 밀어내듯 쳐냈다. 붉은 갑주는 땅에 긴 자국을 남기며 죽 밀려났다. 그리고 배틀 필드에는 이제 아스모데우스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분노에 가득찬 핏발 선 외눈. 등을 통해 전율이 달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창을 땅에 던져 꼽으며 도발했다. 와라. 이제 난 맨손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쿵쿵쿵쿵 달려온다. 그리고 놈의 오른팔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피하는 대신 양팔을 교차시켜 막아낸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던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굉음.

나를 중심으로 지면이 함몰했고, 나는 발목까지 땅에 삼켜졌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줄을 놓고도 내가 악마신의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낸 상황에 당황한 것이리라.

모자란 놈.

그래서야 등에 특대검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어느 새 세로로 길게 휘둘러진 특대검이,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를 깊게 갈라버렸다. 그 일격은 놈의 뇌를 부수고 등뼈를 조각조각 내며 땅에 떨어져, 지면에도 깊은 검흔을 남겼다. 아스모데우스는 치명상을 받은 다음에야 등 뒤에 노란 갑주의 존재를 알아챘다.

아스모데우스 만큼이나 거대한 노란 갑주는 그 거체에 어울리는 육중한 특대검을 다뤄 기사단장의 갑주 중에서도 돌출된, 그야말로 최강의 일격을 뿜어낸다. 그리고 특기는 그 거체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은밀 기동. 그 언밸런스한 조합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약해진 아스모데우스 따위, 실로 일격에 격침시킬 정도다. 단지 이 한 방을 위해 노란 갑주는 전장을 크게 돌아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를 잡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포메이션 2의 숨겨진 핵심. 노란 갑주의 화력에 의존한 일발역전의 대악마 전술이다.

주요 내장 기관을 파괴당한 아스모데우스는 절명. 그 거체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놈의 관자놀이를 겨냥해 힘껏 돌려 찼다. 목이 꺾여 나가며 아스모데우스는 옆으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그냥 놔둬도 됐을 텐데,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몸도 정상이 아닌데 쓸데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 대장!

터져버린 고막 사이로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천천히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