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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9. 1. 7. 12:21
녹트가 돌아온다면.

"녹트가 돌아온다면 역시 캠핑이지. 요즘에는 오프 로드카에 물건을 잔뜩 싣고 다니는 게 대세야. 아직도 밤엔 위험해서 칸나기의 수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좋아졌지. 어차피 뭐가 문제야. 루시스의 빛께서 함께 하시는데. 왕이 모는 차에 타고 캠핑하러 가다니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건 우리들 밖에 없을 거야."

"녹트가 돌아온다면 난 낚시를 배울 거다. 그동안 어째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내가 잡은 물고기가 더 많다면 녹트가 요리를 배울지도 모르지."

"녹트가 돌아온다면 같이 사진을 찍을거야! 녹트가 귀찮아해서 그렇지 감각은 있어. 어설픈 테크닉에 구애받지 않고 피사체 본연의 아름다움이랄까, 그걸 꾸밈없이 정확하게 프레임에 담아낸다구. 오싹하지. 나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으음."

"응? 글라디오?"

"조금 생각해봤는데, 역시 아니야. 원한다면 왕께선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아도 돼. 요즘 나오는 오프로드 카는 내가 앉아 있기에도 커. 운전 내가 하지 뭐. 그러다 길잃은 베히모스가 있으면 넓적다리 살을 좀 얻어서."

"또 컵라면인가."

"컵라면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

"흠. 그렇군. 나도 녹트에게 요리를 강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요리든 녹트가 가장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니까."

"이그니스는 이제 콩으로도 스테이크를 굽는다지. 미친. 시드할배가 어찌나 자랑하던지."

"맛은 그냥 보통이다."

"어련하시겠어. 군사님께서 만든 스타일리시한 콩 스테이크라니. 내 컵라면에 넣어줘도 좋아."

"글라디오 컵라면 진짜 좋아하는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그래.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이 200장도 안된단 말야.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않아? 그래도 단체 사진은 내가 제일 잘 찍으니까. 녹트가 너무 수고하지 않아도 돼."

"녹트에게 달렸지."

"응."

"맞아."

"..."

"..."

"..."

"...우리... 이길 수 있을거야. 그렇지?"

"물론이다. 내 방패에 걸고."

"반드시."

.

희끗희끗하게 눈이 흩날리는 밤, 코르는 비어있는 왕좌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왕좌의 주위는 꽃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까마득한 과거 연인 관계 였던 왕과 칸나기가 맺었다고 전해지는 영혼의 결혼식을 연출한 것이다. 녹티스님과 루나프레나님도 반드시 그러했을 것이다. 영혼의 합일을 이룬 그들은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인섬니아를 굽어 살필 것이다. 그렇게 소망하면서. 그래서 꽃들은 몹시 아름답고 허무했다. 114대 루시스 왕 그 자신처럼.

궁 바깥에서는 목전으로 다가온 시해 대군의 마지막 습격에 대비한 바리케이트와 대형 트랩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1년 전에 글라디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실무에서 벗어난 코르에게는 실질적으로 할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틈도 없다. 그리고 이제와서 뒤돌아 볼 수도 없다. 투쟁과 싸움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한 자기 위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코르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젊었을 때 그는 늘 초조했다. 결국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경호를 내팽겨친 뒤 초대 왕의 방패 길가메시에게 도전했다. 코르는 위대한 검성의 팔은 거두었음에도 승리하지 못했다. 돌아와 생각하면 이유는 명백하다. 치기어린 코르의 검에는 절박함이 부족했다.

왕의 방패가 누릴 수 있었던 명예도 그를 비켜갔다. 왕께서는 코르가 자신을 보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킹 레기스의 방패 클라루스. 그는 행복한 자다. 평생을 충실하게 살았다. 그래, 죽음 조차 그를 축복했다. 그는 모시는 왕의 눈 앞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으므로.

클라루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로, 코르는 스스로 글라디올러스의 이정표가 되었다. 아이리스가 어엿한 전사가 되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지켜 주었다. 글라디오는 젊은 나이에 이미 코르 장군을 넘어 검성 길가매시를 발 아래 두었고, 악마 살해자라 불리우는 아이리스의 명성도 그에 못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코르 그 자신의 명예가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코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군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시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정돈된 기감이 등 뒤로 느껴졌다. 코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 장소에 그 만큼 어울리지 않았던 자도 드물 것이다.

"제네럴 로키."

"코르 장군."

로키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 강한 그가 고개를 숙이는 상대는 코르가 유일하다. 결국 로키는 코르를 이길 수 없었다. 시해를 상대로 함께 싸우게 된 지금 더이상 코르와 겨룰 수도 없게 되었다. 코르에게 호승심을 가지고 있었던 로키는, 그러나 더이상 그 사실이 그렇게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그 코르 장군이 엄한 목소리로 로키를 맞이했다.

"왕께서 거하시는 자리요. 그에 맞는 경의를 요구하지."

"그 왕이 없어서야 의미가 없지 않겠소. 게다가 내 왕이 아닌 것을 어쩌겠소."

로키는 짐짓 무심한 척 코르의 심경을 건드렸다. 오랜 습관같은, 그러나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다.  코르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자 로키는 이내 후회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빛을 가져오셨지. 경솔했소. 내 사과하리다."

로키가 순순히 사과하자 코르도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제네럴 로키야말로 이곳엔 무슨 일이신가."

"오랜 숙적이자 맹우가 와 있다는 데, 내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오래간만에 뵙소. 코르 장군."

"그만. 난 더 이상 장군이 아니니."

"그 무슨. 장군은 언제까지나 맹장이오 영걸이니. 다시는 그런 말씀 꺼내지 마시오."

로키는 아직 젊었다.

그러므로 그 언행이 몸에 맞지 않을 법도 했으나, 이제는 제법 태가 나는 것이 과연 제국 굴지의 가문을 이끄는 당주다웠다. 그 많은 시련들이 이 사내를 착실히 단련시켰던 것이다. 코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를 본 로키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불사장군께서 오셨으니 왕도 방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겠구려."

코르는 자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마음을 후벼 꺼내는 일은 있다.

불사장군.

그 빌어먹을 불사장군.

"나는 실패자다. 이제는 무엇하나 할 줄 모르고, 지금까지 무엇하나 이루지 못한."

불타오르는 것 같은 코르의 눈동자에 로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코르 장군이 평정을 잃었다? 그 냉철한 코르가?

이 내가 그 정도의 실수를 한건가?

아니다.

이상하다.

오늘 코르는 명백하게 이상하다.

"코르 장군...?"

"불사장군이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야. 아군의 시체로 쌓아올린 끔찍한 별명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래, 12년 전 그 날까지."

로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로키는 지금, 코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나는 그 운명의 날 왕께 주제넘게도, 새벽이 밝아오면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로키는 목울대에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로키의 침묵 속에 코르가 자신의 허물을 입에 담았다.

"새벽이 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처연한 목소리에 힘이, 분노가 서렸다.

"제네럴 로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물으셨나."

코르는 선언하는 것 처럼 말했다.

"나는 불사장군으로써가 아니라 전사로써 이곳에 왔다네. 이번에야말로 신명을 다해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야. 거짓된 조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기 위해. 왕께서 찾아 주신 빛을 잇기 위해. 그것을 왕께 고하러 왔을 뿐."

코르는 로키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로키는 왜 자신이 잠자코 코르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것은 유언이었다.

.

인섬니아의 전역에서는 레스탈툼으로의 피난이 한창이었다. 아이리스는 길게 늘어선 차량과 탑승 대기 중인 피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섬니아 시민들의 면면은 굳어있었고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으나 질서를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왕께서 탈환한 땅의 시민으로써 의식이 높았고, 왕궁 경비대가 체계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데몬 슬레이어로 이름높은 아이리스가 곁에서 호위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 데몬 슬레이어는 과연 늠름했다. 시민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을 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나 부관, 가령 글라디오나 탈코트라면 그 표정에 한 조각 회한이 떠올라 있음을 알아챘으리라.

아이리스는 자기 분석에 객관적인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지 똑바로 알고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다름아닌 코르에 대한 불만이다. 그의 검이 지금 그녀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렸다. 살짝만 꺼내보아도 눈부신 검신이 나타난다. 빈틈없이 손질되어 있는 검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것이 마치 코르를 상징하는 것 같아 화가 나면서도 흐뭇하다.

아이리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미소를 짓는 지난한 기술을 성공시켰다. 거울을 보면 스스로의 얼굴이 어떤 지경일지 상상하고 있을 무렵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이다.

"의외네. 좀 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데몬 슬레이어가 역전의 용사를 맞이했다.

"아라네아."

아라네아는 아이리스는 피난민들을 레스탈툼까지 지키며 호송하는 경비 대장을 맡았다는 보고를 듣고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아이리스는 시해를 맨손으로도 때려 죽이는, 그야말로 무문의 상징 아미티시아 가문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완력을 지닌 전사다. 이 실력에 이런 인선은 어떻게 봐도 차별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명하복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행히도 아이리스의 얼굴을 덮고 있는 그늘은 생각보다 옅어 보였다. 아라네아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리스."

용기사 아라네아를 보고 있으면 아이리스는 자신이 아직도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렇다. 아이리스는 아라네아의 강함, 늠름함, 배포, 포용력,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부러웠다. 아쉽지만 글라디올러스가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간다. 아니, 아쉬울 것이 무엇인가. 딱히 아이리스와 아라네아 사이에 달라질 것은 없다.

아라네아의 시선이 아이리스의 허리에 머물렀다.

"코르 장군이 주셨다던 검이구나. 이어받기로 결심했다더니."

"떠넘긴 거죠. 딸을 족쇄로 묶다니 이게 아버지가 할 일이야? 나같은 딸내미가 생겼으면 기뻐서 울어 보이지는 못할 망정."

그 날.

시해의 대규모 공습을 앞두고, 겨우 용기를 낸 아이리스가 코르에게 아버지라 불러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본 그 날.

잠시 아이리스를 응시하던 코르는 신중한 동작으로 검을 풀어 아이리스에게 건냈다. 엉겁결에 검을 받아든 아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저기, 코르... 아... 저씨?"

아.

인자한 눈이다.

아이리스가 코르의 표정을 알아보았다. 아이리스가 어리광을 부릴 때 늘 보여주는 얼굴이다.

코르가 답했다.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있는 선물이 달리 없구나. 내게 가장 소중했던 것이다."

명도 코테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선왕 레기스의 가호를 받았던 둘도 없는 검이다.

그런 검을 넘겨 받는다.

그 속의 의미를 몰라서야 전사로써의 자격이 없다. 아이리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코르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코르의 미소가 깊어졌다.

이것으로 둘의 관계는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코르는 모든 변변치 않은 아버지가 그러는 것 처럼 그녀의 감동을 단칼에 박살냈다.

"그 검에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전장에 나서는 것을 금지한다. 알겠니, 아이리스?"

표정은 자상한 아버지 그대로였다.

그는 진정으로 아이리스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없어.

나는 데몬 슬레이어다.

그딴 배려 따윈 필요없어!

그 날의 일을 떠올린 것만으로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분노로 넘실거렸다. 아라네아는 그 눈을 보고 알아챘다.

아차, 그렇구나.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아라네아는 자신이 정식으로 창을 배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너처럼 꽃같은 아가씨가, 그 가녀린 팔로, 우락부락하고 머저리같은 사내들 사이에서. 그래, 분명 그 때의 나는 지금 아이리스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라네아는 그런 아버지를 뿌리치는데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 머저리같은 사내들- 하이윈드가의 사병들을 모조리 거꾸러뜨려야 했던 것이다. 그 끔찍한 기억이 아라네아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내가 괜한 화제를 꺼낸 건 아닐까.

"그... 저기... 괜찮겠어?"

아라네아가 조심조심 물었다. 그녀의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을 보며 아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이럴 때 그렇게나 강단있는 용기사경은 본인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도 면목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이리스는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도 거리낄 것도 없다고 설명하는 대신 자세를 잡고 발도했다.

검을 뽑는 소리 대신, 지축을 울리는 기세와 소리를 가르는 충격파만 남는, 글레이브의 검기.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뿌려진 쾌검이 검집으로 납도되는 순간은 아라네아 정도 되는 전사가 아니면 인식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공간을 갈라버리는 검.

역전의 글레이브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피난민의 호위 대장은 탈코트가 맡기로 했어요. 시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쯤은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아이리스가 검을 놓고 팔짱을 끼며 진심을 드러냈다.

"내가 가긴 어딜가. 딸내미가 그간 뭘 연습하는지도 모르는 아빠 주제에 폼 잡긴. 내가 수염 다 뜯어버릴거야."

아이리스는 이미 검에 숙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선에 나설 수 있다.

싸울 심산인 것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다.

아라네아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리스를 껴안아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멋지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는 팔짱낀 자세 그대로 아라네아의 상찬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아라네아가 아이리스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소박한 의문을 담았다.

"코르 경의 수염은 엄청 짧은데... 그걸 어떻게 뜯으려고?"

아이리스가 콧김을 후웅 내뱉었다.

"짧으면 좋죠. 더 아플테니."

아라네아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저 바다 건너에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에게 짧은 수염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

"웻지."

"빅스."

"뭐하는 거야, 이런 곳에서."

웻지는 턱끝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낚시대를 가리켰다.

"낚시? 잡히긴 하는 거야?"

크리스탈룸의 지하 수로. 그야 물이 흐르고 있긴 하지만, 문명의 때에 찌든 콘크리트로 둘러쌓여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이 곳에서 설마 낚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왕께서 발견한 낚시 스폿 중 하나라더군. 의외로 꽤 잡힌다는 거야. 이그니스경이 알려줬다."

"재상님이? 하하. 고마운 일이네."

"그래. 이그니스경이 장소를 말해주고 아가씨가 날 이리로 쫒아냈어."

"아아. 아가씨가. 그것 참."

기쁘고... 배알 꼴리는 일이네.

아무리 둘만 있고 싶었기로서니.

"아가씨는 정말 언제까지나 아가씨구나."

강한 자는 남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참지 않는다. 그리고 아라네아는 그들 중 가장 강하다.

"동감이다.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기분 탓이냐? 왠지 이를 갈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 아니다."

"이런, 웻지. 등을 밀어드린 건 우리야. 잊지마."

빅스의 너스레에 쿡, 하고 웻지가 웃었다. 무뚝뚝한 웻지에게 농담을 걸어주는 넉살좋은 녀석은 아라네아 용병단에서 빅스가 유일하다.

한숨을 내쉬며, 웻지가 회상했다.

"설마 10년이나 걸리다니. 아가씨가 못하는 게 다 있었지."

"그래... 그 용기사로 이름높은 전사 중의 전사가 꽃을 받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꼴하곤."

"이그니스경, 여기에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눈이 안보이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누가 아니래. 아가씨가 불에 타서 사라졌을 테니까 말야."

그런 아가씨가 지금은 완전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아서, 도를 넘어선 애정 행각으로 사방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니.

처량하기 이를데 없는 웻지를 보며 빅스가 배를 잡고 과장되게 웃었다.

그 폭소가 잦아들었을 때 빅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웻지는 잠자코 빅스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이윽고 빅스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아가씨를... 지켜낼 수 있으려나? 내 감이 그래. 이번엔 정말 위험하다고."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이다. 고작 이 이야길 하려고 그렇게 빙빙 돌아오다니. 그러나 웻지는 빅스를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빅스의 이런 면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웻지는 담담하게 빅스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지 않나. 이미 오래전부터 아가씨는 우리 손을 떠났다."

아픈 곳을 찔린 빅스가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야 그렇지! 나도 알아. 그래도."

"아가씨는 아가씨다?"

"맞아, 그 뭐냐, 아버지의 마음? 같은 거?"

드디어 웻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한심한 녀석, 내가 잘 봐주려 해도.

"관둬, 죽는다."

웻지의 짧은 제지가 빅스를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아, 그렇지. 어르신과 사이가 안좋았지."

"딱 이 문제로."

"맞아. 우리들 전부 때려눕히고 어르신과는 그 자리에서 의절했지. 뭐야, 나 지금 죽을 뻔 했구나. 죽는 거 정말 쉽네."

"잘 아는 놈이."

"하하..."

실없이 웃기 시작한 빅스에게 눈을 한 번 흘겨준 웻지는 다시 한 번 낚시대를 바라보았다. 낚시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 평온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큰 놈이 걸릴 모양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걱정하지 마라, 빅스."

"웻지?"

"마침 때가 됐군. 도착했을 거야. 물건을 보러 가자."

"물건?"

"네 걱정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물건."

"진짜? 진짜냐? 그런 게 있어?"

"허둥거리지 마라. 경망스럽긴."

"웻지!"

웻지는 조심스럽게 낚시대를 챙겼다. 왕이 낚시 초보일 때 사용했다던 귀중한 물건인 모양이다. 상하게 하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그니스가 신신당부했다. 그는 왕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예외없이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 처럼 행동했다. 아라네아의 눈 빛 공격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이 낚시대를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의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

웻지는 기회가 허락했을 때 왕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봐두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빈약하고 여리여리했지만 인상이 밝고 예쁘장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가 그의 감상이었을 뿐이다. 설마 그 선이 가는 청년이 이오스에 빛을 되돌려 줄 영웅왕이었을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웻지는 아라네아 용병단의 격납고로 방향을 잡고 느긋하게 걸었다. 그런 그를 보다못한 빅스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귀찮은 녀석이다.

.

붉게 물든 황혼의 노을과 함께 그들은 찾아왔다.

작은 놈들도 있고 큰놈들도 있었다. 땅을 파고 드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놈들도 있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은 생명체에 대한 집착과 분노와 살의를 두르고, 지평선을 새까맣게 채워 건재함을 과시했다.

지금껏 살아남아 시해를 상대해왔던 글레이브 이하 인섬니아의 병사들은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적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수문장이 죽고, 진형이 무너지고, 메인 게이트가 수비 기능을 상실하기까지 한시간으로 충분했다.

목숨을 잃은 전우들을 뒤로 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은 직감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오늘, 잠들지 않는 도시, 인섬니아는 멸망한다.

우리들은 전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8. 4. 4. 18:45
"슬슬 프롬프토 녀석이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듣자니 지금 햄머해드에 머물고 있는 것 같더군."

"녀석, 시드니에게 가능성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벌써 12년째야.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게."

"글쎄. 서로 마음은 있는 것 같다만."

"뭐? 서로? 프롬프토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글라디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크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만."

"...하하."

"그보다 슬슬 이야기가 나올 때인가."

"그래. 앞으로 2개월 이내에 마지막 토벌이 있을 거야. 남아있는 시해들도 이번이 끝이다. 자세한 것은 프롬프토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봐야 알겠지만."

"길었군."

"그래."

"드디어 그 녀석에게... 면목을 세울 수 있겠어."

"2년이나 걸렸으니까. 슬슬 좀이 쑤셔서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가능성은 있어. 이번엔 왕도에 전부 모일테니. 뭣하면 왕좌 앞에서 기도라도 해볼까."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매력적인 이야기야."

.

프롬프토는 고열을 동반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신탁과 함께 찾아오는 고열은 늘 새롭고 고통스럽다. 이제 곧 뇌를 부수기라도 할 것 처럼 기승을 부리곤 한다. 하지만 신탁은 이미 받았다. 이제 고통이 잦아져야 할 타이밍일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면.

슬슬 타임 리미트인지도 모른다.

원형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근본은 클론. 이제 세포 분열에 한계가 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가령, 지금 당장이라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프롬프토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졌어야 할, 들릴 이유가 없는 환청.

유쾌한 듯 음험하며 꺼림직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검은 찌꺼기 같은, 불길한, 실은 목소리조차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병원체에 불과하면서도 신조차 타락시킬 수 있는.

그저 끔찍한 어떤 것.

- 아, 프롬프토. 가엾은 프롬프토.

시해의 숙주.

- 자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 놈이다.

- 바스티엘에게 실험체를 하나 내놓으라 했었지. 상황을 봐서 왕자님 척추라도 부러뜨리라고 지령을 내릴까 했었는데.

꺼져. 내 머릿속에서 나가.

- 정에 이끌려 절친이 되어버릴 줄이야. 우와, 놀랐어. 아저씨 정말 놀라버렸지 뭐야.

당장 나가!

- 그래서야 명령을 들어줄 리 없잖아. 결국 말야, 허리 아래가 거대한 뱀으로 된 무서운 시해를 즉석에서 만들어서 말야. 아, 끔찍했지 그건. 왕자를 앉은 뱅이로 만들 때 유모를 죽이고 말았지 뭐야. 어쩔 수 없었어. 힘조절이 잘 안됐거든.

그만 둬!

- 찌꺼기 주제에, 너 때문에 애꿎은 사람 하나 죽었잖아? 미안하지? 응? 그래, 사람이 미안해 할 줄도 알아야지. 아차, 실례. 사람이 아니었지.

아딘!

아딘 이즈니아!

프롬프토는 분노 속에서 몸부림쳤다. 마치 코스탈 타워 심층부에서 자바워크의 앞발에 짓눌렸을 때 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다. 하지만 그 때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뭐야?

이거 대체 뭐야?

정신 차려!

아딘은 죽었어!

2년전에!

녹트와 함께!

- 불쌍하게도. 우리 찌꺼기군이 어차피 살아봐야... 응? 앞으로 10년이나 버티겠어? 그러고보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 누구더라, 그 여자, 이름이. 그래, 아무튼 죽기 전에 그 여자 옆에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대려와 줄까?

으아아아아아아!

- 어이쿠 이거. 아저씨 놀랐잖아. 무심코 찔러 버렸는 걸. 이거 어쩌나. 상처, 괜찮겠어?

겨우 생각났다.

이것은 7년 전의 기억이다.

프롬프토가 고대 인섬니아 유적을 찾아 에오스를 이잡듯 여행하던 시절. 고문서를 수집하고, 왕가의 기적에 대해 조사하고, 크리스탈의 권능에 대해 연구했다.

녹트를 살릴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그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다.

그리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그가 나타났다.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고고학자도 뭣도 아닌 프롬프토가 왕가의 흔적을 차례차례 찾아냈던 것이다.

마치 이끌리는 것 처럼.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다만 프롬프토는 그것이 친구의 인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프롬프토 답다면 프롬프토 다운 생각이다.

어리석었다.

피를 토하며 프롬프토가 무릎을 꿇었다.

- 안돼지 안돼. 아저씨, 약속해 버렸단 말이지. 지금 죽으면 안돼.

건드리지마!

날 건드리지마!

- 하하. 괜찮아. 그냥 조금 돌연변이로 만드는 것 뿐이야. 회복력이 좋아지고, 늙지 않게 돼. 이런. 아저씨 누구에게 선물을 주는 거 5년 만이야.

안돼!

- 괜찮다니까. 아프지 않아. 너희들은 내가. 흠, 그렇지.

아딘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 내가 우선 진정한 왕이 된 그 놈의 팔 다리를 떼어 낼거야. 그러고 나서 내장을 파헤치고, 겨우 숨만 붙여 놓은 다음에.

아딘의 눈에서, 입에서, 온갖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 내렸다.

- 그 다음에 그 놈 눈 앞에서 너희들을 한데 뭉쳐 시해로 만들거야. 어때. 기대되지?

프롬프토.

어이, 프롬프토!

- 쉬이이. 좀 자고 나면 개운할 거야. 그래, 새로 태어난 것처럼.

프롬!

.

"프롬!"

프롬프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온다.

"커흐."

"프롬."

청량감이 서려있어야 할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다. 또 걱정하게 만들고 말았다. 프롬프토는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을 맞잡았다. 놈은 사라졌다. 나는 지금 현실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두통이 가시는 것이 느껴진다.

"신디."

침침한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시야 가득하게 시드니의 얼굴이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긴장한 프롬프토는 손에서부터 그 영향이 나타난다. 프롬프토가 시드니와 맞잡은 손에 힘을 뺐다. 하지만 이를 보충하려는 것처럼 시드니의 손에 힘이 실렸다.

마치 프롬프토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신디. 손에, 땀이..."

"바보. 왜 그런 걸 신경쓰는 거야."

"하하..."

"괜찮은 거야?"

"응. 신디가 손을 잡아줘서. 아픈 거 다 날아갔어."

"또 그런 식으로. 장난치지 말고."

"아닌데. 진짠데."

"그만. 슬슬 화가 나려고 하거든."

시드니가 프롬프토의 머리칼을 잡아 살짝 잡아 당겼다.

"아야."

"봐. 너 머리칼이."

"응?"

시드니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프롬프토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프롬프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넌 잘 모르겠지만 자주 이래. 며칠 지나면 돌아와. 안심해."

프롬프토는 내심 놀랐지만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몇 년이나 신탁을 받아와서 관록이 붙은 것일까.

그리고 신디는 프롬프토가 받은 신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 기적을 몇 번이나 목도한 그녀는 프롬프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녀는 프롬프토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롬프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다만 프롬프토는 그 사실이 그저 기쁘고 또 애달팠다.

그리고 프롬프토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신디."

"응?"

"이제... 가봐야겠어."

"왜? 이렇게 갑자기?"

"예감이 좋지 않아. 빨리 친구들에게 알려줘야 해."

"어제까지는 괜찮았다가, 지금 안된다는 거야?"

"응."

"왜 그러는지, 말해줄 수는 없고?"

"...응."

"..."

"..."

"넌."

"..."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신디."

"중요한 건 무엇하나 말해주지 않아."

"...신디."

"휴우."

"저기... 미안해. 하지만..."

"언젠간 말해 줄거야?"

"...그건."

"됐어. 내가 바랄 걸 바래야지. 안그래?"

"미안. 미안해."

"언제."

"응?"

"언제 돌아올거야?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아, 맞아.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프롬프토가 시드니의 말을 되뇌였다. 마지막이다.

"어차피."

"...무슨 말 했어?"

"아냐, 아무 것도."

"그러시겠지. 차 태워줄 테니까, 샤워라도 하고 나와."

"신디."

"응?"

"매번 고마워. 그리고..."

"됐네요."

살짝 웃으며 시드니가 프롬프토의 손을 놓고 떠나갔다.

그 온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프롬프토는 멀뚱히 지켜봤다. 그리고 내려온 신탁을, 검신 바하무트의 음성을 되살린다.

'인섬니아로 향하라'

'다가올 그 때를 생명을 다해 대비하라'

'시해의 군세는...'

프롬프토는 머리를 감싸쥐고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그렇다.

어차피.

손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신디. 어쩌지. 큰일났어."

시드니는 백미러를 통해 프롬프토를 흘깃 바라봤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뭐. 왜."

그리고 시드니의 대응은 적절했다.

"나 졸려."

프롬프토는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킹스 글레이브."

"안돼. 내가 자면 안돼잖아. 신디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시드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이나 못하면."

시드니가 운전하는 차량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가, 프롬프토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잠들기 싫어하는 꼬마아이 같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시드니는 정말로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프롬프토의 정신이 절벽에 매달렸다.

안돼.

자면 안돼.

아까 꿈의 뒷이야기로 연결될 것 같다고.

그 개자식이 있다고.

무섭다고.

...

-아니.

아니야.

너무 두려워서 잊고 있었어.

그거 아니잖아?

그 다음 분명히, 분명히!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프롬프토는 골아 떨어졌다.

잠든 그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

- 커흑

아딘 아즈니아가 검은 피를 뿌리며 뒤로 죽 밀려났다.

프롬프토는 간신히 눈을 떴다.

믿을 수 없었다.

아딘의 머리가 반 쯤 으깨져 있었다. 입가의 미소 또한 사라져, 시해의 음험함만이 남아 있다.

- 어라, 이거 힘 쌘 돼지 새끼가 행차하셨네.

그 앞에 떠 있는 것은, 밝고 푸르게 빛나는- 왕의 병장. 거대한 둔기. 프롬프토에게는 그것에 스치기만 해도 죽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거대한 날이 네개나 얽혀 있는 살벌한 십자 수리검이 나타났다. 그것은 곧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화전하며 날아들어 아딘의 오른 팔을 잘라 버렸다.

- 겁많고 수줍은 공주님께서도 오셨고.

그럼에도 아딘은 이제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았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등 뒤에 나타난 대검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뚫고 나왔을 때에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 그래, 동생아. 네가 오지 않을 리 없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찌르는 방식이 아주 훌륭해.

그리고 그 상처 속에서 아딘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오히려 기쁨. 열락. 그리고 조용히 침잠해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분노.

거듭된 출혈에 체력이 떨어진 프롬프토가 그 소름끼치는 심연에 삼켜지기 직전에, 눈 앞이 푸르게 밝아졌다.

이건-

프롬프토는 이 것이 무엇인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하. 왕자께서 친구를 지키기 위해 아비를 보냈나. 이거이거. 역시 대단하시구만 그래, 응?

부왕의 검.

마지막의 마지막에 레이부스가 전해준,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프롬프토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부왕의 검이 한바퀴, 프롬프토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마치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 처럼.

그리고 목소리를 전했다.

프롬프토는 몽롱한 가운데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검을 잡아, 프롬프토.

프롬프토는 눈물 속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너야?

정말 너야, 녹트?

손에 쥔 검은 따스했다. 곧 강대한 마력이 프롬프토 안으로 스며들었다.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됐다. 어두컴컴한 시야도 금새 밝아졌다. 마력은 신기하다. 위대하고 신성스럽다.

분명 일반인은 쥘 수 조차 없고, 휘두를 때 마다 생명력이 소모된다던 검이었을 텐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정말이야.

녹트야. 녹트가 여기 있어.

- 흥.

그리고 아딘의 전신에서 검은 투기가 폭발했다.

아딘을 견재하던 세 왕의 무구들이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프롬프토는 이제 아딘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녹트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부왕의 검은 터질 것 처럼 빛을 발했고 아딘의 검은 투기는 프롬프토를 감히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 과연 레기스. 뒈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팔팔하네. 정말 아쉬워.

어느 새 아딘은 육체를 전부 회복해두고 있었다.

뇌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뭉게진 머리는 물론, 의복까지 말끔히.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 처럼.

프롬프토는 긴장하며 부왕의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 왜? 한 번 해보려고? 그만둬 그만둬. 친구가 지켜준 몸을 소중하게 여겨.

아딘이 느릿느릿하게 떨어뜨린 중절모를 집어 먼지를 털어냈다. 시해의 모습도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사람좋은 아저씨의 얼굴로 프롬프토를 바라보고 있다.

구역질 날 것 같았다.

- 이거이거. 선물, 아저씨가 받고 말았네.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이게 레기스 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너무 욕심부릴 수도 없는 일이고.

개자식.

이 개자식.

그 말의 의미를 이 때의 프롬프토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악당은 넘어져도 맨손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아딘은 끝을 알 수 없는 악당이었다. 이 때 아딘이, 자신을 공격한 세 역대왕에게 씻을 수 없는 저주를 심어놓은 것도,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지금의 프롬프토는 알 수 없었다. 프롬프토는 그저 자신이 그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 유의미한 만남이었어, 프롬프토오. 감사의 의미로 이제 찌꺼기라는 말은 안할테니까.

프롬프토는 입을 꾹 닫고 참아냈다. 이 놈은 변덕쟁이다. 언제 돌변할 지 모르니까.

아딘은 그런 프롬프토를 보고 피식 웃으며 사라졌다. 프롬프토는 아딘이 자신을 죽이려면 이미 몇 번이나 죽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력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친구가, 아주 소중한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녹트, 녹트, 녹트!

그에 대답하듯 부왕의 검이 날아올라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수염, 그거 안어울려.

프롬프토는 사라져가는 부왕의 검을 보며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 때부터였다.

프롬프토는 신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

시드니는 잠든 프롬프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경련하기 시작하는 프롬프토를 보고 시드니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차를 갓길에 세웠다. 비오듯 땀을 흘리는 프롬프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며, 시드니는 그저 프롬프토가 홀로 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다.

아침과 같았다. 프롬프토는 가위에 눌린 것 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시드니는 프롬프토의 손을 잡고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프롬. 프롬. 시드니에게만 허락된 그의 애칭이었다.

하지만 프롬프토는 깨어니지 않았다.

그리고 곧 시드니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 방울, 프롬프토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던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그를 마음 속 깊이 웃게 하는 것은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다. 그러나 자신할 수 있다. 그를 얼빠진 얼굴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은은하게 미소짓게 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하지만.

프롬프토를 울게 만드는 것은-

"짜증나네."

조금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럴 수 밖에.

프롬프토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존재를.

녹티스 루시스 체럼을.

"죽은 사람을... 이길 수도 없고."

시드니는 프롬프토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급기야 절친의 이름을 웅얼거리기 시작한 프롬프토를, 시드니는 언제까지고 눈에 새겨 두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글라디오는 하얗게 탈색된 프롬프토의 머리칼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퀭한 눈과, 미묘하게 헐떡이는 호흡을 발견했다. 곧 그는 프롬프토의 모든 것이 3개월 전과는 현격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얼굴에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옆에 침착하게 앉아있는 이그니스에게 인사를 건낼 여유도 없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눈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뭐야. 어떻게 된거야, 프롬프토!"

우와, 창문 떨리는 것 좀 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프롬프토가 이마를 짚었다.

"아, 정말. 글라디오. 실내에서 무슷 짓이야. 가뜩이나 머리가 울리니까 조용히 좀 말해줘."

"프롬프토!"

이그니스가 손을 들어 글라디오를 제지했다. 그래도 이럴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그니스가 유일하다.

글라디오는 폭풍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프리트를 쓰러뜨리고, 차례차례 막아서는 3인의 역대왕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 순간, 루시스의 거짓된 왕을 치기 위해 마지막 문을 열 때-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글라디오의 험악한 얼굴이 프롬프토는 오히려 기뻤다. 친구들의 걱정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 것보다 문제는 인섬니아야."

그런 것이라니.

글라디오의 손이 테이블 모퉁이를 으깨 부숴 버렸다. 그러나 프롬프토도 이그니스도 애써 이를 무시했다.

"신탁에 따르면, 시해의 마지막 군세가 전부 모인다는 것 같아. 집결 장소는 인섬니아. 아마도 왕좌. 여기까지는 지난 번 신탁과 같아. 하지만 숫자가."

'...지금까지 토벌한 것 보다 많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해들을 지금까지 몇 만 필이나 해치웠다. 이렇게나 많은 시해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일은 아니다. 밤은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하니.

지금껏 쓰러뜨린 것보다 많은 시해들이 남아 있을 줄이야.

글라디오가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진짜냐고..."

이그니스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틀림없겠지. 2년 동안 우리는 프롬프토의 신탁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까."

프롬프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은 거짓말을 한 일이 없어. 이번에도 확실할 거야."

"글라디오. 모든 글레이브에게 소집 명령. 경계를 두배로 늘리고. 이틀 뒤 계엄령 선포. 비전투원은 일주일 안에 레스탈룸으로 피난시킨다."

루시스 재상 이그니스의 지령에 글라디오의 고개는 끄덕거리는 대신 프롬프토를 향했다. 표정은 여전히 험악하다.

"난 절대로 참가할 거야. 레스탈룸 따위엔 안가. 기어다니면서라도 싸울 테니까."

"프롬프토!"

"글라디오, 그만. 프롬프토... 그 몸으로 괜찮겠어?"

프롬프토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 적당히 도망다닐 테니까. 그런 거 잘 하잖아, 내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프롬프토는 글라디오 이상으로 완강하다. 꺾을 수 없다.

글라디오는 표정을 더욱 엄격하게 굳혔다.

"프롬프토. 절대로. 절대로 내 앞에 나서지마."

"네에,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스 전체의 두뇌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군들을 총동원해 대응책을 모색해야할 때다.

가용 전투 인원. 배치. 트랩과 바리케이트 준비. 병참. 고려해야할 것은 넘칠 만큼 많았다.

상황은 좋지 않다.

절망적이라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프롬프토는 그저 이것이 끝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저 느낌이다. 흉일지 길일지조차 알 수 없다. 신탁에 대한 일이 아니기에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굳이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늘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째서 일까. 프롬프토는 그 어떤 때보다 녹트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혹시 그런 걸까.

녹트가 저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27. 07:19
보라고! 저 얼굴.



우리 폐하, 너무 대단하지 않아?



.

검이란 곧, 왕께서 사용하는 무기.

이그니스 스키엔티아에게 검이란 그런 것이다.

이그니스가 아직 어렸을 때 강대한 시해가 인섬니아의 견고한 성벽을 한칼에 베고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레기스 폐하께서 직접 검을 들고 토벌에 나섰다.

그 때 이그니스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예복을 입고 나선 왕께선 산보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시해를 상대했다. 생전에는 상당한 검호였을 터인 그 시해는 왕국 수장의 스카프 한장 베지 못하고 토벌되었다. 이그니스가 레기스를 동경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치를 배우고 장차 그 지식을 통해 왕자를 보좌해야 할 이그니스는 자신이 왕자의 옥체까지 지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전사로써 장래가 촉망되기로 그 왼편에 설 자가 없다고 평가받는 글라디올러스가 차기 왕의 방패로써 왕자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그 답지 않은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

경위야 어떻든 레기스 폐하의 신위를 꿈에 그리며 착실하게 육체를 단련한 끝에 슬슬 무기를 들 수 있겠다고 자평한 이그니스는, 그러나 검의 스승을 찾지는 못했다. 언감생심 왕의 병장을 배운다는 행위가 불경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젊은 킹스 글레이브에게 부탁해 창과 단검을 익혔다.

이그니스는 정치보다 무예에 적성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급격히 강해졌다. 어느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재능은 불사장군조차 인정했을 정도였다. 잠시 코르의 동작을 살펴 본 것만으로 노련하게 카타나를 다루는 이그니스는 명백히 태생부터 전사였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그니스의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코르는 왕국군 추천을 목 아래에 삼켰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매우 가끔씩, 충동이 찾아온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레기스 폐하 이상으로 검의 극에 달한, 선택받은 왕과 고락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그랬다.

이제 검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은 레기스 폐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충동은 더이상 억누를 수 없어 이그니스를 삼켜 버리곤 한다. 그런 날이면 늘 그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그니스는 어깨를 드러내는 가벼운 복장으로 실내 단련실 중앙에 섰다. 이 시간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후로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그는 이런 고요한 장소를 마음 속 깊히 즐겼다.

수음이라도 하는 것 같군.

이그니스가 웃었다. 하지만 곧 그런 부끄러운 생각도 지워 버렸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후 이그니스는 정말 많은 것을 버렸다. 쓸데없는 것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버릇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이윽고 이그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그니스가 그리는 검의 궤적은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발 밑에서 피어오르는 먼지조차 양단하는 그 검이 베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가하면 그의 검은 유려하고 연속적이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홀로 숙달한 이 검술로 이그니스는 스스로의 상상 속,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모든 가상 공격을 쳐냈다. 주위에 검사가 있었더라면 그 명료하고 이상적인 움직임을 통해 이그니스를 공격하는 그림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글라디올러스 아미티시아.

이그니스의 검무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제는 없어져 버린 왕 대신 왕국에 없어서는 안될 재상을 지키고 있는 방패.

그도 그런 달인 중 하나였다.

.

글라디오는 흐뭇한 얼굴로 그 검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떠냐. 내 친구 굉장하지.

친구의 기량을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던 글라디오는 이그니스가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프롬프토 마냥 이 검무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글라디오의 뇌리에 어떤 계획이 떠올랐다. 어떤 의미로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글라디오."

글라디오가 옳지 못한 상상을 펼치려는 때에 검무를 끝낸 이그니스가 뒤를 돌아 글라디오를 바라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지 십수년이 흘렀으나, 이그니스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시선을 맞춰온다. 글라디오는 이그니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가슴 한켠이 시리도록 아파온다.

그러나 글라디오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활짝 웃으며 사려깊은 친구를 맞이했다.

"여어. 여전히 화려하시구만."

"그냥 보통이지."

이그니스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 거만한 글레이브 놈들에게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흥. 입만 산 놈들."

글라디오가 슬쩍 본심을 드러냈다.

"별로 숨길 생각은 없지만."

이그니스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친구가 대신 화를 내줬거든. 넘칠 만큼. 그러니 나는 더 할일이 없더군."

글라디오가 코웃음을 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글라디오가 일을 거의 망칠 뻔 했다는 것을, 이그니스는 굳이 입밖에 내지 않았다.

.

왕의 힘을 빌어 전장을 누비던 전사들은 스스로를 더이상 킹스 글레이브라 부르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힘을 빌릴 왕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으나, 자중하는 의미도 있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킹스 글레이브의 절반은 왕을 배신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잃어버린 10년간 선택받은 왕께서 거하신 섬을 지켜왔던 그들의 영광스러운 리더, 글레이브 커맨더가 검신 바하무트에게 그 힘을 인정받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녀조차 그들에게서 배신자의 낙인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죄책감은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왕의 이름을 걸고 활동할 수는 없다.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긍지가 있었다.

시해의 군세를 상대로 10년이나 최전선에서 싸웠다. 레스탈룸을, 가디나 나루터를, 인류의 거점을 탈환하고 지켜왔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과거의 죗값은 모두 치뤘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으로 글레이브들은 만족했다.

만족했다고 생각했다.

불사장군이 왕의 최후를 지켜봤던 왕의 친구들- 글라디오, 이그니스, 프롬프토만을 굳이 킹스 글레이브라 부르며 존중하기 전까지는.

처음 그 소식을 듣게 된 글레이브들은 뭔가의 착오라고, 그 새파란 것들에게 왕의 칭호를 허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르는 그것이 선왕께서 가장 힘들 때 그와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라고 생각했다.

이를 심드렁하게 받아들인 것은, 코르 장군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글라디오 뿐이었다.

실은 이그니스나 프롬프토는 몇 번이나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사장군은 그들을 끝까지 킹스 글레이브로 대우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완고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는 글레이브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왕의 방패인 아미티시아 가의 장남은 차치하고서라도, 재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도 보이지 않는 병신이나 사진 따윌 찍으러 돌아다니기에 여념이 없는 경박한 제국놈을, 저 위대한 루시스 왕국이 낳은 전사 중의 전사를 의미하는 킹스 글레이브라 불러야 한다니. 이만저만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불만은 날이 갈 수록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았고, 사달이 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글라디오가 자신이 흘려듣던 비아냥을 친구들 또한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난 베히모스처럼 격분했던 것이다.

프롬프토가 있었다면 그 모든 비아냥을 웃어 넘기면서 글라디오를 다독였겠지만 그는 지금 여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입장 상 글라디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글라디오가 누굴 위해 화를 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글라디오는 글레이브들에게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며 폭언을 쏟아냈다.

"왕의 힘 없이는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반편이 놈들이. 같은 말을 내 앞에서도 해보지 그래."

성정이 격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글레이브들이 코웃음치며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요?" 글라디오의 분수를 바로 잡으려 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쩌시려오?" 그리고 글라디오는 그들을 전부 쓰러뜨렸다.

대련을 명목으로 하루에 다섯 씩, 많을 때는 수십을 상대했다. 글레이브들에게는 젊은 방패가 보여주는 치기를 야유할 틈도 없었다. 글라디오는 차 한잔 마시는 시간 이상은 할애하지 않으며 글레이브들을 하나하나 박살냈다.

글레이브들은 글라디오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으며, 그 추상같은 공격을 1분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그것은 역전의 용사로 이름 높은 리베르투스도 마찬가지였고, 그와 동기였던 베테랑들도 글라디오의 실력을 인정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어떤 글레이브들은 글라디오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칭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전처럼 왕께서 하사하신 마력만 사용할 수 있다면 저깟 놈 쯤은. 그렇게 생각하는 글레이브들이 태반을 넘었다.

그렇게 결국 글레이브 커맨더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글라디오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글라디오도 커맨더에게 만큼은 폭언을 뱉지 않았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결과는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글라디오는 단 일격에 커맨더를 거꾸러뜨렸다.

저 불사장군이라 한들, 붉은 용기사라 한들 이런 일격을 발할 수 있을 것인가.

커맨더는 땅에 몇 번이나 부딛히며 거의 10미터나 날아갔다. 방어에 사용한 단검은 격돌하는 순간 산산 조각나 그녀의 몸 곳곳에 파고 들었다. 이를 적출하려면 수술이 필요하리라.

드디어 글레이브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다. 왕의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저 글레이브 커맨더가 저렇게 한순간에 당할 리가 없다. 글레이브들이 웅성 거리다가, 이윽고 그 웅성거림이 사자후에 이르렀다.

사기다.

인정할 수 없다.

일촉즉발의 긴장.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

대규모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을 것 처럼 보였다.

이 때 만큼은 저 담대한 이그니스조차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글라디오는 다만 승자로써 당당하게 서 있었을 뿐이다.

그 때 커맨더가 피를 철철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손 짓 하나로 모든 불만을 잠재웠다. 계속 싸운다는 수신호였다. 글레이브들은 침묵했다. 커맨더가 이대로 승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바, 이를 지켜보는 것이 전사의 도리. 커맨더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일으켜 저 무도한 사내를 굴복시키는 장면을 상상하는 글레이브도 있었다.

그렇게 커맨더는 맨손으로 글라디오에게 달려들었다. 글라디오 또한 무기를 놓고 이에 응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커맨더는 글라디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커맨더의 발길질은 매섭고 날카로웠으나 글라디오의 견고한 방어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빠른 손놀림은 단검을 쥐고 있을 때에나 치명적일 수 있었다. 무기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맨손 박투가 되면 필연적으로 체격이 큰 쪽이 우위에 설 수 밖에 없다. 글라디오는 용서없이 글레이브 커맨더를 몰아쳤다. 커맨더는 수 없이 나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몇번이고 일어서서 싸웠다. 보다 못한 글레이브들이 패배를 인정했을 때 커맨더는겨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글레이브 커맨더로써의 비뚤어진 자존심이 아니다. 그녀는 완전한 패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글레이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중요한 시기에 격분한 글레이브들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척을 지게 되었을 터이다.

이그니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에 비해 이 아둔한 녀석은.

이그니스는 아까부터 실실 거리고 있는 글라디오의 분위기를 탐색했다.

그리고 곧 포기했다.

틀렸다. 이 친구에게 커맨더의 깊은 뜻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러므로 이그니스는 다 내려놓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빈약한 분야가 있는 법이다.

.

이그니스는 글라디오가 건낸 수건을 받아들고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 때... 커맨더에게 전력을 다했지? 글라디오."

글라디오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이그니스.

이래보여도 보는 눈이 있다. 글라디오는 자신이 생각해낸 역설적인 진실을 입밖에 내놓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잘도 알아챘네. 뭐, 전성기 땐 우리 셋이서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였어. 처음 일격으로 쓰러뜨리지 못했다면 승부가 어디로 굴러갔을지. 그녀는 빠르거든."

"글레이브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커맨더의 자리도 위태위태해 진 것 같더군."

"그릇들이 그것밖에 안되는 거야. 그것도 특수 부대라고."

"글레이브 커맨더는 만나러 가봤나? 병문안 말이다."

"켁. 내가 왜? 나 아직도 화 안풀렸다."

"글라디오. 여성을 그렇게 상처 입히고도."

"전사에게 실례다, 이그니스. 넌 그래서 안되는 거야."

"..."

"나 원참, 이런 놈에게 어째서 하이윈드 경이."

그 말 만큼은 흘려들을 수 없다.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말을 가로챘다.

"왜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글라디오도 지지 않았다. 눈을 치뜨고 이그니스가 범하고 있는 오류를 지적했다.

"글레이브 커맨더나 하이윈드 경 같은 전사에게 여성이라며 지켜주겠다는 말이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젠장, 내가 이런 놈에게 지다니."

하지만 이제껏 이그니스는 글라디오에게 한 마디도 져 본 일이 없다. 이그니스의 포문이 열렸다.

"글라디오. 하이윈드 경은 트로피가 아니야. 그리고."

이그니스는 신중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경이 선택한 것은 나다."

울컥한 글라디오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를 드러냈다.

"젠장. 잘도 지껄였겠다."

아차.

이그니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한 판 붙자. 오래간만에."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정말로 분한 것 같았다.

이그니스는 괜한 도발을 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하이윈드 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겨루게 되는 것이 이번이 일곱 번째다. 이리 될 것을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엎질러진 물인가.

이그니스는 포기했다.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할까."

"흥. 바라는 바야."

글라디오는 바로 기세를 끌어올리려다 말고 움찔거렸다.

"글라디오?"

이그니스는 글라디오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것 참. 별 일도 다 있군.

글라디오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리 나와. 장소는 내가 정한다."

.

글라디오가 앞장 서고, 이그니스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조금 후 그들은 무기고에서 저마다 애병들을 찾아들고 야외 연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을 마지막으로 수행할 때 사용했던 무기들이다. 손질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이윽고 둘은 연병장에 도착했다.

저마다 훈련하고 있던 글레이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그니스는 오늘 완전히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글라디오와 마주 섰다.

글라디오가 연병장 바닥에 대검을 깊숙하게 꽂아 넣고, 방패를 검에 기울여 걸쳤다. 그가 오른 쪽 어깨를 빙글빙글 돌려 근육을 풀면서 말했다.

"이그니스. 전력을 다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그니스가 보이지 않는 눈을 치켜 떴다.

"진심이야, 글라디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잖아. 한 번에 다 해결하자고. 우리들 중 누가 강한지."

글라디오가 위험하게 웃었다.

"우리가 왜 킹스 글레이브라 불리는지."

이그니스는 양손에 쌍검을 쥐고 글라디오를 겨냥했다.

"그것도 좋겠지. 아라네아의 이야기가 나오면 결투하는 짓을 그만두는 게 조건이다."

아라네아라. 둘 만 있을 때에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나보군. 글라디오가 작게 으르렁 거렸다.

"오늘 따라 매우 꼴보기 싫으네."

그 직후, 이그니스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글레이브들은 녹티스 폐하의 마지막 친구들이 왜 킹스 글레이브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 처음 격돌을, 글레이브들은 육안으로 확인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거침이 없는 것일까. 이그니스의 단검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친구의 목 울대를 노렸다. 글라디오가 막지 않았더라면 즉사였다. 몇몇 글레이브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공격을 신호로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졌다.

글레이브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맹인 전사는 온몸에 불꽃과 뇌전, 얼음을 두르고 섬광처럼 움직이며 글라디오의 온갖 급소를 공격했다. 눈으로 따르기에도 벅찬 속도였다.

글라디오는 저 전설로 전해지는 길가메시의 태도를 추가로 소환해 쌍대검을 막대기 마냥 휘두르며 이에 대응. 그 검풍이 마치 용오름 같았다. 두 사람은 폭풍같은 기세를 조금도 갈무리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흩뿌렸다.

글레이브들은 숨을 쉬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이 싸움을 지켜 보았다.

엘리먼트.

무장소환.

틀림없다. 글라디오와 이그니스에게는 명백히 마력 사용이 허가되어 있었다. 왕이 사라진 지금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 싸움은 신화의 연장선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이 기량.

선왕께서 건재했을 때의 글레이브 커맨더조차 이와 같았을까. 모든 글레이브들은 무인이었다. 무인으로써 이들의 신위를 두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왕의 친구들에 대한 헤묵은 감정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글레이브들의 고함과 탄성 속에서 두 전사들의 싸움은 격렬함을 더해 갔다.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 같던 둘의 싸움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글라디오와 이그니스가 그 격전 속에서 저마다 비장의 기술을 준비할 때, 붉은 용기사 아라네아 하이윈드가 난입했기 때문이었다.

.

"너희들, 날 핑계로 장난질 하면 죽는다 그랬어 안그랬어?"

붉은 용기사는 의외의 사태에 일순 굳어버린 글라디오의 턱에는 신속한 돌려차기를, 쭈뼛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이그니스의 입에는 혀를 선물했다. 불의의 일격에 뇌진탕을 일으킨 글라디오는 힘없이 허물어졌고, 뒷머리를 붙잡힌 이그니스는 감히 그녀의 치명적이고 보드라운 병기에 상처입힐까 두려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 쉬이 대응하지 못했다. 연병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라네아의 입술이 떨어지자 이그니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라네아. 여성이 이런 곳에서 남성에게."

"아 오늘 나랑 씹할 놈 말 존나 많네."

글레이브들이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곱게 자란 이그니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폭언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그니스의 눈썹이 살짝 흔들린 순간 아라네아가 이그니스의 허리를 무정하게 꺾어 버렸다. 그리고 아라네아는 완전히 무력화된 이그니스의 입에 다시 한 번 그녀의 붉은 창을 꽂아 넣었다. 거신 타이탄인들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싶은 장절한 공격이었다.

글레이브들은 황망하게 끝난 신들의 싸움을 아쉬워 해야 할지, 신성한 연병장에서 연애질을 하고 있는 높으신 분들에게 지랄을 떨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곧 자신들은 이 박력 넘치는 용기사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의견에 뜻을 같이 했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글레이브들은 시해의 피를 삼킨 것 같은 얼굴로 뿔뿔히 흩어졌다.

두 입술은 마지막 남은 글레이브가 주섬주섬 사라질 때 쯤에야 떨어졌다. 두 사람의 타액이 길게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아, 아라네아."

이그니스는 허리가 끊어질 것 처럼 아팠지만 감히 내색할 수 없었다. 천하의 이그니스도 지금 포커 페이스를 유지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라네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씨익 웃었다.

"날 기다리게 한 벌이야. 얼른 가자."

이그니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네 방이지. 약속했잖아."

이그니스가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요리. 아아, 요리를 해주기로 했었지."

"그래.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아라네아는 이그니스의 팔을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자타공인, 킹스 글레이브라 불리우는 기적의 전사도 이를 거부할 수 없었으니 이 자리에서 누가 진정 강자인지 결정된 셈이다. 그 와중에 아라네아는 글라디오에게 서슬 퍼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지, 그 눈 빛은?

하이윈드 경. 아라네아 씨.

아니야. 아니라고.

글라디오는 다만 글레이브들에게 친구를, 강하고 스타일리시한, 킹스 글레이브의 필두- 이그니스 스키엔티아를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 만큼은 결코 치정 싸움이 아닌 것이다.

글라디오는 뇌가 흔들려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뇌까렸다.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그런 글라디오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답받는 것은 먼 훗 날의 일이었다.

오늘은 아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9. 19:56
익숙한 적막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홀로 구속구에 전신을 묶인 채 상태로 독방에 구금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기사단장 4명과 특무대를 구성. 모두의 힘을 합해 악마신 아스모데우스를 토벌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인류 최대의 숙적을 쓰러뜨린 특무대장을 이렇게 취급해도 괜찮은 건가.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죄인이니까.

게다가 그 전투 중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번에야말로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장차 신의 도구로 사역당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터.

"쓸모없어졌군."

그렇게 중얼거린 때였다. 독방의 문이 열렸다.

"당치 않습니다."

붉은 기사 정복에 딱 벌어진 어깨. 균형잡힌 몸매에 1.9 미터에 달하는 큰 키. 정돈되어 있는 기감. 등에 메고 있는 것은 가문의 주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창. 스쳐 지나가게 되면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될 법한 남자다.

"랜슬롯 경."

붉은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이란 칭호가 오늘처럼 부끄러웠던 날은 없습니다."

"괜찮다면 상황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대장이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지 3일 지났습니다. 신전과 기사단 설득에 시간이 걸려 모시러 오는 것이 늦었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방금 눈을 떴을 뿐입니다."

어느 새 다가온 붉은 기사가 구속구를 하나 하나 풀기 시작했다. 섬세한 손길이다. 부상자인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겠지. 죄인인 나에게 조차 그 성정을 바꾸지 않는다. 랜슬롯 경이 기사 중의 기사라 불리우는 이유다.

랜슬롯 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흠.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랜슬롯 경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대장은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어떻게 말입니까."

랜슬롯 경은 계속 구속구를 풀어내며 말했다.

"그 날의 전투 영상을 전부 일반 공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특무대 사이의 불협화음과 추태까지 전부."

랜슬롯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당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공개해 버려도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랬다면 대장은 지금쯤 마을 꼬마들 사이에서 신의 사도라 불리우고 있었겠지요. 안심하십시오. 원로회의 늙은이들도 그 영상이 공개되면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정말이지 아둔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해 주기로 했다.

"뒷 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각오한 바입니다."

"기사단장들의 반발이 있었을텐데요."

"만장일치였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상쇄될 정도의 공입니다. 공을 취해 나눈다면 넷이서 기사단의 중추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지 않은 일로 권력을 잡아봐야 그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경솔한 짓을 하셨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경은 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구속구를 풀어내는 손이 멈췄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 경고했다.

"제 몸에 걸려있는 금제는 그대로 입니다. 이는 신께서 아직 제 원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음을 증명합니다."

"그런 정도로 제가 일을 그르칠 거라 생각하십니까. 신께서 가라사대, 원죄를 거둘 수는 없으나, 사람으로써 사람의 법도를 따를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 신탁이 있다니. 너무 상황이 형편 좋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저는 대장의 원죄에는 관심 없습니다. 어차피 이 몸은 그 날 이미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당신이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면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구속구가 전부 풀렸다. 나는 땅에 내려섰다. 손목을 주물거리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그 날의 전투를 마음 속으로 다시 그려 본다. 랜슬롯 경이 곁에 있었고, 테스타롯사 경과 조르쥬 경이 지원해 주었다. 게다가 숨통을 끊은 것은 멜리나 경이다. 내 마지막 발차기는 그저 화풀이에 불과했다.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 것은 내가 아니다. 실로 그렇다.

내 말에 랜슬롯 경이 눈이 크게 떴다가, 가늘게 좁혔다가, 가볍게 탄성을 냈다. 뭔가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이다.

"과연. 대장 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대장이 없었다면 우린 전부 죽었습니다."

이 또한 모두가 인정한 사실입니다, 하고 랜슬롯 경이 덧붙였다. 늘 생각하지만 겸손함이 지나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랜슬롯 경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랜슬롯 경은 존경할 만한 기사다. 내가 특무대장이 되었을 때 경은 기사단장이면서도 나를 대등한 전사로 대우해 주었다.

심지어 죄인에 지나지 않는 나와 함께 전술을 연구하고, 창술을 연마했으며, 진심으로 나를 따라와 주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실력자란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가.

그랬다. 그에게 조금만 야심이 있었더라면. 아깝고도 아까운 인재다. 내가 입밖에 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랜슬롯 경의 표정이 신묘해졌다.

"그...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던가. 랜슬롯 경이 말하기 괴로운 것처럼 말했다.

"이제 대장에게 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박하고 완고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어가봐야 더이상 그에게 먹힐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방을 걸어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나에게 랜슬롯 경은 황송스럽게도 가문의 창을 빌려주었다. 랜스 오브 카인이 지팡이 대신으로 사용된 일은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리라. 심지어 나는 방금 전까지 공식적으로 죄인이었다.

"저에게 날붙이를 쥐어주시면 어찌합니까."

"무한한 영광입니다."

틀렸다. 아까부터 뭔가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방 바깥에는 세 명의 기사가 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멜리사 경. 테스타롯사 경. 조르쥬 경.

왕성이 자랑하는 4인의 기사단장이 모두 모인 것이다. 죄인인 내가 이 사람들을 이끌고 아스모데우스 토벌 특무대를 구성했다는 것이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테스타롯사 경. 무탈하셨습니까."

그는 검은 갑주를 입었던 쌍검 기사. 테스타롯사 가문의 가주. 나이는 이미 장년에 접어들었으나 갑주 착용자의 기량은 신체의 노쇠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수십년의 경험을 통해 쌍검 뿐만 아니라 투검, 박투 등 다방면에 걸쳐 전투 기술을 숙련해두고 있다.

다만 그의 갑주는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때는 미처 신경쓰지 못해 나에겐 다소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테스타롯사 경이 감개무량한 눈 빛으로 오른손을 쥐고 심장에 올려 붙였다.

"목숨을 빚졌소이다. 내 이 은혜는 평생을 통해 갚을 것이니."

전에는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아 주었기에, 이 태도의 변화가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무사해 보여 다행이다.

테스타롯사 경으로써도 아직 내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 였으리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와 교대하는 것처럼 근육질의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몸은 괜찮냐? 이런 비실비실한 놈이 아스모데우스와 일기토를 벌였다니."

키가 2미터를 훌쩍 넘는 궁기사 조르쥬 경이다. 기사답지 않은 언행은 그의 의복 같은 것이다. 그는 예의를 중시하는 기사단에서 단지 실적만으로 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스모데우스를 애꾸로 만든 강궁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한결 수월했습니다."

조르쥬 경의 푸른 갑주가 마음을 먹고 저격을 시작하면 그것은 천재지변에 가깝다. 누구도 그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켁. 그만둬 그만둬."

조르쥬 경은 손사래를 치고 뒤로 물러섰다.

"대장."

고개를 돌린 곳에는 멜리사 경이 있었다. 가벼운 예장에 허리춤에 얇은 레이피어를 차고 있을 뿐이지만 그 기백은 틀림없는 기사단장의 그것이다.

"멜리사 경."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저 무시무시한 노란 갑주의 장착자일 거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랜슬롯 경이나 테스타롯사 경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녀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일격에 목숨을 빚지고 있다.

그녀가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이건... 상상 이상이군요."

"?"

"마음에 직접 울리는 플러팅이라니."

"네? 지금 무슨 말씀을..."

등 뒤로 랜슬롯이 필사적으로 손사레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세로 손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니까.

조금 추울 정도였다. 슬슬 그만뒀으면 한다.

"뭐, 좋아요. 랜슬롯 경을 가장 존경하는 대장. 저도 대장에게 그 존경이란 걸 받고 싶네요."

어라. 내가 그런 말을 입밖에 냈던가.

"멜리사 경!"

랜슬롯 경이 그 답지 않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랜슬롯 경은 헛기침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대장을 숙소로 모십시다. 멜리사 경. 대장에게 간단한 회복 법술을 부탁합니다."

멜리사 경의 눈썹이 묘하게 휘어졌다.

"그런 것은 섬세하고 남자다운 기사 중의 기사께서 하셔야 할... 아, 네, 알았어요. 농입니다. 그리 노려보실 것까지야."

그리고 나는 전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9. 19:08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왔다.

척추가 기능을 잃기 시작하고 있었다. 등뼈에 손상을 입었는데도 무리하게 움직인 탓이다. 허리 아래의 감각은 거의 없어진 상태다.

눈이 침침해지고 졸음이 온다.

그렇게 잠이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슬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어째서 그들은 나에게 회복 법술을 걸어 주지 않는 것일까. 마력이 떨어졌을리는 없을 터.

나는 내버려둔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 안돼! 이 자는 죄인이야!

청각 기능에 손상이 있어서 소리를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마치 귀에 확성기를 대고 힘껏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상을 입은 고막이 터질 지경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 똑바로 말해! 대장이다! 대장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이기지 못했다! 여기까지 해내지 못했다고!

- 그걸 보고도 그러는 거야? 맨몸으로 아스모데우스와 겨루는 걸 보고도? 이 자는 인간이 아냐! 아스모데우스도 없는 지금 이 자가 회복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 그만, 그만!

- 그렇잖아! 우리가 이 자에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너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넌더리가 난다. 그러나 익숙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신탁의 형태로 나에게 불리한 이야기라도 들었을 것이다. 오라클이라 불리는, 위대한 신의 음성이 뇌리에 직접 꽂히는 것이다.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로 이름 높은 그들 역시 인간이다.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이해한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아스모데우스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 !? 뭐, 뭐야?

슬슬 그들도 눈치를 챈 것 같다.

- 아스모데우스? 살아있는 거야?

- 아직 이런 투기를? 말도 안돼!

끔찍하게 압축된 근육 덩어리 같은 4미터의 육체. 여섯 개의 팔. 더이상 신으로써의 지성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 같은, 광기로 덧칠된 눈.

악마신 아스모데우스가 그 거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로부터 느껴지는 투기는 한 번 쓰러지기 전에 비하면 허세에 가깝다. 마지막 발악일 뿐이다. 그에 반해 이쪽은 기사단장급 전투 갑주 4기가 모두 건재하다. 그러므로 전원이 달려들면 승산이 있다. 몇 번이고 해왔던 일이다.

하지만 성대가 갈려나간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단장들이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온 역전의 용사들 답지 않게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허나 아직 죽을 수 없다. 이들 또한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시민들을 위해 기꺼이 사지로 뛰어든 이들을. 기사단장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지휘를 받아들이고, 특무대로써 기꺼이 자살 임무에 참가한 전사 중의 전사들을.

- 이럴수가?

- 대, 대장!

기사단장들은 아스모데우스가 부활한 것 보다 내가 일어선 것이 더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런 그들에게 최소한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투기를 돌려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3분이 고작이다. 그러니까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아스모데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진형을 잡았으면 좋겠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일격이 강한 개체를 포위하는 것으로. 이왕이면 순간 화력이 높은 2번 패턴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때 멈춰있던 4기의 전투 갑주들이 나를 중심으로 포메이션을 잡기 시작했다. 손가락 가득히 투척용 단검을 꼽아둔 검은 갑주가 내 오른 편에, 그레이트 보우를 장착한 푸른 갑주가 내 왼편에. 다른 갑주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은 거대한 노란 갑주는 후방으로 이탈. 마지막으로 4미터가 넘는 장창을 쥔 붉은 갑주는 내 바로 옆에 섰다.

놀랍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포메이션 2. 내가 원하던 그 진형이다.

과연 기사단장들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조금이지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력이 없어 전투 갑주를 입지 못하는 나를, 재능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기사단장들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를 자각한다면 나도 편해질 텐데. 방금과 같은 의심도, 견제도 필요없어질 것이다. 보통이라면 직접 말해줘도 괜찮겠지만 죄인에게 그런 입은 달려있지 않다.

붉은 갑주가 말없이 나에게 창을 내밀었다. 붉은 갑주의 창에 내장되어 있는 내 전용 창이다. 붉은 갑주의 거대한 창에 비하면 길이도 반도 안되고 두께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제 부터 나는 이 비루한 창을 들고 3미터에 가까운 거인 병기와 호흡을 맞춰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야 한다. 정확한 타이밍으로 합격에 임하기 위해서 나는 붉은 갑주 보다 네 배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노란 갑주의 기척이 사라진 순간.

나는 붉은 갑주와 돌격했다. 질풍 같은 찌르기로 정면에서 동시에 아스모데우스를 공격해 들어간다. 아스모데우스는 여섯 개의 팔뚝을 들어올려 두 창격을 한 번에 받아냈다. 강철을 두들긴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팔뚝을 타고 진동이 올라온다. 이 악마신의 육체는 죽었다 살아난 주제에 아직도 이런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건 이미 근육이 아니다.

하지만 실망할 틈이 없다. 그대로 나는 반시계 방향으로, 붉은 갑주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들며 가열찬 공격을 이어간다. 그대로 악마신을 중심에 두고 놈의 앞뒤에서, 좌우에서 끊임없이 공격한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강적을 상대하는 상황을 상정한 진형이다. 이를 위해 나는 붉은 갑주 사용자에게서 속성으로 창술을 배웠고, 그는 내 변칙적인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단련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붉은 갑주는 내 공격에 정확하게 맞춰 찌르고 후려치고 베어냈다. 붉은 기사단 특유의 묵직한 연격이 아스모데우스의 움직임을 사방에서 원천 봉쇄한다. 마치 사이에 거울을 둔 것 같은 완벽한 타이밍. 연습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정확한 합격. 붉은 갑주는 이런 극한 상황에 와서 비결을 깨달은 모양이다.

아스모데우스는 생각치도 못한 협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놈은 150회 이상의 공격을 받았다. 처음으로 얼굴에 창을 허용한 악마신이 주춤 거리는 동안 나와 붉은 갑주는 놈의 좌우에 자리 잡고 투기를 끌어 올렸다. 투기를 타고 내장에 고여있던 피가 역류해 올라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내지른 창격에 온몸을 비틀어 얻어낸 회전력이 합쳐져 악마신의 팔을 헤집어 뜯어 낸다. 내가 두 개. 붉은 갑주가 한 개. 호승심이 강한 붉은 갑주의 탑승자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웃어 보이는 대신 머금고 있던 피를 뱉어냈다.

한 번 더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다. 나와 붉은 갑주는 뒤로 크게 물러났다. 팔을 잃어버린 아스모데우스가 고통과 황망함 속에서 표적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사선이 열렸다.

검은 갑주가 투검. 동시에 푸른 갑주가 재어두고 있던 화살을 릴리즈. 아스모데우스는 검은 갑주가 던진 다섯 개의 투검은 쳐내고 그 사이에 눈앞까지 쇄도한 화살은 손바닥으로 막아낸다. 하지만 푸른 갑주의 사격을 그런 식으로 막아낼 수 없다. 고룡조차 일격에 꿰뚫는 그의 강궁은 그대로 놈의 손바닥을 뚫고 오른쪽 눈에 작렬했다.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경악. 타들어가는 고통.

숨길 수 없는 분노.

---------!

곧 고막이 터져버린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포효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악마신의 마지막 남은 오른 팔이 땅을 가격. 엄청난 마력의 이동이 느껴진다. 거의 동시에 원거리 지원팀이 위치한 땅이 날카롭게 융기. 두 전투 갑주를 공격했다. 검은 갑주는 이를 가까스로 회피. 푸른 갑주도 급히 움직였지만 화살을 쏜 직후 였기에 반응이 늦다. 왼 팔과 다리가 산산조각난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충분하다. 그는 할 일을 마쳤다.

나와 붉은 갑주는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정면으로 돌아 합격을 재개. 놈이 움직이지 못하는 푸른 갑주를 노리지 못하도록 잡아둔다.

아스모데우스는 눈에 박힌 화살을 억지로 떼어내고 통나무같은 팔을 휘둘러 반격.우리들은 동시에 땅에 달라붙는 것처럼 몸을 숙여 그 충격파까지 여유있게 회피. 놈의 시야가 화살에 당해 절반으로 줄었기에 대응은 한층 수월했다. 그 사이 쌍검을 뽑아든 검은 갑주가 아스모데우스의 등 뒤로 쇄도. 포메이션 2-2. 3대 1로 포위 공격한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

위기감을 느낀 아스모데우스가 투기를 폭발시킨 것이다. 칼날 같은 투기가 전신을 통해 전방위로 방출된다. 나와 민감하게 움직임을 맞추고 있던 붉은 갑주는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검은 갑주는 그러지 못했다. 전신을 꿰뚫린 갑주는 힘없이 허물어졌다. 탑승자의 상태를 확인할 여유는 없다. 살아 있기를 바랄 밖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전개였던 탓이리라. 붉은 갑주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그리고 악마신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덤벼든 놈의 주먹이 붉은 갑주에게 작렬. 견고하기 짝이 없는 미스릴제 창을 부러뜨리고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놈이 흉부를 노리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그곳에는 탑승자의 본체가 있다. 이 공격을 받았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나는 창을 반대로 돌려 날이 없는 부분으로 붉은 갑주를 밀어내듯 쳐냈다. 붉은 갑주는 땅에 긴 자국을 남기며 죽 밀려났다. 그리고 배틀 필드에는 이제 아스모데우스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분노에 가득찬 핏발 선 외눈. 등을 통해 전율이 달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창을 땅에 던져 꼽으며 도발했다. 와라. 이제 난 맨손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육중한 몸을 흔들며 쿵쿵쿵쿵 달려온다. 그리고 놈의 오른팔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피하는 대신 양팔을 교차시켜 막아낸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던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굉음.

나를 중심으로 지면이 함몰했고, 나는 발목까지 땅에 삼켜졌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줄을 놓고도 내가 악마신의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낸 상황에 당황한 것이리라.

모자란 놈.

그래서야 등에 특대검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어느 새 세로로 길게 휘둘러진 특대검이,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를 깊게 갈라버렸다. 그 일격은 놈의 뇌를 부수고 등뼈를 조각조각 내며 땅에 떨어져, 지면에도 깊은 검흔을 남겼다. 아스모데우스는 치명상을 받은 다음에야 등 뒤에 노란 갑주의 존재를 알아챘다.

아스모데우스 만큼이나 거대한 노란 갑주는 그 거체에 어울리는 육중한 특대검을 다뤄 기사단장의 갑주 중에서도 돌출된, 그야말로 최강의 일격을 뿜어낸다. 그리고 특기는 그 거체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은밀 기동. 그 언밸런스한 조합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약해진 아스모데우스 따위, 실로 일격에 격침시킬 정도다. 단지 이 한 방을 위해 노란 갑주는 전장을 크게 돌아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를 잡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포메이션 2의 숨겨진 핵심. 노란 갑주의 화력에 의존한 일발역전의 대악마 전술이다.

주요 내장 기관을 파괴당한 아스모데우스는 절명. 그 거체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놈의 관자놀이를 겨냥해 힘껏 돌려 찼다. 목이 꺾여 나가며 아스모데우스는 옆으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그냥 놔둬도 됐을 텐데,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몸도 정상이 아닌데 쓸데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 대장!

터져버린 고막 사이로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천천히 쓰러졌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6. 1. 21:17




왕께서는 조간을 드리운 채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돌연 말을 꺼냈다.




배를 준비해. 알티시에로 간다.




그 때의 울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루나프레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두웠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달 빛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다.

카멜리아 대사와의 회담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딱딱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와 서릿발 같은 대사님의 위압감을 어찌어찌 견뎌낸 뒤로 루나프레나는 가벼운 피로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알티시에가 제국으로부터 루나프레나를 보호하는 것은 그녀가 수신 리바이어선을 소환하는 날 까지인 것으로 합의되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카멜리아 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알티시에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이니까. 그 이상 알티시에가 루나프레나의 안전을 지켜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루나프레나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운명에 묶여 있는 칸나기이므로.

오히려 루나프레나는 알티시에를 걱정하고 있었다. 수신 리바이어선의 성정은 격하기가 그 짝을 찾을 수 없어 검신 바하무트가 한 수 접어줄 정도다. 겐티아나님이 직접 루나프레나에게 경고할 지경이었으니까. 제국의 공격과 상관없이 알티시에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루나프레나에게는 이 우울함을 날려보낼 비장의 마법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수첩을 꺼내 펴들었다. 이 수첩은 녹티스와 주고 받은 문장으로 가득차 있다.

한장씩 넘기며 익숙한 필체를 눈으로 쫓았다. 매일매일, 몇 번이고 읽었다. 이미 그 눈에, 가슴에, 영혼에 새긴 반려의 글자들.

칸나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녹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떠오른다.

무시무시한 시해의 습격을 받아 정신과 육체에 상처를 입은 자그마한 소년. 제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소년. 그 아버지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소년. 그럼에도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관심이 고파서- 편식을 고치지 않았던 소년.

그리고, 크리스탈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소년.

한기가 들었다.

그런 소년에게 자신은 말했다. 세상을 지켜달라고. 그리고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 맹세가 어떤 의미인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조금씩 떨려오는 루나프레나의 눈에, 녹티스 왕자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곧 만날 수 있겠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이제 이 수첩조차 자신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녹티스...님..."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수첩을 적셨다.

그를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먼 발치에서 얼굴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이 허락된다면.

하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루나프레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숨죽여 울었다.

이대로 리바이어선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녹티스님이 신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녹티스님께서 크리스탈의 힘을 이어받지 않게 된다면.

그 분께서는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될까?

이제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묻어나오려 할 때, 창밖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루나프레나의 어깨를 감싸안고 살며시 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루나프레나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팔방이 바다인 자그마한 섬 알티시에 자치구에서는 일년 내내 해풍이 불어온다. 제법 찬 바람이다. 그런 알티시에에서 이와 같은 훈풍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바람은 아까부터 계속 불어오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따스한 바람을 타고, 푸른 색의 꽃 잎이 한들 한들 날아들고 있었다.

"...지르의 꽃 잎?"

녹티스 왕자의 눈동자 색을 닮은, 지르의 꽃. 루나프레나는 자신의 방에 언제나 이 꽃을 장식해 두곤 했다. 그녀는 그 꽃을 통해 녹티스 왕자가 자신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 어린 아이 같은 망상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루나프레나는 그 습관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그 부끄럽고 아련한 지르의 꽃 잎이 눈 앞에 있다. 있을 수 없는 바람을 타고 창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 몽환적인 광경에 경도된 루나프레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꽃을 거의 손에 쥐는 순간.

빛과 함께 내려선 존재가 있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칸나기였다. 그녀는 그 빛이 마력 폭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빛이 잦아들자 마력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꽃 잎과 함께 루나프레나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아, 됐다. 진짜 되네."

빛과 함께 나타난 그는 그 자신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이 분은. 루나프레나는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와! 역시 나 쩔어. 진짜 쩔어."

신이 직접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기쁨이 피어 오른다. 기억 속의 소년이 마음을 열고 나서 보여주곤 했던 장난스러운 미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꿈인가.

그것도 아니면 환상인가.

분명히 이것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감상에 젖어 정신을 놓은 탓이다.

그 분께서 지금 이곳에- 올 수 있을 리 없는 것을.

그러나 루나프레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환상이라도 좋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그저 눈 앞의 기적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루나프레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눈 앞의 청년이 신이 나서 말을 쏟아냈다.

"공기는 말야, 덥히면 떠오른다구. 불꽃으로 그 방향을 조절해서 꽃 잎을 실어 창문으로 날려보낸 거야. 그리고 꽃 잎이 도착한 곳으로 워프한 거지. 언제나 무기를 던져서 워프하는데, 꽃 잎이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맞아! 이 모든 게 루나가 마침 창문을 열어둔 덕분... 루나?"

한 참 떠들고 있던 청년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약혼자를 내려다 봤다. 그녀의 눈에는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질 무렵 루나프레나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녹티스...님?"

입을 열면 환상이 부서질 듯한.

그래서 차라리 확인하고 싶지 않은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정말... 녹티스 님이세요?"

그 떨리는 목소리에 녹티스가 숨을 들이켰다.

"어... 어, 그래. 나야. 루나."

나란 놈은 인사도 똑바로 못하는 거냐.

칠칠치 못한 녀석이라고, 친구들이 웃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녹티스는 그제야 자신이 루나프레나의 손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와!"

쑥맥 왕자가 손을 놓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오늘 나 완전 구겨지네."

녹티스가 놓아버린 손에 새삼 한기가 느껴졌다. 왕자님의 따스한 손. 체온. 결코 환상이 아니다. 그는 실재하는, 사랑스러운 왕자님이다.

"녹티스님!"

루나프레나가 녹티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녹티스는 기겁했지만 가까스로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녹티스님, 녹티스님, 녹티스님!"

녹티스가 루나프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루나. 오랜만이야."

녹티스가 속삭였다.

"늦어서 미안해."

"흐윽... 녹티스님... 흑..."

녹티스는 루나프레나가 오열을 멈출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이그니스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녹히스님."

녹티스는 공들여 왕의 예복을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품안에서 금 빛 자수가 고급스럽게 수놓여 있는 손수건을 꺼내 건냈다. 루나프레나가 말없이 그걸 받아 들었다.

"크응."

아, 웃으면 안돼. 안돼는데.

녹티스는 눈을 부릎 뜨고 견뎌내려 했지만 입가로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녹티스는 헛기침을 구사해 상황을 모면했다. 이 또한 이그니스에게 배운 기술이다.

루나프레나는 손수건을 녹티스에게 돌려주려다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손수건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눈치였다. 갈팡질팡하던 칸나기님은 흥건해진 손수건을 모르는 척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미칠 것 같다. 행동 하나하나가 녹티스를 자극했다. 이건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루나는 분명히 나보다 4살 연상일 텐데. 그랬을 텐데.

"녹티스님."

루나프레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올곧은 눈으로 녹티스를 응시했다. 손수건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이제 완전히 진정한 모양이었다.

다만 녹티스는 그간 루나프레나의 귀여운 행동을 모르는 척 하느라 심장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는 도저히 약혼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루나프레나가 녹티스를 재촉했다.

"녹티스님. 손을 주세요."

"어? 어어."

녹티스는 순순히 오른손을 루나프레나에게 건냈다. 루나프레나의 양손이 녹티스의 손을 보듬었다. 곱게 자란 왕자님의 손이 이젠 온통 굳은살 투성이다. 가슴이 조금씩 아려온다.

칸나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했다. 그리고 감지해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마력을.

...그리고 거의 말라 비틀어진 생명력을.

곧 그녀는 전부 알아챘다.

"녹티스님께선... 이미 왕이 되신거군요. 먼 곳에서 되돌아 오셨어요."

그것은 겐티아나님의 힘. 시간조차 얼려버리는 얼음신의 숨겨진 권능. 그 힘을 통해 녹티스는 과거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은 루시스에 되돌려줄 빛을 위해. 사람들에게 미래를 돌려주기 위해. 확실한 승리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그 자신의 죽음을 위해.

"그... 맞아. 들켰네."

녹티스는 장난하다 들킨 어린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뾰족해 졌다.

"녹티스님. 앞으로 일어날 일. 전부 알고 계신건가요?"

녹티스는 입을 열었다. 대답은 짧았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태연하세요!"

루나프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랫 동안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 있는 일이다. 녹티스는 눈을 깜빡였다.

"왕의 힘을 얻고 나면 녹티스님은!"

아아, 그렇지. 루나는 자상하니까. 녹티스는 웃었고, 루나프레나는 여전히 왕자님의 표정이 못마땅했다.

"검신이 전부 알려줬어. 다 알고서 돌아온 거야."

루나프레나는 아무 말도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그녀는 시선을 떨궜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녹티스가 황급히 덭붙였다.

"괜찮아! 각오는 되어 있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그 어떤 일보다 두렵다. 녹티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루나프레나의 입이 더듬더듬 고백했다.

"녹티스님... 저는... 녹티스님에게... 그 사실을..."

숨겼어요.

루나프레나는 차마 마지막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어렴풋하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녹티스는 위엄있는 부왕 레기스의 뒤를 잇게 될 거라고 어렴풋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이 명징한 미래가 된 것은 왕이 되어 세계를 지켜달라고 루나가 부탁했을 때였다.

그렇다. 누군가 루나프레나를 비난할 작정이라면, 그녀가 왕자에게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겼다는 비정함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루나프레나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루나야말로."

루나프레나는 이미 다시 오열하고 있었다. 녹티스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계에 위기가 왔을 때 칸나기는 왕보다 단명하지. 여섯 신을 깨워야 하니까. 제아무리 칸나기라 해도 목숨을 사용해야 하니까. 난 아무 것도 몰랐어. 레이브스가 말해줬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어."

"...저는...!"

"나는 이제 잘 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는지. 아버지나 루나가 날 어떤 마음으로 지켜주었는지."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루나. 그리고 미안해."

그녀를 지켜줄 수 없다. 자신과는 달리, 일찍 철이 들어야만 했던 칸나기. 어려서 부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운명의 희생자.

녹티스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그 무엇 하나 없었다.

친구들. 학교. 취미. 일상. 자유.

그 무엇하나.

그런데도.

"알아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날. 제국군이 테네브라에 성으로 날 노리고 쳐들어 왔을 때. 난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어. 지금 도망가면 안된다고. 루나가 저기 있다고. 루나와 함께 가야 한다고. 하지만 겁이 나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녹티스가 살짝 눈을 문질렀다.

"그 때 루나의 표정. 잊을 수가 없었어."

사실은 기뻤다. 루나가 세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때. 루나처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부상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자신을 의지했다는 사실에 우쭐했다.

이런 한심한 나라도 그녀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은 환상이었다.

그는 무력함에 몸부림쳤다.

루나에게 그런 처연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루나는 나같은 놈을 위해 스스로 제국군에게 잡혔어.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녹티스님..."

"나한테 실망했겠지. 날 싫어하게 됐을 거야. 그렇게 바닥을 파고 있을 때 움브라가 수첩을 가지고 왔어."

제국군을 피해 달아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그 수첩이었다.

'건강하세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수첩에 적힌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구원받았는지. 루나는 상상도 못할 거야."

"녹티스님..."

"그 때 내가 얼떨결에 답장한 게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보고 싶어.'

그 메시지를 봤들 때의 감정을 루나프레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녹티스 왕자님은 모르실 테지. 그 사소한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이 당신 뿐만이 아님을.

그는, 왕자님은 마치 마법 같았다.

루나프레나는 다시 그 수첩이 자신의 보물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았다.

.

녹티스와 루나프레나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조잘거렸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시간을 전부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녹티스님은 아직도 채소 안드시나요?"

"윽..."

채소라니.

녹티스의 얼굴이 녹즙을 마신 것처럼 구겨졌다. 알티시에로 오기 전날 밤의 일을 떠올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녹티스는 그 때 왕으로써 준엄히 말했다. '몰볼을 갈아 만든 것 같은 그 액체를, 내 한 모금도 마시지 아니할 것인 즉. 삼가 받들도록 하라, 내 충직한 신하여.'

루나는 녹티스의 한심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안돼요, 녹티스님. 이그니스님이 너무 가여워요."

가여워?

이그니스가?

녹티스의 뇌리에 이그니스의 대답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어린애처럼 채소를 들지 아니하시니, 방법이 없는 것을 아뢰오.'

울컥한 녹티스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왜 이그니스 편을 드는 거야. 이그니스가 날 얼마나 못살게 구는 줄 알아?"

"푸흡."

"루나. 웃지 말고 내 편을 들어줘야지."

"그야 물론이죠. 실은요, 전 녹티스님을 이해할 수 있어요. 늘 생각하거든요. 왜 설탕을 먹으면 살이 찌는지."

녹티스가 조금 놀랐다.

"루나도 그런 생각을 다 해?"

"네에, 물론이죠. 칸나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하니까요. 조리장님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케익 같은 것은 거의 못 먹어요. 저도 그래서 가끔 힘들 때 설탕을 먹으면 지방이 분해되고, 근력이 생기고.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답니다."

"신은 왜 맛없는 걸 몸에 좋게 만든 거야."

녹티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루나. 이 다음 연설 때 채소 먹고 싶지 않으면 굳이 안먹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어?"

"아,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꿈을 꾸게 해줘."

"아하, 아하하하하하!"

칸나기는 체통을 잃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뒤에도 끅끅 거리는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온다.

"하아하아... 배... 배 아파... 녹티스님도 참."

웃음를 겨우 멈춘 루나프레나가 올려다보자 녹티스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티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를 애써 참아냈다. 언제까지고 귀여운 사람이다.

"맞다. 프롬프토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물론이지. 걘 나만 있으면- ...그런데 루나가 어떻게 프롬프토를 알아?"

루나프레나는 자신이 프롬프토에게 왕자님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보낸 경위를 설명했다. 과연 녹티스는 눈을 주먹만하게 뜨고 있는 것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자식...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수줍음이 많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

"?"

녹티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루나프레나가 녹티스의 안색을 살폈다.

"녹티스님?"

루나가 이그니스 편을 든다. 그런가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프롬프토가 루나프레나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입이 자꾸만 삐죽거렸다. 결국 녹티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기 말야, 루나가 자꾸 다른 남자 이야길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네?"

"루나가 글라디오 이야기까지 꺼내면 나 진짜 삐칠지도 몰라. 응. 절대로 삐칠 거야."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굳이 그 말을 정면으로 받았다.

"글라디올러스님은 분명히 녹티스님의 검술 선생님이셨죠. 강한 분이라고. 장래가 기대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녹티스가 울컥 했다.

"그런 근육 고릴라 아무 것도 아니거든."

"네에?"

"내가 더 쎄거든. 요전 번에도 이겼거든."

"어머나."

"삐쳤어. 나 삐친다 그랬지. 갈거야."

녹티스가 일어섰다. 그러면서 내심 자신이 대견하다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른스러운 마무리다. 질투를 대의로 승화시켜 루나를 배려한 것이다. 밤이 깊었고, 더 이상 루나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로 아쉽다. 이대로 계속 함께 있고 싶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루나가 "이제 그만 가보시려구요?" 하고 무난하게 배웅해주는 일만 남았다. 녹티스가 그 말을 기다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 씁쓸하긴 하지만. 괜찮다.

루나프레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말을 자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녹티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느새 루나의 눈은 다시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우 그친 눈물이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쏟아질 것만 같다.

왜, 루나가?

어째서. 어째서야.

프롬프토. 글라디오. 이그니스.

너희들 어디 있어.

나 사고쳤어.

.

의연하게 보내 드려야 한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술은 루나프레나의 명령을 거절했고 눈물샘이 멋대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녹티스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루나프레나는 더욱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억지로 목소리를 자아냈다.

"벌써... 가시려구요...?"

글렀다. 하려던 말과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사려깊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곧 이 한심한 미련이야말로 자신의 진심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녹티스님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신을 깨우는 의식보다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을 줄이야.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 그... 애들한테도 비밀로 나온 거라서..."

왕자님도 그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루나의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루나프레나는 생애 처음으로, 칸나기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써,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녹티스님. 친구분들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으세요?"

그 분들과는 지금껏 계속 함께 계셨잖아요.

"저와 함께 있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오늘이 지나면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저와 결혼하는 게 싫으세요?"

계속 기다렸는데.

"저는 녹티스님의 무엇인가요? 왕의 칸나기? 스쳐지나간 사람? 짜증나고 히스테릭한?"

"루나!"

녹티스가 충동적으로 루나프레나를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니야!"

녹티스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나 폼잡고 있지만 미칠 것 같고! 루나와 결혼하는 거 절대 정략 결혼 같은 거 아니고! 나 계속 좋아서! 부끄러워서 내색은 못했지만 내 행운 전부 다쓴 것 같고! 그래서!"

루나프레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조금 신음소리를 냈지만 녹티스는 알아채지 못했다.

"나, 나 계속 루나와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나 그깟 수신의 가호 같은 거 필요없는데 루나를 막을 수 없고! 사명이 있으니까! 그래도 놓고 싶지 않은데! 루나와 결혼하고 싶은데!"

녹티스는 자신이 완전히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진심이다. 그것을 루나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녹티스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녹티스의 고백이 멈췄다. 왕자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뇌가 공회전을 반복했다. 더이상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부담스러운 침묵. 그 어둠을 뚫고, 루나가 입을 열었다.

"녹티스님은 왜 말과 행동이 다르세요?"

아직 조금 찌르는 듯 새침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음색이 담겨있었다.

"루나?"

루나프레나는 녹티스에게 대답하는 대신 결심을 굳혔다. 칸나기는 왕을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혼돈에 빠진 왕에게 바른 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루나프레나가 살짝 발돋움 했다. 그녀의 얼굴이 녹티스의 얼굴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녹티스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갛게 달아 올랐고, 체온이 급상승했다. 이 방 어딘가에 불꽃의 신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 이놈, 이프리트. 아덴의 개가 되어 이 나를 암살하러 왔느냐.

그러나 이래봬도 녹티스는 온갖 수라장을 거쳐온 일류 전사였다. 일촌간파가 그의 장기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달아날 필요는 없다. 그는 루나처럼 발돋움했다. 입술은 다시 녹티스와 루나의 키 차이만큼 벌어졌다.

진정한 왕께서 펼쳐낸 절묘한 방어.

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망극하게도 왕자님께옵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었도다.

루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이 늦은 밤에 제 방에 창문을 통해 찾아들어오시고선."

루나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것이야말로 다음 공격의 준비 자세. 최후의 통첩.

"아무 것도 이루지 않고, 이 방을 나가시겠다구요? 그것이 루시스 왕인가요?"

뾰족한 단어에 비해 루나의 어조는 장난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녹티스가 평정을 찾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컥."

루나는 녹티스의 한심한 반응에 설핏 미소를 지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가 공세를 이어갔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니야!"

녹티스가 소리를 지르곤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루나프레나의 고운 눈썹이 짖궂게 휘어졌다.

"그게 아니라?"

왕자가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런 거... 처음..."

"네에?"

"소설이나 뭐 그런 건 봤지만... 이럴 때 어떻게... 잘... 몰라서..."

루나프레나가 입을 딱 벌렸다.

"하, 한 번도요?"

"으..."

"어머나."

이 왕자님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이 반응은 진짜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밤에 약혼자의 방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혹 뒤에 이어질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생각해 두지 않은 채, 녹티스는 그저 루나를 만나러 온 것 뿐이다.

그저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루나프레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지르의 꽃이 만개하는 것 같은 눈웃음을 녹티스는 홀린 것 처럼 내려다 보았다.

아아.

루나다.

그 어린 시절, 자신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준 그녀다. 그녀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녹티스는 이제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루나가 한 번 더 발돋움 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한심스럽게도 아직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나의 입술이 녹티스의 입술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맙소사. 그 감촉에 녹티스는 거의 현왕의 검을 소환할 뻔 했다. 부드러움. 촉촉함. 루나의 입술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녹티스는 본능이 지시하는 대로 루나를 격렬하게 끌어 안았다. 너무 강한 자극이 녹티스의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무의식 중에 루나의 혀를 거칠게 유린하고, 그녀의 타액을 마시고, 그녀를 벽까지 밀어붙혔다. 루나프레나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이 등을 쓸어내리고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다.

몰라. 이젠 모르겠다. 그저 이대로-

"앗..."

그러나 루나의 신음 소리에 녹티스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루나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은 녹티스를 형용할 수 없는 죄악감에 빠지게 했다.

"하아하아... 녹... 녹티스님..."

"...루나. 미안해. 난..."

루나는 계속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걱정하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겨우 숨을 고르고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볼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녀는 녹티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저기... 입 맞출 때... 숨은 어떻게 쉬는 거에요?"

? 그런 걸 물어도.

녹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 코로? 쉴 수 있잖아?"

루나는 입맞춤의 여운에 취해 아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에 숨을 쉴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맞네..."

녹티스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루나도 책으로 배웠구나.

나처럼.

그리고 녹티스의 표정이 괴상하게 흔들렸다. 뱃속에서,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려 하는 어떤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이다.

그 모습을 보며 루나프레나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다가 이내 체념한 것처럼 말했다.

"괜찮아요. 웃으셔도."

녹티스는 허리를 꺾어대며 폭소했다. 루나프레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녹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결국 왕을 따라 킥킥거리며 웃고 말았다.

아, 어쩌지.

이제 뭘 하면 되지.

앞 일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

녹티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평온한 날이었다.

루나프레나는 잘 놔뒀던 정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화장까지 마친 채 평소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녹티스의 잠든 얼굴을 줄곧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위대한 루시스의 차기 국왕을 더 당혹케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푹 자고 일어난 녹티스는 어느덧 시간이 정오를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선 자신의 명운이 이미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친구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을 테니까.

녹티스는 즉시 피부에 불꽃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말라붙어 있는 온갖 체액과 얼룩을 불태워 닦아냈다. 땀, 타액, 그리고- 여러가지.

저 멀리 날아가 있는 속옷을 주워 입고, 부끄러워 할 틈도 없이 구깃구깃해진 왕의 예복을 갖춰 입은 녹티스는 주저하면서도 루나프레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 답례로 그녀의 가벼운 입맞춤을 받았다.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 이 기억을 양분 삼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모두 견뎌내고 말 것이다.

녹티스는 문을 열고 루나프레나의 침실을 나섰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패착이었다. 들어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도주해야 했다.

그러나 녹티스는 늘 생각이 짧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왕의 참모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벽에 기대어 왕을 기다리고 있던 이그니스가 서서히 벽에서 떨어져 녹티스에게 다가왔다. 그 바로 뒤에는 쓴 웃음을 짓고 있는 프롬프토. 복도 끝에는 팔짱을 낀 채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글라디오.

무표정한 참모의 얼굴을 보며 왕은 생각했다.

프롬프토. 글라디오. 이 자식들아. 보고만 있지 말고 날 구해.

하지만 둘은 왕의 필사적인 텔레파시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녹트."

이그니스의 낮은 목소리가 녹티스의 상념을 박살냈다.

위기. 경고. 이성이 피신을 제안했으나 본능이 위협에 쪼그라들어 녹티스를 단단히 구속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이그니스는 확인차 물었다. 이미 정황근거는 뚜렷하다. 다만 왕의 대답이 필요할 뿐이다.

"너 설마 칸나기 님께..."

"으익?"

"파, 파, 파, 파, 파렴치한 짓을...!"

너무도 큰 충격에 말을 더듬는 이그니스를 처음 본 것은 녹티스가 아직 열살일 때 였다. 그 때 철없는 왕자는 장난감 칼춤이 지나쳐 루시스의 건국 신화를 묘사한 명화를 훼손했었다. 그걸 수선하느라 왕자의 참모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녹티스는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일처럼?

아니, 아무리 그 정도는 아니지.

왜냐하면.

나와 루나는 어제.

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은 왕자의 나쁜 버릇이다. 녹티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루나프레나의 난처한 얼굴이 점점 발갛게 물들었다. 이를 목격한 이그니스의 얼굴에 노기가 쌓여 가는 것을 보며 녹티스는 식은 땀을 흘렸다.

이그니스가 선언했다.

"글라디올러스 아미시티아. 왕을 포박한다."

"...녹트. 미안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글라디오가 복도 끝에서 거리를 한 순간에 좁혀 녹티스를 등 뒤에서 붙잡았다. "다." 왕의 방패의 시련을 거친 그는 더욱 민첩하고 완벽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양팔까지 완전히 붙들린 녹티스는 이젠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의 뇌리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그 입 뿐이었다.

"너 임마, 왕의 방패!"

그러나 글라디오는 그야말로 완전히 작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을 대량으로 방출하지 않는 한 그를 떨쳐낼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친구들에게 영구 제명을 당하고 말 것이다.

프롬프토가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잘못 했잖아. 포기해, 녹트."

그는 녹티스를 결코 편들 수 없는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운 것 같았다. 은연중에 조금 감정이 쌓여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녹티스의 배신감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녹티스는 발악했다.

"지, 짐은 루시스의!"

"짐은 뭔 짐이야. 빼짝 말라서 무겁지도 않은게."

"조용히 해, 녹트!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제국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그깟 놈들 내가..."

"녹트!"

루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왕과 젊은 킹스 글레이브들의 꽁트를 지켜보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녹티스님을 구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오직 그녀 뿐이다.

"저, 저기..."

조금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칸나기의 음성. 킹스 글레이브 전원이 루나프레나를 돌아봤다. 글라디오에게 꽉 붙들려 있는 녹티스는 덩달아 회전. 반 강제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 보게 된 허당 왕자는 이제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루나프레나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친구분들, 언제나 녹티스님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칸나기가 고개를 숙이자 젊은 킹스 글레이브들은 어쩔 줄 모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칸나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녹티스님을 놔 주실 수 없을까요. 따지고 보면 제가..."

유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루나프레나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으니까.

이그니스와 글라디오가 시선만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글라디오가 나직하게 녹티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발광하지 말고. 알아들었냐."

녹티스는 소금이라도 한 덩어리 삼킨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글라디오의 강철같은 근육의 감옥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굴욕. 왕권에 대한 도전. 왕의 방패가 보여준 방자함! 내 결코 잊지 않으리. 골수에 새겨 두리라!

"녹티스님."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녹티스에게 루나프레나가 다가왔다. 글라디오에게 붙들려 있었던 상완에 칸나기의 힘을 불어넣어 근육통을 희석시키고,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녹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씩씩 거리고 있는 왕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저, 저. 한심한 꼬락서니하곤. 이그니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그니스가 고개를 숙였다.

"칸나기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시길. 알티시에 대사께는 양해의 말씀을 올려 두었습니다. 이 근처를 제국군이 침범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어서 글라디오도 사죄 말씀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우리 왕이 저기... 바보는 맞지만... 근본이 나쁜 놈은 아닙니다."

루나프레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이그니스님. 글라디올러스님. 감사합니다."

왕의 참모와 방패가 사과하는 동안 쭈뼛쭈뼛 기회를 엿보던 프롬프토가 앞으로 나섰다.

"칸나기님! 저는 프롬프토 아르젠툼인데요!"

"아, 플라이나를 지켜주셨던."

루나프레나가 그를 바로 알아보고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프롬프토님. 녹티스님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프롬프토는 감격에 젖어 펑펑 울어버릴  뻔 했다. 하지만 그는 햇병아리라 한들 어엿한 사진사. 힘들 때 일수록 포착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루나프레나님. 이것을..."

그 손에는 사진이 세 장 들려 있었다. 루나프레나님의 거처에 녹티스를 포획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사진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루나프레나가 한장 한장 확인했다.

녹티스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진이 한장.

쫙 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멋지다기 보다 부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한장.

친구들 세 명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한장.

"아..."

루나프레나의 입가에 미소. 눈가에는 눈물이 걸렸다.

"고맙습니다. 프롬프토님. 평생 간직할게요."

이 무슨 분에 넘치는 말씀이란 말인가.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자태에 프롬프토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물러섰다.

루나프레나는 눈가를 닦고 자세를 단정히 했다.

"이그니스님. 글라디올러스님. 프롬프토님. 앞으로도 녹티스님을 잘 지켜주세요."

왕을 지킨다.

그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왕의 방패가 대표로 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이그니스와 프롬프토의 눈에도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왠지 녹티스가 곁에서 완전히 대화에서 소외된 상태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지만, 루나프레나는 그에게 섯불리 주의를 줄 수 없었다. 선왕 레기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녹티스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관대했으므로.

.

그렇게 녹티스 왕자와 킹스 글레이브는 알티시에 대사 관저에서 3일 동안을 신세지게 되었다. 카멜리아 대사는 펄펄 뛰었지만 결국 그들의 체제를 허락했다.

그들은 루나프레나와 함께 세계의 위기, 왕이나 칸나기의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음은 물론 특별한 일은 조금도 없는 시시한 나날을 보냈다. 이그니스의 요리를 맛보며 녹티스와 루나프레나는 연신 웃었다. 그런 둘을 프롬프토는 사진에 담있고, 글라디오는 그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짧은 시간이었고, 모두가 더없이 행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굴레의 끝에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

그리고 운명의 날, 루나프레나는 시민들의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세계의 위기. 어둠의 위협. 인지를 초월한 신의 뜻을 말씀으로 전환하는 칸나기의 연설은 대개 비유와 암시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시민들은 오늘의 연설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칸나기께서 모든 사람들이 들었으면 한다고 하셨음에도, 선뜻 와닿지 않는 말씀 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애로우신 당대 칸나기님은 신의 뜻을 곡해하는 사람들을 경계해 선문답을 자제해 왔으니까.

하지만 시민들이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했다.

그 연설에 담긴 암시. 즉 앞으로 일어날 일. 적이 가진 절망스러운 힘과 강대한 어둠의 군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되찾아야 하는 새벽의 빛. 오늘 칸나기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실은 녹티스를 향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왕을 향한 격려였으며 당부였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약속된 왕과 칸나기의 맹세였기 때문이다.

루나프레나의 의연한 눈빛을 마주하며 녹티스는 다시 의지를 굳혔다.

걱정하지마, 루나.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에게 다가올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프레나는 철이 들기도 전에 이미 그 운명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녹티스는 루나프레나의 그 올곧은 마음과 그녀가 겪었을 슬픔이 못내 안타까웠다. 미처 참아내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녹티스는 눈물을 닦아내는 대신 반려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눈물은 곧 멈췄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5. 18. 21:55
클라우드는 묵묵히 사내를 따라 걷고 있었다.

클라우드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휘몰아치는 마황. 구석구석 느껴지는 제노바 세포. 그는 솔져다. 그것도 클래스 퍼스트. 지금 루퍼스 컴퍼니에 남아있는 어중이 떠중이와는 다르다. 베테랑. 진짜배기 병사다.

"이 쯤이면 되겠지."

사내가 참으로 느긋했다. 해는 이미 떨어졌다. 천천히 걷던 그가 멈춘 것은 가게를 나선 이후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클라우드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엣지의 외곽.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다.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나서면 미드갈 에리어에서 벗어날테지.

"자세를 잡아라."

슬슬 티파가 행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 이상 조심할 필요는 없다. 클라우드가 조금 도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곳까지 끌고 와서, 무슨 짓을 할 셈이지?"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단죄다."

"단죄라."

"이게 마지막이다. 자세를 잡아. 주먹질은 할 수 있겠지."

"당신 참 정정당당하군. 내 정보를 열람했다면 내 적성이 검이라는 걸 알텐데."

"테러리스트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군."

클라우드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도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아."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사내가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초인적인 가속. 그 거구가 땅을 스치듯 이동. 클라우드가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 복부에 둔중한 타격이 전해졌다. 무릎 차기다. 무시무시한 충격량에 갈비뼈가 부서지기 전에 클라우드의 몸이 앞으로 꺾여 떠올랐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클라우드의 턱에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작렬.

클라우드는 날아가고, 땅에 튕겨 올라가고, 몇 바퀴나 바닥을 구른 후 폐허에 쳐박혔다. 마른 먼지가 자욱하게 솟아 올랐다. 사내는 천천히 클라우드가 파묻혀 있는 돌무더기에 다가갔다.

"일어서라."

사내가 뇌까렸다. 그 말에 부응하듯, 돌무더기가 살짝 움직였다.

이윽고 클라우드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라이더 수트를 털면서 모래 섞인 침을 뱉어냈다. 사내의 눈에 흥미가 솟아났다. 타액에는 피 한 방울 섞여 있지 않다. 뼈도 내장도 무사한 모양이다.

"단단해. 과연 솔져를 사칭할 정도는 되는군."

클라우드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어설 수는 없으리라. 내구력과는 상관이 없다. 턱을 그런 식으로 가격당했으니 뇌가 흔들리고 있을 터. 사내는 팔짱을 끼고 클라우드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굳이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클라우드가 앉은 자세 그대로 물었다.

"왜 굳이 이곳까지 온 거지? 당신 말대로, 테러리스트를 단죄하겠다면 그 가게와 함께 나를 날려버리면 끝날 일이다.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저 인형 병기들을 사용한다면 말이지."

클라우드의 어조는 평온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뇌진탕이라니 당치도 않다.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저 아발란치의 돌격대장은 과연 만만치 않은 전사인 것이다.

"네가 소문대로의 상대라면 그 정도로 끝날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곳에서 싸우면 주위에 피해가 갔을테지. 그리고 뒤에 있는 것들은 신경쓰지 마라. 단순히 참관인이라고 생각하도록."

클라우드가 어이없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짜고짜 주먹질이나 하는 주제에, 의외로 멀쩡한 이야길 하는데. 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거다."

"죽지 않을 줄 알고 한거다. 게다가 설사 그렇다 해도 달리 남길 말은 없을 터."

"남길 말 정도는 있어. 가족이 있거든."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죽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부정하지는 못하겠지."

클라우드가 고개를 숙였다.

아발란치에 고용된 이후 첫 번째 미션에서, 그가 직접 조작한 폭탄은 계산 이상의 대폭발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죄없는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이를 의도한 것도, 실수한 것도 실은 클라우드가 아니다. 그는 권총의 트리거 였을 뿐이다. 리더의 감시 아래 폭파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게다가, 죄값이라 하기에는 부족하고 어폐가 있겠지만, 폭파 미션을 함께 했던 아발란치의 멤버들은 바렛트와 티파를 제외하고 전부 죽었다.

알고 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바렛트에게는- 절대로 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바렛트는 폭탄 테러를 결정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티파는.

티파는-

클라우드는 이미 결심했다.

절망의 무저갱에서 자신을 꺼내준 그녀를 위해. 가장 무력할 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자신과 함께 해줬던 그녀를 위해. 기약없이 자신을 기다려준 그녀를 위해. 클라우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보다 강하다. 하지만 약하다. 그녀가 죄책감 때문에 불이 꺼진 어두운 복도를 두려워 하는 것을 클라우드는 잘 알고 있다.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녀는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럴 때 이젠 괜찮다는 위로를 듣기 싫어하는 것도 아플 정도로 알고 있다. 괜찮지 않으니까. 괜찮을 리 없으니까. 속죄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다.

클라우드는 그저, 티파 곁에서 함께 살아갈 뿐이다. 그걸 위해 클라우드는 어떤 일이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그녀의 몫까지, 얼마든지 속죄할 것이다. 설사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별의 적을 상대로 언제까지고 싸워나갈 것이다. 죽어간 사람들의 천만배라도, 가령 일억배라도 구해낼 것이다. 그 누구도 티파의 마음 한 귀퉁이조차 상처주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 그렇고 말고.

하지만, 그저 바보처럼 당하며 살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상황.

미심쩍은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아발란치가 단순한 테러 조직으로 평가받는 일은 없다. 아발란치의 역사에는 우여곡절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영웅담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동료를 지킨다. 결정사항이다. 하지만 그 전에 다시 한 번 이 사내의 동기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

클라우드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 번 묻지. 내 이야기. 어디까지 알고 있지?"

사내는 클라우드의 질문을 질문으로 답했다.

"네 죄를 네가 모른다고 말할텐가?"

클라우드는 사내가 자신의 질문을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클라우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알아. 나와 내 동료들의 실수로 1번 마황로가 계산 이상의 폭발을 일으켰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변명하지 않아."

"묘한 말을 하는군.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네 놈들의 폭발 테러는 그것 뿐만이 아닐텐데."

역시 이 자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이를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이 사태는 생각보다 쉽게 진정될 수 있다.

"다른 것은 우리가 한 게 아니야. 5번 마황로와 7번 슬럼가의 폭탄 테러를 저지른 것은 프레지던트 신라다. 우릴 사냥하기 위해서 였지. 1번 마황로 사건을 앞세워 모든 것을 테러리스트에게 덮어씌울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던 셈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남자였지."

클라우드는 조용조용히 답했다. 그 단호한 어조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쉬이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눈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인정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방심해서는 안된다. 놈은 잔학무도한 테러리스트니까.

사내가 짧게 물었다.

"증거는?"

"증거라면 차고도 넘치지. 교양서적에도 슬슬 인용되고 있으니까. 뭣하면 프레지던트 신라의 아들에게라도 직접 물어보면 어떤가."

"아들?"

"당신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

클라우드의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다. 이 사내는 현대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저 근육질의 육체. 책을 읽을 것 같은 타입은 아니다.

거기꺼지 생각이 미친 클라우드의 뇌리에 문득 시드가 떠올랐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차마 클라우드에게 손을 들 수 없는 티파가 결국 시드를 대신 두들겨 팰 테니까. 시드는 튼튼하므로 죽지는 않더라도 수명이 대폭 깎일 것이다.

"오늘 일은 잊겠다. 오늘은 돌아가라. 난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을테니까, 제대로 조사하고 오도록. 다만 표적은 나로 끝내줬으면 좋겠군. 다른 사람들은 괴롭히지 말고."

이 사내는 어쨌든 가게의 손님들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마스터 오브 스위츠도 그대로 놔뒀다. 루퍼스 신라를 소개시켜주면 오해도 풀릴 것이다.

그렇다. 클라우드가 조금 참으면 끝날 일이다.

한가지,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 일만 확인할 수 있다면. 클라우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작정이었다.

"다만."

"뭐지?"

"당신에게 그 정보를 준 사람은 누구지? 저 인형 병기는 누구에게 받았지?"

루퍼스 신라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그는 결코 클라우드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 쪽에는 그 어떤 철통같은 경비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닌자 마스터가 있으니까. 루퍼스 신라는 목도 심장도 하나 뿐이다.

이 사내 또한 루퍼스 신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다. 다른 흑막이 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것도 루퍼스 컴퍼니의 최신예 병기를 유용할 수 있을 정도의 흑막이다.

클라우드가 판단하기에, 눈 앞의 거대한 사내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지능이 높아 보이지도 않는다. 이용하려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겠지.

실로 그랬다.

이 사내는 정말로 어리석었다.

"의뢰주의 정보를 팔라는 말인가. 어림없는 이야기다."

클라우드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사내는 생각보다 훨씬 우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인정했던 것처럼, 네가 1번 마황로를 폭파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장차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지. 나는 의뢰주를 지켜야만 한다. 그러니 너에게 대답할 수 없다."

클라우드가 고개를 숙였다. 급성 편두통이 시작된 것 같았다.

"감히 죄를 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 말처럼 내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 같군. 그러니 철저하게 조사하겠다. 다시 돌아오겠다. 그 땐 너도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어서 클라우드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올곧은 사내다. 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가겠다. 기다리도록."

클라우드가 손사래를 쳤다.

"알았다. 얼른 가라. 피곤하군."

상황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채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클라우드의 턱 근처에 남아있는 희미한 주먹 자국만이 오늘의 사태를 증명하는 듯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클라우드가 전부 내려놓기로 마음 먹은 그 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검은 생머리에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눈동자. 급히 달려왔는지 볼은 발그레 붉힌 채 살짝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녀는 그저 아름다웠다.

티파는 거짓말처럼 클라우드의 피로를 앗아갔고 생기를 북돋웠다.

"티파."

클라우드의 그 목소리에, 짜증이나 분노는 한조각도 실려 있지 않았다. 티파가 클라우드를 돌아봤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이럴 때까지 괜히 아름다운 그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사람이 클라우드를 괴롭혔어?"

클라우드는 조금 망설였다. 이제 거의 다 끝난 일이다. 티파에게 괜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속에 울컥이는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무엇보다 이렇게 된 티파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응. 혼내줘."

사내의 입이 부지불식간에 조금 벌어졌다. 지금 이 대화는 대체 뭐지? 이 오한은 어디서 온거지? 사내는 근엄한 표정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거쳐온 수라장이 하나만 부족했더라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사내가 간신히 티파를 알아봤다.

"붉은 눈. 티파 록하트. 아발란치의 잔당인가."

티파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방금 저 자가 아발란치라고 했다. 티파는 그것 만으로 상황을 민감하게 눈치챘다. 어차피 아발란치의 마황로 폭파 활동을 빌미로 클라우드를 압박했겠지.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었으니까.

티파는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마!"

티파를 중심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세는 사내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클라우드는 그 미션에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하지 않았어. 아발란치 일이라면 나나 바렛트를 찾아 왔어야지. 그리고."

클라우드가 티파의 등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들이 시작했잖아."

그렇다.

클라우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내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기에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다. 하지만 적반하장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티파가 천천히 한 발 내딪었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이 무심코 한 발 뒤로 물러섰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이 내가, 겁을 먹었다고?

"너희들이, 신라 컴퍼니가. 나의, 클라우드의 마을을 짓밟았잖아. 전부 죽였잖아."

그 붉은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찼다. 사내는 그 순수한 감정을 알아보고 숨을 삼켰다. 티파는 신라 컴퍼니의 만행을 짚어 나가면서 분노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그렇게 경멸하는 아발란치의 리더. 그의 마을도 너희들이 전멸시켰어. 그래. 아발란치는 그렇게 생겨났지."

신라 컴퍼니의 좋지 않은 소문들을,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소문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이라는 것도.

"한 눈에 알 수 있어. 당신은 솔져. 하늘에서 내려온 재앙. 제노바의 숙주. 그런 주제에 아발란치를 욕해? 감히, 신라 컴퍼니의 찌꺼기 주제에? 너희들의 오물을 치워준 우리들을?"

그렇게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사내의 얼굴에 고통과 회한이 담겼다.

티파의 투기가 폭발했다.

사내는 할 말을 잃고 티파를 바라보았다. 발밑이, 미드갈이, 지구 그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든다. 이 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위압감. 사내는 체내의 제노바 세포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등이 식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티파의 분노와 그녀의 폭로를 경청한 그는 그제야 자
신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클라우드가 보여준 인내를 이해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 투기를 뚫고 사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혹 여기서 살아돌아간다면- 의뢰주의 미간에 딱밤이라도 먹여주리라.

할 말을 마친 티파는 호흡을 아랫배에 묶어두었다. 숨이 가라앉고 컨디션이 돌아온다. 이럴 때 일수록 그녀는 머리를 식혀둔다. 상대를 효과적으로 두들겨 패려면 흥분해서는 안된다. 존경하는 사부님의 가르침이다.

"잔간류 114대 계승자. 티파 S. 록하트. 당신도 이름을 대."

그녀가 일방적으로 승부를 가로챘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그 정도의 자각은 있다. 게다가 이것은 격투가의 정중한 일기토 요청이다. 사내는 이를 무시할 정도로 예의를 모르지는 않았다.

"솔져, 클래스 퍼스트. 안질 휴레이. 한 수 부탁한다."

.

"들었지? 티파가 사장 목은 아직 따지 말래."

"응? 그런 걸 신경쓰고 있었어? 알아 알아. 사장님은 약삭 빠르니까. 우릴 적으로 돌릴 리 없잖아. 난 우연히 근처에 있다가 그냥 확인차 온거야."

"칭찬 고맙군. 그럼 그 날붙이는 넣어주지 않겠나."

"얼래? 이게 무서웠어? 사장님 솔직한 구석이 다 있네?"

"허세가 통할 상대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네만."

"역시 사장님. 잘 알고 있잖아?"

"...사장. 목격 정보가 있었어. 해결사야. 사장이 우려한 대로 기어이 사고를 쳤어."

"흠. 티파에게 이 정보를 정리해서 전달하게."

"해결사? 클라우드? 클라우드가 사고 쳤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잠깐 조용히 해주게, 닌자 마스터"

"나도 알아듣게 설명 좀 해 달라고. 왜 난 차별하는데?"

"사안이 긴급하다네. 이해해주게, 미즈 발렌타인."

"아이참. 아직 식도 안올렸는데!"

"루퍼스!"

"...시즈.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저기요. 그 쪽으로 안던졌거든요. 갑자기 껴안고. 애칭으로 부르고. 어조도 바뀌고! 뜨겁기도 하셔라."

"너 정말!"

"옛날 같았으면 진즉에 마음이 꺾였겠지만. 이미 난 예전의 귀여운 유피가 아니거든. 나도 다 겪었거든."

"유피!"

"...시즈네. 이제 됐네. 서둘러 현장에 가도록 하지."

"후우. 괜찮겠어?"

"해결사에게 누가 프라우드 솔러스를 제공했는지 알아내야해. 짐작은 간다만... 어쨌든 내가 직접 가야 하네."

"프라우드 솔러스는 몇 기나 가져갈까?"

"필요없네. 닌자 마스터가 동행할테니."

"후훙."

"턱스 오브 턱스가 함께 할테지."

"난 덤이냐!"
posted by nameless7777 2017. 5. 18. 18:58
'클라우드가 늦네. 연락도 안되고.'

티파는 정신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남편의 조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세븐스 헤븐에 손님이 몰리는 화요일이다. 매주 화요일 클라우드는 티파를 위해 일찍 장사를 접고 가게 일을 도우러 온다.

뭐, 별 일이야 있겠어.

그러다 티파는 클라우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 그 얼빠진 모습을 손님들께 들킬까 화들짝 놀랐다. 주책이다. 아무도 못 봤어야 할텐데. 티파는 부끄러움에 볼을 물들였다. 사실 남편의 얼굴은 적응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살을 맞대고 살아도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우연히 티파의 얼빠진 얼굴을 본 몇몇 손님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은 손님들의 주술적 오락이었다. 미드갈에는 티파가 남편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행운이 온다는 도시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티파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 중 가장 훈훈하고 신빙성 있는 부류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부류도 많이 있었지만.

티파는 마음을 다잡고 접객을 재개했다. 칵테일을 섞고, 안주를 대량 생산하고, 손님들의 계산서를 일일히 확인하고 정산한다. 스위츠를 만드는 것 외에는 완전 자동화되어 있는 마스터 오브 스위츠와는 달리, 티파가 운영하는 세븐스 헤븐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옛스러운 감성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영업장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 티파의 천성에도 맞는 모양이었다.

티파가 이변을 알아챈 것은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클라우드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티파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산더미같은 문자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워낙 많고 너무 빨리 지나가서 티파는 그 내용을 다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티파가 제대로 읽을 수 있었던 메시지는 마지막 것 뿐이었다.

메시지를 읽은 티파의 눈에 벼락이 내려쳤다. 격분한 그녀가 무심코 발을 굴렀다.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충격파에 세븐스 헤븐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고 손님들은 성대하게 음식물을 뒤집어 썼다. 티파가 만들어낸 미증유의 재난에 손님들은 숨소리 한번 내뱉지 못했다. 도시 전설 6. 지진 안정대인 미드갈에서 땅울림을 느꼈다면 그것은 어디선가 티파가 크게 화를 냈다는 뜻이다.

티파가 화를 냈다. 필시 그 가족에 연관된 일이며, 십중팔구 클라우드가 사고를 쳤으리라. 손님들은 진심으로 클라우드를 비난했다. 저 천사같은 사람에게 매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결혼을 했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게 있어야지.

한편 분노로 가득찬 티파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나가버린 메시지도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았다. 전에 클라우드와 함께 상의해서 설정해둔, 루퍼스 컴퍼니의 자경 조직에 의한 방어 프로토콜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메시지에 의해 이 모든 프로토콜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투박한 문체로 보건데 이것은 클라우드가 직접 보낸 것이 아니다. 자동 발송된 방식이라면, 이미 이상 사태가 발생한 지 1시간 이상 흘렀다는 이야기다.

티파는 세븐스 헤븐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최악의 상황이다. 더없이 급박했다. 티파는 이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리나의 목소리 역시 다급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 아니에요. 티파. 루퍼스 컴퍼니는 결코 세븐스 헤븐과 마스터 오브 스위츠를 적대하지 않습니다.

티파가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는 세번째 방어 프로토콜을 나타내는 패턴 C. 마린과 덴젤을 사수하는 패턴 A와 다른 점은 단 한가지 뿐이다.

루퍼스 컴퍼니의 배신 의혹. 확인 요망.

티파는 그들과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와서 그들이 배신을 한다니 믿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턱스에게 말로 밀리는 순간 끝이다. 티파는 부러 표독한 말투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티파는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으니까.

"어떻게 패턴 C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수상하게 느낄 수 밖에 없잖아?"

- 티파. 우리는 턱스입니다. 턱스에게는 누구도 비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에요.

티파의 뒤로 건물이 엄청난 속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간판을 딛고 한 상가 건물의 옥상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티파가 협박을 이어갔다. 그녀는 달인이다. 전력으로 달리고 있음에도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는다.

"뒤가 구린 일이 있으면 지금 말해. 전부 철회해. 그러면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나."

그 착하고 인자한 티파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보통 때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는 어휘다. 이리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 아니에요, 티파! 그렇지, 덴젤과 마린은 이미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혹시 협박하는 거야? 인질로 잡았다고? 그럼 죽어. 농담하는 거 아냐. 전부 죽일 거야."

- 티파, 제발!

이리나가 알고 있는 그녀는- 티파는 자신보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티파는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 지금 루퍼스 컴퍼니의 간부들은 전원 노후 보험을 파기하고 해외로 도주해야 할 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 물론이에요. 티파. 상황을 파악하고 10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겠어요. 마린과 덴젤은, 정말로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길어. 끊어."

- 자자자자잠깐! 티파, 잠깐!

"뭐야. 혹시 고백할 생각이 든거야?"

- ...지금 사장실에 유피가 와 있거든요.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그러고보니 그랬다. 패턴 C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닌자 마스터와 공유하고 있는 정보다. 이것으로 루퍼스 신라의 배신에 의한 추가적인 위협은 완전히 잊어버려도 될 것이다. 루퍼스 컴퍼니가 프레지던트 루퍼스의 목을 걸고 진행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고마워 유피. 덕분에 골칫거리 하나 없앴어.

티파는 고개를 돌려 한 숨을 내쉬었다.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되니까. 그렇게 되면 애써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던 이야기가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다.

티파는 강한 어조를 유지한 채 말했다. 슬슬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서 앞으로도 계속 잘해나갈 자신이 없다. 그러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사용해야만 한다.

"어차피 녹음하고 있겠지? 내 말 유피에게 전해. 아직 목을 따진 말라고."

- ...감사해요 티파.

티파는 대꾸없이 전화를 끊었다. 으름장 놓은 사실에 대해 사과는 하지 않는다. 아직 그럴 이유가 없다.

그대신 티파는 계속 달렸다. 차량, 간판, 건물을 뛰어넘어 마스터 오브 스위츠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녀에 대한 도시 전설이 늘었다. 그녀는 발을 굴러 지진을 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람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5. 18. 18:07
케익 전문점 마스터 오브 스위츠에서는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가게에서 다루는 스위츠.

그것은 그야말로 절품 중의 절품.

클라우드가 개업한지 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미드갈 전역에 그의 스위츠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점주 클라우드 L. 스트라이프의 비할 바 없는 단 맛에 대한 재능. 그에 따른 전설적인 일화는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다.

심지어 소문은 결코 과장되는 일 없이, 클라우드는 손님들에게 금단의 무화과를 제공했다. 그리고 손님들은 공평하게 천국의 다리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기꺼이 건너갔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분명 기분전환으로 시작한 일이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클라우드는 제빵에 매진하고 있었다. 어느새 빵을 굽는 일은 클라우드에게 있어서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여느 때 처럼 평범한 하루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클라우드는 라스트 오더를 처리한 후 식기를 정리하면서 집에 가져갈 브라우니를 굽고 있었다. 이 날을 위해 사둔 최고급 초코보젖을 곁들여 모두와 함께 먹을 예정이다. 오늘은 바렛트가 돌아오는 날이니까.

클라우드는 아내가 사준 새하얀 장갑을 끼고 브라우니를 오븐에서 꺼냈다. 손님들은 따끈따근한 김이 올라오는 브라우니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클라우드는 이어서 팬 케이크나 겨우 썰 수 있을까 싶은 페이퍼 나이프로 브라우니를 대담하게 자르는 묘기를 선보였다. 대충 눈대중으로 잘랐을 텐데도 접시에 담아낸 브라우니는 완벽한 정육면체. 손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감히 있을 수 없는 신위를 연달아 보여주면서도 클라우드의 얼굴은 여전히 표표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 신비감. 자각이 없다는 점이 특히 고약하다.

문득 클라우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훔쳐 보고 있던 손님들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접시를 바라봤고, 얼마 남지 않은 스위츠를 바라보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다가, 마스터의 시선을 따라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성이 천천히 가게에 들어서고 있었다. 인상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손님들은 저마다 확신했다. 사내가 입고 있는 검은색 의복들은 틀림없이 오더 메이드일 것이다. 어쨌든 키가 2미터를 훌쩍 넘는 사람을 위한 기성품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신기할 정도로 평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클라우드는 사내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출입문을 통과한 사내가 클라우드를 향해 목례했다. 이제 30세 중반 정도 되었을까. 표정을 드러낸 그는 아까보다 훨씬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평생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살아온 것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클라우드는 이 사내의 예약을 받은 바 없었다. 즉 그는 마스터 오브 스위츠에 오늘 처음 발걸음한 손님이었다.

클라우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화요일 라스트 오더는 17시 30분입니다. 10분 후에는 가게를 마감해야 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6시 20분이었다. 새삼스럽게 시간을 확인한 사내의 얼굴에 실망이 서렸다.

"오늘이 아니면 올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만, 방법이 없을까요."

고객의 딱한 사정에 클라우드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 그림같은 동작에 테이블에서 무심코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구의 사내는 답지 않에도 손님들의 반응에 조금 움찔거렸지만 클라우드는 한조각 미동도 하지 않고 생각을 마쳤다. 신경쓸만한 일도 아니거니와 익숙한 일이다. 일상인 것이다.

숙고를 마친 클라우드가 사내에게 제안했다.

"손님께 내놓기에 부끄럽습니다만, 방금 구운 브라우니로 괜찮을까요? 다만 빈자리가 없으니 포장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스터는 언제나처럼 겸손했지만 부끄럽다니 당치도 않다. 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간단한 브라우니조차 사람을 승천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저 일품을 마스터 오브 스위츠에서 온전히 시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평생 후회로 남을 것이다.

마스터 오브 스위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료다.

그리고 동료는 언제나 환영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손님들이 빈 접시를 들고 자발적으로 일어섰다. 곧 접시를 퇴식구에 반납한 그들은 출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로 이동. 준비되어 있는 모금함에 금액을 지불하고, 그 옆에 준비되어 있는 각종 지폐와 동전을 이용해 정산. 거스름을 챙겼다. 저마다 마스터에게 진심어린 인사를 잊지 않고, 새로운 손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전한 뒤에 가게를 나섰다.

이제 가게에는 클라우드와 곰같은 사내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손님들의 배려에 감사하며 사내를 중앙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테이블에는 빵 부스러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이 손님들의 예절. 새로운 손님에 대한 배려.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이 상황 자체가 이 가게에 대한 손님들의 충성도를 나타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사내는 경탄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어디까지나 평온한 얼굴로 새로운 손님을 테이블로 인도했다.

"앉으시지요. 곧 브라우니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손님들이 빠져나간 출입문에서 아직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계산도 손님들이 스스로 하는 건가요?"

이 가게에 처음 오신 손님께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리라. 클라우드는 친절히 대답했다.

"네. 드신 가격대로 저마다 계산하십니다. 제가 손이 바쁜 편이라, 이 방법이 저도 손님도 편하더군요."

클라우드가 잘라둔 브라우니 중 두 개를 접시에 올리며 답했다. 하지만 이곳은 엣지다. 눈을 잘못 감으면 바지를 입은 채로 속옷이 없어지는 곳이다. 미드갈 에리어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다.

"손님들을 믿으시는군요."

그 말에는 사람을 쉬이 믿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소중한 손님들을 폄훼하는 발언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클라우드는 태연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의 발언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 그저 담담하게 사내의 우려를 정정할 뿐이다.

"만족하지 못하셨다면 값을 적게 치르시더라도 괜찮다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매일 셈이 남습니다."

정말 친절하신 분들입니다, 라고 클라우드가 덧붙였다. 손님들에 대한 순수한 신뢰가 묻어나는 대답에 사내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클라우드는 묵묵히 우유잔을 채웠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쟁반을 들고 테이블 앞에 나타난 클라우드는 브라우니를 전달하기 앞서 조그마한 휴대용 단말기를 사내에게 건냈다. 간단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터치 패드 뒷면에는 '마스터 오브 스위츠 전용'이라고 쓰여 있다.

"이건 뭐죠?"

"저희 가게 전용 주문 입력기입니다. 저희 가게는 손님이 원할 때 오실 수 있도록 완전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드시고 싶으신 메뉴를 적어 보내시면 제가 손님께 예상 대기 시간을 전송해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손님께서 이를 승인하시면 예약이 종료됩니다."

"허어."

"첫 방문하시는 모든 손님께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찾아올 예정이 없으실 때 반납해 주시면 됩니다."

"무상제공."

"손님께서 줄을 늘어 서시면 저도 마음이 불편하기에. 지인과 상담해 만든 시스템입니다."

이리저리 단말기를 감상한 사내는 그 완성도를 확인하고 괜히 뒷 목을 잡고 싶어졌다. 손님들에 대한 배려를 넘어 방만하기 짝이 없는 경영이다. 사내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제멋대로 살아가던 나르시스트 친구를 떠올렸다. 그런 사람이 또 있다니 착잡한 이야기다.

심지어 퇴식구가 자동 식기 세척기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남자는 얼마나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사내의 생각을 알아챌 턱이 없는 클라우드가 사내에게 스위츠가 전달했다.

우유 한 컵과 브라우니 두조각이 전부인, 여느 가정집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하고 소박한 쟁반. 그랬다.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사내는 조심스럽게 브라우니를 입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는 깨달았다.

예절바르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에도 계산을 속이지 않는 손님. 친구가 만들어 주었다던, 오직 주인이 스위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자동화 시스템과 셀프 서비스. 손님들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선행 투자.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이 검고 소박한 브라우니에 담겨 있었다. 맛의 세계에 밝지 않은 사내조차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이 흉악무도한 자가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사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 브라우니는 얼마지요?"

클라우드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손님께 드릴 만큼 대단한 게 아니라 무료로 드리고 싶습니다만, 저에게도 입장이 있어서요. 299길 받겠습니다."

299길. 중학생의 점심식비도 안되는 가격이다.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다. 이 남자는 지금 자선사업이라도 할 셈인가.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이리도 태연자약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사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끝이다. 무리다.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다.

본색을 드러낸 사내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믿을 수가 없군. 아발란치."

아발란치.

신라의 마황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이 결성했던 과격파 무력 조직.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그 이름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공포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사내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클라우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사내는 건조하게 말했다.

"클라우드 스트라이프. 아발란치의 용병. 자칭 전 솔져. 주요 활동 내역은 1번 마황로 테러. 그외 극렬 무력 활동 다수. 틀림없나."

1번 마황로 테러.

클라우드의 심장이 요동쳤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진실. 청산할 수 없는 아발란치의 어두운 과거.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한 클라우드의 음성이 차갑게 내려 앉았다.

"당신은 누구지?"

"하지만 실제로 솔져가 된 일은 없었지. 마황 적성 F. 의지가 박약하고 육체도 미성숙한 신라병. 사기꾼에 불과하다."

클라우드는 자신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이 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원하는 게 뭐야?"

그 순간, 가게 밖에서 굉음. 다섯 기의 거대한 인간형 병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와 착지했다. 저마다 등에 지고 있는 백병전용 해머나 로켓 런쳐를 양손에 쥐고 마스터 오브 스위츠를 겨냥한다.

"밖으로 나와. 테러리스트."

틀림없다. 저것은 루퍼스 컴퍼니가 자랑하는 다목적 인형 전략 병기다. 패턴 C. 최악의 상황이 의심된다.

"무고한 시민들이 흘린 피. 그 죄 값을 치를 때다."

클라우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13. 23:57
클라우드는 살짝 혀를 찼다.

아무래도 카인에게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준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갈 수록 그는 친숙했던 성기사의 기운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폭신폭신한 어둠이 강한 빛에 감싸여 균형을 이루는, 특이하고도 신비한 기감.

틀림없다. 이 앞에 카인이 찾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앞에 있었던 것은 누구였을까. 어째서 내가 이걸 착각해 버린 걸까. 지금쯤 카인은 그 사람과 만났을까.

뭐, 큰 문제야 있으려고. 다름 아닌 저 자상한 성기사와 닮은 사람일 터이다. 클라우드는 꼬리를 무는 생각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성기사가 티파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클라우드는 곧 익숙한 공간의 균열을 감지했다. 패왕 엑스데스가 세계 곳곳에 내놓은 상흔은 지금처럼 찢어지곤 한다. 그리고 차원의 틈새에 대량으로 서식하는 꺼림직한 존재들을 토해낸다.

구조적으로 돌맹이나 마찬가지인 무기질적 존재이면서도, 근처의 유기 생명체를 흉내내는 것을 통해 성장하는 이율배반적인 존재.

이미테이션.

그 상세는 완전히 수수께끼이다. 다만 알려진 것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흉내낸 존재들을 증오하고 배척한다는 것 정도다.

클라우드는 즉시 전력으로 질주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보폭을 고려하면 날아올랐다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60초가 채 지나기 전에 클라우드는 검을 쥐고 서 있는 은발의 기사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안도했다. 성기사는 건재. 이미 쓰러져 있는 이미테이션이 다섯 개체. 서 있는 이미테이션은 두 개체에 불과했다. 클라우드는 처음부터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테이션이 발생한 그 순간 성기사가 내뿜은 기세는 마치 산을 움직이고 달을 기울게 할 것 같았으니까.

이제 클라우드는 다른 의미로 의아함을 느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과 해답이 교차했다. 저 성기사의 압도적인 기량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나머지 이미테이션들이 아직도 서 있을 수 있는가. 성기사가 등 뒤에 용기사를 감싸면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용기사는 왜 이곳에 있는가. 분명히 그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을 터이다.

아니,

아니다!

"...세실...! 뒤를 조심해!"

그건 카인이 아니야!

이미테이션이다!

클라우드는 속도를 한계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피와 마황과 심장이 들끓고, 허파가 산소를 게걸스럽게 갈구하고, 빠른 속도로 손상되는 근육이 고통 속에서 아우성친다.

맞출 수 있을까? 클라우드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기사의 정면으로 동시에 쇄도한 두 이미테이션들에게 세실이 출수하는 동안, 가짜 카인의 창은 이미 세실의 등뒤로 뻗어 이미 갑주에 닿고 있었다.

클라우드는 눈을 찌푸렸다. 저 위치는 심장 쪽이다. 치명상인 것이다. 클라우드와 세실의 시선이 교차했다. 세실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드에게는 그 미소를 해석할 여유가 없었다.

섬전과도 같은 세실의 일격은 두 이미테이션의 목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갔다. 간신히 도달한 클라우드는 가짜 카인에게 모든 체중과 운동 에너지를 실어 일섬했다.

굉음.

거의 공간이 찢어져 그 틈새에서 새로운 이미테이션이 쏟아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파공성.

클라우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세실의 검이 클라우드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가로 막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릴 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짜 카인을 지켜준 것이다.

클라우드의 아미가 찌뿌려졌다. 성기사와 용기사의 사정은 골베자에게 들어 대충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바보 자식! 사람이 좋은 것에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미소짓고 있는 세실의 표정은 평온했다.

도저히 심장을 손상당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시선이 가짜 카인의 창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의심했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가짜 카인의 창끝은 세실의 등에 겨우 닿아 있을 뿐이다.

설마 이미테이션이, 살의를 억제하고, 공격을 멈췄다?

클라우드의 뇌가 포화상태에 빠져 설명을 요구하려는 때에, 타이밍 좋게 머리 위로 맑은 목소리가 흘러 내려왔다.

"젊은 전사여. 그만 투기를 풀어주시게. 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으이."

그 위엄. 카리스마.

소싯적 싸가지가 없기로 그 왼편에 서있을 자가 없었던 클라우드조차 무심코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 목소리였다.

아니다.

이 자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성기사가 아니다.

같은 영혼을 지녔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완숙한 존재다. 그러므로, 아무 문제도 없다. 클라우드는 힘을 풀고 손상된 근섬유에 마황을 돌려 신진대사를 촉진시켰다.

세실 너머에서 무너져내린 용기사는 잔뜩 억눌린 한 마디 만을 남겨놓았다.

나를, 나를 보지 마라.

거짓된 용기사는 등을 돌려 하늘로 사라졌다.

.

피차 설명할 것이 많았다.

클라우드는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면서, 먼저 이 세계에 대해 설명했다. 두 신들의 싸움에 사용될 장기말로써, 이세계로부터 소환된 전사들. 신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한 죽을 수 없으며, 그 대신 죽을 때마다 전세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법칙 등.

대강의 일을 전해 들은 눈 앞의 남자, 성왕 세실 B. 하비는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전설의 디시디아인가. 이야기가 복잡해졌군."

놀랍게도 이 자는 지금까지 클라우드가 알고 있던 성기사 세실 하비의 미래인 것 같다. 그릇이 큰 줄은 어렴풋 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왕까지 되신 모양이다. 그에 따라 범상치 않은 지식을 쌓아두신 것 같다.

이 지옥같은 곳에 떨어진 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클라우드라 한들 이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드가 물었다.

"알고 있는 건가?"

그러나 세실은 부정했다.

"아니, 내가 살고 있던 미시디아란 곳에서 읽은 책에 인용되어 있었을 뿐이야. 자네가 설명한 것 이상의 정보는 없네."

이제와서 새삼 실망스러울 일도 없다.

클라우드는 요리에 눈을 돌렸다. 세실과 함께 발견한 새둥지에서 가져온 알이다. 초코보 수정란 만큼은 아니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 비슷한 풍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클라우드는 돌을 깎아 만든 접시에 오믈렛을 담아 세실에게 건냈다. 절묘하게 덥힌 접시는 따끈한 오믈렛의 온기를 효과적으로 보존해주고 있었다.

"고맙네."

세실은 요리를 받아들고 턱을 쓰다듬었다.

"끝없는 싸움에, 죽지는 않더라도, 기억과 힘이 깎여나간다는 것인가. 흠. 골치아픈 일이로고. 곁에 로자가 있었다면 걱정할 일이 없겠지만."

로자. 성기사 시절에 맺어진 반려인가. 세실이 웃는 낯을 보였다.

"자네, 정말로 이곳에서 나와 함께 싸워왔던 것이로군. 슬슬 믿을 수 밖에 없겠어."

"하지만, 이런 곳에 당신의 아내가 함께 있다해도 좋은 일은 없어. 두렵고, 무슨 일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흥. 모르는 소리. 힘들 때 함께 있지 않고서 어찌 반려라 할 수 있겠는가."

세실이 코웃음쳤다. 클라우드는 눈썹을 조금 들어올렸다. 세실이 가끔 보여주던 치기어린 표정이다. 클라우드는 그가 언제 이런 얼굴을 보여주는지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녀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완벽한 전사 중 한 명일세. 오히려 우리가 그녀의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야."

클라우드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뒤에 이어질 말도 알고 있다. 괜한 말을 했다고 자각한다.

"아, 그래. 알았어. 알고 있어. 성왕."

"흠.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인데, 그녀는."

"왕국 제일의 명사수이자 회복술사라지. 공격 마법은 하나 밖에 모르지만 위력은 절륜. 공성전에 중용될 정도라 했던가."

"뭐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긴, 내가 말하지 않았을리 없지. 우주를 뒤져도 그런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니."

이번에는 클라우드가 코웃음칠 차례였다. 당신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 예전의 애송이가 아니다.

"후. 내 아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군."

검은 병사의 자심감 넘치는 발언은 겸양과 성실의 화신에게 불신과 호승심을 심었다.

"호오..?"

"당신 세계라면 또 모르겠지만 감히 우주를 들먹인다면 어쩔 수 없지. 별의 심장부에서 표류하던 나를 목숨을 걸고 꺼내준 사람이 바로 내 아내다. 티파 S. 록하트라 하지."

성왕은 물끄러미 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옳거니. 저것은 그저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저 눈은, 자신과 같다. 진심으로 제 아내가 우주 제일이라 믿는 것이다.

설마.

설마 이 자는, 하늘이 주신, 세상 끝에서 온 내 호적수란 말인가.

세실의 눈이 지엄해졌다.

"이름을 클라우드경이라 했던가. 괜찮겠나? 이 나를 진심으로 만들어도."

"겨우 식전 요리를 대접했을 뿐이다. 당신이 내 진심을 이끌어낼 수나 있을 것 같아?"

클라우드의 도발에 세실은 호기롭게 웃었다. 이미테이션과 싸울 때 보다 전의에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클라우드는 실소했다.

진심으로 나를, 티파를 이길 생각인가.

어리석다. 가소롭다. 박살을 내주마, 바론의 성왕 나으리.

그리고 둘은 검을 사용하지 않는 전투를 시작했다.

혀는 보통 보드랍고 유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검보다도 단단해 진다. 상황에 따라서 혀는 병장기보다 치명적인 것이다.

클라우드가 포문을 열고, 세실이 응사했다.

"내 아내는 천사다. 폐인이 된 나를 포기하지 않고 간호해 줬지. 지금의 나는 티파가 만들었다."

"자애, 긍휼, 헌신을 3대 덕목으로 삼는 백마도사의 정점 앞에서 그 성정을 논하는가."

"티파는 밝고 활달하여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옛말에 인자무적이라 하더군."

"로자는 그 존재 자체로 왕국의 사기를 드높힌다. 칭송받아 마땅하다."

"옥의 티라면 너무 예쁘다는 것이겠지. 매일 질투가 날 정도다."

"하하하하. 날 믿게, 젊은 친구. 그 이야기는 감히 하지 않는 편이 나을 터."

"내가 방황하던 때에도 티파는 흔들리지 않고 기다려줬다. 내가 다시 고백할 때까지, 몇 년이나."

"몇 년이고 뭐고, 로자는 내가 성인이 되는 날까지 기다려줬다."

"...?"

"그 날 처음 맺어졌지."

"..."

"그 이야기가 아니었나?"

"...아니다, 성왕. 아니다."

"..."

"..."

"내가 성왕이라 불릴 즈음 로자는 패왕이라 불리웠지. 보통은 무엇을 빼앗을 때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다."

"..."

"그리 부끄러워하지 말게.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지 않은가."

"누가 부끄러워 한다는 거야."

"후후후. 자네 차례일세."

"...큭."

"흐하하. ...흠?"

"...먹었군."

"이, 이건..."

"티파는 방금 당신이 삼킨 오믈렛을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큰 그림을 그렸다."

"..."

"왜."

"...이런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이런 절품을 어떻게 만들었지? 그 어떤 시행착오도 없이?"

"...? 실패한 건 지금 내가 먹고 있다만?"

"허어... 그게... 그것도 이미 충분히 훌륭해 보인다만... 아니 그보다, 처음 본 사람에게 굳이 잘 만든 쪽을... 설마, 몸에 배어있는 이 배려 또한 아내의 지도 편달 덕분이라고...?"

"크게 말해. 중얼거리지 말고."

"무례한지고. 난 아직 지지 않았다."

"큭큭큭."

"후... 내 아내는 나와 둘째를 만들기 위해 왕성에 호수를 팠다."

"크헉..."

그 설전은 식사를 마치고, 함께 저녁 거리를 사냥하고, 사냥한 사슴을 정통 붉은날개 방식으로 호쾌하게 구워 먹은 뒤, 화톳불을 남겨 노숙을 준비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몇 시간 째 웃을 때 귀엽다는 둥, 머리결이 비단결같다는 둥 미취학 아동의 논리가 사용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길 즈음 피를 튀기지 않는 싸움이 종료되었다.

강맹한 전사들이었다. 하룻밤을 샌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성왕과 병사는 해가 뜨는 방향으로 삼일 밤낮을 더 걸었다.

이미테이션의 습격은 다섯 번이나 있었지만 세실과 클라우드는 서로 협력하여 이를 격퇴했다. 클라우드는 세실이 펼치는 공방위일체의 바론 왕국 정통 검기에 매료되었고, 세실은 클라우드의 변화무쌍한 분리합체검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요리는 대개 클라우드의 몫이었다. 짐승의 목을 따고 통째로 태워버릴 것처럼 굽는 야만스런 방식은 처음 한 번만 호쾌하게 느꼈을 뿐이다.

클라우드는 그 사실에 큰 불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클라우드는 저 반대편에 있을 용기사의 존재를 떠올리고 낭패한 기분을 느꼈다. 세실과 함께한 기묘한 여행에 정신이 팔려 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약 7일 거리 정도 뒤에, 그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세실의 표정이 의문을 떠올렸다.

"카인? 그라면 4일 전에 봤지 않은가. 7일이라니."

"세실. 그 놈은 이미테이션이야. 진짜 카인이 아니다."

세실은 조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닐세. 그는, 설령 자네 말대로 이미테이션이라 하더라도- 카인의 파편을 가지고 있어. 난 알 수 있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지?"

"죄책감. 그는 몇 번이고 나를 찌르려 했다가 실패했네. 마지막 것은 자네도 봤을 테지. 이미테이션과는 나도 이미 꽤 상대해 봤지. 이젠 나도 확신할 수 있네."

클라우드는 그 가짜 카인이 세실의 심장을 거의 꿰뚫을 뻔한 장면을 떠올리고 조금 아찔해졌다. 클라우드가 세실을 똑로 쳐다보며 말했다.

"성왕 나으리. 다신 그러지 마.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텐데."

"어차피 죽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 남자는 대담한 건지 어수룩한 건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숨을 쉬는 클라우드를 보며 세실이 빙그레 웃었다.

"나와 내 친구의 관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어느 정도는. 골베자가 이야기해줬으니까."

"형님의 지인이셨는가... 이거, 실례가 많았다."

"신경쓰지마. 피차 서로 돕고 있으니."

"형님은 강령하신가."

"물론이다.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

세실은 그리운 눈을 하고 산 너머를 바라보았으나 그 이상 골베자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세실은 친구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카인이 날 공격한다면, 난 받아줄 수 밖에 없다네. 상처가 많았던 녀석이야. 모두 내 탓이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녀석에게 내 존재가 가장 큰 상처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이."

"세실. 카인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알고 있네. 카인은 전부 떨쳐냈고, 기어이 나를 구해주었지. 하지만 이곳은 전설의 디시디아. 어떤 카인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니."

"엉뚱한 생각하지 마, 세실 하비."

클라우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도저히 혼자 놔둘 수가 없군. 또 그런 소리만 해봐. 그 카인이 나타났을 때 내가 베어버릴 테니까."

친구를 베어버리겠다는 흉흉한 말에 세실은 분개하는 대신 웃는 얼굴을 돌려주었다.

"자네 아내. 티파님이라 했던가. 꼭 한 번 뵙고 싶군."

"뭐야 갑자기. 싫어. 안보여준다."

"자네가 그런 기특한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아내의 영향일 테지. 반드시 그럴 테지. 하하하. 꼭 뵙고 인사하고 싶으이."

"..."

클라우드는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은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귀찮은 일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이야기가 꼬이기 전에, 클라우드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카인을... 만나러 가지 않을 건가. 널 찾고 있는데."

"자네가 날 닮은 기세를 느꼈다 했지. 문제 없네. 필시 그 기세는 내 아들의 것일 테니."

"아들?"

"세오도르 B. 하비. 바론의 현 국왕이라네. 적룡왕이라 불리울 만큼 용맹하고, 내 친구와도 막역한 사이지. 걱정하지 말게. 충분히 제몫을 다할 터이니."

"국왕."

"내 아들이니 당연하지. 왜 그러는가?"

"...당신 올해 나이가?"

"내일 모레 오십일세."

"......."

클라우드는 정신적으로 입을 딱 벌렸다. 왠지 말이 고풍스럽다 했지만, 나이가 오십? 스스로 하늘의 뜻을 알아챈다는 그 오십? 그 얼굴로? 나와 동년배인 아들이 있다고? 농담이지?

세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거리며 웃었다.

"신경쓰지 마시게, 젊은 전사여. 내가 원래 동안이라는 이야긴 많이 듣는다네."

이런 패배감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이후 클라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미테이션의 대군을 분쇄하며 계속 걸었다. 세실은 딱히 괘념치 않고 클라우드의 등 뒤를 지켰다.

말 없는 행군은 성왕과 병사가 거대한 크레이터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를 조사하던 클라우드는 대뜸 환성을 내질러 세실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틀림없다. 이것은 티파의 흔적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성왕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 날 클라우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귀신같은 감각으로 사냥한 거북이형 몬스터를 부위별로 해체하여 열 다섯 가지의 신묘한 요리를 만들었고, 정통 바론식 요리를 재해석 하여 믿기 힘들 정도로 바삭바삭한 사슴 통구이를 대령했다. 산더미처럼 채집한 버섯과 산야채는 영롱한 칠색 빛의 스프가 되었고, 사탕수수를 졸여 만든 과자에 천연꿀을 발라 구운 후식이 화룡점정이었다. 세실은 아귀처럼 음식에 달려 들었다. 성왕의 혀에 돋은 돌기가 환호성을 울렸고, 위장의 융털이 전에 없이 폭주했다.

클라우드는 음식을 과흡입하고 완전히 뻗어버린 성왕 대신 불침번을 섰다. 바라던 바였다. 어차피 오늘 클라우드는 잠을 잘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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