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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eless7777 2018. 4. 4. 18:45
"슬슬 프롬프토 녀석이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듣자니 지금 햄머해드에 머물고 있는 것 같더군."

"녀석, 시드니에게 가능성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벌써 12년째야.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게."

"글쎄. 서로 마음은 있는 것 같다만."

"뭐? 서로? 프롬프토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글라디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크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만."

"...하하."

"그보다 슬슬 이야기가 나올 때인가."

"그래. 앞으로 2개월 이내에 마지막 토벌이 있을 거야. 남아있는 시해들도 이번이 끝이다. 자세한 것은 프롬프토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봐야 알겠지만."

"길었군."

"그래."

"드디어 그 녀석에게... 면목을 세울 수 있겠어."

"2년이나 걸렸으니까. 슬슬 좀이 쑤셔서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가능성은 있어. 이번엔 왕도에 전부 모일테니. 뭣하면 왕좌 앞에서 기도라도 해볼까."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매력적인 이야기야."

.

프롬프토는 고열을 동반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신탁과 함께 찾아오는 고열은 늘 새롭고 고통스럽다. 이제 곧 뇌를 부수기라도 할 것 처럼 기승을 부리곤 한다. 하지만 신탁은 이미 받았다. 이제 고통이 잦아져야 할 타이밍일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면.

슬슬 타임 리미트인지도 모른다.

원형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근본은 클론. 이제 세포 분열에 한계가 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가령, 지금 당장이라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프롬프토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졌어야 할, 들릴 이유가 없는 환청.

유쾌한 듯 음험하며 꺼림직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검은 찌꺼기 같은, 불길한, 실은 목소리조차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병원체에 불과하면서도 신조차 타락시킬 수 있는.

그저 끔찍한 어떤 것.

- 아, 프롬프토. 가엾은 프롬프토.

시해의 숙주.

- 자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 놈이다.

- 바스티엘에게 실험체를 하나 내놓으라 했었지. 상황을 봐서 왕자님 척추라도 부러뜨리라고 지령을 내릴까 했었는데.

꺼져. 내 머릿속에서 나가.

- 정에 이끌려 절친이 되어버릴 줄이야. 우와, 놀랐어. 아저씨 정말 놀라버렸지 뭐야.

당장 나가!

- 그래서야 명령을 들어줄 리 없잖아. 결국 말야, 허리 아래가 거대한 뱀으로 된 무서운 시해를 즉석에서 만들어서 말야. 아, 끔찍했지 그건. 왕자를 앉은 뱅이로 만들 때 유모를 죽이고 말았지 뭐야. 어쩔 수 없었어. 힘조절이 잘 안됐거든.

그만 둬!

- 찌꺼기 주제에, 너 때문에 애꿎은 사람 하나 죽었잖아? 미안하지? 응? 그래, 사람이 미안해 할 줄도 알아야지. 아차, 실례. 사람이 아니었지.

아딘!

아딘 이즈니아!

프롬프토는 분노 속에서 몸부림쳤다. 마치 코스탈 타워 심층부에서 자바워크의 앞발에 짓눌렸을 때 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다. 하지만 그 때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뭐야?

이거 대체 뭐야?

정신 차려!

아딘은 죽었어!

2년전에!

녹트와 함께!

- 불쌍하게도. 우리 찌꺼기군이 어차피 살아봐야... 응? 앞으로 10년이나 버티겠어? 그러고보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 누구더라, 그 여자, 이름이. 그래, 아무튼 죽기 전에 그 여자 옆에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대려와 줄까?

으아아아아아아!

- 어이쿠 이거. 아저씨 놀랐잖아. 무심코 찔러 버렸는 걸. 이거 어쩌나. 상처, 괜찮겠어?

겨우 생각났다.

이것은 7년 전의 기억이다.

프롬프토가 고대 인섬니아 유적을 찾아 에오스를 이잡듯 여행하던 시절. 고문서를 수집하고, 왕가의 기적에 대해 조사하고, 크리스탈의 권능에 대해 연구했다.

녹트를 살릴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그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다.

그리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그가 나타났다.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고고학자도 뭣도 아닌 프롬프토가 왕가의 흔적을 차례차례 찾아냈던 것이다.

마치 이끌리는 것 처럼.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다만 프롬프토는 그것이 친구의 인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프롬프토 답다면 프롬프토 다운 생각이다.

어리석었다.

피를 토하며 프롬프토가 무릎을 꿇었다.

- 안돼지 안돼. 아저씨, 약속해 버렸단 말이지. 지금 죽으면 안돼.

건드리지마!

날 건드리지마!

- 하하. 괜찮아. 그냥 조금 돌연변이로 만드는 것 뿐이야. 회복력이 좋아지고, 늙지 않게 돼. 이런. 아저씨 누구에게 선물을 주는 거 5년 만이야.

안돼!

- 괜찮다니까. 아프지 않아. 너희들은 내가. 흠, 그렇지.

아딘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 내가 우선 진정한 왕이 된 그 놈의 팔 다리를 떼어 낼거야. 그러고 나서 내장을 파헤치고, 겨우 숨만 붙여 놓은 다음에.

아딘의 눈에서, 입에서, 온갖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 내렸다.

- 그 다음에 그 놈 눈 앞에서 너희들을 한데 뭉쳐 시해로 만들거야. 어때. 기대되지?

프롬프토.

어이, 프롬프토!

- 쉬이이. 좀 자고 나면 개운할 거야. 그래, 새로 태어난 것처럼.

프롬!

.

"프롬!"

프롬프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온다.

"커흐."

"프롬."

청량감이 서려있어야 할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다. 또 걱정하게 만들고 말았다. 프롬프토는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손을 맞잡았다. 놈은 사라졌다. 나는 지금 현실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두통이 가시는 것이 느껴진다.

"신디."

침침한 눈에 초점이 돌아오자 시야 가득하게 시드니의 얼굴이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긴장한 프롬프토는 손에서부터 그 영향이 나타난다. 프롬프토가 시드니와 맞잡은 손에 힘을 뺐다. 하지만 이를 보충하려는 것처럼 시드니의 손에 힘이 실렸다.

마치 프롬프토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신디. 손에, 땀이..."

"바보. 왜 그런 걸 신경쓰는 거야."

"하하..."

"괜찮은 거야?"

"응. 신디가 손을 잡아줘서. 아픈 거 다 날아갔어."

"또 그런 식으로. 장난치지 말고."

"아닌데. 진짠데."

"그만. 슬슬 화가 나려고 하거든."

시드니가 프롬프토의 머리칼을 잡아 살짝 잡아 당겼다.

"아야."

"봐. 너 머리칼이."

"응?"

시드니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프롬프토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프롬프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넌 잘 모르겠지만 자주 이래. 며칠 지나면 돌아와. 안심해."

프롬프토는 내심 놀랐지만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몇 년이나 신탁을 받아와서 관록이 붙은 것일까.

그리고 신디는 프롬프토가 받은 신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 기적을 몇 번이나 목도한 그녀는 프롬프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녀는 프롬프토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롬프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다만 프롬프토는 그 사실이 그저 기쁘고 또 애달팠다.

그리고 프롬프토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신디."

"응?"

"이제... 가봐야겠어."

"왜? 이렇게 갑자기?"

"예감이 좋지 않아. 빨리 친구들에게 알려줘야 해."

"어제까지는 괜찮았다가, 지금 안된다는 거야?"

"응."

"왜 그러는지, 말해줄 수는 없고?"

"...응."

"..."

"..."

"넌."

"..."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신디."

"중요한 건 무엇하나 말해주지 않아."

"...신디."

"휴우."

"저기... 미안해. 하지만..."

"언젠간 말해 줄거야?"

"...그건."

"됐어. 내가 바랄 걸 바래야지. 안그래?"

"미안. 미안해."

"언제."

"응?"

"언제 돌아올거야?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아, 맞아.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프롬프토가 시드니의 말을 되뇌였다. 마지막이다.

"어차피."

"...무슨 말 했어?"

"아냐, 아무 것도."

"그러시겠지. 차 태워줄 테니까, 샤워라도 하고 나와."

"신디."

"응?"

"매번 고마워. 그리고..."

"됐네요."

살짝 웃으며 시드니가 프롬프토의 손을 놓고 떠나갔다.

그 온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프롬프토는 멀뚱히 지켜봤다. 그리고 내려온 신탁을, 검신 바하무트의 음성을 되살린다.

'인섬니아로 향하라'

'다가올 그 때를 생명을 다해 대비하라'

'시해의 군세는...'

프롬프토는 머리를 감싸쥐고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그렇다.

어차피.

손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신디. 어쩌지. 큰일났어."

시드니는 백미러를 통해 프롬프토를 흘깃 바라봤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뭐. 왜."

그리고 시드니의 대응은 적절했다.

"나 졸려."

프롬프토는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킹스 글레이브."

"안돼. 내가 자면 안돼잖아. 신디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시드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이나 못하면."

시드니가 운전하는 차량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가, 프롬프토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잠들기 싫어하는 꼬마아이 같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시드니는 정말로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프롬프토의 정신이 절벽에 매달렸다.

안돼.

자면 안돼.

아까 꿈의 뒷이야기로 연결될 것 같다고.

그 개자식이 있다고.

무섭다고.

...

-아니.

아니야.

너무 두려워서 잊고 있었어.

그거 아니잖아?

그 다음 분명히, 분명히!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프롬프토는 골아 떨어졌다.

잠든 그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

- 커흑

아딘 아즈니아가 검은 피를 뿌리며 뒤로 죽 밀려났다.

프롬프토는 간신히 눈을 떴다.

믿을 수 없었다.

아딘의 머리가 반 쯤 으깨져 있었다. 입가의 미소 또한 사라져, 시해의 음험함만이 남아 있다.

- 어라, 이거 힘 쌘 돼지 새끼가 행차하셨네.

그 앞에 떠 있는 것은, 밝고 푸르게 빛나는- 왕의 병장. 거대한 둔기. 프롬프토에게는 그것에 스치기만 해도 죽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거대한 날이 네개나 얽혀 있는 살벌한 십자 수리검이 나타났다. 그것은 곧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화전하며 날아들어 아딘의 오른 팔을 잘라 버렸다.

- 겁많고 수줍은 공주님께서도 오셨고.

그럼에도 아딘은 이제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았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등 뒤에 나타난 대검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뚫고 나왔을 때에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 그래, 동생아. 네가 오지 않을 리 없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찌르는 방식이 아주 훌륭해.

그리고 그 상처 속에서 아딘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오히려 기쁨. 열락. 그리고 조용히 침잠해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분노.

거듭된 출혈에 체력이 떨어진 프롬프토가 그 소름끼치는 심연에 삼켜지기 직전에, 눈 앞이 푸르게 밝아졌다.

이건-

프롬프토는 이 것이 무엇인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하. 왕자께서 친구를 지키기 위해 아비를 보냈나. 이거이거. 역시 대단하시구만 그래, 응?

부왕의 검.

마지막의 마지막에 레이부스가 전해준,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프롬프토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부왕의 검이 한바퀴, 프롬프토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마치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 처럼.

그리고 목소리를 전했다.

프롬프토는 몽롱한 가운데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검을 잡아, 프롬프토.

프롬프토는 눈물 속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너야?

정말 너야, 녹트?

손에 쥔 검은 따스했다. 곧 강대한 마력이 프롬프토 안으로 스며들었다.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됐다. 어두컴컴한 시야도 금새 밝아졌다. 마력은 신기하다. 위대하고 신성스럽다.

분명 일반인은 쥘 수 조차 없고, 휘두를 때 마다 생명력이 소모된다던 검이었을 텐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정말이야.

녹트야. 녹트가 여기 있어.

- 흥.

그리고 아딘의 전신에서 검은 투기가 폭발했다.

아딘을 견재하던 세 왕의 무구들이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프롬프토는 이제 아딘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다. 녹트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부왕의 검은 터질 것 처럼 빛을 발했고 아딘의 검은 투기는 프롬프토를 감히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 과연 레기스. 뒈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팔팔하네. 정말 아쉬워.

어느 새 아딘은 육체를 전부 회복해두고 있었다.

뇌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뭉게진 머리는 물론, 의복까지 말끔히.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 처럼.

프롬프토는 긴장하며 부왕의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 왜? 한 번 해보려고? 그만둬 그만둬. 친구가 지켜준 몸을 소중하게 여겨.

아딘이 느릿느릿하게 떨어뜨린 중절모를 집어 먼지를 털어냈다. 시해의 모습도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사람좋은 아저씨의 얼굴로 프롬프토를 바라보고 있다.

구역질 날 것 같았다.

- 이거이거. 선물, 아저씨가 받고 말았네.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이게 레기스 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너무 욕심부릴 수도 없는 일이고.

개자식.

이 개자식.

그 말의 의미를 이 때의 프롬프토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악당은 넘어져도 맨손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아딘은 끝을 알 수 없는 악당이었다. 이 때 아딘이, 자신을 공격한 세 역대왕에게 씻을 수 없는 저주를 심어놓은 것도,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지금의 프롬프토는 알 수 없었다. 프롬프토는 그저 자신이 그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 유의미한 만남이었어, 프롬프토오. 감사의 의미로 이제 찌꺼기라는 말은 안할테니까.

프롬프토는 입을 꾹 닫고 참아냈다. 이 놈은 변덕쟁이다. 언제 돌변할 지 모르니까.

아딘은 그런 프롬프토를 보고 피식 웃으며 사라졌다. 프롬프토는 아딘이 자신을 죽이려면 이미 몇 번이나 죽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력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친구가, 아주 소중한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녹트, 녹트, 녹트!

그에 대답하듯 부왕의 검이 날아올라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수염, 그거 안어울려.

프롬프토는 사라져가는 부왕의 검을 보며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 때부터였다.

프롬프토는 신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

시드니는 잠든 프롬프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경련하기 시작하는 프롬프토를 보고 시드니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차를 갓길에 세웠다. 비오듯 땀을 흘리는 프롬프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며, 시드니는 그저 프롬프토가 홀로 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다.

아침과 같았다. 프롬프토는 가위에 눌린 것 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시드니는 프롬프토의 손을 잡고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프롬. 프롬. 시드니에게만 허락된 그의 애칭이었다.

하지만 프롬프토는 깨어니지 않았다.

그리고 곧 시드니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 방울, 프롬프토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던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그를 마음 속 깊이 웃게 하는 것은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다. 그러나 자신할 수 있다. 그를 얼빠진 얼굴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은은하게 미소짓게 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하지만.

프롬프토를 울게 만드는 것은-

"짜증나네."

조금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럴 수 밖에.

프롬프토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존재를.

녹티스 루시스 체럼을.

"죽은 사람을... 이길 수도 없고."

시드니는 프롬프토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급기야 절친의 이름을 웅얼거리기 시작한 프롬프토를, 시드니는 언제까지고 눈에 새겨 두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글라디오는 하얗게 탈색된 프롬프토의 머리칼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퀭한 눈과, 미묘하게 헐떡이는 호흡을 발견했다. 곧 그는 프롬프토의 모든 것이 3개월 전과는 현격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얼굴에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옆에 침착하게 앉아있는 이그니스에게 인사를 건낼 여유도 없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눈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뭐야. 어떻게 된거야, 프롬프토!"

우와, 창문 떨리는 것 좀 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프롬프토가 이마를 짚었다.

"아, 정말. 글라디오. 실내에서 무슷 짓이야. 가뜩이나 머리가 울리니까 조용히 좀 말해줘."

"프롬프토!"

이그니스가 손을 들어 글라디오를 제지했다. 그래도 이럴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그니스가 유일하다.

글라디오는 폭풍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프리트를 쓰러뜨리고, 차례차례 막아서는 3인의 역대왕들을 쓰러뜨리고, 마지막 순간, 루시스의 거짓된 왕을 치기 위해 마지막 문을 열 때-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글라디오의 험악한 얼굴이 프롬프토는 오히려 기뻤다. 친구들의 걱정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 것보다 문제는 인섬니아야."

그런 것이라니.

글라디오의 손이 테이블 모퉁이를 으깨 부숴 버렸다. 그러나 프롬프토도 이그니스도 애써 이를 무시했다.

"신탁에 따르면, 시해의 마지막 군세가 전부 모인다는 것 같아. 집결 장소는 인섬니아. 아마도 왕좌. 여기까지는 지난 번 신탁과 같아. 하지만 숫자가."

'...지금까지 토벌한 것 보다 많다.'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해들을 지금까지 몇 만 필이나 해치웠다. 이렇게나 많은 시해들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일은 아니다. 밤은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하니.

지금껏 쓰러뜨린 것보다 많은 시해들이 남아 있을 줄이야.

글라디오가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진짜냐고..."

이그니스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틀림없겠지. 2년 동안 우리는 프롬프토의 신탁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까."

프롬프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은 거짓말을 한 일이 없어. 이번에도 확실할 거야."

"글라디오. 모든 글레이브에게 소집 명령. 경계를 두배로 늘리고. 이틀 뒤 계엄령 선포. 비전투원은 일주일 안에 레스탈룸으로 피난시킨다."

루시스 재상 이그니스의 지령에 글라디오의 고개는 끄덕거리는 대신 프롬프토를 향했다. 표정은 여전히 험악하다.

"난 절대로 참가할 거야. 레스탈룸 따위엔 안가. 기어다니면서라도 싸울 테니까."

"프롬프토!"

"글라디오, 그만. 프롬프토... 그 몸으로 괜찮겠어?"

프롬프토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 적당히 도망다닐 테니까. 그런 거 잘 하잖아, 내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 프롬프토는 글라디오 이상으로 완강하다. 꺾을 수 없다.

글라디오는 표정을 더욱 엄격하게 굳혔다.

"프롬프토. 절대로. 절대로 내 앞에 나서지마."

"네에,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스 전체의 두뇌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군들을 총동원해 대응책을 모색해야할 때다.

가용 전투 인원. 배치. 트랩과 바리케이트 준비. 병참. 고려해야할 것은 넘칠 만큼 많았다.

상황은 좋지 않다.

절망적이라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프롬프토는 그저 이것이 끝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저 느낌이다. 흉일지 길일지조차 알 수 없다. 신탁에 대한 일이 아니기에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굳이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늘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째서 일까. 프롬프토는 그 어떤 때보다 녹트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혹시 그런 걸까.

녹트가 저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9. 21:39





썩 꺼져라.





내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테니.





.

첫 인상은 사마귀였다.

그리고 녹티스는 곧 놈을 고작 사마귀 따위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사마귀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습격하지도 않는다.

녹티스는 놈의 얼굴을 응시했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조악한 표현이지만, 방금 지옥에서 뛰쳐 나온 것 같은 면상이다. 고교 시절 프롬프토와 집안의 불을 전부 꺼놓고 함께 봤던, 트라우마 레벨로 끔찍했던 공포 영화보다 그로테스크하다.

녹티스는 지금 당장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야. 난 그저 곤충을 싫어할 뿐이야. 너도 그렇지? 응? 프롬프토.

젠장.

젠장젠장젠장.

이제와서 그럴 수는 없다.

내 얼굴엔 왕자의 체면이라 하는 귀찮은 것이 발라져 있다. 이것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얼굴이 썪어나가기 시작할 터이다. 쿨하고 잘생긴 마스크에 패배자의 낙인이 찍힌다.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무섭다.

면상도 흉상이지만 우선 덩치가 크다.  높이만 해도 8 미터는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크기 뿐만이라면, 놈보다 큰 몬스터도 잡아봤다. 마력을, 세계의 근간을 몸에 걸친 녹티스는 알 수 있었다. 놈의 힘은, 그 절망적일 정도의 힘은 완전히 격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기적적일 정도로.

문득 이 놈의 존재를 몰랐던 척, 알아채지 못한 척 애써 피해다녔던 과거가 떠올랐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놈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소름이 돋고, 암담하고, 볼수록 공포가 깊어질 뿐이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사마귀의 집게 발에 해당하는 앞 발이 몸통에 좌우 세 개 씩, 무려 여섯 개나 된다.  그 앞 발에 달려있는 손톱이랄까, 주먹이랄까. 애초에 저걸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방금 저 게젓갈 같은 놈이 세개의 왼팔과 함께 집게 같은 손톱을 휘두르자 제국 최신예 대량 학살형 마도 아머가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내가 맞는다면 아마 물렁뼈 하나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손톱을 발사하는 공격에 와서는 그저 소름이 돋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면 놈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걸로 내 허리는 절단나겠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 흉흉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글라디오의 하반신 보다도 훨씬 튼실해 보이는 4개의 다리이며, 몸체 뒷 편에는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훨씬 두꺼운 꼬리가 달려 있다. 녹티스는 곧 놈이 가볍게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건장한 마도병 셋이 장작개비 처럼 날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아라네아 같구나. 노력하면 전설의 용기사가 될 수도 있겠어.

자기가 생각해낸 농담에 실없이 웃으며 녹티스는 괜히 우쭐해졌다. 언제 어느 때나 여유를 찾아내는 나의 이 그릇이야말로 왕의 덕목이지. 그렇게 자평해본다. 머릿 속에 세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만, 이 정도로만 하자.

슬슬 농담할 때가 아니니까.

이제 집중하지 않으면 아딘은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고를 덜게 될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열심히 했다. 아직 그 정도 여유는 있다. 그렇게 믿으며, 녹티스는 놈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봤다. 나는 저 무도한 놈에게 마도병처럼 허리를 강제로 접히고 싶지 않으니까.

나굴파르.

사람을 먹고, 시해를 먹고,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그 힘을 흡수하는 존재. 저주스런 시해이면서도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류의 천적. 저 급하고 성질 더러운 리바이어선조차 저 녀석을 쉽게 어쩌지는 못하리라.

꼴 좋다.

내가 오늘 저 놈을 쓰러뜨릴 테니까, 잘 보고 나서 나에게 충성을 맹새하도록. 알았냐? 이 살찐 동갈치 자식아.

.

"정말 저거랑 싸우는 거야?"

프롬프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탄환을 장전하고 있다. 일반인에 불과한 그도 전투를 거듭하며 썩 괜찮은 전사로 성장했다.

녹티스는 이 끈기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프롬프토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녹티스는 누구 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녹트에게 달렸지."

이것은 이그니스다. 안경을 고쳐쓴 왕의 참모는 약점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굴파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통찰력에 녹티스 일행은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척봐도 장난 아닌데. 그래도 물러설 수야 없지."

글라디오가 꿈틀거리는 근육을 갈무리했다. 아직 녹티스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글라디오는 나굴파르가 자신의 투지를 읽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방패. 녹티스가 검을 던지는 순간 뛰어나갈 준비를 해둘 뿐이다.

등 뒤에 있는 친구들을 느낀 녹트가 목소리에서 힘을 풀었다. 들켜도 어쩔 수 없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강한 왕자니까.

그런 걸로 되어 있으니까.

"저 놈 죽이고 등뼈라도 뽑아가면 되겠지."

엔진 블레이드를 소환하며 녹티스가 사소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 할아범, 정체가 뭐야? 왜 저런 걸 알고 있어?"

"내말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냥 뼈나 챙겨다 줘보자고."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을 담았다. 그 가벼운 어조에 녹티스의 어깨도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상대다. 마력이 없다하더라도 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텐데, 친구들은 겁을 먹거나 주눅든 기색이 없어 녹티스는 마냥 든든했다. 나도 좀 더 힘을 내서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고양감이 솟아났다.

할 수 있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쉿."

녹티스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이그니스가 왼손 검지를 입가에 세우며 주의를 촉구했다.

"놈의 등 뒤로 마도 아머가 접근하고 있어. 놈이 돌아서는 순간 돌격한다."

글라디오가 크게 어깨를 돌린다.

"좋아. 한 판 떠볼까."

프롬프토는 잘 숨겨둔 두 번째 총의 장전도 마쳤다.

"언제라도 좋아."

그리고 나굴파르와 마도아머의 교전을 확인. 마도아머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기대하며, 이그니스는 품안에서 꺼낸 마법병을 쥐어 부쉈다.

"가라, 녹트!"

녹티스가 정제하고 이그니스가 재련한 마법의 힘이 엔진 블레이드에 깃들었다. 녹티스는 마력으로 충만해진 엔진 블레이드를 나굴파르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 던졌다.

-그것은 처절한 사투였다.

이 때 녹티스가 사용한 포션과 엘릭서는 실로 48개.

녹티스는 그 외에도 일반인에게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인 제국 마도병 전용 근육 강화제, 흥분제와 같은 전투 약물도 8개나 사용했다.

소중한 엔진 블레이드는 이가 다 빠져 버렸고, 왕가의 힘은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이나 빌렸다.

승부가 났을 때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이그니스. 녹트는?"

"아직 자고 있어."

"어제도 굉장했지, 녹트."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녹티스는 나굴파르를 상대하는 동안 제대로 땅에 내려 서지도 않았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놈의 반격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나굴파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을 쉴 새 없이 이어갔고, 온갖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친구들을 지켜냈다. 방패를 소환해 막아내고, 얼굴을 직접 공격해 시선을 돌리고, 검을 휘둘러 나굴파르가 발사한 손톱들을 튕겨냈다.

과연 영웅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왕자의 형제들은 나굴파르의 힘을 피부로 느끼며 전율하면서도, 왕자의 비호 아래 움츠러드는 일 없이, 최강의 적을 상대로 완벽한 성과를 일궈냈다. 프롬프토의 저격은 나굴파르의 두 눈을 모두 터뜨렸고, 이그니스는 화염으로 놈의 외골격을 무력화시켰으며, 글라디오의 검격은 무방비가 된 몸통을 거의 반절이나 잘라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녹티스 왕자가 힘을 쥐어짜 왕가의 무기를 소환, 나굴파르를 섬멸하는 모습을- 여력을 남긴 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유롭거나 통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글라디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그래."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디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그니스의 표정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서.

"녹트가 소환한 왕의 무기는 틀림없이 열 세개였어."

"그래. 나도 다시 확인했다."

녹티스는 세 친구들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왕의 무기를 수집했다. 그 수량은 분명히 열 개일 터. 프롬프토가 굳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된거야? 설마 세 개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프롬프토다운 말이다.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그니스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중 하나는 '칸나기의 역모'. 루나프레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거야. 칸나기 취임식에서 계승하셨지."

글라디오가 이그니스의 말을 받았다.

"하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이런 젠장. 믿을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글라디오를 힐끗 바라봤다.

"못 알아볼 이유가 없어. 그건 선왕...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말도 안 돼..."

프롬프토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분명히 라디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들었다. 폐하의 검은 분명히 제국이 가져갔다. 마치 전리품을 챙겨 가는 것 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 때 녹티스의 얼굴은- 프롬프토는 절대로 잊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글라디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자 초조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나쁜 버릇이다.

"녹트.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왜 우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거야."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허물을 조용히 질책했다.

"그만. 글라디오. 녹트는 인섬니아의 차기 왕이다. 우린 녹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그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마, 글라디올러스."

그 말에 프롬프토가 어깨를 움찔 거렸다. 이그니스가 가시돋친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녹트가 마력을 넣으면 평범한 음료수가 생명의 물이 되지. 녹트가 축복한 지저분한 깃털 장식에 기원하면 죽어가던 사람도 되살아나. 녹트는 매일 이런 걸 산더미처럼 만들고 있어. 우리가 써야 하니까. 매일 수십개씩 사용하니까. 무거운 무기도 평소에는 녹트가 보관해 주고 있지. 캠핑 도구도, 텐트도 전부. 그리고 우리는 녹트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해."

감정을 드러낸 이그니스는 멈추지 않았다.

"녹트가 사용하는 순간 이동. 한꺼번에 소환하는 왕의 무기. 그것들 모두 엄청난 심력을 필요로 하지. 무사수행? 영광의 상처? 글라디올러스.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녹티스가, 차기왕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그 마지막 말.

그 마지막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글라디오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굴욕적이다. 이그니스."

글라디오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근육이 조여 꿈틀거리고, 얼굴을 길게 수놓은 상처가 일그러진다. 글리디오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새어나왔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아미시티아에게 감히. 레기스 폐하께서 어떤 심정으로 인섬니아를 지키고 계셨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방벽을 치고 계신 것을! 감히,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그 참된 아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마지막에는 거의 사자후와 같은 고함으로 변해 있었다. 글라디오가 자신의 특대검과 방패를 동시에 소환했다.

"따라와. 겁이 난다고는 하지 않겠지."

이그니스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창과 단검을 꺼내들었다.

"얼마든지."

일촉즉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두 사람에게서 여유를 앗아가고 있었다. 녹티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그니스를 격동시켰고, 글라디오의 민낯을 폭로했다.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조용히. 두 사람 모두 다행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다. 상상 이상의 박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프롬프토가- 이토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처음 봤다.

프롬프토가 텐트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녹트의 귀가 잘 안들리게 된 것 말야."

프롬프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그랬으면 지금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봤을 테니까."

프롬프토가 흘린 청천벽력같은 말에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동시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집중력이 흩어져 무기를 현세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뭐?"

"지금, 뭐라고?"

당황한 두 사람에 비해 프롬프토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말한 대로야. 녹트, 귀가 점점 안들리고 있어. 어제도 왕의 힘을 엄청 사용했으니까, 아마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너희 둘은 그런 것도 몰랐나, 하는 비난의 어조가 아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그 뿐이다.

하지만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녹트는 우리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하잖아?"

"어제의 움직임도 청각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하지만 프롬프토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녹트는 언제나 우리들을 신경쓰고 있어. 왕의 힘인지 뭔지로 어떻게든 하고 있겠지. 하지만 잠을 잘 때는 달라. 반응이 다르다고. 요즘에는 정말 죽은 듯이 자. 건드리지 않으면 뒤척이지도 않아."

"..."

"..."

짐작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녹티스는 요즘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아침잠도.

두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프롬프토의 어조는 거의 타이르는 것처럼 바뀌었다.

"이그니스가 말했지. 어려운 일은 전부 녹트가 대신 해주고 있다고. 그 말이 맞다면, 녹트가 자는 동안에는 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는 것도 신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잖아?"

"...미안하다."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냐."

면목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글라디오의 표정도 침울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할 시간이야. 내가 녹트를 깨울테니까. 두 사람, 얼굴이 아직도 험악해. 좀 진정시키고 와. 그 다음부터는 평소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글라디오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그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쭈뼛쭈뼛 다가왔다.

"프롬프토. 미안하다. 너에게만..."

"응? 신경쓰지 마. 이런 건 나에게 맡겨."

어느 새 프롬프토가 예전처럼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이그니스는 겨우 눈치챘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간 프롬프토가 그대로 텐트 안으로 사라지더니, 언제나처럼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프롬프토! 하지마! 하지 말라고!" "우이! 드러!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네!" "너 임마!" "얼른 일어나 잠탱이 왕자님! 지금 몇 신줄 알아?" "아 진짜 바지 벗겨지잖아!" "오늘 초코보 보러 가자고! 어제 약속 했잖아!" "초코보 말고 거울로 니 머리털이나 보라고 이 화상아!" 화를 내며 텐트에서 기어나오는 녹트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프롬프토는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로 녹트와 어울리고 있었다.

당해낼 수가 없다.

결국 글라디오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놈은 당췌... 이길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설핏 알아채고 있었다. 저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프롬프토는 그저 녹티스와, 우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프롬프토는 강하다. 어째서인지 절로 웃음이 흘러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정말이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여유를 발견한 글라디오가 얼마전에 새로 얻은 이마의 상처를 긁적였다. 마침 이그니스도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낸 글라디오가 한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그니스. 저기, 뭐냐."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언제나 그렇듯, 글라디오보다 솔직하고 어른스러웠다.

"미안하다, 글라디오. 진실된 왕의 방패에게 내가 말이 심했다. 우리들 중 녹트가 가진 왕의 자질을 가장 믿고 있는 건 너였지."

글라디오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아버지나 불사장군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 참, 이 놈의 성질 어디가서 갈아마시던가 해야지."

"또 무사수행을 나가겠다고 하면 곤란한데."

"흐하하. 안가 안가. 저것들 두고 내가 어딜가."

녹트는 이제 프롬프토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었다. 땅바닥을 굴러 흙투성이가 된 프롬프토는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왕자의 겨드랑이 분비물을 조합하면 신경작용제를 만들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녹트는 팔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넣었지만, 글라디오가 보기에는 여전히 젓가락 같았다. 언제까지나 빈약한 녀석이다.

그 장난질을 구경하며 이그니스도 간신히 감정을 정리했다. 이 여행, 정말이지 질릴 틈이 없다.

"식사다. 글라디오. 오늘은 채소가 없는 걸로 하지."

글라디오는 참모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했다.

"찬성이다."

그리고 잠시 후 녹티스는 흔한 샐러드 한 조각 없이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특선 가루라 스테이크 두 덩어리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녹티스는 거의 사랑을 고백할 것 같은 눈으로 이그니스를 쳐다봤지만 이그니스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예상대로였다.

스테이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

그리하여, 녹티스 왕자가 계획하고 있던 몬스터 토벌 미션은 모두 종료되었다. 녹티스와 그 동료 헌터들은 이오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베히모스를 쓰러뜨렸고, 몹시 끔찍한 용종과 뱀들을 차례로 사냥했으며, 귀찮게도 하늘로 도망치는 잡것들까지 전부 깔끔하게 처리했다.

마지막에는 임섬니아의 역대 왕들이 지하에 봉인한 모든 잠재적인 위협들을 제거함은 물론, 이 모든 존재들을 전부 합한 것 만큼이나 끔찍한 나굴파르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 망국의 왕자와 그가 목숨보다 아꼈던 세 명의 킹스 글레이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의 추도식에서 밝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