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26. 22:07
지금도 레나는 자신이 이룩해낸 업적을 믿을 수 없었다. 정부를 은근히 압박해서, 송하나 하사의 외박을 얻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레나는 동료들 사이에서 해결사로 통하며, 그 별명처럼 그녀는 남의 부탁은 흔쾌히 받아 해결해 주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누군가를 강제하거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에는 매우 서툴렀다. 그래서 레나에게는 한국 정부에게서 직접 얻어낸 하나의 외박 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쾌거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무리하게 정부를 압박한 것은 옴닉 섬멸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에게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매일같이 녹초가 될 정도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하나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탓도 컸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녀는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언젠가 반드시 경을 칠 날이 올 거라고, 강습 사령관은 늘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그녀가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몸에서 시간 가속기를 떼어놓고서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된 그녀가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철칙이다.
그렇게 하나와 만날 약속을 잡아둔 날이 오늘이다. 그리고 레나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해둔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11시에 하나와 이곳에서 만나서 부산의 명물 크림치즈 츄러스 딜럭스페셜을 먹기로 했다. 레나가 병사들에게 직접 수소문해서 알아낸 것인데, 이 츄러스는 레나가 부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5분 후면 하나가 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날 것이다. 레나는 하나를 밖에서 만날 생각에 완전히 흥분해서, 계속 그 모퉁이를 응시한지 이제 거의 30분이나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를 기다리면서, 레나는 문득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나는 외박 허가가 떨어지더라도 부대 밖으로 나서는 것 보다, 숙소에 틀어박혀 신작 게임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레나 그 자신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녀와 직접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는 열심히 스스로를 설득하고, 억지를 부려 하나를 숙소 밖으로 끌어내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른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하나와 약속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상태를 앙겔라에게 들키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앙겔라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그녀가 머리에 걸치고 있는 특유의 고글 이외에, 지금 입고 있는 속이 살짝 비치는 니트와 상아색 가디건, 숏 팬츠와 샌들, 파랗게 칠한 네일은 모두 앙겔라가 골라준 것이다. 앙겔라가 하나의 나이 대에 맞춰 조언한 복장이긴 하지만 레나에게는 매우 잘 어울렸다. 이제 그녀는 오버워치의 정예라기 보다는 하나의 평범한 동급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레나의 상념은 11시 정각 알람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았던 하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1시 5분.
10분.
레나가 갈증으로 속이 타들어가고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는 모퉁이로 돌아 들어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레나는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향해 외쳤다.
"하나야!"
레나가 붕붕 손을 흔들자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내가 그렇게 반가운가? 레나가 다음 말을 자아내기도 전에 하나의 오른손이 거의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급?!"
"언니. 제 이름 너무 크게 부르면 안돼요.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요."
"으급 으급"
"좋아요."
하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그녀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티셔츠에 야구팀 이름이 재봉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스키니진, 발에는 길거리에서 산 것 같은 심플한 스니커. 그냥 요 앞에 잠깐 도리토스나 마운틴듀라도 사러 나온 것 같은 복장이었지만, 레나는 하나가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나의 시선이 하나의 얼굴로 옮겨졌다. 머리카락은 동글게 말아 뒷 머리 쪽에 고정시키고, 목에는 언제나 잊지 않는 토끼귀 헤드셋. 영내에서 얼굴에 그려두고 다니는 특유의 페인팅은 깨끗하게 지워뒀고, 약간 어두운 색이 들어가 있는 썬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그제서야 레나가 겨우 알아챘다.
"아, 맞어. 자기 유명인이었지. 후훙"
"왜 언니가 뿌듯해 해요? 게다가 언니가 훨씬 유명인이거든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하나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카운터에 앉아있던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눈매에는 자글자글한 주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는 중년의 여성은 이 가게의 점주님인 같았다. 아까부터 하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걸 보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에는 접시.
그 위로 음식을 한 아름 쌓여 있다.
레나가 약간 당황했지만 "아, 아직 시키지 않았는데..." 점주님은 척척 산더미 같은 음식을 내려 놓았다. 4인용 테이블의 낙낙한 넓이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실버 메달 논스파클링 애플 쥬스 두 병.
초컬릿 쿠키.
치즈 케익.
슈크림 빵.
머핀.
햄치즈 베이글.
그리고, 따끈따끈한 치즈크림 츄러스 딜럭스페셜 6개.
레나의 입을 쩍 벌렸다.
"헛."
심지어 츄러스의 길이는 거의 5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적이 너무 많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디바와 트레이서로는 역부족. 단 것을 많이 먹지 못하는 앙겔라 박사님도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국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래. 라인하르트나 윈스턴. 최소한 솔져 세븐티 식스의 위장이 필요하다.
레나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점주님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나의 머리에 손을 뻗었지만, 이내 움찔 하고 멈췄다. 아마도 함께 앉아 있는 손님을 의식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점주님의 손을 자신의 머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머리 모양이 온통 헝클어지도록 문질렀다. 점주님의 얼굴에 홍조. 표정은 애저녁에 무너졌고, 칠칠치 못한 팔불출 같은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으므로, 레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마워요 이모."
하나의 살가운 대응에 점주님이 진심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점주님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달라며 카운터로 되돌아 갔다. 무서운 아이. 육식 토끼. 이미 점주님도 손에 넣은 지 오래구나.
레나가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행동에 돌입했다.
"언니, 식기 전에 먹어요."
하나가 직접 츄러스를 냅킨에 감싸 레나의 손에 쥐어준다. 레나가 츄러스를 조심조심 받았다. 냅킨은 이미 기름으로 번들번들해진 상태였다. 이런 기름 투성이 밀가루 덩어리를 세 개나 해치워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 츄러스에 온통 새까맣게 묻어 있는 이 결정체들은 흑설탕이며, 원통형으로 비어있는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하얀 것은 뜨끈뜨끈하게 덥힌 크림치즈였다. 그리고 레나는 이 음식의 이름이 매우 명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에게 차마 츄러스의 열량을 물어볼 수 없다. 레나에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잠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하나는 이미 츄러스 하나를 해치우고 다음 희생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레나는 무심코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신경 뉴런의 작용에 따른,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초 연산이 레나의 두뇌를 자극했다. 결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뇌는 거부했다. 이것은 불량식품이며, 이것을 섭취하면 앞으로 한 달간 샐러리만 먹어야 한다. 그러자 본능이 답했다. 건강해 지려면 식이요법은 집어치우고 유산소 운동을 해라. 그리고 레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고, 본능이 개가를 올렸다. 입술이, 코와 허파꽈리가, 혀의 돌기가, 식도가, 위장과 대장의 융털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확보하라.'
'남은 츄러스를 확보하라.'
곧 하나와 레나는 경쟁적으로 츄러스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하나는 토끼가 풀을 갉아먹 듯 빠르게 입을 움직였고 레나는 성큼성큼 베어 물어 거의 씹지도 않고 삼켰다. 용호상박. 무적의 용과 최강의 호랑이가 자웅을 겨루니 츄러스가 남아날 리 없었다. 츄러스가 전부 없어지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레나는 츄러스 하나의 열량이 천 이백 킬로 칼로리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곧 그녀는 시간 가속기의 도움없이 기지까지 뛰어가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레나는 하나가 초컬릿 쿠키를 위시한 잔당들을 소탕하는 동안 츄러스 하나를 더 시켜 먹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
"후아. 잘 먹었다."
하나가 배를 쓰다듬었다. 다른 한 팔로는 레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레나도 하나에게 붙들려 있지 않은 팔로 아랫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너무 먹었다. 후회된다. 하지만 후회도 하지 않는 인생이 재미있을 리 없다. 너무 거창한 곳까지 확대된 생각이 너무 어이없어서 레나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다음은 어디 갈까요?"
하나의 물음에 레나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나는 이미 오늘의 모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자타공인. 그녀는 해결사였다.
그리고 레나가 안내해 도착한 곳에서 하나는 거의 괴성을 내지를 뻔 했다.
'우와! 우와우와우와!'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머리통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날려보낸다는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이 자신을 게임센터에 대려다 줬다는 사실을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그냥 게임 센터가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감정이 폭발했다.
"언니가 여길 어떻게 알았어요?! 언닌 영국인이고! 게이머도 아니잖아요!?"
레나가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이래뵈도 촉이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자기가 좋아할 만한 게임 센터라면 아무리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겠더라고."
하나는 레나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헐 감동이야 언니 사랑해요!"
레나가 고르고 고른 장소는 부산 게이머들의 은밀한 장소였다.
통칭 성지.
굳이 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지만, 게임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면 감히 발을 딛지도 못한다는 특별한 게임 센터. 하나더러 굳이 자신의 숙소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이곳일 것이다. 그녀는 게이머의 정열과 투쟁심이 휘몰아치는 이곳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게임 센터안에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피끓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거의 귀기까지 느껴지는 광경에 레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하나도 게임 센터에 들어선 이후로는 안색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두리번 거리는 레나를 뒤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걸어 증강 현실 콘솔 앞에 섰다.
MEKAGE.
한국 굴지의 게임사에서 MEKA 부대를 소재로 제작한, 최대 6 대 6까지 가능한 다인수 대전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 매니악한 현실 재현도 덕분에 발매 초기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나, 이후 굴지의 프로게이머인 송하나의 편애와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재조명되었고, 지금은 그 자유로운 완성도가 차고 넘칠 정도로 재평가받았다.
곧 전설적인 프로게이머인 하나를 알아본 몇몇 게이머들이 흠칫 놀랐지만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가까이 오거나 아는 채 하기는 커녕 인사를 건내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하나의 인기를 잘 알고 있는 레나는 이 분위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가 일단 콘솔 하나를 골라 자리에 앉자 나머지 11개의 빈 자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꽉 채워졌다. 마치 그들은 행동을 통해 하나의 인기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묵묵히 증거하는 수도승 같았다.
게임 매니아들이 숫기가 없다는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너무 데면데면하다. 그에 반해 그들의 하나에 대한 시선은 꽤나 노골적이다. 아까부터 이곳의 게이머들은 사욕으로 질척이는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나는 곧 그것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과장된 감이 있지만, 레나는 이런 눈을 잘 알았다.
전장에서 늘 보는 눈이다.
살기.
기백.
투쟁심.
호승심.
이를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레나의 소박한 의문과 질려버린 것 같은 기색을 감지한 하나가 소곤소곤 설명했다.
"여기선 절 이기지 못하면 저에게 말을 걸지 못해요. 제가 그렇게 정했어요."
그러나 레나의 의문은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나의 의아한 표정을 읽어낸 하나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성지는 제가 키운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제 말이 곧 법이란 말씀."
"뭐야아?"
"제가 인기가 좀 많아요."
인기가 많다.
과연 그 말은 납득할 수 있다.
게이머 입장에서 하나는 동경의 대상이다. 희귀한 여성 게이머인데다가 게임 실력은 초일류. 온갖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실력으로 시끄러운 게이머들을 닥치게 만들고, 여세를 몰아 그런 룰을 만들었으리라. 나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대충 그런 일이라도 있었겠지.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수 많은 전장에 섰으면서도, 이제껏 무패.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상대팀을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유린하고 있었다. 너무도 리얼한 게임성. 그리고 하나는 실존하는 MEKA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은 필요없었다. 하나는 침묵을 지킨 채 팀원들이 두서없이 내뱉는 말을 독자적으로 분석하여, 팀원들을 효과적으로 보조함과 동시에 적을 섬멸하고 있었다. 함께 전장에 서있는 게이머들의 면면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실력에 대한 경이와 존경. 하나는 매일 4시간 이상 군용 MEKA를 운용해 실전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레벨이 틀려도 너무 틀렸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뒤에서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레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나도 조금 즐길 수 있는 편이 좋겠지.
레나는 하나의 상대편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 중 한명에게 다가가 무언의 압력. 기세에 눌린 게이머가 시뮬레이터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레나가 고글을 내려 쓰고 콘솔에 게임 코인을 넣는다.
의외의 전개에 반대편에서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이 게임 꽤 어려운데 괜찮겠어요?"
하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미묘.
우려.
흥분.
기대.
아무래도 좋았다. 레나는 대답하는 대신 팀원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토끼는 내가 잡아둘게. 그럼 이길 수 있겠어?"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레나에게 시선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레나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 게이머가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뻐끔이고 있는데, 레나의 정체를 결정짓는 아이템이 레나의 가방에서 출격, 팔을 타고 이동. 이윽고 흉부에 도달해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장착되고 있었다.
파란 플라즈마를 내뿜는 그것은 트레이서의 상징- 시간 가속기였다.
하나를 포함한 갤러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곧 비명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트트트트트레이서?"
"진짜야? 오버워치가 성지에 왔어?"
그러나 아무도 스마트폰을 꺼내거나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레나는 그들의 인내심에 조금 놀랐다. 이것도 하나가 만든 성지의 룰인 걸까.
"할 수 있어! 저 토끼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고!"
트레이서와 함께하는 팀원들의 사기가 성층권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오늘 꼭 하나를 꺾어야만 했다.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울분과 희망을 토해낼 때가 왔다.
"난 인사할 거야!"
"나도!"
"난 싸인 받을 거야!"
"악수! 악수를 요구한다!"
"풍선껌을 가보로 삼겠어!"
그것 참 소박해 돌아가시겠네! 레나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스틱을 잡았다.
게임 시작 30초 전.
레나가 조용히 선언했다.
"해결사가 왔어."
.
"푸풉"
하나는 완전히 그로기 상태가 된 일행을 부축해서 성지로부터 3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겨우 앉힌 참이었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방금 실패했다.
"꺄하하하하하하!!!!!!"
"이제 그만 웃어 자기야..."
다섯 번이나 계속된 대전 중 트레이서는 손도 발도 내밀지 못했다. 싸움꾼 토끼를 잡아두긴 커녕 그녀가 지휘하는 다섯 명의 팀원 중 누구 한 명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들은 위대하신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을 거리낌없이 유린했고, 한 번씩 돌아가며 죽였다. 무서운 놈들이다.
그 무서운 놈들의 필두에 서있는 무서운 토끼가 겨우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언니.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거예요? 조작법 좀 외워온 걸로 진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나가 두서없이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의 초점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으으으... 오버워치 중에서도 난 적응력과 동체 시력이... 반응... 속도가..."
"시간 가속기 이야긴 안해요?"
"컥..."
하나가 짖궂게 웃으며 레나의 말을 끊고 추가타를 날렸다. 나 이거 알아. 레나가 몽롱한 머리로 기억해냈다.
지난 번 게임 방송에서 봤어.
"비전투 상황 중 민간인 앞에서 시간 가속기를 조작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거 맞죠?"
공중 컴보야. 공중에 띄워놓고 죽을 때까지 패는 거지.
"자기야... 제발... 응?"
이 아이는 악마다. 게임 감각으로 사람을 손쉽게 파괴한다. 레나의 정신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레나의 한심한 얼굴을 본 하나의 표정도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이 언니, 연상 맞아? 뭔데 이렇게 귀여워?
"오구오구."
하나가 레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애기 이렇게 여려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그 참담한 패배감.
레나는 오버워치의 험난한 미션 중에도 이런 실패는 겪어본 일이 없었다.
최소한 시간 가속기가 있는 한, 그녀는 자신이 질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 가속기를 이용해 피탄 직전에 회피 기동을 섞어 넣으며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 오는 레나를 2인 1조로 구성된 하나의 팀원들이 침착하게 응격했다. 어쨌든 게임 속의 메카는 현실 속의 트레이서 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시간 가속기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굳건하게 버텨낸 적들은 무력해진 레나의 기체를 손쉽게 사냥했다.
그 방약무도한 전투력.
레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돼. 뭐야. 진짜 민간인을 군대로 키우고 있는 거야? 한국 정부의 의도가 정말 그거야?"
"그 병크 얘길 왜 해요? 아오."
레나는 쓴웃음을 짓는 하나를 올려다보며, 하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레나의 정신은 도저히 진지한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하나에게 어리광 부리더라도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레나는 하나의 품 안으로 더 깊숙히 파고 들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레나를 받아들였다.
포근하고 기분 좋다.
레나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한심해 보이겠지.
아무렴 어때.
하나의 체향을 듬뿍 느끼면서, 어느 새 레나는 하나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과거로 날아갔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은.
애틋하고 귀여운, 그리고 강인한- 신병 시절의 하나가 그녀의 눈 앞에 있었다.
레나가 무리하게 정부를 압박한 것은 옴닉 섬멸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에게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매일같이 녹초가 될 정도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하나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탓도 컸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녀는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언젠가 반드시 경을 칠 날이 올 거라고, 강습 사령관은 늘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그녀가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몸에서 시간 가속기를 떼어놓고서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된 그녀가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철칙이다.
그렇게 하나와 만날 약속을 잡아둔 날이 오늘이다. 그리고 레나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해둔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11시에 하나와 이곳에서 만나서 부산의 명물 크림치즈 츄러스 딜럭스페셜을 먹기로 했다. 레나가 병사들에게 직접 수소문해서 알아낸 것인데, 이 츄러스는 레나가 부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5분 후면 하나가 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날 것이다. 레나는 하나를 밖에서 만날 생각에 완전히 흥분해서, 계속 그 모퉁이를 응시한지 이제 거의 30분이나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를 기다리면서, 레나는 문득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나는 외박 허가가 떨어지더라도 부대 밖으로 나서는 것 보다, 숙소에 틀어박혀 신작 게임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레나 그 자신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녀와 직접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는 열심히 스스로를 설득하고, 억지를 부려 하나를 숙소 밖으로 끌어내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른스럽지 못하다.
심지어 하나와 약속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상태를 앙겔라에게 들키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앙겔라에게까지 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그녀가 머리에 걸치고 있는 특유의 고글 이외에, 지금 입고 있는 속이 살짝 비치는 니트와 상아색 가디건, 숏 팬츠와 샌들, 파랗게 칠한 네일은 모두 앙겔라가 골라준 것이다. 앙겔라가 하나의 나이 대에 맞춰 조언한 복장이긴 하지만 레나에게는 매우 잘 어울렸다. 이제 그녀는 오버워치의 정예라기 보다는 하나의 평범한 동급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레나의 상념은 11시 정각 알람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았던 하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1시 5분.
10분.
레나가 갈증으로 속이 타들어가고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는 모퉁이로 돌아 들어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레나는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향해 외쳤다.
"하나야!"
레나가 붕붕 손을 흔들자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내가 그렇게 반가운가? 레나가 다음 말을 자아내기도 전에 하나의 오른손이 거의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급?!"
"언니. 제 이름 너무 크게 부르면 안돼요.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요."
"으급 으급"
"좋아요."
하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그녀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티셔츠에 야구팀 이름이 재봉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스키니진, 발에는 길거리에서 산 것 같은 심플한 스니커. 그냥 요 앞에 잠깐 도리토스나 마운틴듀라도 사러 나온 것 같은 복장이었지만, 레나는 하나가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나의 시선이 하나의 얼굴로 옮겨졌다. 머리카락은 동글게 말아 뒷 머리 쪽에 고정시키고, 목에는 언제나 잊지 않는 토끼귀 헤드셋. 영내에서 얼굴에 그려두고 다니는 특유의 페인팅은 깨끗하게 지워뒀고, 약간 어두운 색이 들어가 있는 썬글래스를 쓰고 있었다. 그제서야 레나가 겨우 알아챘다.
"아, 맞어. 자기 유명인이었지. 후훙"
"왜 언니가 뿌듯해 해요? 게다가 언니가 훨씬 유명인이거든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하나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카운터에 앉아있던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눈매에는 자글자글한 주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는 중년의 여성은 이 가게의 점주님인 같았다. 아까부터 하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걸 보면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에는 접시.
그 위로 음식을 한 아름 쌓여 있다.
레나가 약간 당황했지만 "아, 아직 시키지 않았는데..." 점주님은 척척 산더미 같은 음식을 내려 놓았다. 4인용 테이블의 낙낙한 넓이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실버 메달 논스파클링 애플 쥬스 두 병.
초컬릿 쿠키.
치즈 케익.
슈크림 빵.
머핀.
햄치즈 베이글.
그리고, 따끈따끈한 치즈크림 츄러스 딜럭스페셜 6개.
레나의 입을 쩍 벌렸다.
"헛."
심지어 츄러스의 길이는 거의 50 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적이 너무 많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디바와 트레이서로는 역부족. 단 것을 많이 먹지 못하는 앙겔라 박사님도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국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래. 라인하르트나 윈스턴. 최소한 솔져 세븐티 식스의 위장이 필요하다.
레나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점주님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나의 머리에 손을 뻗었지만, 이내 움찔 하고 멈췄다. 아마도 함께 앉아 있는 손님을 의식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점주님의 손을 자신의 머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머리 모양이 온통 헝클어지도록 문질렀다. 점주님의 얼굴에 홍조. 표정은 애저녁에 무너졌고, 칠칠치 못한 팔불출 같은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으므로, 레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마워요 이모."
하나의 살가운 대응에 점주님이 진심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점주님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달라며 카운터로 되돌아 갔다. 무서운 아이. 육식 토끼. 이미 점주님도 손에 넣은 지 오래구나.
레나가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행동에 돌입했다.
"언니, 식기 전에 먹어요."
하나가 직접 츄러스를 냅킨에 감싸 레나의 손에 쥐어준다. 레나가 츄러스를 조심조심 받았다. 냅킨은 이미 기름으로 번들번들해진 상태였다. 이런 기름 투성이 밀가루 덩어리를 세 개나 해치워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이 츄러스에 온통 새까맣게 묻어 있는 이 결정체들은 흑설탕이며, 원통형으로 비어있는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하얀 것은 뜨끈뜨끈하게 덥힌 크림치즈였다. 그리고 레나는 이 음식의 이름이 매우 명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에게 차마 츄러스의 열량을 물어볼 수 없다. 레나에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나가 잠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하나는 이미 츄러스 하나를 해치우고 다음 희생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레나는 무심코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신경 뉴런의 작용에 따른,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초 연산이 레나의 두뇌를 자극했다. 결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뇌는 거부했다. 이것은 불량식품이며, 이것을 섭취하면 앞으로 한 달간 샐러리만 먹어야 한다. 그러자 본능이 답했다. 건강해 지려면 식이요법은 집어치우고 유산소 운동을 해라. 그리고 레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고, 본능이 개가를 올렸다. 입술이, 코와 허파꽈리가, 혀의 돌기가, 식도가, 위장과 대장의 융털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확보하라.'
'남은 츄러스를 확보하라.'
곧 하나와 레나는 경쟁적으로 츄러스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하나는 토끼가 풀을 갉아먹 듯 빠르게 입을 움직였고 레나는 성큼성큼 베어 물어 거의 씹지도 않고 삼켰다. 용호상박. 무적의 용과 최강의 호랑이가 자웅을 겨루니 츄러스가 남아날 리 없었다. 츄러스가 전부 없어지는 데에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레나는 츄러스 하나의 열량이 천 이백 킬로 칼로리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곧 그녀는 시간 가속기의 도움없이 기지까지 뛰어가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레나는 하나가 초컬릿 쿠키를 위시한 잔당들을 소탕하는 동안 츄러스 하나를 더 시켜 먹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
"후아. 잘 먹었다."
하나가 배를 쓰다듬었다. 다른 한 팔로는 레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레나도 하나에게 붙들려 있지 않은 팔로 아랫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너무 먹었다. 후회된다. 하지만 후회도 하지 않는 인생이 재미있을 리 없다. 너무 거창한 곳까지 확대된 생각이 너무 어이없어서 레나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다음은 어디 갈까요?"
하나의 물음에 레나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나는 이미 오늘의 모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자타공인. 그녀는 해결사였다.
그리고 레나가 안내해 도착한 곳에서 하나는 거의 괴성을 내지를 뻔 했다.
'우와! 우와우와우와!'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머리통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날려보낸다는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이 자신을 게임센터에 대려다 줬다는 사실을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그냥 게임 센터가 아니다.
이곳은-
하나의 감정이 폭발했다.
"언니가 여길 어떻게 알았어요?! 언닌 영국인이고! 게이머도 아니잖아요!?"
레나가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이래뵈도 촉이 좀 있는 편이거든. 우리 자기가 좋아할 만한 게임 센터라면 아무리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겠더라고."
하나는 레나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헐 감동이야 언니 사랑해요!"
레나가 고르고 고른 장소는 부산 게이머들의 은밀한 장소였다.
통칭 성지.
굳이 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지만, 게임판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면 감히 발을 딛지도 못한다는 특별한 게임 센터. 하나더러 굳이 자신의 숙소 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이곳일 것이다. 그녀는 게이머의 정열과 투쟁심이 휘몰아치는 이곳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게임 센터안에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피끓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거의 귀기까지 느껴지는 광경에 레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하나도 게임 센터에 들어선 이후로는 안색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두리번 거리는 레나를 뒤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걸어 증강 현실 콘솔 앞에 섰다.
MEKAGE.
한국 굴지의 게임사에서 MEKA 부대를 소재로 제작한, 최대 6 대 6까지 가능한 다인수 대전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 매니악한 현실 재현도 덕분에 발매 초기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나, 이후 굴지의 프로게이머인 송하나의 편애와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재조명되었고, 지금은 그 자유로운 완성도가 차고 넘칠 정도로 재평가받았다.
곧 전설적인 프로게이머인 하나를 알아본 몇몇 게이머들이 흠칫 놀랐지만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가까이 오거나 아는 채 하기는 커녕 인사를 건내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하나의 인기를 잘 알고 있는 레나는 이 분위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가 일단 콘솔 하나를 골라 자리에 앉자 나머지 11개의 빈 자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꽉 채워졌다. 마치 그들은 행동을 통해 하나의 인기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묵묵히 증거하는 수도승 같았다.
게임 매니아들이 숫기가 없다는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너무 데면데면하다. 그에 반해 그들의 하나에 대한 시선은 꽤나 노골적이다. 아까부터 이곳의 게이머들은 사욕으로 질척이는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나는 곧 그것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과장된 감이 있지만, 레나는 이런 눈을 잘 알았다.
전장에서 늘 보는 눈이다.
살기.
기백.
투쟁심.
호승심.
이를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레나의 소박한 의문과 질려버린 것 같은 기색을 감지한 하나가 소곤소곤 설명했다.
"여기선 절 이기지 못하면 저에게 말을 걸지 못해요. 제가 그렇게 정했어요."
그러나 레나의 의문은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나의 의아한 표정을 읽어낸 하나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성지는 제가 키운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제 말이 곧 법이란 말씀."
"뭐야아?"
"제가 인기가 좀 많아요."
인기가 많다.
과연 그 말은 납득할 수 있다.
게이머 입장에서 하나는 동경의 대상이다. 희귀한 여성 게이머인데다가 게임 실력은 초일류. 온갖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실력으로 시끄러운 게이머들을 닥치게 만들고, 여세를 몰아 그런 룰을 만들었으리라. 나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대충 그런 일이라도 있었겠지.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수 많은 전장에 섰으면서도, 이제껏 무패.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상대팀을 어린 아이 손목 비틀 듯 유린하고 있었다. 너무도 리얼한 게임성. 그리고 하나는 실존하는 MEKA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은 필요없었다. 하나는 침묵을 지킨 채 팀원들이 두서없이 내뱉는 말을 독자적으로 분석하여, 팀원들을 효과적으로 보조함과 동시에 적을 섬멸하고 있었다. 함께 전장에 서있는 게이머들의 면면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실력에 대한 경이와 존경. 하나는 매일 4시간 이상 군용 MEKA를 운용해 실전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레벨이 틀려도 너무 틀렸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뒤에서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레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나도 조금 즐길 수 있는 편이 좋겠지.
레나는 하나의 상대편 진영으로 걸어갔다. 그 중 한명에게 다가가 무언의 압력. 기세에 눌린 게이머가 시뮬레이터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레나가 고글을 내려 쓰고 콘솔에 게임 코인을 넣는다.
의외의 전개에 반대편에서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이 게임 꽤 어려운데 괜찮겠어요?"
하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미묘.
우려.
흥분.
기대.
아무래도 좋았다. 레나는 대답하는 대신 팀원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토끼는 내가 잡아둘게. 그럼 이길 수 있겠어?"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레나에게 시선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레나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 게이머가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뻐끔이고 있는데, 레나의 정체를 결정짓는 아이템이 레나의 가방에서 출격, 팔을 타고 이동. 이윽고 흉부에 도달해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장착되고 있었다.
파란 플라즈마를 내뿜는 그것은 트레이서의 상징- 시간 가속기였다.
하나를 포함한 갤러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곧 비명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트트트트트레이서?"
"진짜야? 오버워치가 성지에 왔어?"
그러나 아무도 스마트폰을 꺼내거나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레나는 그들의 인내심에 조금 놀랐다. 이것도 하나가 만든 성지의 룰인 걸까.
"할 수 있어! 저 토끼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고!"
트레이서와 함께하는 팀원들의 사기가 성층권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오늘 꼭 하나를 꺾어야만 했다.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울분과 희망을 토해낼 때가 왔다.
"난 인사할 거야!"
"나도!"
"난 싸인 받을 거야!"
"악수! 악수를 요구한다!"
"풍선껌을 가보로 삼겠어!"
그것 참 소박해 돌아가시겠네! 레나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스틱을 잡았다.
게임 시작 30초 전.
레나가 조용히 선언했다.
"해결사가 왔어."
.
"푸풉"
하나는 완전히 그로기 상태가 된 일행을 부축해서 성지로부터 3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겨우 앉힌 참이었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방금 실패했다.
"꺄하하하하하하!!!!!!"
"이제 그만 웃어 자기야..."
다섯 번이나 계속된 대전 중 트레이서는 손도 발도 내밀지 못했다. 싸움꾼 토끼를 잡아두긴 커녕 그녀가 지휘하는 다섯 명의 팀원 중 누구 한 명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들은 위대하신 오버워치의 정예 요원을 거리낌없이 유린했고, 한 번씩 돌아가며 죽였다. 무서운 놈들이다.
그 무서운 놈들의 필두에 서있는 무서운 토끼가 겨우 웃음을 참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언니.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거예요? 조작법 좀 외워온 걸로 진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나가 두서없이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의 초점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으으으... 오버워치 중에서도 난 적응력과 동체 시력이... 반응... 속도가..."
"시간 가속기 이야긴 안해요?"
"컥..."
하나가 짖궂게 웃으며 레나의 말을 끊고 추가타를 날렸다. 나 이거 알아. 레나가 몽롱한 머리로 기억해냈다.
지난 번 게임 방송에서 봤어.
"비전투 상황 중 민간인 앞에서 시간 가속기를 조작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거 맞죠?"
공중 컴보야. 공중에 띄워놓고 죽을 때까지 패는 거지.
"자기야... 제발... 응?"
이 아이는 악마다. 게임 감각으로 사람을 손쉽게 파괴한다. 레나의 정신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레나의 한심한 얼굴을 본 하나의 표정도 느슨하게 허물어졌다. 이 언니, 연상 맞아? 뭔데 이렇게 귀여워?
"오구오구."
하나가 레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애기 이렇게 여려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그 참담한 패배감.
레나는 오버워치의 험난한 미션 중에도 이런 실패는 겪어본 일이 없었다.
최소한 시간 가속기가 있는 한, 그녀는 자신이 질 요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 가속기를 이용해 피탄 직전에 회피 기동을 섞어 넣으며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 오는 레나를 2인 1조로 구성된 하나의 팀원들이 침착하게 응격했다. 어쨌든 게임 속의 메카는 현실 속의 트레이서 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시간 가속기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굳건하게 버텨낸 적들은 무력해진 레나의 기체를 손쉽게 사냥했다.
그 방약무도한 전투력.
레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말도 안돼. 뭐야. 진짜 민간인을 군대로 키우고 있는 거야? 한국 정부의 의도가 정말 그거야?"
"그 병크 얘길 왜 해요? 아오."
레나는 쓴웃음을 짓는 하나를 올려다보며, 하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레나의 정신은 도저히 진지한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하나에게 어리광 부리더라도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레나는 하나의 품 안으로 더 깊숙히 파고 들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레나를 받아들였다.
포근하고 기분 좋다.
레나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한심해 보이겠지.
아무렴 어때.
하나의 체향을 듬뿍 느끼면서, 어느 새 레나는 하나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과거로 날아갔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은.
애틋하고 귀여운, 그리고 강인한- 신병 시절의 하나가 그녀의 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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