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6. 7. 6. 15:18
차라리 그 사건의 원흉이 제노바의 심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실은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제노바의 세포와는 몇 번이고 겨뤘고, 이제와서 질 만한 요소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클라우드의 본능은 그것이 지나친 낙관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준비해야 한다.

더 강해져야 한다

티파와- 계속 함께 하기 위해서.

여행에서 돌아온 클라우드는 바로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문제에 봉착했다. 클라우드는 연습을 해본 일이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법은 전부 아류. 클라우드의 검은 전부 실전에서만 습득한 것이다. 무예로써의 검은 배워본 일도, 닦아본 경험도 없다.

클라우드는 자신이 실은 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하지만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 일주일은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수십 시간을 연습에 몰두한 날도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드는 몸을 혹사시키는 방식이 자신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내에서 생성되는 마황이 끊임없이 체력을 활성화시키고 있었다. 처음으로 클라우드는 마황이 수련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대로 강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완전히 시간 낭비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한 클라우드는 수단을 가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클라우드는 마황로의 원리를 응용해서 한계까지 자신의 마황을 적출하고, 탈진 직전까지 수련에 매진했다. 적출한 마황은 신경독 치유를 위한 촉진제로써 바렛트에게 전달했다. 마침 공장 시운전 시기였다. 중독자가 다발할 시점이기에 클라우드의 마황은 치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바렛트도 괜한 걱정하게 만들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클라우드도 필사적이었다.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였다.

하지만 티파는 단 한 번의 대련으로 클라우드의 방식이 잘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지만 티파는 강했다. 창촐간에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역시 들켰다. 티파는 전부 알고 있었구나. 한심하다. 또 틀렸다. 난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건가. 어리석었다. 이렇게 약해진 상태에서 적이 습격하면 어떻게 할 셈이었나. 클라우드는 길을 잃었다. 혼란스러웠다.

티파는 그런 클라우드의 고뇌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클라우드는 생각이 너무 많아.

내 허가가 있을 때까지 검은 잡지 마.

그 이후로는 검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한달이 흘렀다. 티파의 의도대로 그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지냈던 것이다. 곧 마황도 전부 회복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클라우드는 전혀 불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루퍼스의 의뢰를 받을 때에도 전혀 초조하지 않았다. 티파의 말처럼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일까. 클라우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티파의 덕택이다.

티파의 말대로 하면, 문제없다.

나는 이 얼마나 행운아인가.

지금은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티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아니다.

클라우드가 돌연 펜닐을 멈추었다.

클라우드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티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클라우드.. 무슨 일 있어?"

"3분."

"응?"

"3분 정도.. 늦어도 큰 문제는 없지 싶어서."

"응?"

티파는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말보다 행동을 보이는데 더 익숙해졌다.

그러나 클라우드가 키스를 마칠 때 까지는 예상보다 7분이나 더 걸렸다.

.

목적지에 도착했다.

때를 같이 해서 마황의 흔들림을 감지. 곧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감지되는 인원은 두 명.

상대는 고위험군 몬스터. 다수.

클라우드가 펜닐의 속력을 올렸다. 티파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정말. 그러게 3분만 했으면 괜찮았잖아."

"할 말이 없군. ..유피에게는 비밀이다."

"당연하지. ..아앗! 맞아! 유피!"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냐. 유피를 반드시 안전하게 확보하는 거야."

"?"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하지만 이를 되물을 시간은 없었다. 육안으로 유피와 조사단으로 추정되는 무리를 확인한 것이다.

유피는 건재.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느긋한 움직임으로 적의 급소를 차례로 공격하고 있었다. 적의 시야와 사각을 계산해서 전장 한 복판에서 모습을 숨긴다. 그야말로 닌자 마스터의 기술. 베히모스조차 부지불식간에 유피에게 경동맥을 따이고 일격에 격침당했다. 그러므로 난전 속에서 유피의 안전을 우려하는 것은 불가능. 아군의 위험이 그녀의 위험일 뿐이다. 그녀가 무리하기 시작할 테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조사단 쪽이다.

총 3인. 아니, 그 중 둘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마도 루퍼스 컴퍼니의 자동 인형 병기. 크기는 약 3 미터. 두터운 장갑판으로 둘러 쌓여 있는 백병전 지원기로 보였다. 거대한 배틀 액스를 내려치는 힘은 6개월전에 티파와 함께 쓰러뜨린 철거인에 필적. 공간을 선점하는 기민함이나 레드 드래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는 장갑판은 그 이상. 그런 괴물이 2기.

이를 지휘하는 것은 경검사. 체형을 보건데 여성. 이렇다할 방어구 하나 없는 가벼운 복장에서 몸놀림에 대한 자신감이 읽혔다. 과연 움직임이 빠르고 부족함이 없어 움직임이 재빠른 몬스터의 공격도 그녀는 무리 없이 회피해냈다. 무기는 특징이 없는 롱소드였지만 공격력에도 불안함은 없었다. 주로 인형 병기의 공격으로 자세가 흐트러진 몬스터의 급소를 날카로운 검기로 일격에 꿰뚫는 연계를 통해 적의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매끄러운 연계를 고려할 때, 인형 병기는 경검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보 전달 매체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바이저일까.

두 사람은 더 할 나위 없이 매끄럽게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은 오히려 밸런스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클라우드는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 펜닐을 정차시켰다. 수신호로 티파와 의견을 교환. 자세를 낮추고 신속하게 전장으로 이동한다.

목표는 전방의 드래곤의 머리. 티파가 소리 없이 클라우드의 넒은 검면을 딛고 날아올랐다. 드래곤의 머리를 발 뒷꿈치로 강타. 1톤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드래곤의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용에게 다가간 클라우드가 목에 일섬. 한순간에 머리를 잃어버린 드래곤은 그대로 절명. 아군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기습에 몬스터들은 대혼란. 그리고 유피가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티파! 어서와!"

"유피! 얼른 정리하자!"

난 보이지도 않는 거냐. 클라우드는 쓴 웃음을 짓고 언제나처럼 합체검에서 2번 검 오거닉스를 분리. 방어력이 높아 보이는 적을 위주로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멤버가 모였다. 고 위험군 몬스터 집단이라 해서 두려워할 요소가 없었다.

전투는 곧 끝났다.

피해는 없었다.

.

"유피! 동료의 사생활을 팔다니!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으읏! 벌써 들켰나! 루퍼스 입 가벼워!"

"유피이이이이이이!"

"으앗! 오지마!"

"일단 한 대 맞자!"

"말도 안돼! 세상에서 삭제된다고!"

그렇군. 범인은 유피였나. 티파가 한 발 먼저 떠올린 것이겠지. 아무래도 유피는 피로연 때 구석에 티파를 끌고 가서 이것 저것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술에 취한 티파가 전부 불어버렸겠지. 적은 항상 내부와 알콜에 있는 법이다.

결국 티파에게 붙잡힌 유피가 필사적으로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저건 뿌리치지 못하지. 클라우드는 유피의 무사함을 빌며 경검사- 루퍼스의 에이젼트에게 다가갔다.

"조사단의 리더, 인가."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는."

"클라우드 스트라이프. 이제 됐지? 그만 임무로 돌아가게 해줘."

노골적인 적의. 루퍼스가 말했던 것이 이것인가. 클라우드는 모르는 척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클라우드 L. 스트라이프다. 의뢰주의 이름 정도는 똑바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군. 당신은."

그녀가 내뱉듯이 답했다.

"칸셀."

"칸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우리 혹시 구면이던가?"

"핫. 반편이 주제에 나한테 작업거는거야?"

"거기까지만 하지. 티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말해두는데 아내가 들으면 당신 죽어."

그리고 나도 죽는다. 이건 위협이 아니다.

"흥."

마침 티파가 유피와 딱 달라붙어 팔짱을 낀 채 돌아왔다. 언제 화해한 거지? 분위기를 봐서는 방금 칸셀의 비아냥은 못 들은 것 같다. 못 들었기를 바란다. 칸셀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금 위험한데. 지금 같은 발언이 또 나온다면 끝장이다.

클라우드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상태로 화제를 전환시켰다. 초인적인 포커 페이스였다. 이 어빌리티로 클라우드는 몇 번이나 사선을 넘었다.

"이야기를 되돌리지. 의뢰는 이상 상태가 일어난 장소를 특정짓는 것 뿐이다. 어째서 귀환하지 않았지?"

"어째서 당신에게 그런 걸 설명해야 하지?"

"루퍼스 신라가 이틀 전에 헬퍼들을 보냈을 텐데. 우린 그 두 번째다. 협조를 부탁하지."

"그 냉혈 도련님이 그렇게 까지 심장이 약할 줄은 몰랐군."

동감이다. 클라우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칸셀이 해명을 시작했다.

"통신이 끊길 정도로 강력한 마황을 관측했다. 명백한 비상 사태였지. 원인도 규명하지 못한 채 귀환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납득하지 못했다.

"72시간 동안이나 연락을 두절시키고 말인가?"

클라우드가 상황을 정리했다.

"당신, 솔져지? 그 실력, 클래스 퍼스트라고 봤다."

칸셀이 약간 놀랐지만 이내 비아냥 거렸다.

"흥. 눈이 단추 구멍은 아니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72시간의 공백은 분명 탈주에 해당한다. 탈주는 퍼스트 클래스에 있어서 중죄 중의 중죄. 취급하는 정보의 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서 처분 명령조차 하달될 수 있어. 어째서 그런 위험을 감수한 거지?"

칸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핫! 정말이지 반편이 주제에 말 한 번 잘하네. 누가 들으면 진짜 솔져 인 줄 알겠어."

그 말에 티파가 발끈했다.

"뭐야? 당신,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웃기지 마. 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무사한 것은 확인했지? 미션 컴플리트야. 돌아가."

유피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칸셀! 당신 왜 그래? 그런 거 당신 답지 않아! 지금 이 둘이 필요하다는 거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칸셀이 코웃음쳤다.

"흥. 틀렸어. 이 녀석 도움 만큼은 필요없어."

그녀가 검을 들어 클라우드의 미간을 겨냥했다. 남은 거리는 10 센티미터 남짓. 그러나 클라우드는 평온했다. 그녀의 검은 이미 봤다. 물론 초일류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 줄의 찰과상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한 명.

그 사람이 칸셀의 검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이 이상은 못 참아."

티파가 웃었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칸셀이 약간 움찔했지만 곧 태세를 정비했다. 그리고 힘껏 지뢰를 밟았다.

"제 3자는 빠져. 이건 나와 클라우드가 풀 문제야."

티파의 고운 눈썹이 약간 흔들렸다. 클라우드는 새파랗게 질렸다.

"당신과, 클라우드?"

얼음장같은 날카로운 투기.

"제 3자?"

공기에 찔려 죽을 것 같은 살기.

칸셀의 뇌가, 심장이, 온 몸의 세포가 위험을 경고했다.

"당신, 죽을래? 어디서 수작질이야?"

티파가 손가락에 힘을 준다.

꾸드드드드드득.

티파의 가죽 장갑이 마찰음을 내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이 여자, 솔져용으로 제련된 검을? 손가락으로? 농담이지? 그 상상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낭패를 느낀 칸셀이 검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도.

티파가 힐끔 검을 보고 다시 칸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위대하신, 솔져 클래스 퍼스트?"

칸셀은 이미 완전히 압도되었다.

"내가 언젠가 신라 빌딩에서 어떤 빌어먹을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관을 짰던 적이 있었거든. 그 때 당신같은 걸 몇 명 박살냈을 것 같아?"

클라우드는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아니, 끼어들 수 없었다. 도발은 네가 했으니, 수습도 네가 해라, 칸셀.

"클라우드. 저 여자랑 눈 빛 교환하면 혼날 줄 알아."

클라우드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아예 뒤로 돌려버렸다. 이제 칸셀의 검끝은 클라우드의 뒤통수를 향하게 되었다. 물론 위험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

"아, 응. 나 뒤로 돌았다고."

"좋아."

티파가 다시 시선을 되돌렸다.

"칸셀? 저 인형 병기라도 움직여 보지? 뭐, 회사 기물 파손 시말서 같은 게 있다면 내가 써줄게. 어짜피 당신은 앞으로 식사를 옆구리로 하게 될테니까."

티파가 손에 더욱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감히, 누구에게 칼을 겨누는 거야?"

검이 깨진다. 이제 정말로 깨진다.

그것 만큼은 절대로 막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까지다.

"미안. 무례를 사죄하겠어."

칸셀이 검을 놓고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그 검은 굉장히 소중한 거야. 전부 설명해줄게. 따로 궁금한 것까지 전부. 그러니까 제발."

검을 부수지 말아줘.

칸셀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나 티파는 투기를 풀지 않았다. 싸늘한 눈이 투항한 병사를 내려다 본다. 냉정하게 식은 머리가, 방금 것이 클라우드를 향한 단순 무력 도발이었다는 것을 간파해 냈다. 대충 등을 맡길 상대의 실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녀의 모든 언동이 진심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이 칸셀을 용서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런 티파를, 클라우드가 조심스럽게 제지했다.

"티파. 그 검을 돌려줘. 그건."

그는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친구의- 잭스의 유품이야."

잭스.

잭스 페어.

그 이름이 가진 무거움에, 드디어 티파가 검을 쥔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살았다.

잭스의 유품이 안전하게 지켜졌다

그러나 평화는 곧 깨졌다. 우연히도 클라우드와 칸셀이 동시에 한숨을 내쉼으로써 티파가 발을 굴러 국소 지진을 초래하게 만든 것이다. "아, 그래, 환상의 팀웍 나셨어, 그치?" 그 파급력은 마치 자연재해. 그야말로 타이탄의 분노.

공포에 질린 칸셀이 머리를 다시 조아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일행은 함께 클라우드의 마황 감지 능력을 나침반 삼아 마황의 핵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정을 되찾은 클라우드는 유피에게 빈센트의 행방을 물었다. 그가 말한 '혼돈'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빈센트는 그렇게 일방향 통신을 보내고 나서 그대로 사라졌어. 그 혼돈인가 뭔가를 감지한 게 아닐까? 나도 몰라."

유피는 약간 토라진 것 같았다. 클라우드의 민감한 청각은 유피의 중얼거림도 포착했다. '이렇게 귀여운 일행을 내버려 두는 게 말이 돼?' 그리고 티파에게는 유피를 이해하는 것에 그런 청각은 필요없었다.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유피의 등을 토닥였다. 유피는 앙탈을 부리면서도 "아 진짜 나 이제 애기 아니거든? 스무살 됐거든?" 티파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언제나의 티파로 돌아왔다. 정말 다행이다. 클라우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클라우드가 칸셀- 잭스와 수차례 임무를 수행하곤 했던 솔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잭스의 두 번째 검은 손잡이만 남게 되었으리라. 그랬다면 분위기는 결코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 칸셀은 클라우드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사회성이 그렇게 유도했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이 기묘한 일행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는 거대했다. 그녀는 심문 과정에서 클라우드에게 관심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까지 모조리 토해내야 했다. 그래서 '키는 6피트 이상, 근육질 몸매에 흑발인 남성'이 취향인 칸셀은, 그 진정성있는 고백을 통해 일행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티파는 칸셀이 잭스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실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심지어 그녀는 잭스가 남긴 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존심까지 내던졌으니까.

칸셀이 연모하던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고 죽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사소한 질투심을 견디지 못하고 칸셀에게 과도한 폭언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티파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칸셀은 그런 그녀의 침울한 표정을 보면서 티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걷어냈다. 칸셀은 모든 것을 알아채고도 섯불리 자신의 과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티파가 고마웠다.

실은 방금의 상황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난 것은 온전히 티파의 공이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가 칸셀을 지켜낸 것과 마찬가지다. 그대로 클라우드와 일전을 벌였다면 그냥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그녀가 한 일은 칸셀의 검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이 전부였다. 티파는 분노를 눌러 삼키며 끝내 칸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선한 사람에게, 오히려 내가 개인적인 욕심- 잭스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시험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너무 심한 짓을 해버린 것이 아닐까.

칸셀은 티파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옛날 이야기야. 미즈 록하트. 난 다 잊었어. 게다가 이렇다할 일도 없었으니까."

칸셀이 웃으며 티파를 다독였다.

"그 자식, 내가 몰래 휴가까지 맞춰서 해변에 찾아갔는데 그냥 스쿼트만 하더란 말이지. 진짜, 제 정신이야? 난 수영복까지 챙겨 입었는데."

티파는 날카롭게 고개를 돌려 클라우드의 신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칸셀은 승기를 잡았다. 거의 다 됐다.

"게다가 임무 핑계를 대고 그 자식 부모님을 찾아가서 점수도 땄는데 말야. 결국 아들의 신부가 되어 달라는 이야기까지 들어버렸는데 말야! 좀 머리가 모자라지만 본성은 선하다면서. 그런데도 그 자식은 부모님 말상대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나 하고 앉았고. 바보 아냐?"

"쿽"

티파가 매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성공했다. 이런 과거 이야기가 이제와서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그래. 괴로운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흠?"

하지만 칸셀은 곧 일행이 모두 멈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라우드와 유피는 몇 걸음 앞선 곳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점검하고 있는 것일까? 곧이어 칸셀은 티파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기분은 전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고운 아미를 잔뜩 찌뿌리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칸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미즈 록하트?"

주제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파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칸셀."

"응?"

"이리와 칸셀."

티파가 손을 뻗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칸셀은 티파의 목소리가 너무 감미로워서, 티파의 손를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칸셀은 순순히 그녀의 품에 안겼다.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칸셀은 티파의 포근함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칸셀은 갑자기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난 지금 울고 있구나.

"미즈... 난..."

"쉬이이. 티파면 돼."

"티파... 나... 그 자식이... 보고 싶어..."

"응."

"잭... 왜 죽었어... 내가... 얼마나...!"

그 동안 그에 대한 감정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만이었을 뿐이었다. 칸셀은 그렇게 한참 동안 티파의 품안에서 오열했다.

티파는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안아주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7. 1. 16:48
쳉은 가게 내부의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 눈살을 찌뿌렸다.

"이런 날까지 장사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쳉은 느긋하게 등 뒤를 따르고 있는 고용주, 루퍼스 신라의 눈치를 살폈다. 정확하게는 기척이다.

그랬다.

턱스의 주임은 너무도 유능해서 기척만으로 사장님의 기분을 유추해낼 줄 알았다. 그야말로 최측근의 귀감이다.

쳉이 살피기에 루퍼스의 기분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쳉은 완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한 숨을 내쉬었다. 실로 묘기였다.

하지만 루퍼스 신라 또한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왜 그러나?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군."

"..아닙니다. 사장님."

쳉은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쳉이 그의 기분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루퍼스는 턱스의 모든 인원의 기분을 간파해냈다. 레노의 속내도, 루드의 표정도, 이리나의 연심도. 그리고 물론, 최측근의 심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 둘을 따라 레노, 루드, 이리나의 순서로 턱스의 행동파 삼인방이 줄줄이 세븐스 헤븐에 들어섰다. 깎아 놓은 것 같은 미남 두 명에 이어 새까만 정장을 입은 붉은 머리, 대머리, 그리고 단정한 여성이라는 압도적으로 이질적인 파티가 들어왔음에도, 손님들은 그들에게 제대로 된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긴, 이 가게 손님들이라면 진귀한 것은 이미 볼 만큼 봤을 거야.'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이리나가 상념을 뒤로 하고 쳉을 앞서 나가며 빈 자리를 찾아냈다. 루퍼스 신라와 턱스 전원, 게다가 세븐스 헤븐의 주인들이 앉을 만한 넓은 자리는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장님. 이 쪽으로."

루퍼스 일행이 우르르 움직여 넓다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우드가 홀연히 나타났다. 손에 들려 있는 쟁반에는 인원수 만큼의 우유.

우유라니.

쳉이 혀를 찼다.

"마치 내가 유치원에라도 온 것 같군."

그러나 클라우드는 쳉의 비아냥 차분하게 받았다. 오늘 유난히 여유와 관록이 돋보였다. 감히 턱스를 상대로 기선을 잡을 셈일까.

"나로써는 그래도 손님 대접에 심혈을 기울인 건데 말이야."

쳉의 눈썹이 흔들렸다.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것이다.

턱스 멤버 전원이 그들의 리더까지 대동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자리에 이런 취급이라니. 쳉의 심기가 불편해 진 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지?

진심으로 불쾌해 보이는 쳉을 보면서 레노는 불길한 위화감을 읽어냈다.

클라우드가 우유를 내온 이유를 어째서 주임 정도 되는 정보원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냐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걸 맛 봤다면.

그래. 그 날 분명히 이리나에게 주임과 사장님이 충분히 맛 보실 수 있을 만큼의-

아.

레노가 무심코 이리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레노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물건의 전달은 직접 수행하는 것이 철칙.

임무에 대해서는 동료조차 믿지 않는 것이 턱스의 율법.

레노는 실수를 통감했다. 루드는 선글라스 너머의 눈 빛으로 레노를 태워버릴 것 같은 기세로 노려봤다. 레노의 실수는 곧 루드의 실수다.

삼인방은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그들의 주임과 클라우드를 번갈아 바라봤다. 주로 클라우드의 눈치를 살피고 만 것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삼인방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필요없다면 어쩔 수 없지."

레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라고! 서두르지 말고! 주임! 가끔은 괜찮치 않슴까! 그, 뭐냐, 우유는 건강에도 좋고!"

이리나가 눈치를 보며 레노를 거들었다.

"선배 말이 맞아요! 취해서 할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죠? 루드 선배!"

루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팔짱을 끼고 있는 손등과 밋밋한 머리에 돋아있는 험상궂은 힘줄이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변함없이 즐겁게 사는구나. 당신들은."

클라우드가 한 숨을 쉬며 우유잔을 돌렸다. 쳉은 동료들의 반응에 허를 찔렸는지 굳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왠지 억울함을 느낀 쳉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티파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기다렸지! 우유와 함께 먹으면 더욱 맛있답니다!"

턱스의 행동파 삼인방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

"그런가... 이게 그 유명한 '구름과자' 로군."

루퍼스가 만면에 미소를 띄고 '구름과자'를 음미했다.

"과연. 이 세상의 맛이 아닌 것 같군. 이리나가 빼돌릴 만한 맛이야."

".......죄송합니다......."

이리나의 말은 거의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클라우드가 비웃음을 참지 못하자 "유치원이라니, 어느 쪽이 말이냐." 삼인방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고 티파는 팔꿈치로 클라우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루퍼스가 삼인방에게 힐끔 시선을 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건 케익을 만들고 남은 장식이나 초콜릿을 모아 조합한 거로군. 그래서 크기도 구성물도 모두 미묘하게 달라. 찌꺼기로 만든 게 이런 맛이라니, 자네가 가진 단 맛에 대한 이해도에 고개가 숙여질 정도야."

공치사. 그것은 반격의 봉화였다.

"과연, 프로포즈에 사용하겠답시고 포션을 스위츠로 바꾼 남자다. 도저히 인간이 할 만한 일이 아니야."

커헉.

클라우드의 뇌가 비명을 내질렀다.

"네 놈, 어떻게 그걸-"

"심지어 반지를 전달할 때 그 포션을 사용한 방법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어. 누구나 상상이야 할 수 있겠지만 실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이번에는 티파가 얼굴을 물들일 차례였다.

"그만, 그만해!"

루퍼스는 신경쓰지 않고 공격을 이었다.

"하지만 유동성 젤리에 반지를 숨기다니 어리석어. 만약 그녀가 포션과 함께 반지를 삼켰다면 어쩔 셈이었나."

"꺄악!"

이리나였다. 이 정도 쯤 되니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겠지. 레노는 눈 빛으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이리나를 죽여 버렸다. 잃어버린 턱스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 저 정도의 고급 정보를 쾌척하시는 사장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거냐. 목숨을 잃은 이리나는 침울하게 다시 구름과자를 섭취했다. 그리고 되살아났다.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루퍼스의 공격을 경청했다. 티파에게 아련한 연심을 품고 있던 루드의 낯 빛이 썩어들어가는 것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위험하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평생 받아본 경험이 없었다. 도저히 반격할 수 없다.

"루퍼스... 너... 잘도... 하지만..."

루퍼스는 클라우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표정을 분석했다.

"음? 호오. 그런가. 혀를 사용해서 반지의 움직임을 컨트롤한 것이로군. 과연. 하지만 어떤 식으로 연습을 했는지 궁금해지는데. 자네, 분명히 그 쪽으로는 반편일텐데 말일세."

무섭다. 나는 이 남자가 진심으로 두렵다. 난 그저, 한 마디만 돌려줬을 뿐이다.

"하지만 그 리스키한 계획이 자네 목숨을 살렸지. 대공동의 만년설처럼 정체되어 있는 관계도 한 순간에 녹여 버렸어. 단 맛에 대한 지식은 덤으로 얻었고. 이런 사업을 시작할 정도니까 말이야. 뭐, 푼돈이네만."

클라우드는 완전히 격침당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잃어버릴 것도 없다. 나 혼자 죽지는 않으리라. 저 놈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아, 잊을 뻔 했군. 그러고보니 코스타 델 솔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네만."

클라우드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 내가 잘 못 했다. 다시는 턱스를 얕보지 않겠다. 약속하지."

그 한심한 모습에 무심코 티파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루퍼스는 클라우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유잔을 기울였다. 어째서인지 쳉의 얼굴이 의기양양해졌을 뿐이다.

그렇게 클라우드는 홈 그라운드에서,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상태로- 겨우 의뢰에 대한 턱스의 보고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보고에 앞서 쳉이 의뢰 내용을 정리했다.

"클라우드 L. 스트라이프가 당사 루퍼스 컴퍼니에 의뢰한 것은 마황의 이상 발생과 그에 따른 고위험군 몬스터가 출현한 장소, 혹은 그 여파로 전멸한 집락이나 도시가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었다. 범위는 미드갈 에리어를 중심으로 대륙 전체. 제노바나 그에 준하는 레벨의 불특정 생명체의 신체 일부가 핵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있음. 이상, 틀린 점은 없나."

3개월 전 클라우드는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후 바로 리브와 접촉했다. 그리고 이름없는 마을에서 일어난 참상과 클라우드가 발견한 것에 대해 빠짐없이 의견을 공유했다.

장고 끝에 리브는 스스로 조사를 맡기에 역부족임을 인정하고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추천한 업체가 신생 루퍼스 컴퍼니였다. 클라우드는 귀가 더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리브는 단호했다.

"클라우드. 루퍼스 신라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예전과는 다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리브. 난 배가 아무리 고파도 몰볼을 구어먹지는 않아."

리브는 조용하게 클라우드의 약점을 지적했다.

"클라우드. 당신의 성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긴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맡을 능력이 있는 자는 루퍼스 신라 이외에는 없습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클라우드는 아무 말도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3개월 후, 현재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클라우드는 리브의 통찰력에 순순히 감사할 수는 없었다. 쳉의 확인 요청에 대답하는 클라우드의 목소리에는 힘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틀린 점은 없다. 계속해줘."

쳉이 아타셰 케이스에서 봉투를 꺼내어 클라우드에게 건냈다. 클라우드가 지체없이 밀봉을 뜯어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봉투 안에는 X 표시가 되어 있는 지도.

폐허가 되어버린 거주구의 사진.

쳉이 무정하게 선언했다.

"있었다."

사진을 검토하는 클라우드의 눈 빛이 험악해졌다.

"아직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근처에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버려진 지 오래된 곳이다. 구 신라 컴퍼니의 데이터 베이스에 따르면 50년 이상."

클라우드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렇군. 마황 농도는?"

"계측 불가. 가볍게 봐도 대공동 수준이었다. 너무나도 짙은 마황 때문에 핵의 위치 또한 측정할 수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다. 반 년 전에 클라우드가 티파와 함께 제압한 곳도 충분히 끔찍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런 장소가 이제야 발견됐다고?"

루퍼스가 쳉의 보고를 이어받았다.

"그럴리가 없지. 이것은 명백하게 이상 사태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나 개인적으로는 미증유의 재난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네."

소금 덩어리를 삼키는 것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향후의 방침을 서둘러 수립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도 부족했다.

클라우드가 루퍼스에게 제안했다.

"조사단을 직접 만나보고 싶군."

그러나 루퍼스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하네."

루퍼스가 가볍게 통보했다. 차량이 막혀 약속 시간을 지키기 어렵겠다는 정도의 가벼운 말투였다.

"조사단과의 연락은 끊겼다네. 72시간 전이군."

72시간 전이라면, 레노가 마스터 스위츠에 왔을 즘에는 이미 그 조사단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티파가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큰일이잖아! 여기서 이럴 시간이 있는 거야?"

의외의 사태에 클라우드도 눈을 부릅 떴다. 하지만 루퍼스의 태도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클라우드는 냉정하게 상황을 평가했다.

루퍼스 신라는 냉혈 인간이지만 부하의 신뢰는 두텁다. 여기서 그를 보좌하고 있는 턱스를 보면 그 사실은 명확하다. 턱스는 루퍼스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성흔 증후군에 휘말려 거동조차 하지 못할 때에도 그의 곁을 지켰다. 그가 언젠가 다시 일어설 것을 믿었다. 이 신뢰는 거저 얻어낸 것일 수 없었다.

결론을 내렸다.

루퍼스는 부하들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조사단은 아마도 건재. 아마도 루퍼스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으리라. 지금 루퍼스가 아무런 우려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늘 회합의 목적은 보고가 아니었군."

클라우드가 루퍼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루퍼스 컴퍼니의 의뢰. 그렇게 봐도 좋을까."

루퍼스가 웃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자네 말대로다."

루퍼스는 여유를 잃지 않고 말했다.

"당사의 조사단에 예상치 못한 피해가 있었지. 그에 대한 필요한 조치는 이미 마쳤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미 여기 부터는 우리 루퍼스 컴퍼니의 일이다. 다만 자네들이 우리와 함께 사건 해결에 함께할 의지가 있는 지, 그걸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클라우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요한 조치라고?"

"그래. 48시간 전에, 당사는 턱스 오브 턱스를 현장에 파견했다네. 그자의 유능함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테지."

루퍼스의 이 발언에는 과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빈센트를? 잘도 연락이 닿았군."

"닌자 마스터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었지. 솔직히 말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네."

닌자 마스터. 현대에 그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한 사람 밖에 없다.

"유피까지? 설마 유피도 현장에 있다는 건가?"

"당시 우리가 취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조치였다고 자부하네."

경위는 둘 째 치고, 그 둘의 전투력은 가히 클라우드와 티파의 콤비와도 비견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기에, 사건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질 뿐이었다.

"빈센트와 유피가 현장에 있다. 하지만 그러고도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바로 그렇다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당사가 파견한 조사단 또한 당사 최대의 전력일세. 그 정도의 멤버가 모였는데도 아직까지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어. 우리가 턱스 오브 턱스로부터 받은 것은 일방통행의 메시지 뿐이었지. '조사단 확보'. '위험 상존'. '서둘러'. 그리고."

"그리고?"

"'혼돈'."

"혼돈."

다름아닌 빈센트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빈센트가 두려워하는 혼돈이란 딱 한가지 뿐이니까.

클라우드는 티파를 돌아봤다. 잠깐의 시선 교환으로 의견은 일치. 그리고 클라우드가 결연한 얼굴로 통보.

"그 곳에 빈센트와 유피가 있다면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애초에 각오가 없었다면 의뢰도 하지 않았을 거다."

루퍼스가 싱긋 웃었다.

"자네라면 반드시 그렇게 말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네. 출발은 언제 할 예정인가?"

"당장."

"준비할 시간은?"

"필요없어."

"좋아. 하지만 우리들은 준비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네. 자네만큼 발이 가볍지 않아서 말야. 이해해주게. 우리로써도 만전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거든."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리에게 온 것일테지. 먼저 출발하겠다."

"고맙네. 이 빚은 언제라도 꼭 갚도록 하지. 선수금이 필요한가?"

"돈 때문에 하고 있는 일이 아니야. 따로 당부하고 싶은 사항은 있나."

그 말에 루퍼스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루퍼스 신라 답지 않은 일이었다.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군. 가겠다."

클라우드가 일어섰다. 티파는 이미 손님들에게 폐점을 공지하고,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조심하도록 하게, 클라우드."

루퍼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조사단의 리더는, 자네의 도움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그것은 불길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루퍼스가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클라우드 또한 그런 루퍼스에게 그 이상의 설명을 기대하지 않았다. 어짜피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우드는 즉시 펜닐을 준비했고, 그 사이 티파는 아이템 백에 유사 엑스 포션을 채워넣었다.

이윽고 펜닐이 굉음을 흘리며 출발했다.

비공정이 무색한 속도였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6. 29. 19:45
어느새 마스터 스위츠는 그대로 클라우드의 별명 그 자체가 되었다. 요 며칠 동안에는 친애를 담아 그냥 마스터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아졌다.

"마스터 스위츠. 우리 왔어요."

"마스터."

"마스터! 여기 주문이요!"

설탕을 설탕으로 씻는 목가적인 전쟁의 나날들. 클라우드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 지적해 주지 않는다면 그게 고작 한 달 전이라는 것을, 클라우드는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티파가 나더러 생각이 너무 많다고 했던가. 성공했다. 클라우드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케익을 만들어내는 기계나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의 모든 주문에 대응하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니 가게의 문이 벌컥 열렸다. 클라우드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 가게를 개장한 뒤로 저렇게 무례하게 들어오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진짜냐? 진짜 여기 클라우드가 있다! 우리 저 녀석이 만든 케익 먹는 거냐고!"

"이미 알고 있었잖나."

턱스 행동 대장. 레노와 루드. 지긋지긋한 얼굴들이다. 그래도 이런 곳에 올 때는 제발 그 시커먼 양복은 벗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빨리 좀 돌아갔으면 한다.

둘의 얼굴을 확인한 클라우드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뿌렸다. 1년 반 전에는 도움을 받은 적도 있어서, 클라우드는 저 이인조를 생각만큼 야멸차게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여긴 왠 일이야?"

웅성웅성.

"마스터가 얼굴 찡그린 거 처음 봐."

"그러게. 접객 멘트도 하지 않고."

"누구지? 그런데 왠지 불량해 보이지 않아?"

레노가 웅성거리는 손님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클라우드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날 세우지 말라고! 슬슬 우리 친구 아니냐."

클라우드가 코웃음을 쳤다.

"친구 좋아하네. 방해하지 말고 가라. 정신 사납다."

"또, 또 그런다 또... 우리 지난 번엔 사지를 함께 넘어서지 않았냐고?"

사지를 함께 넘었네 마네 하면 손님들이 놀란다고. 분위기 좀 읽고 그런 살벌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둬 줬으면 한다.

"그런데 우리 뒤에 사람들 눈 빛이 왜 이러냐? 이거 살기냐?"

레노가 가게 출입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불량배 놈들에겐 대기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새치기해서 들어왔다는 자각도 없는 것 같았다.

클라우드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해 주십시오, 손님. 대기 예상 시간은 네 시간입니다."

"뭐라고!?"

가게의 새하얀 분위기에 눌려 침묵으로 일관하던 루드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하라고.

"진짜다. 영업에 방해되는 거 알았으면 좀 가라."

클라우드가 프라이팬에서 굽고 있던 조그맣고 동그란 과자를 두 개 꺼냈다.

"이거 줄 테니까."

클라우드가 과자를 휙휙 던졌다. 레노와 루드가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뭐냐고 이게?"

웅성웅성. 그 답은 앉아있던 손님들이 크게 동요하며 내려주었다.

"설마...!"

"저건!?"

"구름과자? 구름과자라고?!"

"처, 처음 봐... 분명히 이름이 덴젤이나 마린이 아니라면 받아갈 수 없다는 그... 환상의..."

"마스터! 새치기나 하는 놈들에게 왜 그런 걸 줘요! 나한테 팔아요!"

클라우드가 난처하다는 듯 손님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조잡해서 손님께 상품으로 내놓을 만한 게 못 됩니다."

못보던 사이 클라우드는 완전히 파티셰가 되어 있었다. 레노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구름 과자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식감과 맛의 폭풍. 레노는 꾸밈없는 남자였다.

"으어! 뭐냐고 이거! 사기치는 거 아니냐고?"

어째 언젠가 들어봤던 것 같은 평을 내리는 레노. 역시 첫 날 만났던 그 녀석은 턱스와 같은 레벨이었음에 틀림없었다. 클라우드가 한 숨 쉬며 다시 한 번 꺼지라고 말하려 하는데, 레노가 참지 못하고 거침없이 외쳤다.

"이걸 니가 만들었냐? 이렇게 맛있는 건 난생 처음 먹아봤다! 좋은 말 할 때 프라이팬에 있는 거 전부 내놓으라고!"

웅성웅성웅성.

"마스터 스위츠 앞에서 무슨 판에 박힌 소릴!"

"지가 무슨 은행강도야? 천박하긴!"

"마스터, 절대 저런 불한당에게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웅성웅성웅성.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눈을 충혈시키며 레노와 클라우드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나 손님들은 클라우드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클라우드는 완전히 방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약간 홍조를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손님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그랬다. 이것은 클라우드가 가게를 열고 나서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던,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였다. 다들 황송해서 감히 내놓을 수 없었던 평가이기도 했다. 마스터 스위츠의 음식에 어찌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서슬 퍼런 레노의 박력에 밀려 클라우드가 주섬주섬 봉투에 구름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설마 레노 따위에게 기세에서 밀리다니. 클라우드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전부!"

"어? 어어..."

다른 손님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 평정을 찾고 눈을 빛냈다. 마스터 스위츠가 칭찬에 약하다는 귀중한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스터는 당황한 얼굴은 그 이상으로 진귀한 수확이었다. 이 정보, 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놈들과는 절대로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클라우드는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순순히 과자 봉투를 레노에게 넘겼다. 뒤 늦게 구름 과자를 삼킨 루드는 그 맛에 경도된 나머지 구름 과자가 담긴 봉투를 통째로 씹어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레노가 희열에 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고맙다 친구! 오늘은 이만 갈테니까 장사 잘하라고!"

"나 참. 진짜 왜 온거야."

레노가 제 정신으로 잠깐 돌아왔다. 그리고 아차 하는 표정으로 클라우드에게 다가왔다.

"아 참 참. 잊어버릴뻔 했다. 의뢰했던 일로 주임이 곧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고. 전화는 대체 왜 안받는 거냐? 아니, 됐다. 이제 충분히 알 것 같다고."

레노가 클라우드에게 귓말로 속삭였다. 과연 손님들과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뒷 세계의 이야기다. 갑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레노를 클라우드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클라우드는 구름 과자를 통해 자신이 레노에게 VIP가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주 금요일 오후 6시. 장소는 세븐스 헤븐."

"그래. 알았다."

"기대하고 있겠다! 전부 모아서 가겠다고!"

방금 주임만 온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전부는 곤란하다. 루퍼스는 특히 껄끄럽고. 하지만 레노는 클라우드가 제지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자 봉투를 신주 단지 모시듯 품에 안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클라우드는 어쩔 수 없이 마스터 스위츠의 얼굴로 돌아왔다. 곧 테이블 회전이 시작될 것이다. 클라우드는 곧 아무 생각없이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숨어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6. 29. 17:03
클라우드는 언제나처럼 후줄근한 차림으로 소파의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며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바렛트가 입던 커다란 스포츠웨어를 대충 접고 줄여 입었기 때문에 옷 맵시는 완전히 파멸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이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처럼 행동했다. 어쨌든 이것은 가족들에게 지탄 받은 속옷 차림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되었기에 차선책으로 삼은 편안한 복장일 뿐이다. 결혼 이후로 클라우드는 집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는 티파가 무릎을 빌려주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클라우드가 멋대로 빌린 것이었지만. 그녀는 소파 깊숙히 몸을 맡긴 채 긴 다리를 곧게 뻗어 발받침대 위에 올려 두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실은 이 발받침대는 원래 식사 용도로 구매한 식탁이었다. 그러나 1년 반 전 바하무트 습격의 여파로 한 쪽 다리가 부러졌고, 이후 클라우드가 고집을 부려 성근 실력으로 개수한 것이 화근이었다.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 몇 번이고 잘라내어 높이를 맞춘 결과, 발받침대 정도로 밖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티파는 거의 누워있는 것과 비슷한 자세로 TV를 보고 있었다.

클라우드 시선은 TV보다는 주로 티파의 발가락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왼 발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을 벌려 그 사이에 요령 좋게 오른 발의 새끼 발가락을 꽂아 고정시키고 있었다. 클라우드에게 그것은 엄청나게 편해 보였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클라우드는 자신도 따라해볼 요량으로 발가락을 벌려 보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발가락을 앞 뒤로는 움직일 수 있지만 좌 우로 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하는 이미지대로 즉시 전투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클라우드는 자신이 아직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편함으로의 길은 끝이 없고 요원하다.

클라우드의 시선을 느낀 티파가 장난스럽게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티파의 발가락은 서로 다른 의지를 가진 것 처럼 전방위로 움직였다. 클라우드는 마치 빨려드는 것처럼 티파의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낀 티파가 발가락을 멈추었을 때 그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클라우드의 상념이 제멋대로 확장되려는 때에 현관에 인기척이 있었다. 둔중하고 느릿한 발걸음. 클라우드가 잘 알고 있는 묵직한 생명력.

"아, 바렛트가 왔나보네. 진짜 오래간만이야."

과연 티파도 바로 알아챘다. 티파의 기감은 첨예했다. 가끔은 클라우드조차 놀랄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보이곤 했다. 역시 단련된 무술가이기 때문일까.

이윽고 바렛트가 거실에 들어섰다. "어서와!" 티파의 응대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바렛트가 클라우드 옆 쪽에 따로 놓여있는 소파에 몸을 실었다. 바렛트 전용으로 준비된 2인용 소파였다. 작년보다 몸이 더 불어난 바렛트를 지탱하는 소파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삐걱이는 소파 위에서 오래간만에 느끼는 집의 포근함에 바렛트가 목을 뒤로 젖히고 폭풍같은 한 숨을 내쉬었다.

"마린은?"

"덴젤과 함께 시내에."

"이 시간에!?"

"아직 해도 안떨어졌거든."

바렛트의 목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오는 모습에 티파가 쓴 웃음을 지었다. 변함없는 과보호. 끝이 보이지 않는 딸사랑.

"덴젤! 그 놈이 꼬여낸 게 틀림없어!"

뭐, 틀리진 않았지만. 이제 그만 덴젤에게 질투하는 일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만 역효과가 날 뿐이다. 티파는 클라우드의 머리를 살짝 내려놓고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특정 부위가 강조되는 동작에 클라우드가 헛숨을 들이켰다. 다른 남자 앞에서는 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주의를 줬건만. 클라우드가 째릿 눈 빛을 보냈지만 티파는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저 태연했다. 정작 바렛트는 덴젤에게 던질 말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티파는 기지개를, 클라우드는 눈보신을 마쳤다.

"자, 나는 가게 준비하러 갈게."

"어, 그럼 나도."

"클라우드는 바렛트 이야기 상대나 하고 있어. 마실 거라도 좀 내놓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넵. 말씀대로."

"좋아."

티파가 온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클라우드에게 입을 맞췄다.

"오늘 그렇게 바쁜 날은 아니니까 천천히 와."

티파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갈 무렵 클라우드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초코보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진 쟁반 위에는 유리컵이 두 개. 그 안에는 무색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바렛트는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겨우 물이나 내오려고 그 부산을 떨었냐."

바렛트가 물컵을 단숨에 비우며 투덜거렸다. 클라우드가 잔을 돌려 받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걸 그렇게 한 번에 들이키다니. 뭘 대접해도 의미가 없군."

"뭐? 어라."

바렛트는 그제야 입안에 퍼지는 향기를 눈치챘다. 바렛트는 혀끝에 남아있는 희미하지만 고상한 단 맛도, 아련한 알콜도, 상쾌한 여운도 확실히 잡아냈다. 바렛트는 평생 미식을 해본 일이 없었다. 음식을 연료로 생각해 왔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바렛트는 격렬한 미식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뭐야, 이게? 엄청 신기한데?"

"...자."

"어? 이건 네 몫이잖냐?"

"그렇게 바라보면 줄 수 밖에 없잖아. 많아. 필요하면 더 가져다 주지."

"고맙구만. 이게 당췌 뭐가 뭔지."

바렛트는 입술끝으로 조금씩 음료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단지 그것만으로 정신적인 포만감이 느껴졌다. 평소 바렛트는 사소한 것에 대해 묻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묻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뭐지 이게? 어디서 구한 거야?"

"만들었지."

바렛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클라우드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됐고. 보고할 게 있을 텐데."

"크흠. 아, 그랬지."

바렛트가 옷 안 쪽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 뭉치를 꺼내 보였다. 클라우드가 진지한 얼굴로 종이 뭉치- 가솔린 생산 공정표를 읽기 시작했다. 재작년 바렛트가 발견한 유전을 개발해 플랜트를 설립하고, 가솔린 시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3개월 째였다. 시운전을 마친 지금은 플랜트가 꽤 안정적으로 운전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바렛트가 이 자리에 와 있지는 않을 터.

클라우드가 금새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직 순조로워 보이지만, 지난 달에 비해 생산량이 1.8 퍼센트 줄었군. 설계 스펙은 간신히 맞추고 있지만, 가솔린의 순도 역시 떨어졌어."

바렛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증류탑에 문제가 있다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원인을 모르겠어."

클라우드가 다시 눈을 보고서 쪽으로 떨어뜨렸다.

"증류탑에 공급되는 스팀의 총량이 줄었군. 그에 반해 스팀 보일러는 한계까지 몰려 있고. ..흠. 역시 스팀 생산에 사용되는 물에 염분 함유량이 예상치보다 높아. 결과적으로 재생된 스팀에 섞여있는 잉여 염분이 보일러에 달라붙어 열전달 면적을 줄어들게 하는 거야. 그게 효율을 저하시키는 거지."

바렛트는 진지하게 클라우드의 분석을 경청했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클라우드는 흐름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이제 곧 명쾌한 답을 보여주리라.

"스케일 인히비팅. 포스페이트 투입량을 평소보다 두 배로 늘려. 과투입된 포스페이트가 보일러에 들러붙은 염분을 제거하고 나면 제품의 순도는 둘 째치고 생산량은 돌아올거야."

"과연."

"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해. 아직 괜찮을 때 수처리 설비를 확충하도록 해. 추가 예상 비용은 삼천만길. 설비 안정화까지 반 년은 더 걸리겠지만, 수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훌륭해, 바렛트. 이제 완공한 플랜트가 세 개나 되는군."

"하하하.. 이거 쑥스럽구만."

"올해 직원들의 성과급 지급 계획은?"

"월급의 천 퍼센트."

"타당해. 역시 노동자로 시작한 사장이야. 직원들의 사기도 올라갈테지. 훌륭한 감각이다."

이어지는 상찬에 바렛트는 그답지 않게 얼버무렸다.

"사실 말야, 네가 이렇게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어.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네가 없었으면 희생도 위험도 컸을거야. 고맙다."

클라우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 수중에 신라 컴퍼니의 플랜트 설계 자료가 있었을 뿐이야. 난 그 흐름을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아. 맨 손으로 공장을 세운 건 너야."

"그것도 네 투자금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지. 숨겨두고는 있지만 슬슬 감당이 안 돼. 배당금 말야. 티파는 네가 억만장자라는 걸 알아?"

클라우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몰라. 하지만 어짜피 티파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 한결같지. 지금도 봐. 플랜트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는 네가 직접 상의하러 왔는데 일부러 자리를 피해줄 정도니까."

바렛트도 무겁게 동의했다.

"그래. 그 녀석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어."

바렛트가 한 층 더 진지한 눈으로 클라우드를 바라봤다.

"문제는 너야."

클라우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심드렁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렇군. 보통은 부하를 보냈을텐데, 어쩐 일로 발걸음을 하셨더라니."

이 자식이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바렛트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차분히 현상을 정리했다.

"지난 삼개월 동안 넌 노동자 회복용 촉매제로 매주 막대한 마황을 보내고 있어. 시운전 이후 가솔린 정제 과정에서 신경독 누출이 끊이질 않으니까, 네 마황을 매개로 재 때 치료하지 않았다면 벌써 사망자가 수십은 나왔을 테지. 고마운 일이야. 문제는 그 마황이 어디서 나오냐는 거다."

클라우드는 침묵했다. 바렛트의 설명이 이어진다.

"별의 힘을 빌려 모으고 있는 것도 아니야. 우리는 별을 지키기 위해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전부 네 체내에 있었던 마황이지?"

클라우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바렛트는 추리를 계속했다.

"나는 공장일을 계속 해왔어. 코렐 탄광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플랜트 공부를 했다고. 가장 먼저 배운게 이거야. 들어가는 게 없으면 나오는 것도 없어. 질량 보존의 법칙이다. 물론 마황에 질량은 없어. 하지만 마찬가지야. 요는 공짜로 생기는 에너지가 아니라는 거지. 마황을 뽑아 먹힌 별은 말라 죽어가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렇게까지 직원들을 위해 희생하는 거야?"

바렛트의 설명은 설득으로 바뀌어 갔다.

"마테리아는 신라 놈들이 만들던 마황로와는 달라. 별의 마황을 뽑아내는 게 아니라고. 단지 별의 지식과 시전자의 정신을 이어줄 뿐이지. 회복에 사용하는 드라이빙 포스는 시전자의 마력이다. 별의 마황은 건드리지 않아, 하물며 네 마황 따윈 필요없어. 클라우드. 차라리 마테리아를 쓰자. 효율 좋은 회복 마테리아는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아. 이게 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야."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버무리거나 속이기 위한 웃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냐. 정말 괜찮은 거냐, 클라우드. 바렛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농담을 던졌다.

"바렛트가 드라이빙 포스같은 어려운 단어를 쓰다니."

"클라우드. 난 지금 진지하다."

"바렛트. 난 별로 별이나 직원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게 아니야. 알고 있잖아? 난 영웅 따위가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 넌 정상이 아니잖냐. 직접 보니 알겠어. 쇠약해졌다고. 집에 있을 때에는 항상 방금처럼 축 늘어져 있겠지. 지금 몸 상태는 티파에게도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거야. 내 말이 틀려?"

클라우드가 처음으로 긍정했다.

"지금은. 하지만 때가 되면 말할 거야. 난 단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 확인하고 나면 다 끝나. 별로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바렛트는 클라우드를 노려봤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마테리아는 포기한다. 역시 방침에 안 맞아. 대신 안전 장치와 의료 시설을 확충하겠다. 네 마황은 이제 안 받아."

클라우드가 눈썹을 찌뿌렸다.

"바렛트, 대주주로써 그 발언은 그냥 넘길 수 없겠는데. 매년 억단위의 돈이 들어갈거야. 내 마황이 가장 확실한 답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지."

그러자 바렛트가 눈을 부라렸다. 곧 용의 멱을 따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클라우드!"

클라우드가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시했다.

"알았어, 알았어. 무슨 말을 못 하겠군."

그거 이리 내놔. 클라우드는 바렛트가 마시던 잔을 빼앗아 입으로 옮겼다. 그걸 심통이라고 부리고 있는 걸까. 바렛트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전우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모두 다 함께 별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클라우드가 없었다면 결코 이룩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도, 클라우드에게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던가.

클라우드가 왜 아직도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지 바렛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평화로운 세상이 됐다. 이제 가정도 생겼다. 좀 더 편하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이다.

바렛트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클라우드."

클라우드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왜? 이건 이제 안 줘."

그러나 바렛트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티파는... 절대로 울리지 마라."

"..."

낯 간지러운 이야기는 할 줄 모르는 바렛트에게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그 속에 숨어있는 진의를 놓칠 만큼 바렛트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한 번에 남아있는 잔을 비웠다. 마치 바렛트처럼.

"절대로."

클라우드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바렛트는 겨우 조금 마음을 놓는 것이었다.

.

클라우드는 평소와 같이 새벽에 일어나 집 근처의 폐허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티파는 구석의 벤치에 앉아 그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파가 길게 하품했다. 티파가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것은 꽤 오래간 만이다.

바렛트가 플랜트로 돌아간 뒤 일주일이 흘렀다.

그는 돌아가기 전 마린을 한 참 동안이나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마린은 전혀 거부하지 않고 바렛트를 마주 안아 주었고, 기어코 바렛트를 눈물 짓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행복한 녀석이다. 탄광의 억쎈 환경도 어쩌지 못한 단단한 사람이 딸바보가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슬슬 나도 힘내볼까.

그리고 클라우드는 공터를 종횡무진하며 탈진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곧 티파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티파가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파공음에 흩어졌다. 클라우드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하지만 그 표정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을, 티파가 놓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결심.

그녀가 일어섰다.

그리고 한껏 투기를 방출.

클라우드의 동작이 멈췄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려 티파를 바라보았다.

"...티파?"

클라우드의 동공이 커졌다. 티파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 있었다.

"클라우드. 승부야."

"뭐?"

티파가 투기를 온몸에 잔뜩 두른 채로 대담하게 웃었다.

한기.

클라우드의 등에 온통 소름이 돋았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땅을 차는 폭발음과 함께 티파가 사라졌다. 잠깐, 난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 클라우드는 그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완전히 억지로, 승부는 성립됐다. 이어지는 내기까지.

"...!"

클라우드가 몸을 틀며 방어적으로 검을 넓게 세웠다.

굉음.

그리고 경악.

'이건...!'

파이널 헤븐!

초격부터, 이런 절기를 아끼지 않을 줄이야!

심지어 티파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클라우드가 아니었던 것이다. 클라우드는 자신이 완전히 허를 찔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치명적인 공격에 클라우드는 그만 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 무거운 검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림잡아도 수백 미터는 날아갔으리라. 짓쳐 들어오는 티파를 견제하면서 검을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 이대로 티파를 상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는 맨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다.

클라우드의 얼굴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클라우드의 절망적인 예상대로, 그 이후는 티파의 독무대였다. 각종 페인트와 대인 격투 기교에 섞여서 명치나 관자놀이, 턱이며 목에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연속 공격을 클라우드는 진땀을 흘리며 받아내야 했다. 즉석에서 티파의 동작을 흉내내 혼신의 발차기로 반격해 봤지만 티파는 이것을 상체를 유연하게 뒤로 젖혀 가볍게 회피. 오히려 기세를 올려 공격을 이어갔다. 아무리 버텨내도 티파의 공세는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클라우드는 복부, 명치, 인중, 왼쪽과 오른쪽 관자놀이를 보디 블로우, 장타, 팔꿈치, 백너클에 이은 돌려차기에 차례로 얻어맞고 성대하게 공중 제비를 돌며 고꾸라졌다. 마지막 발차기는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티파의 각력은 클라우드를 가드 째로 두 바퀴나 회전시켰다. 클라우드가 아니었다면 방금 연격으로 다섯 번은 죽었을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방향으로 땅바닥에 쳐박힌 클라우드를 내려다보며, 티파가 자세를 풀지 않은 채로 물었다.

"설 수 있겠어?"

클라우드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아니."

티파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이긴 거다? 딴 말 하기 없기?"

클라우드가 쓴 웃음을 지으며 티파의 손을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상대가 상대야.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솔직해서 좋아."

클라우드는 마황을 순환시켜 상처를 수복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회복이 더뎠다. 마황을 한계까지 적출하고 탈진할 때까지 검을 휘두른 데다가 그 상태에서 티파와 전력을 다해 겨뤘다. 몸이 정상이 아닌 것도 당연하다.

"어때? 몸 상태가 만전이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아?"

클라우드가 속마음을 들킨 것 처럼 움찔했다. 공방을 냉정하게 되짚어 본다. 부정. 장담할 수 없다. 티파는 전력을 다하지 않은 데다가, 여력도 한참 남아있다. 그녀의 호흡은 조금도 흐뜨러지지 않았다.

티파가 이렇게까지 강했던가.

아니면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건가.

클라우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잘 고민해 봐,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애초에 클라우드는 생각이 너무 많아. 정말 요령이 없다니까."

티파는 그 이후로도 이것저것 촌평을 내렸으나, 클라우드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평을 마친 티파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무튼 들어주는 거다? 내 소원."

하지만 그 말은 마법처럼 클라우드를 제 정신으로 돌려놨다. 클라우드의 침이 목젖을 울리며 넘어갔다. 예감이 좋지 않다.

"클라우드는 이제부터 내가 제안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줘야 겠어."

그리고 티파의 제안을 듣게 된 클라우드의 동공이 고양이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축소되었다. 가열찬 시련이 찾아왔다. 무심코 제노바 세포가 반응할 정도로.

"괜찮아 괜찮아. 못할 것 같았으면 시키지도 않아! 당신은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답니다."

티파가 하얗게 웃었다.

"오늘부터 검은 잡지 마. 기한은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어짜피 당분간은 그럴 시간도 없을테지만."

클라우드는 힘없이 땅에 드러누웠다. 날아가버린 검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결정되고 나서는 일사천리였다.

클라우드는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티파가 강제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클라우드는 가끔 만능약을 들이킨 얼굴을 하긴 했지만 결국 무시무시한 추진력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선 시드를 세븐스 헤븐으로 초빙.

비공정 시에라호를 건조하면서 남은 기기 메인터넌스 룸 모듈을 입수. 크기가 의외로 크고 티타늄 합금의 견고한 내구성을 지니고 있어 안정성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시드에게는 프로젝트의 개요를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시드는 허파를 토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폭소했다. 클라우드가 건넨 시제품을 받으며 겨우 진정한 시드는 통크게도 룸 모듈을 재료 가격만 받고 넘겨줬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연장자. 쏠 때는 쏘는 구나. 시드가 알기 힘든 눈 빛도 함께 쐈지만 클라우드는 잘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리브를 소환.

리브에게서는 미드갈에서 잘 나가는 인테리어 업체를 알선받았다. 시제품을 받은 리브는 세븐스 헤븐을 떠날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군요." 라고, 알듯 말듯한 코멘트를 남겼다.

소개받은 인테리어 업체 직원들이 건물 외장에도 조예가 있다기에, 문외한인 클라우드는 업체에 모든 것을 맡겼다. 건물 외벽에 따스한 느낌의 목재로 덧대고 새하얗게 도색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클라우드는 작업 이미지를 위해 참조하라며 시제품을 선물했다. 직원들은 선하고 착실한 사람들이어서 클라우드는 깊은 신뢰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들은 물도 제대로 마시지 않고 일했다. 탈수현상을 우려하는 클라우드에게 티파는 그들이 여운을 씻어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설명해 줬다.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클라우드는 자신의 소통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리고 곧 그 사실조차 잊어 버렸다. 눈이 핑핑 돌아갈 만큼 신경쓸 것이 많았다. 가게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인테리어 매니저에게 알아서 하라는 대답이 나올만큼.

인테리어 매니저는 다음 날 바로 간판을 가져 왔다. 이것 이외에는 없다는 표정이 매우 의기양양했다.

마스터 스위츠.

그 미묘한 네이밍에 클라우드는 그만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그러나 매니저는 클라우드의 반응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 거릴 뿐이었다. 클라우드의 케익을 맛 본 매니저로써는 앞에 그랜드를 붙여야할지 말아야할지 밤새 고민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를 목격한 티파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를 쥐고 자지러지며 클라우드의 등을 팡팡 때렸다.

우여곡절 끝에 케익 전문점, 마스터 스위츠의 개장일이 다가왔다. 그러나 손님을 끄는 법을 전혀 모르는 클라우드는 개장 첫 날 이벤트에 대해 전혀 고려해 두지 못했다. 의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경험의 영역이다.

"알았어, 클라우드. 내일까지만 내 말대로 해. 다음 날 부턴 아무 간섭도 하지 않을 테니까."

역시 날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티파 뿐이다. 이벤트 내용을 확인한 클라우드는 티파의 말대로 간단한 재료 준비를 마친 다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을 떨치지 못한 클라우드는 평소처럼 잠들지 못하 고 뒤척였고, 그 모습에 티파가 끓어올랐다. 곧 클라우드는 시체처럼 골아떨어졌다.

다음날 정오. 화창하고 선선한 최고의 날씨. 클라우드는 새하얀 셰프 복장을 착용하고 마스터 스위츠 앞에 설치한 가판대에 서 있었다. 왼쪽 가슴엔 금 빛으로 빛나는 마스터 스위츠의 엠블렘. 그 앞에는 무작위로 만든 한 입 사이즈 케이크가 가득. 수량 200개. 새벽에 함께 일어난 티파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제작했다. 오늘 하루는 무료 시식 이벤트였다.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

꽤 시간이 흘렀지만 손님은 없었다. 클라우드는 약간 초조해졌다. 마스터 스위츠는 구석에 있었고 잘 눈에 띄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클라우드가 이대로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 쯤 첫 번 째 손님이 찾아왔다. 여성. 묘령. 클라우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살짝 시선을 피했지만, 그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첫 손님은 야외 가판대에 진열된 케익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어지간히 케익을 좋아하는 구나 싶었다. 사실 그녀는 클라우드를 힐끔 힐끔 훔쳐 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클라우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티파가 아닌 여성인 경우라면 살기가 아니고서야 클라우드를 돌려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우드의 두뇌는 느릿느릿하게 손님 접대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티파의 마지막 당부가 생각났다.

'손님을 나라고 생각하는 건 어려울 테니까... 그래. 마린이나 덴젤이라고 생각하고 대해봐. 응. 이거면 됐어.'

그래. 여성이니까, 마린이군.

클라우드가 중저음으로, 그러나 살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마스터 스위츠입니다. 오늘은 개장 기념으로 무료 시식회를 열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드셔 주십시오."

손님이 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정말로 케익을 좋아하는구나.

"그럼 이쪽의... 초코 무스를 먹을 게요."

손님이 조심조심 초코 무스를 집어 입에 넣었다.

경직.

그녀는 더이상 클라우드를 힐끔 거리지 않았다. 더 이상 초코 무스를 들고 있지 않은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조만간 숨을 쉬는 것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클라우드는 그런 손님의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왜 그러는지 분석할 수도 없었다.

'맛이 그렇게 심각한가?'

클라우드는 첫 손님의 반응을 듣고 싶었지만 손님께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클라우드가 물었다. 목소리에 약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손님. 입에 안맞으시다면."

"네!? 아니요, 아니에요!!"

손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입을 막았다. 그야 케익을 만든 당사자를 앞에 두고 차마 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못할 것이다. 클라우드는 자신의 질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난 정말 서툴구나.

"아마 이 쪽은 좀 나을 겁니다, 손님."

미안한 마음에 클라우드가 직접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생크림 케익을 집어들었다. 오늘 아침 마린도 이건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니까. 가족의 의견이니 당연히 가려 들어야 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까지 나쁘지는 않으리라.

손님의 반응은 꽤 희극적이었다.

"네? 하, 하하하하나 더 먹어도 돼요!?!?!?"

아, 이런. 저런 반응이라면 먹기 부담스러운데 억지로 권한 꼴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클라우드가 겸언쩍게 웃었다.

"아, 물론 손님께서 원하지 않으신"

"주주주주주세요!"

손님이 케익을 냉큼 낚아챘다.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더니, 부끄러워 졌는지 얼굴을 가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어쨌든 먹어는 주겠다는 건가.

"하하... 정말..."

케익을 좋아하는, 착한 사람이구나.

클라우드는 왠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오늘은 이대로 접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첫 날이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자. 만들어둔 것은 아깝지만, 티파라면 열심히 먹어주지 않을까. 아무래도 200개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많이 남으면 세븐스 헤븐 손님에게 나눠 줘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 이제 더 올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응?"

첫 손님이 돌아갔구나 싶었는데 어느 새 사람들이 까맣게 몰려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방금 재미있는 콩트를 봐서 흥미가 생겼다거나. 어쨌든 운이 좋았다. 클라우드가 다시 접객을 시작했다.

"네, 마스터 스위츠입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와 시식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무료 시식회의 모양새를 띄기 시작하자 클라우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티파가 생각해 준 이벤트인데, 그녀가 실망할 만한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케익의 맛에 대해 평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조용히 케익맛을 감평하는 것 같았다. 케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점잖고 조용한 것이겠지.

클라우드가 들었던 평이라곤 우락 부락한 근육질 남자가 내뱉은 욕지거리 뿐이었다. 남자는 클라우드의 얼굴과 케익을 번걸아 쏘아보다니 격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씨발 이게 뭐야! 사기잖아!"

부탁입니다 손님. 저에게 평을 주세요. 하지만 저 야만스런 놈은 케익을 좋아하는 게 아닐 것 같았다. 아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튼 클라우드가 그 날 케익의 맛에 대한 제대로 된 평을 받는 일은 없었다. 케익은 금새 동이 났지만 공짜 였던 탓일 것이다. 클라우드는 썩 개운치 못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온 꼬마가 첫 손님이 두 개를 먹었다고 폭로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오는 손님들은 경쟁적으로 케익을 두 개씩 집어들었다. 덕분에 홍보의 효과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버프의 효과는 전투 건 일상이건 절대적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면서, 클라우드는 주섬주섬 가판대를 접었다. 그래도 전부 배포는 했으니, 오늘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첫 날의 목표는 완수한 셈이다.

클라우드는 접객의 어려움을 톡톡히 느꼈다. 손님들이 자신의 홍보 멘트는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조차 알기 힘들었다. 접객을 몇 년 동안이나 불평 한 번 없이 수행해왔던 티파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사람을 접대한 탓인지 오늘은 정신적으로 꽤 지쳐 버렸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제대로 돈을 받을 테니, 오늘처럼 정신없지는 않을 것이다. 손님이 이렇게 몰려 드는 일은 일단 없을테니까. 좀 한가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려나. 손님이 없으면 가게 뒷 편 공터에서 티파 몰래 검이나 휘두르자. 그게 좋겠다. 이 초조함을 없애려면 단련 밖에는 없으니꺼. 가게 주인으로써 있을 수 없는 기대를 은근히 떠올리며 클라우드가 터덜터덜 귀가했다. 티파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환한 미소로 클라우드를 맞이해 주었다. 결과가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는 거냐고 묻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튼 오늘 클라우드에게는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클라우드는 또다시 스스로의 근거없는 낙관론에 배신당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인생은 언제나 클라우드에게 체념을 가르치곤 했다.

결국 사흘도 지나지 않아 다시 시드가 초빙되었다.

시드는 아내에게 선물할 케익을 종류 별로 일곱개를 전달받고, 즉석에서 대기 번호표 생성기를 만들어 주었다. 케익을 들고 돌아가는 시드의 입에 시거는 물려 있지 않았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6. 29. 15:32
미드갈에 가을이 찾아왔다.

그러나 대도시 미드갈에 계절은 중요하지 않았다. 코발트 색으로 점철된 무기질적인 도시. 그저 높게, 효율적으로만 설계된 건물이 여운도 없이 다박다박 붙어있는, 단지 그 뿐인 도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초록 대신 아직 복구가 덜된 폐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절은 미드갈을 바꿀 수 없었다. 대자연의 힘조차 미드갈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정체 불명의 조직에 따른, 인위적 거대 운석 소환.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신라 컴패니 소속의 전설적인 솔져가 홀로 획책한 것이라 한다. 물론 이 얼빠진 소문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재앙의 규모가 너무도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드갈은 그 운석이 직격으로 떨어질 뻔한 도시였다. 초거대 운석의 무도한 질량은 물리 법칙을 초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중력 역전 현상을 초래했다. 그리고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미드갈은 그러한 중력 역전에 가장 취약한 도시였다. 미드갈은 그대로 버려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문화와 기술의 중심지였던 미드갈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마치 기적과도 같이, 미드갈은 빠르게 부흥했다. 하지만 그 미증유의 사태조차 부족했는지, 미드갈에는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질 않았다. 한 번은 크기가 20 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 크리쳐가 미드갈을 습격한 일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시민들이 미드갈 재건 작업에서 기능성 이상의 무엇을 추구할 수는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7번가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가게는 과연 이질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 건물은 다 쓰러져가는 폐허 속에 삼켜져 있는 단층 구조물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삼각 지붕 형태의 목조 건물이었다. 다만 몹시 새하얗게 도색되어 있었는데, 미드갈 가을 날씨 특유의 비바람에도 얼룩 하나 없는 걸 보면 과연 미드갈 건축물에 걸맞는 기술로 코팅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삼각 지붕의 꼭짓점 아래에는 미취학 어린이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동화적 필체로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건물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마스터 스위츠.

이름 그대로 이곳은 케익을 중심으로 한 각종 스위츠를 취급하는 가게였다. 참고로 스위츠를 다루는 가게는 미드갈에서 운석 낙하 이래 근 4년 동안 멸종 상태였다.

과연 꾸물꾸물한 지붕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밀피유를 연상시키는가 하면, 굴뚝의 외형은 앙증맞은 딸기 모양으로 마감시킴으로써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뿐인가. 벽면 곳곳에는 생크림 모양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고 막대 사탕과 거대 초콜릿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설계자가 가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 화려함에 대비하여 이 가게의 좌 우는 고블린이라도 나올 것 같은 완전한 폐건물. 가게의 뒷 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굳이 궁금하게 여길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소문으로는 저주라도 받았는지 무시무시한 돌풍이 불거나 날카로운 귀곡성까지 들린다고 한다. 뜬금없고 기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뭔가의 착오로 설계되었다거나, 조직 폭력배의 자금 세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 수상함은 가게에 들어서면 다소 사그러든다.

손님용 탁자가 듬성듬성 있는 가게 안은 건물 외벽과 대조되어 완전히 심플했다. 유리 장식장에는 특별할 것 없는 스위츠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그 수수함이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4년 전만 해도 미드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케익 가게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 또한 이내 뇌리에서 사라진다.

가게 안에 단 한 명, 그 수수한 장식 속에 돌출되어 있는 것처럼 새하얀 사람이 서 있기 때문이다.

품이 큰 셰프복이 오히려 연약하고 크지 않은 체구를 숨길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그 체격에 반비례하는 강렬한 인상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 번에 시선을 빼앗는다. 아니, 그 인상은 강렬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완전히 정반대라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셰프의 모자로 머리칼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서 마치 머리를 깎고 속세를 등진 수도승처럼 보였다. 덧없어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자아낼 것처럼 우수에 차 있었고, 선이 가는 갸름한 얼굴과 수려한 이목구비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성별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곤 했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스위츠입니다."

녹아내릴 것 같은 중저음의 맑은 음성은 그 외모 만큼이나 덧없어,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신은 그를 통해 남성에게는 질투와 안도를, 여성에게는 선망과 탄식을 가르쳤다.

그는 기혼자였다. 반년 정도 된 모양이다.

.

클라우드와 티파가 길고 먼 길을 돌아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한 지 6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의례 그렇듯이 결혼은 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여유를 되찾은 티파는 더이상 예전의 그녀처럼 질투의 화신이 아니었다. 클라우드가 업무 상 집을 비우거나 외박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물론 클라우드의 변함없는 미모에 꼬이는 도둑 고양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덤벼볼테면 덤벼보라지. 어짜피 고백받은 건 나니까.

하지만 이 모든 상념은 기우에 불과했다. 클라우드는 티파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티파에게 빠져 있었다. 클라우드는 티파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참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클라우드는 집에 남아 세븐스 헤븐의 일을 돕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짜피 돈은 필요한 만큼 있었고, 대공동에서 수집한 고가의 현물도 썩어날 만큼 많았다. 휴양지인 코스타 솔 델타에 구매해둔 펜션의 임대 수익 만으로 생활비는 대충 들어온다는 것도 티파는 최근 알게 되었다. 애초에 해결사나 운반책 일은 클라우드가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생활에 큰 애착은 없었다. 이미 받아둔 의뢰는 당일에 처리하고 돌아왔다. 밤을 새서 달려왔다는 말에 티파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 클라우드는 늘 티파를 보듬은 팔에 필요 이상의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 해야 했다.

클라우드는 숨을 쉬는 것 보다 자연스럽게 티파를 사랑했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정신없이 보는 티파의 옆에는 어느 샌가 달콤한 케익이 놓였다. 그런데 이게 꿈결처럼 맛있었다. 티파가 감탄하면 클라우드는 그저 웃어줄 뿐이었다. 이후 마린에게 그 케익이 클라우드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라 이에 대해 묻자, 클라우드는 공허한 눈으로-

"나는 맛의 구도자, 클라우드"

라던가,

"그대, 단 맛을 갈망하는가."

같은 알 수 없는 대사를 읊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케익은 말 할 필요가 없이 맛있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세븐스 헤븐에 손님이 몰릴 때에는 어느 새 클라우드가 곁에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주방이 번쩍번쩍 빛난다던가 칵테일의 밑재료가 눈 깜박할 사이에 손질되어 있었다. 클라우드는 티파가 목이 마를 때에 타이밍 좋게 물을 건냈고, 불을 사용하는 요리를 만들 때에는 땀이 눈에 들어가기 전에 이마를 닦아 줬다. 전쟁같은 시간이 끝나 티파가 숨을 돌리고 있을 때에는 슬며시 다가와 손을 잡아 준다던가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곤 했다.

티파는 그럴 때마다 행복감을 감추지 않고 클라우드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는데, 클라우드는 단지 그 미소가 마냥 좋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클라우드가 그런 소소한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티파는 참지 못하고 클라우드에게 달려 들었다. 티파가 지금 당장 하고 싶다고 말하면 클라우드도 티파를 더는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처럼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클라우드가 이성을 놓는 일은 없었다. 이럴 때 클라우드는 침착하게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끓어오르는 흑심을 참을 수 없어 안절부절하지 못하면서도 결코 서둘러 티파에게 부담을 주거나 거사를 그르치지 않았다. 클라우드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서커스에 가까웠다. 클라우드의 심리 상태는 굳이 보려하지 않아도 보였다. 티파는 그런 클라우드가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부터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티파는 이 정도로 만족스러운 삶을 누려본 일이 없었다. 손님들 앞에서 자각도 없이 멍청하게 풀어진 얼굴로 하루 종일 지내는 일도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바라보고 있으면 따스한 광경이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 뿐인 탓이 더 컸다. 티파에 대한 도시전설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것은 사실 전설이 아니었으며,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급부였을까. 클라우드는 티파를 사랑하는 일 이외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남아있던 운반책 일이 끝난 뒤로는 티파가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집에만 틀어박혀 있거나 집 앞 공터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만 휘둘렀다. 집에 돌아와서는 땀도 닦지 않은 채 소파에 대충 드러눕거나 거실을 굴러서 이동함으로써 집을 온통 얼룩 투성이로 만들곤 했다. 청소 책임자인 마린이 불만을 토로해도 클라우드는 마린에게까지 상남자의 면모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왠지 클라우드를 라이벌로 생각하던 덴젤은 크게 안심한 것 같았다. 클라우드가 집에서 속 옷 차림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클라우드가 그런 꼬락서니를 보일 때 마다 덴젤은 발작적으로 마린의 시야를 사수했다.

클라우드의 어지간한 비행은 눈감아 주던 티파도 덴젤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일까지 좌시할 수는 없었다. 클라우드에게 실내복을 착실히 입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클라우드를 구속하거나 바른 생활을 강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클라우드의 고백을 3년이나 기다려 준 관용의 화신이었다. 티파는 클라우드에게 받은 사랑을 마린과 덴젤에게 조금씩 나눠주는 방식으로 집안의 밸런스를 잡아갔다.

꿈결같은 날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듯 했다.

posted by nameless7777 2016. 6. 26. 20:46

"그럼 함께 가보겠어?"

티파는 거의 뛰어오를 뻔 했다. 설마, 진짜로? 늘 그랬던 것처럼 억눌러 참았지만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글쎄? 방해되는 거 아냐?"

티파는 그렇게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급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칵테일에 쓰일 파인애플을 손질하는 척 하며 흔들리는 동공을 감춘다.

"일하는 거 궁금하다면서?"

그럼 그만두라는 말이 돌아올까 마음을 졸이던 티파에게 클라우드는 미소를 돌려보냈다. 요사이 마린이나 덴젤에게 아끼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어째서 그간 그렇게나 미소에 인색했는지 가끔 울컥할 정도다.

"게다가 티파가 방해될 리가 없잖아."

우와. 우리 클라우드가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니. 이 엄마는 기쁘단다. 그런 식으로 장난스럽게 받아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오늘의 티파에게는 묘하게 여유가 없었다. 감정을 얼버무리며 애꿎은 파인애플을 뭉게 놓을 뿐이다. 내가 무슨 곱게 자란 재벌집 따님이냐!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머리 속에선 이미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지만 태연한 얼굴을 가장할 수 밖에 없었다.

티파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클라우드가 미소를 지우는 것도 잊고 칵테일에 손을 뻗었다. 세븐스 헤븐. 가게와 명칭을 공유하는, 이 가게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다. 처음 왔을 때와 똑같다. 그 때는 술에 강한 척 하는 클라우드를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에는 측은함을 느꼈다. 마황과 제노바 세포가 클라우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수가 아무리 높아도 알콜 정도는 마시는 순간 분해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 이야기다.

작년의 사건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로, 그리고 일련의 풍파를 거쳐- 클라우드는 조금 더 부드러워 졌다. 지금처럼 티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방비한 웃음을 흘리는 일도 생겼다. 그 때 클라우드가 말했던 것처럼, 너무 끌려다녀서 닳아버린 걸까.

병, 고뇌, 죄책감. 옭아매고 있던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털어낸 클라우드는, 그러나 치명적인 남자가 되었다.

티파는 최근 덴젤이 마린에게 미소짓는 클라우드를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클라우드의 어머니도 늘 걱정했었지. 그녀가 특히 팔불출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어떨 때는 여성보다 아름다운 클라우드의 용모는 저 거대한 검보다 흉악하다.

그런 클라우드가 '운반책'이랍시고 세계를 쏘다니고 있는 것이다. 티파는 걱정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번이 기회다. 클라우드가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모든 위험 요소를 체크해두자. 혹시 뭔가 수상한 것이 발견된다면.. 손에 쥔 나이프가 위험한 소리를 내며 구부러졌다. 후에 돌이켜 생각해도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서 난 뭘 준비하면 돼?"

클라우드가 갑작스런 오한에 움찔거렸다. 미소를 지우고 티파를 올려다 봤다.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티파가 있었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냉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티파는 블리자드 계열에 특히 능숙했지.'

오한 속에서 클라우드는 간신히 모든 준비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

준비를 하기위해 방에 들어선 클라우드는 더이상 티파가 냉기를 내뿜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잔간류 격투술의 달인. 지상 최강의 전사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좁은 곳은 티파의 영역이다.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티파의 완력은 정말이지 보통이 아니다. 물론 그녀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관용적이고 선한 사람이다. 민간인을 향해 그 전투력을 사용하는 일은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완력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난 주 클라우드는 티파가 얼빠진 여행객을 상대하는 것을 목격했다. 접시를 나르는 마린에게 시비를 거는 여행객 앞에 나선 그녀는 접시 한장을 장타 한 방에 가루로 만들었다. 오감이 극한까지 단련되어 있는 클라우드는 접시 가루가 나선형으로 비산하는 것을 지켜 봤고, 티파가 건네는 귓속말도 "이걸 세 번 연속으로 꽂는 게 장타러시의 포인트야" 똑똑히 들었으며, 여행객이 오줌을 지리는 냄새도 확실히 맡았다.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물며 철로 된 식기를 장비 없이 공 모양으로 찌그러뜨리는 걸 본다면 건장한 남성일수록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타구니를 신경쓰게 되는 법이다. 티파에게 무식한 추파를 날리는 용감한 주정뱅이는 언제부턴가 뚝 끊겼다. 평화롭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저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여기있는 의학책 전부 다 읽은 거야?"

호기심에 찬 티파의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 새 꽉 쥐고 있던 주먹에 땀이 흥건했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가히 초인적인 포커 페이스였다.

"그렇군. 세 번 정도씩은 읽었지."

"으엑- 진짜?"

티파는 만능약을 마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몰볼의 맹독성 최루액에 당했을 때 억지로 들이킨 이후로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약이다.

"그 땐 발병원인과 치료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니까."

"성흔증후군.."

"치료법은 커녕 나 처럼 농후한 마황과 제노바 세포를 함께 가진 인간은 증후군을 타인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만 얻었지. 그러니 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어."

"클라우드.."

단숨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간 일이다. 클라우드가 의식적으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냐. 의학 서적을 공부한 덕분에 포션을 정제하는 법도 배웠고."

책상에 놓여진 붉은색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몇 년 전 유행하던 신라 컴퍼니제 고급 화장품 샘플 같은 크기다. 주머니에 몇 개라도 들어갈 것 같았다.

"포션의 엣센스를 추출해 만든 유사 엑스 포션이야. 작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해독 효과도 있어."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주머니에 넣어두라며 붉은 포션 몇 개를 건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맛은 그렇게 좋지 않아."

포션을 받아든 티파는 진심으로 놀랐다. 클라우드, 의외로 머리가 좋았구나.

"우와- 대단해 대단해!"

티파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클라우드의 책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붉은 포션과 크기는 같지만 이상하게 화사한 용기를 발견했다. 투명하고 화려한 병에는 반짝이는 파란색 유체가 담겨 있었다.

"이건 뭐야?"

클라우드가 잠깐 경직된다. 그런 클라우드를 티파는 눈치채지 못하고 골골거리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냈다.

"예쁘다. 내가 가져도 돼?"

클라우드가 한 숨을 내쉬었다. 발견된 시점에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조심성이 부족했군.

"효과는 동일하게 맛을 좋게 해서 젤리 형태로 굳힌 거야. 만드느라 진짜 고생했으니까 쉽게 열면 안돼."

그 소리를 듣자마자 티파가 파란색 포션의 뚜껑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언제나 여유롭던 클라우드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티파가 왠 일로 음흉하게 "우후후" 웃었다.

"이거 엄청 재밌다! 이젠 울어도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클라우드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본 티파가 마치 이 때다 싶은 기세로 놀려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계속될 눈치였다.

클라우드는 평소와 다르게 장난스러운 그녀를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뭔가 잘못한 기억은 없었다. 억울함의 극치다. 그러면서도 클라우드는 반드시 파란 포션을 되찾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

"승차감은 어때? 티파."

"응, 괜찮아. 속도 더 내도 돼."

"꽉 잡고 있어."

"아냐, 역시 좀 흔들리는 것 같아. 속이 안좋아."

"그래? 그러면.."

"응. 포션을 마셔야 겠어. 이왕이면 맛좋은 파란 게 좋겠지?"

"티파.."

"알았어 알았어. 아껴둘게."

"..."

"우후후."

클라우드는 티파와 함께 애마 펜닐에 탑승하여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펜닐은 클라우드의 다목적범용성분리합체검을 수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잠시 동안은 거꾸로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접지력과 어마어마한 마력, 눈 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가속력, 어지간한 비공정에 필적하는 속도와 주행거리를 자랑한다. 클라우드의, 클라우드를 위한, 클라우드에 의한 자랑스런 애마. 모든 것이 완벽한 바이크인 것이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티파는 펜닐의 완벽함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클라우드의 뒤에 타는 것에 난색을 표하며 사이드 카를 장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리가 협소해 장기간 탑승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클라우드는 내일 새로운 메테오가 미드갈을 향해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 안돼. 막아야 해."

"무슨 소리야?"

클라우드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펜닐은 완벽해."

"아까부터 대체 무슨.."

"사이드카는 각하한다."

클라우드는 쿨하고 냉정한 전사였다. 클라우드는 진지한 얼굴로 펜닐의 외형적 완벽함과 그가 간직한 검은 오오라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펜닐에 사이드카를 장착하는 발상의 위험성을 물리 현상에 근거하여 설명했다. 펜닐의 높은 운동성에 견디지 못한 사이드카의 강제 분리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비참한 결과에 대해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조용히 열거한 것이다. 던컨류 공중 살법의 달인인 티파조차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끔찍한 묘사였다. 이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티파에게 결정타를 날릴 시점이다. 클라우드는 속으로 심호흡하며 말을 골랐다. 전투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남은 건 좁은 좌석 문제군. 하지만 내 계산에 따르면 좌석은 전혀 좁지 않아. 실제로 티파는 나와 함께 펜닐에 탑승했던 일이 있지.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그렇군. 티파, 혹시 살쪘"

"난 돼지가 아냐-------!!!!!!!"

접시를 가루로 만드는 장타가 클라우드의 정중선을 차례로 가격한다. 전광석화같은 3연타. 기술도 신체 조건도 완벽한, 틀림없는 전성기의 티파였다. 하지만 충격에 대비하고 있었던 클라우드에게 사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 펜닐은 지켜졌다. 덧붙여 클라우드의 검은 오오라도.

.

-잠시 후.

티파는 어쩔 수 없이 뚱하지만 이상하게 상기된 얼굴로 클라우드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클라우드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등에 뺨을 기대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펜닐은 빠르게 가속할 테니 자세를 단단히 고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펜닐은 그다지 빠르게 달리지 않았다. 일반 차량과 거의 다르지 않은 속력으로 미드갈 시내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엔진음도 이상하게 큰 것 같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직 말문을 트는 것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이에 대해 티파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죄책감도 있었다. 클라우드가 속을 긁어대긴 했지만 역시 장타 러시는 도가 지나쳤다. 설마 코피가 터질 줄은 몰랐다. 자연스럽게 사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성공할 뻔 했다. 클라우드가 평소와 같았더라면.

"펜닐이.. 울고 있어."

"..뭐?"

"생각보다 짐이 무거웠던 거지."

"으아-! 내가 짐이야?! 그리고 나 살 안쪘다고!"

"하하하"

"그만 웃어!!!!!!!"

"그래서 피가 터질 때까지 때렸습니다."

"으아-------!!!!!!!"

-그리고 현재에 이른다.

미드갈을 빠져나오자 펜닐은 당연하게도 아무 문제 없이 가속했다. 클라우드는 단지 시내에서 안전히 운전하기 위해 저속으로 달렸다고 한다. 설명에 따르면 가솔린 기관은 저속 기어일 수록 속도가 낮아지는 대신 힘과 소음이 커지게 된다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지만 티파의 몸무게 이야기는 그저 농담이었을 뿐이다.

클라우드가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티파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펜닐의 속도는 극도로 단련된 티파에게도 기분 좋은 스릴을 느끼게 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 파란 포션으로 한 방 먹였으니 비긴 것으로 치자.

펜닐이 거침없이 나아갔다.

티파는 클라우드로부터 전해지는 온기를 듬뿍 즐겼다.

.
.

"거의 다왔어."

펜닐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여행이 끝나가는 것이다. 티파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돌아오는 즐거움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도착한 곳은 평범한 마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폐허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성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곳곳에 무자비한 형태로 지반이 융기되어 있다. 바위 그 자체가 녹아내린 지형도 볼 수 있었다. 최소한 '가' 급 이상, 대마법이 사용된 흔적이다.

이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증거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저 절벽에 새겨진 흉흉한 손톱자국은 틀림없이 베히모스다. 크기로 유추하면 킹 급. 팔뚝만 해도 티파보다 컸을 것 같았다. 심지어 용종의 발자국까지 보였다.

별의 에너지가 들끓는 대공동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을 법한 괴물의 흔적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었다. 평범한 마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런 일보다 훨씬 티파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다.

"저건.."

시계탑을 벽면에 세로로 길게 새겨져 있는 참격의 흔적. 자세히 보면 비슷한 것이 어디에나 있었다. 마치 이 일관적인 흔적이 모든 파괴에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역시 알아보겠어?"

클라우드가 애마의 움직임을 멈췄다. 낙석으로 길이 끊어져 있었다. 펜닐이라면 지나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효율이 좋지 못하리라. 클라우드가 아무렇게나 펜닐을 주차시켰다. 검 거치대를 열고, 6개의 검을 모두 꺼내 능숙하게 결합하고, 등에 걸었다. 이 검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금속인 아다만타이트를 제련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티파는 그 무게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맞아. 처음 와본 곳이 아니야."

클라우드와 티파는 펜닐을 내버려둔 채 낙석을 넘어 걷기 시작했다. 펜닐이 도난당할 위험 따위는 없으리라.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클라우드가 기억을 더듬어 마을의 중심지로 향한다. 괜한 상념이 함께 떠올랐다.

3년 전 대공동에서 숙적을 쓰러뜨리고 나서 클라우드를 찾아온 것은 달성감이나 해방감이 아닌 허무함이었다. 세피로스를 쓰러뜨리는 것- 가족과 에어리스의 원수를 쓰러뜨리고, 과거와 결별하는 것.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목표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목표가 사라지니 잡념만 늘었다. 특히 잭스와 에어리스에 대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이 겹쳐 내가 죽였다는 죄책감이 되었다. 용서받고 싶다. 고민 끝에 옛날 기억을 더듬어 해결사 일을 시작했다. 생각할 틈이 없으면 죄책감도 엹어지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처음 이 마을에 관계된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중년의 남성으로부터 대신 성묘에 가 줄 것을 요구받았다. 기묘한 의뢰였다. 하지만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물의 무리에게 마을 사람들이 거의 전멸.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을 포함해 불과 한 줌. 직접 가보려 해도 공포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해결사를 자처할 정도라면 나 대신 사자들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클라우드는 그와 과거의 자신을 겹쳐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니블헤임의 불 꽃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어쨌든 클라우드는 깊히 생각하지 않고 승락했다. 위치로 보건데 아무 것도 없는 시골이다. 기껏해야 블랙팽 같은 변종 늑대 놈들이나 좀 무리지어 있겠지. 그리고 클라우드는 자신의 낙관론에 배신당했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클라우드에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예상했던 블랙팡 무리들이 있었다. 다만 숫자가 백단위를 넘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마을의 초입부터 마물의 대군이 클라우드를 습격한 것이다. 게다가 이어서 나타나는 리치, 드래곤 좀비, 베히모스.. 마황이 옅은 장소에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클라우드는 강하다.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이젠 세상에서 클라우드와 1대 1로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잃고 약해졌다. 달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살아남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살아남는다고? 이런 놈들을 상대로? 그리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클라우드가 소리없이 포효했다. 베히모스의 이빨을 깨뜨리고, 드래곤 좀비의 머리를 칼몸으로 후려쳐 으깨고, 리치의 가슴팍을 깊게 쑤셔 골수채로 머리를 뽑아버리고, 화룡점정의 기세로 버스터 소드를 휘둘러 블랙팡도 일거에 쓸어버렸다. 어깨로 숨을 쉬며 정신차려보니 간신히 모양만 건사하고 있던 마을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클라우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 때도, 지금도.

"하하하. 어이없지? 마을을 이 지경으로 박살낸 건 사실 나야. 의뢰주에게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어. 이야길 듣고 찾아간 집에서 발견한 가족의 유품으로 사죄해야 했지."

티파의 표정이 흐려진다. 클라우드가 홀로 그런 방황을 하고 있을 때, 티파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세븐스 헤븐에 돌아오길 기다리고, 길을 나서는 그를 배웅할 뿐. 클라우드가 집에서 나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티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중요한 때면 티파는 움츠러 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언제까지고 그녀를 이길 수 없을 텐데.

"클라우드.. 난-"

티파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울렸다. 바람 소리 때문인지 클라우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가볍게 고했다.

"다 왔어 티파. 여기야."

"...!"

그 곳은 광대한 묘지였다. 조잡하고 제각각이긴 하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괴물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나니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사방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다는 걸 알았어. 처음엔 그냥 놔둘까도 싶었지만."

클라우드가 주머니에서 얇은 철제 병을 꺼냈다.

"문득 생각났어. 동료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뚜껑을 열고, 묘지를 향해 뿌린다.

진한 알콜 냄세. 가게에서 가장 강한, 세븐스 헤븐. 마을 하나 분의 공물로써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몇 방울 만으로도 취할 것이다.

"나를 되찾아준, 티파라면"

"클라우드.."

"그러니까 왠지 가슴이 먹먹해져서 말야. 한 번에 다 하지 못하더라도 전부 묻어주기로 했어"

수십, 수백의 십자가.

"그리고 가끔 들러서 내 나름대로 성묘를 하고 있지. 나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제 다 매장한 것 같아.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서 조금이지만 마음이 진정되는 걸 느꼈어."

그 목소리에 그늘 따윈 없었다.

"티파는 모르는 사이에 전 해결사- 운반책의 롤모델이 되어줬어. 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건낼 수 있는 사람으로써 나 자신을 조금씩 인정할 수 있게 됐지. 이후에도 조금 곡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문득 클라우드의 등 뒤에 부드럽게 따스함이 내려앉았다.

"함께 오고 싶었어. 지금까지 날 지탱해 준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싶었어."

"클라우드."

"언제나 네가 날 구해줬어. 날 라이프 스트림의 흐름에서 꺼내줬던 것 처럼. 그 때도, 지금도. 항상 도움받고 있어."

"클라우드..!"

"네가 늘 나를 현실로 되돌려 주고 있어."

"응."

"난 네가 돌려준 내 현실을 살아갈거야."

"응."

"그런데.."

"..응?"

그런데?

"나오셨군. 1년이나 잠잠했으니 슬슬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마황. 그것도 농밀한 마황이 마을 어디에선가 뿜어져 나왔다. 마황을 느낄 수 있는 클라우드의 육체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필이면 오늘인가. 운이 없군"

티파가 클라우드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클라우드는 커다랗고 따스한 어떤 것을 잃어버린 등에서 검을 꺼내들며 거대한 상실감을 느꼈다.

티파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운이 없네."

그러자 클라우드가 그 말을 정정했다. 전투를 앞두고서도, 세븐스 헤븐에서 보여준 미소를 재현하면서.

"오해하지마. 재수없는 건 저 쪽이야."

이에 당황한 티파가 황급히 기도를 끌어올리며 심장을 단속했다.

"어?"

"오늘 내 옆에는 티파가 있으니까."

"아.."

티파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스위치를 켜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클라우드가 미소를 지운 것도 거의 동시였다.

어느 덧 사방에 몬스터가 나타나 있었다. 블랙팽.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백마리 이상. 경험 상 이 정도로 끝날 일도 없다. 하지만 아무런 위험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둘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소리를 등 뒤에 두고 올 정도로 격렬한 기세였다.

.

몸 놀림은 역시 티파가 빠르다. 한 발 앞서 블랙팽의 무리에 뛰어들었다.

"흡!"

장저를 정확하게 블랙팽의 턱에 꽂아 넣는다. 불길한 소리를 내며 머리가 비틀려 떨어져 나갔다. 즉사.

이어서 연격. 다음 녀석을 반바퀴 스핀하며 백 너클로 후려치고, 기세를 이용해 돌려차기를 날린다. 공격이 한 번 적중될 때마다 어김없이 블랙팽 한 마리가 쓰러졌다. 계속해서 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바늘 구멍도 느껴지지 않는 연타가 뿜어져 나왔다. 타격점이 실로 정확무비. 블랙팽의 개체수가 초단위로 격감했다. 마지막 실전이 거의 1년 전일텐데도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매서운 공격은 클라우드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역시 티파는 대단하다.

클라우드가 합체검에서 2번 검 오거닉스를 분리해 양손에 검을 쥐고 종횡무진 휘둘렀다. 블랙팽들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오른손의 대검이 수직으로 내려 꽂힌다. 파황격. 마황이 세 방향으로 갈라지며 진격하자 사선에 있던 블랙팽들이 차례로 양단된다. 파황격의 검격을 직접받은 블랙팽은 이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틈을 노려 공격하는 블랙팽은 왼손으로 검을 뿌려 조각냈다. 두 개의 검은 서로 다른 생명을 가진 것 처럼 움직였고 블랙팽들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클라우드와 티파는 등을 맞대고 경쟁하듯 블랙팽을 줄여 나갔다. 클라우드는 무시무시한 검기를 거리낌 없이 흩뿌렸다. 바로 옆에 있는 티파가 휘말려도 이상할 것 없는 공격. 하지만 그 무도한 공격이 티파의 동선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없다.

티파가 끌어들이고 클라우드가 한 번에 베어낸다. 클라우드의 뒤에서 달려드는 적을 티파가 한 발 앞서 뒷꿈치로 찍어 내린다. 클라우드와 티파는 동료로써 수백, 수천번의 공투를 경험했다. 이런 잔챙이를 상대할 때는 작전을 짤 필요도, 큰 목소리로 위험을 경고할 필요도, 등 뒤를 조심할 필요도, 눈 빛을 교환할 필요도 없었다. 둘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치에 맞는 합격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것을 봤다면 둘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서도 3년 동안이나 질질 끌고 있는 상황에 진절머리를 냈을 것이다.

개전 후 3분만에 둘은 400 개체가 넘는 블랙팽을 쓰러뜨렸다. 블랙팽들도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마수들이다. 어짜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티파가 가볍게 숨을 골랐다.

"후우"

"..."

클라우드는 말 없이 전방을 응시했다.

그 때와 똑같다.

다음이 온다.

"준비해 티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경고였다. 다만-

"조심해 클라우드."

한 번 더 티파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마치 별이 움직여 클라우드에게 마황을 건내는 것 같았다. 감정이 들끓고 클라우드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드디어 난 강해졌다.

무엇이 나와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투기에 반응하듯 검게 변질된 마황이 압축된다. 검은 마황은 남아있는 블랙팽마저 삼켜 농축되어 간다. 이윽고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인간형태. 전고 약 4 미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신장에 필적하는 크기의 메이스.

"철거인인가.."

대공동에서 본 철거인보다는 작지만, 느껴지는 마황과 존재감 자체가 격이 다르다. 클라우드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 편이 유리하다고 직감했던 건지도 모른다. 강하다. 틀림없이 지금까지 이 곳에 등장했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우와! 왠지 클라우드 같네!"

클라우드가 철거인을 다시 뜯어본다. 하체보다 세 배는 우람한 상체. 유인원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팔과 그에 반비례하게 짧은 다리. 이번엔 아무 말 없이 티파를 바라봤다. 티파는 그 얼굴이 억울하다는 표정임을 알고 있었다. 강적을 지척에 두고서 티파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그렇게 쳐다봐도 말야. 그치? 우후후"

"..싸움에 집중해. 저건 강하다."

"우후후"

클라우드가 말 없이 뛰쳐 나갔다.

"앗 잠깐! 연계해야지!"

.

철거인이 느릿느릿 왼쪽 손날을 세워 앞으로 뻗었다. 뭉툭한 손가락 끝이 쇄도하는 클라우드들을 향한다. 클라우드의 시력이 철거인의 손가락 끝에 구멍이 있는 것을 포착했다. 마치-

"포격이 온다!"

바렛트의 총구 같았다. 우악스러운 기세의 무엇인가가 튀어나온다. 클라우드가 서둘러 오른손의 대검으로 튕겨낸다. 라이플을 막아낸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압축 공기..!"

이게 에어로라고? 쏟아지는 포격에 뒷 말은 삼킨다. 그리고 움직임의 궤적을 바꿔 포격을 피한다. 좌 우 검을 하나로 합쳐 무게와 면적을 늘리고 직격으로 날아오는 압축 공기를 선택적으로 튕겨낸다.

티파는 변칙적인 클라우드의 움직임을 똑바로 인지하고 뒤에 바로 붙어 따라온다. 클라우드가 이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

포격을 뚫고 아군의 사정권내까지 길을 열어야 하는 클라우드의 임무는 막중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3년 전에는 신라병 상대로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일이다.

이제 적과의 거리는 50 미터 남짓.

클라우드가 다리에 힘을 집중시켰다.

"하아!"

지면이 폭발하고 클라우드가 포탄처럼 튀어나간다. 인간을 초월한 각력. 한 순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그 기세 그대로 철거인의 머리에 강렬한 일격을 작렬시킨다.

클라우드의 팔에 둔중한 반작용이 돌아온다. 신경쓰지 않고 밀어붙인다. 철거인의 거체가 땅에 긴 흔적을 남기며 뒤로 죽 밀려난다.

압축 공기를 토하던 철거인의 왼쪽 팔이 클라우드를 포획하려 한다. 클라우드가 철거인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거리를 벌린다. 공격을 먹였던 철거인의 머리를 확인한다. 조금 우그러진 상처가 있을 뿐이다. 상상 이상으로 견고하다.

뒤로 떨어지는 클라우드와 교차하듯 티파가 쇄도한다. 그리고 클라우드가 공격한 그 지점에 온 몸의 체중을 실은 정권 지르기를 쑤셔 넣는다. 클라우드의 공격이 묵직하다면 티파의 공격은 폭발적이다. 순간적으로 철거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기세를 이어 되돌아오는 머리에 왼 발 옆차기가 클린히트. 뻗은 다리를 완전히 회수하지 않고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관자놀이에 왼 발 돌려차기를 꽂아넣는다. 일반적인 적이었다면 이 정도로 상황이 종료되었으리라.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티파에게 철거인이 왼 손으로 지근거리에서 압축 공기를 발사한다. 뒤로 빠졌던 클라우드가 늦지 않게 도착, 대검으로 왼팔 관절을 후려친다. 압축 공기가 표적을 잃고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검을 철거인의 팔관절에 찍어 누른채 팔의 힘만으로 클라우드가 날아오른다. 공중 제비를 돌며 중력에 원심력을 더해 다시 한 번 팔관절을 후려친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철거인의 팔관절이 역방항으로 꺾인다.

그오오오오오!

처음으로 철거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착지한 클라우드에게 오른손의 거대 메이스를 흉포한 기세로 휘두른다. 티파의 등줄기에 오싹한 전율이 달린다.

"클라..!"

클라우드가 몸 왼편에 검을 세로로 세워 땅에 박는다.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클라우드가 검째로 날아간다. ..아니, 날아가지 않는다. 뿌리 깊은 거목처럼, 땅과 하나가 된 바위 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철거인의 일격을 받아낸 것이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 메이스를 튕겨낸다. 철거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대단해.."

티파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상궤를 벗어난 클라우드의 전투 능력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질량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거동한다. 깃털처럼 가볍고, 강철보다 무겁다.

"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면서, 클라우드가 티파에게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준비해, 티파."

"응? 이제 거의 끝난 것 아냐?"

"곧 마황의 핵이 놈을 회복시킬거야."

"으엑. 정말?"

"이 현상을 이제 좀 알 것 같아.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테지. 하지만."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강할 거야. 단번에 끝내자."

"알았어."

과연 철거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전보다 훨씬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클라우드가 검을 고쳐 잡고 연계 공격 신호를 보내려는 찰나-

"아앗!"

티파가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냈다. 클라우드가 덩달아 놀란다.

"티파?"

"없어졌어! 그거! 파란 포션! 떨어뜨렸나봐!"

"그럴리가 없어. 끝나면 천천히 찾아."

"안돼! 그게 없으면 난!"

티파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가슴골에 손을 넣었을 때는 클라우드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황급히 고개를 철거인 방향으로 돌리며 외쳤다.

"티파! 집중해!"

갑자기 티파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찾았다! 찾았어 클라우드!" 하지만 그 사이 철거인은 완전히 회복했고, 메이스를 양 손에 쥐고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티파!"

클라우드가 티파를 밀어 넘어뜨렸다. 티파가 어린 아이같은 소리를 내며 "꺄악" 간단히 쓰러졌다. 그것은 메이스가 클라우드에게 쳐내려지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클라우드가 메이스를 정면으로 받아낸다. 무시무시한 압력. 클라우드를 중심으로 지면이 반경 10 미터나 함몰. 클라우드가 이를 악물고 버텨낸다. 등 뒤에는 아직 티파가 쓰러져 있다.

"큭.."

잔뜩 힘을 모은 철거인이 메이스를 내려치는 속도는 음속보다도 빨랐다. 소리와 충격파가 뒤늦게 찾아온다. 파아앙! 그 충격파는 방심 상태에 빠진 티파를 날려보냈다.

"꺄아아아아악-!"

그러나 저 정도 충격파에 티파가 다칠 리 없다. 그녀를 돌아보는 대신 클라우드는 몸 상태를 점검한다. 방금 공격으로 전신에 충격. 특히 팔과 허벅지, 무릎 근섬유 파손이 예상 이상. 마황 에너지를 순환시켜 대사를 촉진. 이 정도라면 문제없어. 할 수 있다.

그 순간.

대기로부터 거대한 흔들림이 전해져 온다. 등 뒤로 폭풍같은 기세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이 자식아아아아아아아아아!"

투기로 빨갛게 달아오른 티파가 탄환같은 속도로 되돌아오고 있다. 도약. 그대로 철거인의 가슴팍에 강력한 발차기를 날린다. 철거인의 거체가 잠깐 동안이지만 부웅 날아오른다. 이를 티파가 허공을 박차고 날아들어 추격. 지켜보는 클라우드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연격을 쏟아낸다.

"너 때문에 진짜로 잃어버렸잖아-------!!!!!!!"

그제야 클라우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티파가 잃어버렸을 법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 파란 포션이다. 티파에게 알려주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 기세를 잃고 싶지 않다.

티파가 날뛰는 잠시 동안 기력도 완전히 돌아왔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황을 개방한다.

티파는 클라우드의 기감을 느꼈으나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공격에 맞춰 한 번에 끝장낸다. 좀 멀리 돌아왔지만 일단 그게 계획이었을 것이다.

다음 순간 클라우드가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처럼 짓쳐 들어왔다. 티파가 숨을 들이켰다.

초구무신패참.

마황을 폭주시켜, 이를 그대로 육체와 검에 실어 공격하는 클라우드의 비기 중의 비기.

하필이면 이 기술로 나왔나. 제 아무리 티파라 하더라도 이 때의 클라우드는 맞춰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굳이 클라우드가 함께 가자고 해준 날이다. 클라우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 녀석 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내 소중한 파란 포션을-------!!!!!!!'

티파가 각오를 굳힌 순간, 클라우드가 잔상을 흩날리며 철거인의 전방위에 검격을 넣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그 세피로스조차 버티지 못했던 기술에 철거인이 반응할 수 있을리 없다. 견고한 장갑에 무수한 참상이 새겨진다.

그에 맞춰 티파도 폭발적으로 가속한다. 클라우드가 공격한 바로 그 지점에 주먹을 찔러 넣고, 무릎과 팔꿈치로 짓이기고, 발차기로 뭉게 버린다. 충격이 철거인의 갑옷 속을 진탕시킨다.

클라우드는 아무런 패턴이나 전조도 없이 움직이면서 공격했고, 티파는 클라우드에 대한 마음과 철거인에 대한 분노를 에너지로 삼아 철저하게 따라 붙었다. 검의 반사광과 권격의 충격파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마치 철거인의 주위에 백억의 거울 조각이 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곧 두 사람은 전에 없던 고양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편안함마저 느껴지는 격렬함. 아찔할 정도의 쾌감. 호흡의 일치. 공명. 정신적 연결. 그 감각에 대한 표현은 이미 의미를 잃고 표류한다. 이 순간 클라우드와 티파는 서로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기세에 철거인의 무릎이 꺽이자 클라우드가 검면으로 허리를 후려친다. 거의 동시에 티파가 반대쪽 허리를 돌려찬다. 정 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가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철거인의 전신이 삐걱거린다. 그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클라우드가 도약하자, 티파가 앞으로 쓰러지는 철거인의 턱을 올려차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철거인의 머리 위로 클라우드의 최후의 공격이 떨어졌다.

마지막에는 비명조차 없었다.

철거인은 완전히 소멸했다.

.
.

클라우드가 앞장 서서 걷고 있다. 느릿느릿 티파가 뒤따른다. 뚱한 얼굴이다. 조금 전에 클라우드에게서 잃어버렸던 물건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 그 포션 찾았으니까."

"응?"

"그거. 파란 포션."

"뭐!?"

너무 심드렁해서 잠깐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티파가 절규했다.

"돌려줘-!"

"귀중한 거라고 했잖아. 또 잃어버리려고?"

"그렇지만!"

"지금의 티파에게 어떻게 이걸 맡길 수 있겠어?"

"그럼 어떡하면 돌려줄거야?"

"글쎄.. 너 하기 달렸지."

"우리 클라우드가 새디스틱해졌어!"

"무슨 소리야."

"이 엄만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그리고 결국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 티파가 입을 삐죽거렸다. 클라우드에 대한 유일한 무기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회수한 클라우드는 아까부터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껏해야 좀 단맛이 나는 포션일텐데 뭐가 저렇게 소중할까. 아무리 실수 한 번 했기로서니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

"분명히 이 앞이야."

클라우드와 티파는 저택 앞에 있었다. 아마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건물일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부터 뭘 찾는 거야?"

클라우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티파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설명했잖아. 그런 표정이다. 티파도 어깨를 으쓱하며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방금까지 파란 포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 걸. 클라우드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반복했다.

"마황의 핵. 그걸 찾아 부수지 않으면 언젠가 또 같은 일이 벌어질테지."

티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그렇다는 건..!"

역시. 티파는 언제나 긍정적인 답을 찾아내곤 한다. 클라우드는 그런 티파가 늘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클라우드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담겼다.

"맞아. 그걸 부수면 이 마을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라고."

아차.

말을 뱉어놓고 클라우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3년만에 원인을 알았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너무 풀어졌다. 위대하사 라이프 스트림에 기원하건데, 제발 티파가 알아듣지 못했기를.

"엇? 클라우드가 레노 말투를 흉내냈어! 너무 웃겨! 뭐야? 언제부터야?"

빠르게도 티파는 파란 포션의 대용 병기를 발견했다. 클라우드는 갑자기 이해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클라우드는 티파에게 존재 자체가 약점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완전히 체념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줘."

클라우드는 녹이 슨 저택의 문을 열였다. 한숨을 쉬는 것 치고는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

녹 슨 쇳소리와 함께 오래된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 동물들의 박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초코보부터 방금 전까지 싸웠던 블랙팽, 그리즐리 베어까지. 모두 박제였다. 그 다채로운 콜렉션에 티파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마도 생전 집 주인의 취미이리라.

"그래.. 이런 집이었지. 이제 기억이 나."

클라우드는 시체를 탐색해 매장하기 위해 모든 집에 들렀을 것이다. 티파는 묘지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고 새삼 클라우드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다.

맞아, 그리고선 내가 참지 못하고 클라우드에게 백허그를-

"왓!"

갑자기 티파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오늘 자신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너무 들떠 있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클라우드가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티파?"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냐."

"아까부터 참 이상하네."

"아하하! 신경쓰지마."

클라우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탐색을 재개했다. 희미한 마황이 집 전체에 옅게 깔려 있어서 핵의 위치를 특정짓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찾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앗! 이거 아냐?"

티파가 높게 목소리를 튕겼다. 클라우드가 피식 웃으며 티파를 돌아봤다. 어짜피 무슨 잡동사니 같은 걸 발견했겠지. 왠지 오늘 이상하게 얼이 빠져 있으니까.

그리고 티파가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쳐다봤다. 클라우드의 동공이 확 커졌다.

허름한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꺼림직한 마황. 진짜다. 저것이야말로 이 마을을 몇 년이나 괴롭힌 원흉이다. 이렇게 간단히 발견하다니! 흥분한 클라우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 강대한 철거인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 큰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티파!!"

그리고 클라우드가 티파를 덥석 껴안았다.

"잘 했어!!"

"으엑?"

실수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너무 놀랐던 것이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클라우드의 복부에, 신묘한 원인치 블로가 깨끗하게 들어갔다. 인간을 때린 것 같지 않은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헉.."

마치 복부가 꿰뚫리는 것 같은 막대한 충격. 클라우드가 배를 움켜주고 주저 앉았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이런 타격, 저 강대한 철거인을 상대할 때에도 받지 않았었는데. 눈 앞이 침침해진다. 통증이 저절로 몸을 쓰러뜨려 동그랗게 웅크리게 했다. 여긴, 여긴 지옥인가.

"크크크크클라우드!? 아 어떡해 그렇게 갑자기 껴안아서 그만! 미미미미미안해! 미안해 클라우드! 아파? 당연히 아프겠지! 아아아!"

티파가 완전히 착란 상태에 빠졌다. 저 강대한 철거인과 대적하다가 파란 포션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클라우드는 이를 악물고 마황을 총동원하여 내상을 수복했다. 끊어지려는 의식을 다잡으며, 앞으로는 티파를 절대로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맞아!!!!!!! 포포포포션!!!!!!!"

티파가 주머니에서 출발 전에 받았던 붉은 포션을 꺼내 클라우드의 입에 흘려 넣어준다. 클라우드가 깊이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끈질기지만, 저 강대한 철거인을 상대할 때에도 포션 따위는 필요없었다.

"커허어어어어"

"클라우드!"

티파가 클라우드의 머리를 와락 껴안았다. 부드러운 감촉. 가득 퍼지는 티파의 향기. 여긴, 여긴 천국인가. 오늘은 정말 바쁘구나. 그 촉감 속에서 통증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클라우드는 왠지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 괜찮아? 어디 안아파?"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가 망가졌어?!?!?!?"

클라우드는 한참동안 그렇게 티파에게 안겨있었다.

조금만 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클라우드는 눈을 감고 티파를 만끽했다.

.

"아, 정말. 괜찮아졌다면 괜찮아졌다고 말을 하란 말이야. 엄청 걱정했잖아."

"태도가 그게 뭐야. 하긴 가해자는 금방 잊어버린다더군."

"읏..!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아 그래. 나는 배가 꿰뚫리는 줄 알았어.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는 성이 안 찰 법도 하잖아?"

그래서 계속 안겨 있었지. 그 정도는 괜찮은 거 아냐?

클라우드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티파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클라우드 오늘 짖궂어.."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다.

"큭큭큭. 이제 이 정도로 하고. 이거 열어보자."

티파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클라우드를 노려봤다. 클라우드는 모른 척 하고 상자를 관찰했다. 잠금 장치는 있었지만 견고하지는 않았다. 뚜껑을 움켜 쥐고 힘을 주자 간단히 열렸다.

"으엑.."

역한 냄새가 났다. 티파가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제노바.. 인가"

심장이었다. 몸체에서 떨어져 나와있는데다 반 정도는 잘려 있었다. 심지어 오늘 무진장한 마황을 방출했다. 그런 만큼 쇠약해져있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어?"

티파가 조심스럽게 들여다 봤다. 심장은 여전히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청난 생명력. 과연 제노바 세포.

"어디선가 떠돌고 있는 걸 이 집 주인이 수집품으로 삼은 것 같군.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는데도 여전히 살아있는 심장이니, 신기하기도 했을 거야. 상자에 고이 모셔놨으니 1년 전에 내린 정화의 비에도 노출되지 않았을 테지. 흠. 콜렉터로서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콜렉터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노바의 심장을 어떤 경위로 손에 넣게 된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콜렉터의 수기라도 찾아볼까 싶었지만, 이 저택의 넓이다. 바늘을 찾는 것 같은 작업이 될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지금은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아. 방금 전에는 1년 정도 다시 모은 마황으로 몬스터를 사역했겠지만."

클라우드가 라이터로 제노바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지금은 이런 작은 불조차 버티지 못하겠지."

석연치 않은 점은 남아 있다. 다름아닌 제노바가 관련된 일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찌할 방도가 남아있지 않다. 이대로 운반책 일을 계속하면서 정보를 모으는 수 밖에 없다. 아니, 이번에 돌아가면 리브에게 문의해볼까.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니 티파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노바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걸까? 별일 아니라고 안심시켜줄 말을 고르고 있는 클라우드에게 티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라우드, 설마? 담배 피워?"

제노바는 커녕 단순히 손에 들려있는 라이터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이건"

클라우드가 쓴 웃음을 짓는다. 티파에게는 제노바 보다 클라우드의 흡연 여부가 더 중요한 모양이다. 클라우드는 몹시 기뻐졌고, 표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티파는 정곡을 찔렀다고 착각했다.

"시드구나. 그 골초 아저씨가 기어코!"

"아냐. 이건 일 때문에 들고 다니는 거야. 보다시피 쓸모가 있거든"

"소지품 검사를 실시하겠습니다!"

티파가 불끈 주먹을 쥐어보인다.

"담배가 나오면 시드는 죽는 거야!"

"왠지 시드에게 미안하군."

티파가 이런 시덥지도 않은 잔소리를 나에게 늘어놓다니. 클라우드는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티파가 자신을 구속하려 하다니 이보다 더 자극적인 일은 없었다. 물론 여기서는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클라우드 자신이 더 참고 싶지 않았다.

클라우드가 한 걸음 나섰다. 장난기가 발동한 무표정이다. 오직 티파만이 분간할 수 있기에 무표정이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저 입모양은 오늘 자신에게 장타러시를 맞을 때와 닮았다. 결의와 의지가 함께 읽혀졌다. 티파가 압도당해 주춤거렸다.

"뭐, 뭐야?"

"그럼 티파. 냄새라도 맡아보겠어?"

"응?"

"담배향이 나는지, 안나는지 말야."

"읏.."

클라우드가 점점 다가온다. 티파는 물러서지만 곧 퇴로가 사라졌다. 클라우드는 능숙하게 티파를 기둥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버렸기 때문인지 반항도 소극적이었다. 간단히 두 손을 잡혀 버린다. 클라우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잠깐 담배향이 나는지 시험해 볼 뿐이잖아?"

"이, 이거 놔!"

"힘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팔을 잡았다고 다 이긴 것 같아?"

클라우드가 슬쩍 아래를 봤다.

"아, 무릎. 무릎으로 뭘 할 생각이지?"

"그야 힘껏.."

"힘껏?"

"히, 힘껏.."

클라우드가 도발적으로 웃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아, 그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난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겠지. 해 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시, 시간?"

티파는 고장난 녹음기 같았다.

이런 식으론 안돼! 이런 식으론! 그럼 어떤 식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티파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결연히 선언했다.

"찰거야! 진짜로!"

그러나 클라우드는 이미 지근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경고 삼아 무릎을 슬쩍 올린 정도로, 무릎의 맨살을 통해 클라우드가 느껴질 정도로.

".......!!!!!!!"

그걸로 끝이었다. 티파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클라우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3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부끄럽고 두려운 것은 처음 뿐이었다. 클라우드는 점점 격렬해졌고, 티파도 정신없이 응했다. 클라우드는 강하고 단단했으며, 티파는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문득 티파는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잊혀져 갔다.

끝나고 나서야 두서없이 생각했다.

아, 이 저택 천정이 날아가고 없구나. 벽도 여기저기 무너진 곳 투성이고. 누가 볼 지도 모르는 야외에서 이렇게.. 정말 3년전 같아.

클라우드와 티파는 그렇게 꽤 오랫 동안 아무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말 뿐만이 아니다.

.

시간은 계속 흘렀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티파가 아쉬움을 눌러 참고 말문을 열었다.

"새벽.. 밤을 새버렸네."

클라우드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렇군. 슬슬 돌아갈까."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 가자."

그렇게 말하고서, 클라우드가 가볍게 눈을 비볐다.

"아니, 역시 좀 피곤한 것 같아."

"그래? 눈 좀 붙일래?"

"아니, 포션이면 돼. 이왕이면 맛있는 파란 게 좋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농담에 티파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가볍게 웃을 준비를 마쳤을 때 클라우드는 정말로 파란 포션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티파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아앗-------!!!!!!!"

티파가 입을 크게 벌리며 클라우드의 반인류적 배신 행위를 규탄하고 있을 때, 클라우드는 티파를 다시 한 번 배신했다.

그대로 입을 맞춘 것이다.

티파는 경악한 채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입 속으로 달콤한 포션이 전해져 오는 것을 무방비하게 받아냈다. 클라우드의 입술이 미소지으며 멀어져 간다. 티파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새삼 심장의 고동은 의지와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클라우드는 정말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포션을 음미했다. 그리고 포션 속에 숨겨진 위화감을 포착했다. 이건-

금속?

손을 입에 넣어 위화감을 꺼내 확인한다.

반지?

티파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윽고 클라우드의 녹아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티파."

티파가 젖은 눈으로 클라우드를 바라본다. 몽롱하게 그 입술이 자아내는 말을 갈구한다.

"나와 결혼해줘."

티파가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로 흐려진 클라우드가 안전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티파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클라우드는 다만 영문을 모른 채 티파를 안아 다독여줄 뿐이었다.

.
.

당초 하루만 닫아 둘 예정이었던 세븐스 헤븐은 무려 3개월이나 휴무했다. 이를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 소문의 반 정도는 사랑의 도피였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티파는 돌아왔다. 그녀의 연인과 함께.

클라우드와 티파가 돌아온 날에 맞춰 그리운 얼굴들이 세븐즈 헤븐에 모였다. 말하자면 생략된 결혼식의, 그것도 신혼여행 이후에 이루어진 피로연이다. 순서가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메테오 낙하에 따른 중력장 역전 현상의 영향으로 고철더미가 되었던 3년전의 미드갈과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았다.

동료들의 앞에서 클라우드는 어설프게 웃었다. 티파에게 청혼하고 승낙받은 그 날부터 클라우드의 안면 근육은 이상한 타이밍에 주인을 배신하곤 했다. 그러고보니 그 날 티파는 내가 망가졌다고 했었지. 과연. 바로 그 말대로다.

"하 저 병신 웃는 것 좀 보게. 좋아서 낯짝 다 풀어진 꼴 좀 보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클라우드가 시드의 말투는 원래 거칠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동료들도 경쟁적으로 시드를 거들었다.

"클라우드. 지금 메테오 낙하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리브가 점잖게 클라우드를 나무랐다. 하얀 와이셔츠에 투버튼 정장. 수수하지만 고급스러운 구두. 언제나처럼 말끔한 차림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기품있게 규탄한다. 그만큼 더 무섭고 아프다.

"마린이 얼마나 티파를 걱정했는지 알긴 하냐? 다 큰 사내가 태도를 똑바로 하지 않으니까 저 조그만 애까지 걱정하잖아. 알아 들어? 마린이 엄청 걱정했다고."

바렛트도 툴툴거렸다. 바렛트는 언제나 화제가 마린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의 딸 사랑은 날이 갈 수록 한계가 없어졌다. 언제부터인지 마린의 걱정거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바렛트에게 있어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덴젤도 바렛트에게는 이미 어엿한 범죄자였다.

"하하하. 설마하니 내가 클라우드 따위에게 지다니."

레드 서틴- 나나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요새 그는 '걸프렌드'를 찾고 있다. 그 옛날 코스모 캐니언에서 독립해 잠적한 일족의 후예를. 흔해 빠진 이성친구 사귀기가 아니다. 위대한 일족의 대를 잇는 까마득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수명이 긴 나나키는 앞으로 천년 이상을 일족 찾기에 사용할 것이다. 클라우드가 나나키를 상대로 승리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변함없이 번거로운 남자라니까, 클라우드는.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저 멀리 우타이에서 시드의 비공정을 타고 날아온 유피는 멀미약 대신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클라우드가 그녀를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본다. 도저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게다가 아직 미성년자 아니었나?

"다들 클라우드에게 너무 엄격하군. 어쩔 수 없지. 클라우드는, 내가 구해주는 것으로 하겠다."

무려 빈센트가 클라우드의 변호에 나서 줄 모양이었다. 연애 면에서 찌질함의 결정체 같은 놈이 못하는 말이 없다. 클라우드가 그런 빈센트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닥쳐."

클라우드는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물러서는 일이 없는 초일류 전사지만, 그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동료 앞에서는 한없이 약자였다.

오늘까지만 참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낙관했던 클라우드는 전망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렇다. 티파를 3년이나 더 기다리게 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덧붙여 클라우드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티파는 편안한 얼굴로 연신 웃고 있었다. 동료들의 반응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오늘은 클라우드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숨이 나왔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것은 의외로 유피였다.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키며 혀가 반 쯤 꼬인 발음으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자 이제 그만하자~? 아저씨들이 시끄럽게 떠드니까 머리만 울려~ 슬슬 신부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하지만 난 아직 한 마디도 안했는데. 클라우드가 중얼거렸지만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이번에 삐죽머리한테 받은 반지야? 도대체 저 답답이 한테서 어떻게 받은 거야?"

그렇다해도 표현이 너무 과하다. 유피에게 술을 권한 건 대체 누구야?

"마린이 섞어준 거다! 알콜은 거의 안 들어가 있어! 불만있냐!"

그럴리가요 선생님.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안전합니다. 절대 범죄자가 아닙니다.

"아이 참. 우리 바보 커플 이야기 좀 들어보자고! 모두 조용히 해봐!"

유피가 판을 깔자 티파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여봐라는 듯이 클라우드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함으로써 동료들을 모두 소화불량 상태에 쳐박았다. 그 기세가 마치 메테오 드라이브 같았다.

물론 듣고 있는 클라우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대신 파이널 헤븐을 장타 러시의 수법으로 연거푸 얻어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동료들이 기어이 폭소를 터뜨릴 때 클라우드는 라이프 스트림 속을 마황 중독 상태로 헤메이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

지난 몇 개월 동안 클라우드는 대단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정해진 시간에 세븐스 헤븐에 드나들었고,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앉지 않게 된 바에 앉고, 가게 이름을 공유하는 칵테일을 마셨다. 티파에게 눈독 들이는 놈들에게 투기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피로스 조차 압도한 투기를 동네 청년들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귀중한 손님들이 자리를 뜨는 사태에 티파가 가끔 험한 눈 빛을 보냈지만 클라우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낮에는 주로 포션을 젤리 형태로 굳히는 연구를 수행했다. 포션 특유의 강한 소독향과 역한 맛을 억제하기 위해 수십가지도 넘는 향신료와 과일 시럽을 조합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맛을 발견했을 때 클라우드는 거의 종교적 성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맛의 구도자, 클라우드. 그대, 단 맛을 갈망하는가.

그리고 심야에는 지하에 틀어박혀 반지를 가공했다. 미스릴 주괴를 마황로에 넣어 불순물을 태웠다. 마황로에는 다름아닌 클라우드 자신이 체내에서 정제한 마황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티파에게 선물할 특별한 반지를 만들기에 이 이상 적절한 설비는 없으리라. 한없이 순도가 높아진 미스릴은 엄청난 강도를 자랑한다. 똑바로 된 원형을 구현하는 것만 해도 아득한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반지 안 쪽에 글귀를 새기는 일에는 초인적인 집중력이 필요했다. 실수는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클라우드는 마사무네를 받아 넘기는 이미지로 반지 제작에 전념했다.

클라우드는 이 모든 작업을 묵묵하게 수행했다. 누구에게도 상세를 알리는 일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제 남은 것은 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유리병 뿐이었다.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예쁜 병은 생각보다 금새 찾았다. 우연히 세븐스 헤븐의 엠블렘과 닮은 문양을 하고 있는 향수병을 발견한 것이다. 티파에겐 조금 둔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 문양이 세븐스 헤븐의 엠블렘과 닮았다는 사실 자체는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의하기 힘든 호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늘 보는 익숙함은 있을 테니까. 클라우드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잠시 방심한 사이 티파는 파란색 포션 젤리와 반지가 담긴 유리병을 강탈했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빛에 비춰 보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미스릴이 반지 모양의 빛을 반사할 테니까. 마황로에서 단련되는 동안 반지에 농축된 클라우드의 마황도 영롱한 녹색 빛을 낼 것이다. 클라우드는 진심으로 동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티파는 파란 포션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어디에 보관했었는지는 한 참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티파에게 파란 포션을 되찾을 방법을 궁리하며, 클라우드는 최후의 작업에 착수했다. 펜닐에 티파와 함께 탑승해 엔진을 시끄럽게 울리며 미드갈의 시내 구석구석을 이 잡듯 돌아다닌 것이다. 티파는 미드갈에서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유명인이다. 그녀를 등 뒤에 태웠다는 사실 자체가 데몬스트레이션 효과를 가져온다. 티파가 사랑의 도피로 세븐즈 헤븐을 방치했다는 소문의 절반 정도는 클라우드가 의도했던 셈이다. 계산대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실패는 곧 죽음이다.

소위 말하는 배수의 진을 편 것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나와 티파는-

-아니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티파에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으면 털어놓을 수록, 솔직해 질 수록- 이 프로포즈가 실패하면 끝날 뿐인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 티파가 없었다면 자신은 제노바 세포를 제어하거나 스스로를 되찾을 수 없었을 테고, 허무를 극복할 수도 없었으며, 삶의 방향도 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보답하기 위해 평생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티파가 너무 애틋하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배수의 진 따위가 아니다.

결국 3년 전과 똑같다.

클라우드는 티파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령 오늘 실패하더라도 그걸로 끝낼까 보냐. 아무리 꼴사나워도, 티파가 질색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고 말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클라우드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티파에 대한 프로포즈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에 부응하는 것처럼 파란 포션도 클라우드의 손에 되돌아 왔다. 보라고. 라이프스트림도 내 편이야.

그렇게 클라우드는 티파에게 마음을 전했다.

3년이나 걸려서, 티파에게 자신의 전부를 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티파는 다시 한 번 클라우드를 구원했다.

그녀가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

아련한 눈으로 티파를 바라보고 있는 클라우드에게 시드가 비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뱉어냈다.

"푸헐! 참내, 별.. 클라우드 이 자식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자빠졌구만.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죄 떼어주면 다음엔 뭘 주려고? 이 생초짜 새끼 이거 안되겠네."

전재산의 절반을 털어 하이윈드를 대신할 비공정을 만들고, 그 비공정에 연인의 이름을 붙이고, 기어코 청혼에까지 사용한 시드가 할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오늘 클라우드는 죄인이다. 속죄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 반론도 제기하기 않았다.

"클라우드씨 역시 할 땐 하는 남자였군여. 솔찬히 놀랐어여."

리브. 뭘 얼마나 마신거야? 캣시가 튀어나왔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둬. 갭이 엄청나다고.

"티파는 아바란치의 원로니까! 울리면 가만 안둬!"

바렛트가 호쾌하게 웃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새 유피와 의기투합하여 센 놈으로 몇 병이나 비운 것 같았다.

"잠깐! 원로라고 하면 내가 할머니같잖아!"

티파가 바렛트에게 항의한다. 그야 그렇지. 티파는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그 항의가 왠지 바렛트의 위험한 스위치를 켠 것 같았다. 바렛트가 클라우드와 티파를 번갈아 훑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위험을 감지한 클라우드가 날카롭게 제지했다.

"바렛트."

"아아?"

"성희롱하면 죽는다."

"뭐야, 벌써부터 남편 행세냐?"

"경고하는 거다. 당신은 아직 티파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 설마?"

"그래. 배가 쪼개지는 줄 알았지."

"클라우드!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 저 호구새끼 진짜. 마누라한테 쳐맞고 사냐?"

"휴! 첫 날부터 그런 플레이를? 역시 아바란치의 원로! 흥분했더니 기계팔이 다 떨리는군."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 그 땐 너무 놀라서!"

"티파, 모두들 그냥 놀리고 싶은 것 뿐이야. 굳이 반응하지마."

"어라아~? 티파한테 말할 때만 목소리가 바뀌네~?"

"유피! 넌 이제 그만 마셔!"

"클라우드. 폭력에 굴해선 안돼. 어쩔 수 없군. 내가 그 상황에서 구해주는 걸로 해주지."

"하하하하.. 닥치라고."

변변치 않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클라우드는 곧 자신 또한 마음 속 깊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합세해 아내를 놀려볼까 싶었지만 후환이 두렵다. 그것도 매우. 지금 토라지면 아무래도 고달프다. 정신, 육체 양면으로 거대한 시련이 찾아오리라.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된 일이었다.

"아 정말! 클라우드! 뭐라고 말 좀 해봐!"

하지만 유혹이 찾아온다. 그녀의 새초롬한 표정을 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티파."

티파는 아직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여기서 특대급으로 한 방 터뜨려 준다. 실은 골려준다기 보다, 단순한 사실의 확인일 뿐이다. 무죄인 것이다. 뜸을 들이는 클라우드를 티파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사랑해 티파."

일부러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클라우드의 의식이 멀어졌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다음 순간 클라우드는 자신이 긴 의자에 길게 누워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은 클라우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고 마시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클라우드를 돌봐야 하지만 자리는 떠날 수 없었던 티파가 긴 의자를 가지고 왔으리라.

클라우드가 좀 더 상황을 분석했다. 관자놀이에 둔중한 타격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급소를 노리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다. 지난 번의 전투도 그렇고, 티파는 평화로워진 뒤에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 아내지만 실로 살벌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목 뒤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살결은 분명히 티파의 허벅지인 것이다. 현세에 이런 사치가 있을 수 있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클라우드는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누워있는 방향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클라우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티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티파가 숨을 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올려다보니 티파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티파가 얼굴을 사과빛으로 물들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티파는 난처해 하면서도 클라우드를 밀어내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그것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졌다. 하지만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위치는 엘보가 들어오는 거리다. 그래서-

사랑해 티파.

클라우드는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나도.

티파도 활짝 웃으며 소리없이 답했다.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아아아앗~! 둘이서 비밀 이야기하고 있어~!"

그리고 유피가 그 기척을 간파했다. 술에 취해도 빈틈이 없다. 역시 유피. 과연 닌자 마스터. 재능 낭비가 엄청나다.

클라우드가 부활하자 분위기가 다시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티파가 세븐스 헤븐을 대량 생산했고, 이를 기다리는 동안 시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품있게 졸고 있는 리브를 바렛트가 흔들어 깨우고, 흥분한 나나키는 꼬리를 붕붕 휘둘렀다. 곧 빈센트의 잔에도 세븐스 헤븐이 채워졌고- 유피는 처음부터 풀 슬로틀로 달리고 있었다.

파티는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는다.

티파와 함께라면, 남은 모든 날이 축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