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6. 6. 26. 20:46

"그럼 함께 가보겠어?"

티파는 거의 뛰어오를 뻔 했다. 설마, 진짜로? 늘 그랬던 것처럼 억눌러 참았지만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글쎄? 방해되는 거 아냐?"

티파는 그렇게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급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칵테일에 쓰일 파인애플을 손질하는 척 하며 흔들리는 동공을 감춘다.

"일하는 거 궁금하다면서?"

그럼 그만두라는 말이 돌아올까 마음을 졸이던 티파에게 클라우드는 미소를 돌려보냈다. 요사이 마린이나 덴젤에게 아끼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어째서 그간 그렇게나 미소에 인색했는지 가끔 울컥할 정도다.

"게다가 티파가 방해될 리가 없잖아."

우와. 우리 클라우드가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니. 이 엄마는 기쁘단다. 그런 식으로 장난스럽게 받아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오늘의 티파에게는 묘하게 여유가 없었다. 감정을 얼버무리며 애꿎은 파인애플을 뭉게 놓을 뿐이다. 내가 무슨 곱게 자란 재벌집 따님이냐!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머리 속에선 이미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지만 태연한 얼굴을 가장할 수 밖에 없었다.

티파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클라우드가 미소를 지우는 것도 잊고 칵테일에 손을 뻗었다. 세븐스 헤븐. 가게와 명칭을 공유하는, 이 가게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다. 처음 왔을 때와 똑같다. 그 때는 술에 강한 척 하는 클라우드를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에는 측은함을 느꼈다. 마황과 제노바 세포가 클라우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수가 아무리 높아도 알콜 정도는 마시는 순간 분해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날 이야기다.

작년의 사건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로, 그리고 일련의 풍파를 거쳐- 클라우드는 조금 더 부드러워 졌다. 지금처럼 티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방비한 웃음을 흘리는 일도 생겼다. 그 때 클라우드가 말했던 것처럼, 너무 끌려다녀서 닳아버린 걸까.

병, 고뇌, 죄책감. 옭아매고 있던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털어낸 클라우드는, 그러나 치명적인 남자가 되었다.

티파는 최근 덴젤이 마린에게 미소짓는 클라우드를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클라우드의 어머니도 늘 걱정했었지. 그녀가 특히 팔불출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어떨 때는 여성보다 아름다운 클라우드의 용모는 저 거대한 검보다 흉악하다.

그런 클라우드가 '운반책'이랍시고 세계를 쏘다니고 있는 것이다. 티파는 걱정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번이 기회다. 클라우드가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모든 위험 요소를 체크해두자. 혹시 뭔가 수상한 것이 발견된다면.. 손에 쥔 나이프가 위험한 소리를 내며 구부러졌다. 후에 돌이켜 생각해도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서 난 뭘 준비하면 돼?"

클라우드가 갑작스런 오한에 움찔거렸다. 미소를 지우고 티파를 올려다 봤다.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티파가 있었다. 하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냉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티파는 블리자드 계열에 특히 능숙했지.'

오한 속에서 클라우드는 간신히 모든 준비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

준비를 하기위해 방에 들어선 클라우드는 더이상 티파가 냉기를 내뿜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잔간류 격투술의 달인. 지상 최강의 전사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좁은 곳은 티파의 영역이다.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티파의 완력은 정말이지 보통이 아니다. 물론 그녀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관용적이고 선한 사람이다. 민간인을 향해 그 전투력을 사용하는 일은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완력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난 주 클라우드는 티파가 얼빠진 여행객을 상대하는 것을 목격했다. 접시를 나르는 마린에게 시비를 거는 여행객 앞에 나선 그녀는 접시 한장을 장타 한 방에 가루로 만들었다. 오감이 극한까지 단련되어 있는 클라우드는 접시 가루가 나선형으로 비산하는 것을 지켜 봤고, 티파가 건네는 귓속말도 "이걸 세 번 연속으로 꽂는 게 장타러시의 포인트야" 똑똑히 들었으며, 여행객이 오줌을 지리는 냄새도 확실히 맡았다.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물며 철로 된 식기를 장비 없이 공 모양으로 찌그러뜨리는 걸 본다면 건장한 남성일수록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타구니를 신경쓰게 되는 법이다. 티파에게 무식한 추파를 날리는 용감한 주정뱅이는 언제부턴가 뚝 끊겼다. 평화롭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저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여기있는 의학책 전부 다 읽은 거야?"

호기심에 찬 티파의 목소리에 클라우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 새 꽉 쥐고 있던 주먹에 땀이 흥건했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가히 초인적인 포커 페이스였다.

"그렇군. 세 번 정도씩은 읽었지."

"으엑- 진짜?"

티파는 만능약을 마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몰볼의 맹독성 최루액에 당했을 때 억지로 들이킨 이후로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약이다.

"그 땐 발병원인과 치료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니까."

"성흔증후군.."

"치료법은 커녕 나 처럼 농후한 마황과 제노바 세포를 함께 가진 인간은 증후군을 타인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만 얻었지. 그러니 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어."

"클라우드.."

단숨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간 일이다. 클라우드가 의식적으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냐. 의학 서적을 공부한 덕분에 포션을 정제하는 법도 배웠고."

책상에 놓여진 붉은색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몇 년 전 유행하던 신라 컴퍼니제 고급 화장품 샘플 같은 크기다. 주머니에 몇 개라도 들어갈 것 같았다.

"포션의 엣센스를 추출해 만든 유사 엑스 포션이야. 작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해독 효과도 있어."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주머니에 넣어두라며 붉은 포션 몇 개를 건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맛은 그렇게 좋지 않아."

포션을 받아든 티파는 진심으로 놀랐다. 클라우드, 의외로 머리가 좋았구나.

"우와- 대단해 대단해!"

티파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클라우드의 책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붉은 포션과 크기는 같지만 이상하게 화사한 용기를 발견했다. 투명하고 화려한 병에는 반짝이는 파란색 유체가 담겨 있었다.

"이건 뭐야?"

클라우드가 잠깐 경직된다. 그런 클라우드를 티파는 눈치채지 못하고 골골거리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냈다.

"예쁘다. 내가 가져도 돼?"

클라우드가 한 숨을 내쉬었다. 발견된 시점에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조심성이 부족했군.

"효과는 동일하게 맛을 좋게 해서 젤리 형태로 굳힌 거야. 만드느라 진짜 고생했으니까 쉽게 열면 안돼."

그 소리를 듣자마자 티파가 파란색 포션의 뚜껑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언제나 여유롭던 클라우드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티파가 왠 일로 음흉하게 "우후후" 웃었다.

"이거 엄청 재밌다! 이젠 울어도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클라우드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본 티파가 마치 이 때다 싶은 기세로 놀려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계속될 눈치였다.

클라우드는 평소와 다르게 장난스러운 그녀를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뭔가 잘못한 기억은 없었다. 억울함의 극치다. 그러면서도 클라우드는 반드시 파란 포션을 되찾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

"승차감은 어때? 티파."

"응, 괜찮아. 속도 더 내도 돼."

"꽉 잡고 있어."

"아냐, 역시 좀 흔들리는 것 같아. 속이 안좋아."

"그래? 그러면.."

"응. 포션을 마셔야 겠어. 이왕이면 맛좋은 파란 게 좋겠지?"

"티파.."

"알았어 알았어. 아껴둘게."

"..."

"우후후."

클라우드는 티파와 함께 애마 펜닐에 탑승하여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펜닐은 클라우드의 다목적범용성분리합체검을 수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잠시 동안은 거꾸로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접지력과 어마어마한 마력, 눈 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가속력, 어지간한 비공정에 필적하는 속도와 주행거리를 자랑한다. 클라우드의, 클라우드를 위한, 클라우드에 의한 자랑스런 애마. 모든 것이 완벽한 바이크인 것이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티파는 펜닐의 완벽함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클라우드의 뒤에 타는 것에 난색을 표하며 사이드 카를 장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리가 협소해 장기간 탑승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클라우드는 내일 새로운 메테오가 미드갈을 향해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 안돼. 막아야 해."

"무슨 소리야?"

클라우드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펜닐은 완벽해."

"아까부터 대체 무슨.."

"사이드카는 각하한다."

클라우드는 쿨하고 냉정한 전사였다. 클라우드는 진지한 얼굴로 펜닐의 외형적 완벽함과 그가 간직한 검은 오오라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펜닐에 사이드카를 장착하는 발상의 위험성을 물리 현상에 근거하여 설명했다. 펜닐의 높은 운동성에 견디지 못한 사이드카의 강제 분리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비참한 결과에 대해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조용히 열거한 것이다. 던컨류 공중 살법의 달인인 티파조차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끔찍한 묘사였다. 이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티파에게 결정타를 날릴 시점이다. 클라우드는 속으로 심호흡하며 말을 골랐다. 전투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남은 건 좁은 좌석 문제군. 하지만 내 계산에 따르면 좌석은 전혀 좁지 않아. 실제로 티파는 나와 함께 펜닐에 탑승했던 일이 있지.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그렇군. 티파, 혹시 살쪘"

"난 돼지가 아냐-------!!!!!!!"

접시를 가루로 만드는 장타가 클라우드의 정중선을 차례로 가격한다. 전광석화같은 3연타. 기술도 신체 조건도 완벽한, 틀림없는 전성기의 티파였다. 하지만 충격에 대비하고 있었던 클라우드에게 사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 펜닐은 지켜졌다. 덧붙여 클라우드의 검은 오오라도.

.

-잠시 후.

티파는 어쩔 수 없이 뚱하지만 이상하게 상기된 얼굴로 클라우드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클라우드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등에 뺨을 기대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펜닐은 빠르게 가속할 테니 자세를 단단히 고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펜닐은 그다지 빠르게 달리지 않았다. 일반 차량과 거의 다르지 않은 속력으로 미드갈 시내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엔진음도 이상하게 큰 것 같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직 말문을 트는 것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이에 대해 티파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죄책감도 있었다. 클라우드가 속을 긁어대긴 했지만 역시 장타 러시는 도가 지나쳤다. 설마 코피가 터질 줄은 몰랐다. 자연스럽게 사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성공할 뻔 했다. 클라우드가 평소와 같았더라면.

"펜닐이.. 울고 있어."

"..뭐?"

"생각보다 짐이 무거웠던 거지."

"으아-! 내가 짐이야?! 그리고 나 살 안쪘다고!"

"하하하"

"그만 웃어!!!!!!!"

"그래서 피가 터질 때까지 때렸습니다."

"으아-------!!!!!!!"

-그리고 현재에 이른다.

미드갈을 빠져나오자 펜닐은 당연하게도 아무 문제 없이 가속했다. 클라우드는 단지 시내에서 안전히 운전하기 위해 저속으로 달렸다고 한다. 설명에 따르면 가솔린 기관은 저속 기어일 수록 속도가 낮아지는 대신 힘과 소음이 커지게 된다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지만 티파의 몸무게 이야기는 그저 농담이었을 뿐이다.

클라우드가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티파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펜닐의 속도는 극도로 단련된 티파에게도 기분 좋은 스릴을 느끼게 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 파란 포션으로 한 방 먹였으니 비긴 것으로 치자.

펜닐이 거침없이 나아갔다.

티파는 클라우드로부터 전해지는 온기를 듬뿍 즐겼다.

.
.

"거의 다왔어."

펜닐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여행이 끝나가는 것이다. 티파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돌아오는 즐거움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도착한 곳은 평범한 마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폐허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성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곳곳에 무자비한 형태로 지반이 융기되어 있다. 바위 그 자체가 녹아내린 지형도 볼 수 있었다. 최소한 '가' 급 이상, 대마법이 사용된 흔적이다.

이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증거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저 절벽에 새겨진 흉흉한 손톱자국은 틀림없이 베히모스다. 크기로 유추하면 킹 급. 팔뚝만 해도 티파보다 컸을 것 같았다. 심지어 용종의 발자국까지 보였다.

별의 에너지가 들끓는 대공동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을 법한 괴물의 흔적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었다. 평범한 마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런 일보다 훨씬 티파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다.

"저건.."

시계탑을 벽면에 세로로 길게 새겨져 있는 참격의 흔적. 자세히 보면 비슷한 것이 어디에나 있었다. 마치 이 일관적인 흔적이 모든 파괴에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역시 알아보겠어?"

클라우드가 애마의 움직임을 멈췄다. 낙석으로 길이 끊어져 있었다. 펜닐이라면 지나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효율이 좋지 못하리라. 클라우드가 아무렇게나 펜닐을 주차시켰다. 검 거치대를 열고, 6개의 검을 모두 꺼내 능숙하게 결합하고, 등에 걸었다. 이 검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금속인 아다만타이트를 제련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티파는 그 무게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맞아. 처음 와본 곳이 아니야."

클라우드와 티파는 펜닐을 내버려둔 채 낙석을 넘어 걷기 시작했다. 펜닐이 도난당할 위험 따위는 없으리라.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클라우드가 기억을 더듬어 마을의 중심지로 향한다. 괜한 상념이 함께 떠올랐다.

3년 전 대공동에서 숙적을 쓰러뜨리고 나서 클라우드를 찾아온 것은 달성감이나 해방감이 아닌 허무함이었다. 세피로스를 쓰러뜨리는 것- 가족과 에어리스의 원수를 쓰러뜨리고, 과거와 결별하는 것.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목표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목표가 사라지니 잡념만 늘었다. 특히 잭스와 에어리스에 대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이 겹쳐 내가 죽였다는 죄책감이 되었다. 용서받고 싶다. 고민 끝에 옛날 기억을 더듬어 해결사 일을 시작했다. 생각할 틈이 없으면 죄책감도 엹어지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처음 이 마을에 관계된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중년의 남성으로부터 대신 성묘에 가 줄 것을 요구받았다. 기묘한 의뢰였다. 하지만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물의 무리에게 마을 사람들이 거의 전멸.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을 포함해 불과 한 줌. 직접 가보려 해도 공포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해결사를 자처할 정도라면 나 대신 사자들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클라우드는 그와 과거의 자신을 겹쳐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니블헤임의 불 꽃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어쨌든 클라우드는 깊히 생각하지 않고 승락했다. 위치로 보건데 아무 것도 없는 시골이다. 기껏해야 블랙팽 같은 변종 늑대 놈들이나 좀 무리지어 있겠지. 그리고 클라우드는 자신의 낙관론에 배신당했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클라우드에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예상했던 블랙팡 무리들이 있었다. 다만 숫자가 백단위를 넘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마을의 초입부터 마물의 대군이 클라우드를 습격한 것이다. 게다가 이어서 나타나는 리치, 드래곤 좀비, 베히모스.. 마황이 옅은 장소에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클라우드는 강하다.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이젠 세상에서 클라우드와 1대 1로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잃고 약해졌다. 달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살아남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살아남는다고? 이런 놈들을 상대로? 그리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클라우드가 소리없이 포효했다. 베히모스의 이빨을 깨뜨리고, 드래곤 좀비의 머리를 칼몸으로 후려쳐 으깨고, 리치의 가슴팍을 깊게 쑤셔 골수채로 머리를 뽑아버리고, 화룡점정의 기세로 버스터 소드를 휘둘러 블랙팡도 일거에 쓸어버렸다. 어깨로 숨을 쉬며 정신차려보니 간신히 모양만 건사하고 있던 마을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클라우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 때도, 지금도.

"하하하. 어이없지? 마을을 이 지경으로 박살낸 건 사실 나야. 의뢰주에게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어. 이야길 듣고 찾아간 집에서 발견한 가족의 유품으로 사죄해야 했지."

티파의 표정이 흐려진다. 클라우드가 홀로 그런 방황을 하고 있을 때, 티파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세븐스 헤븐에 돌아오길 기다리고, 길을 나서는 그를 배웅할 뿐. 클라우드가 집에서 나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티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중요한 때면 티파는 움츠러 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언제까지고 그녀를 이길 수 없을 텐데.

"클라우드.. 난-"

티파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울렸다. 바람 소리 때문인지 클라우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가볍게 고했다.

"다 왔어 티파. 여기야."

"...!"

그 곳은 광대한 묘지였다. 조잡하고 제각각이긴 하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괴물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나니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사방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다는 걸 알았어. 처음엔 그냥 놔둘까도 싶었지만."

클라우드가 주머니에서 얇은 철제 병을 꺼냈다.

"문득 생각났어. 동료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뚜껑을 열고, 묘지를 향해 뿌린다.

진한 알콜 냄세. 가게에서 가장 강한, 세븐스 헤븐. 마을 하나 분의 공물로써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몇 방울 만으로도 취할 것이다.

"나를 되찾아준, 티파라면"

"클라우드.."

"그러니까 왠지 가슴이 먹먹해져서 말야. 한 번에 다 하지 못하더라도 전부 묻어주기로 했어"

수십, 수백의 십자가.

"그리고 가끔 들러서 내 나름대로 성묘를 하고 있지. 나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제 다 매장한 것 같아.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면서 조금이지만 마음이 진정되는 걸 느꼈어."

그 목소리에 그늘 따윈 없었다.

"티파는 모르는 사이에 전 해결사- 운반책의 롤모델이 되어줬어. 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건낼 수 있는 사람으로써 나 자신을 조금씩 인정할 수 있게 됐지. 이후에도 조금 곡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문득 클라우드의 등 뒤에 부드럽게 따스함이 내려앉았다.

"함께 오고 싶었어. 지금까지 날 지탱해 준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싶었어."

"클라우드."

"언제나 네가 날 구해줬어. 날 라이프 스트림의 흐름에서 꺼내줬던 것 처럼. 그 때도, 지금도. 항상 도움받고 있어."

"클라우드..!"

"네가 늘 나를 현실로 되돌려 주고 있어."

"응."

"난 네가 돌려준 내 현실을 살아갈거야."

"응."

"그런데.."

"..응?"

그런데?

"나오셨군. 1년이나 잠잠했으니 슬슬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마황. 그것도 농밀한 마황이 마을 어디에선가 뿜어져 나왔다. 마황을 느낄 수 있는 클라우드의 육체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필이면 오늘인가. 운이 없군"

티파가 클라우드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클라우드는 커다랗고 따스한 어떤 것을 잃어버린 등에서 검을 꺼내들며 거대한 상실감을 느꼈다.

티파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운이 없네."

그러자 클라우드가 그 말을 정정했다. 전투를 앞두고서도, 세븐스 헤븐에서 보여준 미소를 재현하면서.

"오해하지마. 재수없는 건 저 쪽이야."

이에 당황한 티파가 황급히 기도를 끌어올리며 심장을 단속했다.

"어?"

"오늘 내 옆에는 티파가 있으니까."

"아.."

티파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스위치를 켜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클라우드가 미소를 지운 것도 거의 동시였다.

어느 덧 사방에 몬스터가 나타나 있었다. 블랙팽.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백마리 이상. 경험 상 이 정도로 끝날 일도 없다. 하지만 아무런 위험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둘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소리를 등 뒤에 두고 올 정도로 격렬한 기세였다.

.

몸 놀림은 역시 티파가 빠르다. 한 발 앞서 블랙팽의 무리에 뛰어들었다.

"흡!"

장저를 정확하게 블랙팽의 턱에 꽂아 넣는다. 불길한 소리를 내며 머리가 비틀려 떨어져 나갔다. 즉사.

이어서 연격. 다음 녀석을 반바퀴 스핀하며 백 너클로 후려치고, 기세를 이용해 돌려차기를 날린다. 공격이 한 번 적중될 때마다 어김없이 블랙팽 한 마리가 쓰러졌다. 계속해서 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바늘 구멍도 느껴지지 않는 연타가 뿜어져 나왔다. 타격점이 실로 정확무비. 블랙팽의 개체수가 초단위로 격감했다. 마지막 실전이 거의 1년 전일텐데도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매서운 공격은 클라우드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역시 티파는 대단하다.

클라우드가 합체검에서 2번 검 오거닉스를 분리해 양손에 검을 쥐고 종횡무진 휘둘렀다. 블랙팽들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오른손의 대검이 수직으로 내려 꽂힌다. 파황격. 마황이 세 방향으로 갈라지며 진격하자 사선에 있던 블랙팽들이 차례로 양단된다. 파황격의 검격을 직접받은 블랙팽은 이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틈을 노려 공격하는 블랙팽은 왼손으로 검을 뿌려 조각냈다. 두 개의 검은 서로 다른 생명을 가진 것 처럼 움직였고 블랙팽들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클라우드와 티파는 등을 맞대고 경쟁하듯 블랙팽을 줄여 나갔다. 클라우드는 무시무시한 검기를 거리낌 없이 흩뿌렸다. 바로 옆에 있는 티파가 휘말려도 이상할 것 없는 공격. 하지만 그 무도한 공격이 티파의 동선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없다.

티파가 끌어들이고 클라우드가 한 번에 베어낸다. 클라우드의 뒤에서 달려드는 적을 티파가 한 발 앞서 뒷꿈치로 찍어 내린다. 클라우드와 티파는 동료로써 수백, 수천번의 공투를 경험했다. 이런 잔챙이를 상대할 때는 작전을 짤 필요도, 큰 목소리로 위험을 경고할 필요도, 등 뒤를 조심할 필요도, 눈 빛을 교환할 필요도 없었다. 둘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치에 맞는 합격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것을 봤다면 둘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서도 3년 동안이나 질질 끌고 있는 상황에 진절머리를 냈을 것이다.

개전 후 3분만에 둘은 400 개체가 넘는 블랙팽을 쓰러뜨렸다. 블랙팽들도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마수들이다. 어짜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티파가 가볍게 숨을 골랐다.

"후우"

"..."

클라우드는 말 없이 전방을 응시했다.

그 때와 똑같다.

다음이 온다.

"준비해 티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경고였다. 다만-

"조심해 클라우드."

한 번 더 티파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마치 별이 움직여 클라우드에게 마황을 건내는 것 같았다. 감정이 들끓고 클라우드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드디어 난 강해졌다.

무엇이 나와도 질 것 같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투기에 반응하듯 검게 변질된 마황이 압축된다. 검은 마황은 남아있는 블랙팽마저 삼켜 농축되어 간다. 이윽고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인간형태. 전고 약 4 미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신장에 필적하는 크기의 메이스.

"철거인인가.."

대공동에서 본 철거인보다는 작지만, 느껴지는 마황과 존재감 자체가 격이 다르다. 클라우드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 편이 유리하다고 직감했던 건지도 모른다. 강하다. 틀림없이 지금까지 이 곳에 등장했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우와! 왠지 클라우드 같네!"

클라우드가 철거인을 다시 뜯어본다. 하체보다 세 배는 우람한 상체. 유인원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팔과 그에 반비례하게 짧은 다리. 이번엔 아무 말 없이 티파를 바라봤다. 티파는 그 얼굴이 억울하다는 표정임을 알고 있었다. 강적을 지척에 두고서 티파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그렇게 쳐다봐도 말야. 그치? 우후후"

"..싸움에 집중해. 저건 강하다."

"우후후"

클라우드가 말 없이 뛰쳐 나갔다.

"앗 잠깐! 연계해야지!"

.

철거인이 느릿느릿 왼쪽 손날을 세워 앞으로 뻗었다. 뭉툭한 손가락 끝이 쇄도하는 클라우드들을 향한다. 클라우드의 시력이 철거인의 손가락 끝에 구멍이 있는 것을 포착했다. 마치-

"포격이 온다!"

바렛트의 총구 같았다. 우악스러운 기세의 무엇인가가 튀어나온다. 클라우드가 서둘러 오른손의 대검으로 튕겨낸다. 라이플을 막아낸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압축 공기..!"

이게 에어로라고? 쏟아지는 포격에 뒷 말은 삼킨다. 그리고 움직임의 궤적을 바꿔 포격을 피한다. 좌 우 검을 하나로 합쳐 무게와 면적을 늘리고 직격으로 날아오는 압축 공기를 선택적으로 튕겨낸다.

티파는 변칙적인 클라우드의 움직임을 똑바로 인지하고 뒤에 바로 붙어 따라온다. 클라우드가 이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

포격을 뚫고 아군의 사정권내까지 길을 열어야 하는 클라우드의 임무는 막중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3년 전에는 신라병 상대로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일이다.

이제 적과의 거리는 50 미터 남짓.

클라우드가 다리에 힘을 집중시켰다.

"하아!"

지면이 폭발하고 클라우드가 포탄처럼 튀어나간다. 인간을 초월한 각력. 한 순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그 기세 그대로 철거인의 머리에 강렬한 일격을 작렬시킨다.

클라우드의 팔에 둔중한 반작용이 돌아온다. 신경쓰지 않고 밀어붙인다. 철거인의 거체가 땅에 긴 흔적을 남기며 뒤로 죽 밀려난다.

압축 공기를 토하던 철거인의 왼쪽 팔이 클라우드를 포획하려 한다. 클라우드가 철거인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거리를 벌린다. 공격을 먹였던 철거인의 머리를 확인한다. 조금 우그러진 상처가 있을 뿐이다. 상상 이상으로 견고하다.

뒤로 떨어지는 클라우드와 교차하듯 티파가 쇄도한다. 그리고 클라우드가 공격한 그 지점에 온 몸의 체중을 실은 정권 지르기를 쑤셔 넣는다. 클라우드의 공격이 묵직하다면 티파의 공격은 폭발적이다. 순간적으로 철거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기세를 이어 되돌아오는 머리에 왼 발 옆차기가 클린히트. 뻗은 다리를 완전히 회수하지 않고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관자놀이에 왼 발 돌려차기를 꽂아넣는다. 일반적인 적이었다면 이 정도로 상황이 종료되었으리라.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티파에게 철거인이 왼 손으로 지근거리에서 압축 공기를 발사한다. 뒤로 빠졌던 클라우드가 늦지 않게 도착, 대검으로 왼팔 관절을 후려친다. 압축 공기가 표적을 잃고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검을 철거인의 팔관절에 찍어 누른채 팔의 힘만으로 클라우드가 날아오른다. 공중 제비를 돌며 중력에 원심력을 더해 다시 한 번 팔관절을 후려친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철거인의 팔관절이 역방항으로 꺾인다.

그오오오오오!

처음으로 철거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착지한 클라우드에게 오른손의 거대 메이스를 흉포한 기세로 휘두른다. 티파의 등줄기에 오싹한 전율이 달린다.

"클라..!"

클라우드가 몸 왼편에 검을 세로로 세워 땅에 박는다.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클라우드가 검째로 날아간다. ..아니, 날아가지 않는다. 뿌리 깊은 거목처럼, 땅과 하나가 된 바위 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철거인의 일격을 받아낸 것이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 메이스를 튕겨낸다. 철거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대단해.."

티파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상궤를 벗어난 클라우드의 전투 능력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질량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거동한다. 깃털처럼 가볍고, 강철보다 무겁다.

"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면서, 클라우드가 티파에게 다시 한 번 속삭인다.

"준비해, 티파."

"응? 이제 거의 끝난 것 아냐?"

"곧 마황의 핵이 놈을 회복시킬거야."

"으엑. 정말?"

"이 현상을 이제 좀 알 것 같아.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테지. 하지만."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강할 거야. 단번에 끝내자."

"알았어."

과연 철거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전보다 훨씬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클라우드가 검을 고쳐 잡고 연계 공격 신호를 보내려는 찰나-

"아앗!"

티파가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냈다. 클라우드가 덩달아 놀란다.

"티파?"

"없어졌어! 그거! 파란 포션! 떨어뜨렸나봐!"

"그럴리가 없어. 끝나면 천천히 찾아."

"안돼! 그게 없으면 난!"

티파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가슴골에 손을 넣었을 때는 클라우드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황급히 고개를 철거인 방향으로 돌리며 외쳤다.

"티파! 집중해!"

갑자기 티파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찾았다! 찾았어 클라우드!" 하지만 그 사이 철거인은 완전히 회복했고, 메이스를 양 손에 쥐고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티파!"

클라우드가 티파를 밀어 넘어뜨렸다. 티파가 어린 아이같은 소리를 내며 "꺄악" 간단히 쓰러졌다. 그것은 메이스가 클라우드에게 쳐내려지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클라우드가 메이스를 정면으로 받아낸다. 무시무시한 압력. 클라우드를 중심으로 지면이 반경 10 미터나 함몰. 클라우드가 이를 악물고 버텨낸다. 등 뒤에는 아직 티파가 쓰러져 있다.

"큭.."

잔뜩 힘을 모은 철거인이 메이스를 내려치는 속도는 음속보다도 빨랐다. 소리와 충격파가 뒤늦게 찾아온다. 파아앙! 그 충격파는 방심 상태에 빠진 티파를 날려보냈다.

"꺄아아아아악-!"

그러나 저 정도 충격파에 티파가 다칠 리 없다. 그녀를 돌아보는 대신 클라우드는 몸 상태를 점검한다. 방금 공격으로 전신에 충격. 특히 팔과 허벅지, 무릎 근섬유 파손이 예상 이상. 마황 에너지를 순환시켜 대사를 촉진. 이 정도라면 문제없어. 할 수 있다.

그 순간.

대기로부터 거대한 흔들림이 전해져 온다. 등 뒤로 폭풍같은 기세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이 자식아아아아아아아아아!"

투기로 빨갛게 달아오른 티파가 탄환같은 속도로 되돌아오고 있다. 도약. 그대로 철거인의 가슴팍에 강력한 발차기를 날린다. 철거인의 거체가 잠깐 동안이지만 부웅 날아오른다. 이를 티파가 허공을 박차고 날아들어 추격. 지켜보는 클라우드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연격을 쏟아낸다.

"너 때문에 진짜로 잃어버렸잖아-------!!!!!!!"

그제야 클라우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티파가 잃어버렸을 법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 파란 포션이다. 티파에게 알려주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 기세를 잃고 싶지 않다.

티파가 날뛰는 잠시 동안 기력도 완전히 돌아왔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황을 개방한다.

티파는 클라우드의 기감을 느꼈으나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클라우드의 공격에 맞춰 한 번에 끝장낸다. 좀 멀리 돌아왔지만 일단 그게 계획이었을 것이다.

다음 순간 클라우드가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처럼 짓쳐 들어왔다. 티파가 숨을 들이켰다.

초구무신패참.

마황을 폭주시켜, 이를 그대로 육체와 검에 실어 공격하는 클라우드의 비기 중의 비기.

하필이면 이 기술로 나왔나. 제 아무리 티파라 하더라도 이 때의 클라우드는 맞춰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굳이 클라우드가 함께 가자고 해준 날이다. 클라우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 녀석 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내 소중한 파란 포션을-------!!!!!!!'

티파가 각오를 굳힌 순간, 클라우드가 잔상을 흩날리며 철거인의 전방위에 검격을 넣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그 세피로스조차 버티지 못했던 기술에 철거인이 반응할 수 있을리 없다. 견고한 장갑에 무수한 참상이 새겨진다.

그에 맞춰 티파도 폭발적으로 가속한다. 클라우드가 공격한 바로 그 지점에 주먹을 찔러 넣고, 무릎과 팔꿈치로 짓이기고, 발차기로 뭉게 버린다. 충격이 철거인의 갑옷 속을 진탕시킨다.

클라우드는 아무런 패턴이나 전조도 없이 움직이면서 공격했고, 티파는 클라우드에 대한 마음과 철거인에 대한 분노를 에너지로 삼아 철저하게 따라 붙었다. 검의 반사광과 권격의 충격파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마치 철거인의 주위에 백억의 거울 조각이 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곧 두 사람은 전에 없던 고양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편안함마저 느껴지는 격렬함. 아찔할 정도의 쾌감. 호흡의 일치. 공명. 정신적 연결. 그 감각에 대한 표현은 이미 의미를 잃고 표류한다. 이 순간 클라우드와 티파는 서로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기세에 철거인의 무릎이 꺽이자 클라우드가 검면으로 허리를 후려친다. 거의 동시에 티파가 반대쪽 허리를 돌려찬다. 정 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가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철거인의 전신이 삐걱거린다. 그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클라우드가 도약하자, 티파가 앞으로 쓰러지는 철거인의 턱을 올려차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철거인의 머리 위로 클라우드의 최후의 공격이 떨어졌다.

마지막에는 비명조차 없었다.

철거인은 완전히 소멸했다.

.
.

클라우드가 앞장 서서 걷고 있다. 느릿느릿 티파가 뒤따른다. 뚱한 얼굴이다. 조금 전에 클라우드에게서 잃어버렸던 물건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 그 포션 찾았으니까."

"응?"

"그거. 파란 포션."

"뭐!?"

너무 심드렁해서 잠깐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티파가 절규했다.

"돌려줘-!"

"귀중한 거라고 했잖아. 또 잃어버리려고?"

"그렇지만!"

"지금의 티파에게 어떻게 이걸 맡길 수 있겠어?"

"그럼 어떡하면 돌려줄거야?"

"글쎄.. 너 하기 달렸지."

"우리 클라우드가 새디스틱해졌어!"

"무슨 소리야."

"이 엄만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그리고 결국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 티파가 입을 삐죽거렸다. 클라우드에 대한 유일한 무기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회수한 클라우드는 아까부터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껏해야 좀 단맛이 나는 포션일텐데 뭐가 저렇게 소중할까. 아무리 실수 한 번 했기로서니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

"분명히 이 앞이야."

클라우드와 티파는 저택 앞에 있었다. 아마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건물일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부터 뭘 찾는 거야?"

클라우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티파를 돌아봤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설명했잖아. 그런 표정이다. 티파도 어깨를 으쓱하며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방금까지 파란 포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 걸. 클라우드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반복했다.

"마황의 핵. 그걸 찾아 부수지 않으면 언젠가 또 같은 일이 벌어질테지."

티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그렇다는 건..!"

역시. 티파는 언제나 긍정적인 답을 찾아내곤 한다. 클라우드는 그런 티파가 늘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클라우드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담겼다.

"맞아. 그걸 부수면 이 마을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라고."

아차.

말을 뱉어놓고 클라우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3년만에 원인을 알았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너무 풀어졌다. 위대하사 라이프 스트림에 기원하건데, 제발 티파가 알아듣지 못했기를.

"엇? 클라우드가 레노 말투를 흉내냈어! 너무 웃겨! 뭐야? 언제부터야?"

빠르게도 티파는 파란 포션의 대용 병기를 발견했다. 클라우드는 갑자기 이해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클라우드는 티파에게 존재 자체가 약점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완전히 체념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줘."

클라우드는 녹이 슨 저택의 문을 열였다. 한숨을 쉬는 것 치고는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

녹 슨 쇳소리와 함께 오래된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 동물들의 박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초코보부터 방금 전까지 싸웠던 블랙팽, 그리즐리 베어까지. 모두 박제였다. 그 다채로운 콜렉션에 티파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마도 생전 집 주인의 취미이리라.

"그래.. 이런 집이었지. 이제 기억이 나."

클라우드는 시체를 탐색해 매장하기 위해 모든 집에 들렀을 것이다. 티파는 묘지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고 새삼 클라우드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다.

맞아, 그리고선 내가 참지 못하고 클라우드에게 백허그를-

"왓!"

갑자기 티파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오늘 자신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너무 들떠 있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클라우드가 그런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티파?"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냐."

"아까부터 참 이상하네."

"아하하! 신경쓰지마."

클라우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탐색을 재개했다. 희미한 마황이 집 전체에 옅게 깔려 있어서 핵의 위치를 특정짓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찾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앗! 이거 아냐?"

티파가 높게 목소리를 튕겼다. 클라우드가 피식 웃으며 티파를 돌아봤다. 어짜피 무슨 잡동사니 같은 걸 발견했겠지. 왠지 오늘 이상하게 얼이 빠져 있으니까.

그리고 티파가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쳐다봤다. 클라우드의 동공이 확 커졌다.

허름한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꺼림직한 마황. 진짜다. 저것이야말로 이 마을을 몇 년이나 괴롭힌 원흉이다. 이렇게 간단히 발견하다니! 흥분한 클라우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 강대한 철거인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 큰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티파!!"

그리고 클라우드가 티파를 덥석 껴안았다.

"잘 했어!!"

"으엑?"

실수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너무 놀랐던 것이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클라우드의 복부에, 신묘한 원인치 블로가 깨끗하게 들어갔다. 인간을 때린 것 같지 않은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헉.."

마치 복부가 꿰뚫리는 것 같은 막대한 충격. 클라우드가 배를 움켜주고 주저 앉았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이런 타격, 저 강대한 철거인을 상대할 때에도 받지 않았었는데. 눈 앞이 침침해진다. 통증이 저절로 몸을 쓰러뜨려 동그랗게 웅크리게 했다. 여긴, 여긴 지옥인가.

"크크크크클라우드!? 아 어떡해 그렇게 갑자기 껴안아서 그만! 미미미미미안해! 미안해 클라우드! 아파? 당연히 아프겠지! 아아아!"

티파가 완전히 착란 상태에 빠졌다. 저 강대한 철거인과 대적하다가 파란 포션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클라우드는 이를 악물고 마황을 총동원하여 내상을 수복했다. 끊어지려는 의식을 다잡으며, 앞으로는 티파를 절대로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맞아!!!!!!! 포포포포션!!!!!!!"

티파가 주머니에서 출발 전에 받았던 붉은 포션을 꺼내 클라우드의 입에 흘려 넣어준다. 클라우드가 깊이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끈질기지만, 저 강대한 철거인을 상대할 때에도 포션 따위는 필요없었다.

"커허어어어어"

"클라우드!"

티파가 클라우드의 머리를 와락 껴안았다. 부드러운 감촉. 가득 퍼지는 티파의 향기. 여긴, 여긴 천국인가. 오늘은 정말 바쁘구나. 그 촉감 속에서 통증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클라우드는 왠지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 괜찮아? 어디 안아파?"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가 망가졌어?!?!?!?"

클라우드는 한참동안 그렇게 티파에게 안겨있었다.

조금만 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클라우드는 눈을 감고 티파를 만끽했다.

.

"아, 정말. 괜찮아졌다면 괜찮아졌다고 말을 하란 말이야. 엄청 걱정했잖아."

"태도가 그게 뭐야. 하긴 가해자는 금방 잊어버린다더군."

"읏..!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아 그래. 나는 배가 꿰뚫리는 줄 알았어.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는 성이 안 찰 법도 하잖아?"

그래서 계속 안겨 있었지. 그 정도는 괜찮은 거 아냐?

클라우드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티파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클라우드 오늘 짖궂어.."

"하하하하하하하"

클라우드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다.

"큭큭큭. 이제 이 정도로 하고. 이거 열어보자."

티파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클라우드를 노려봤다. 클라우드는 모른 척 하고 상자를 관찰했다. 잠금 장치는 있었지만 견고하지는 않았다. 뚜껑을 움켜 쥐고 힘을 주자 간단히 열렸다.

"으엑.."

역한 냄새가 났다. 티파가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제노바.. 인가"

심장이었다. 몸체에서 떨어져 나와있는데다 반 정도는 잘려 있었다. 심지어 오늘 무진장한 마황을 방출했다. 그런 만큼 쇠약해져있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어?"

티파가 조심스럽게 들여다 봤다. 심장은 여전히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청난 생명력. 과연 제노바 세포.

"어디선가 떠돌고 있는 걸 이 집 주인이 수집품으로 삼은 것 같군.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는데도 여전히 살아있는 심장이니, 신기하기도 했을 거야. 상자에 고이 모셔놨으니 1년 전에 내린 정화의 비에도 노출되지 않았을 테지. 흠. 콜렉터로서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콜렉터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노바의 심장을 어떤 경위로 손에 넣게 된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콜렉터의 수기라도 찾아볼까 싶었지만, 이 저택의 넓이다. 바늘을 찾는 것 같은 작업이 될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지금은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아. 방금 전에는 1년 정도 다시 모은 마황으로 몬스터를 사역했겠지만."

클라우드가 라이터로 제노바의 심장에 불을 붙였다.

"지금은 이런 작은 불조차 버티지 못하겠지."

석연치 않은 점은 남아 있다. 다름아닌 제노바가 관련된 일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찌할 방도가 남아있지 않다. 이대로 운반책 일을 계속하면서 정보를 모으는 수 밖에 없다. 아니, 이번에 돌아가면 리브에게 문의해볼까.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니 티파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노바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걸까? 별일 아니라고 안심시켜줄 말을 고르고 있는 클라우드에게 티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라우드, 설마? 담배 피워?"

제노바는 커녕 단순히 손에 들려있는 라이터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이건"

클라우드가 쓴 웃음을 짓는다. 티파에게는 제노바 보다 클라우드의 흡연 여부가 더 중요한 모양이다. 클라우드는 몹시 기뻐졌고, 표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티파는 정곡을 찔렀다고 착각했다.

"시드구나. 그 골초 아저씨가 기어코!"

"아냐. 이건 일 때문에 들고 다니는 거야. 보다시피 쓸모가 있거든"

"소지품 검사를 실시하겠습니다!"

티파가 불끈 주먹을 쥐어보인다.

"담배가 나오면 시드는 죽는 거야!"

"왠지 시드에게 미안하군."

티파가 이런 시덥지도 않은 잔소리를 나에게 늘어놓다니. 클라우드는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티파가 자신을 구속하려 하다니 이보다 더 자극적인 일은 없었다. 물론 여기서는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클라우드 자신이 더 참고 싶지 않았다.

클라우드가 한 걸음 나섰다. 장난기가 발동한 무표정이다. 오직 티파만이 분간할 수 있기에 무표정이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저 입모양은 오늘 자신에게 장타러시를 맞을 때와 닮았다. 결의와 의지가 함께 읽혀졌다. 티파가 압도당해 주춤거렸다.

"뭐, 뭐야?"

"그럼 티파. 냄새라도 맡아보겠어?"

"응?"

"담배향이 나는지, 안나는지 말야."

"읏.."

클라우드가 점점 다가온다. 티파는 물러서지만 곧 퇴로가 사라졌다. 클라우드는 능숙하게 티파를 기둥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버렸기 때문인지 반항도 소극적이었다. 간단히 두 손을 잡혀 버린다. 클라우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잠깐 담배향이 나는지 시험해 볼 뿐이잖아?"

"이, 이거 놔!"

"힘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팔을 잡았다고 다 이긴 것 같아?"

클라우드가 슬쩍 아래를 봤다.

"아, 무릎. 무릎으로 뭘 할 생각이지?"

"그야 힘껏.."

"힘껏?"

"히, 힘껏.."

클라우드가 도발적으로 웃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아, 그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난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겠지. 해 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시, 시간?"

티파는 고장난 녹음기 같았다.

이런 식으론 안돼! 이런 식으론! 그럼 어떤 식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티파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결연히 선언했다.

"찰거야! 진짜로!"

그러나 클라우드는 이미 지근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경고 삼아 무릎을 슬쩍 올린 정도로, 무릎의 맨살을 통해 클라우드가 느껴질 정도로.

".......!!!!!!!"

그걸로 끝이었다. 티파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클라우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3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부끄럽고 두려운 것은 처음 뿐이었다. 클라우드는 점점 격렬해졌고, 티파도 정신없이 응했다. 클라우드는 강하고 단단했으며, 티파는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문득 티파는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잊혀져 갔다.

끝나고 나서야 두서없이 생각했다.

아, 이 저택 천정이 날아가고 없구나. 벽도 여기저기 무너진 곳 투성이고. 누가 볼 지도 모르는 야외에서 이렇게.. 정말 3년전 같아.

클라우드와 티파는 그렇게 꽤 오랫 동안 아무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말 뿐만이 아니다.

.

시간은 계속 흘렀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티파가 아쉬움을 눌러 참고 말문을 열었다.

"새벽.. 밤을 새버렸네."

클라우드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렇군. 슬슬 돌아갈까."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 가자."

그렇게 말하고서, 클라우드가 가볍게 눈을 비볐다.

"아니, 역시 좀 피곤한 것 같아."

"그래? 눈 좀 붙일래?"

"아니, 포션이면 돼. 이왕이면 맛있는 파란 게 좋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농담에 티파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가볍게 웃을 준비를 마쳤을 때 클라우드는 정말로 파란 포션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티파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아앗-------!!!!!!!"

티파가 입을 크게 벌리며 클라우드의 반인류적 배신 행위를 규탄하고 있을 때, 클라우드는 티파를 다시 한 번 배신했다.

그대로 입을 맞춘 것이다.

티파는 경악한 채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입 속으로 달콤한 포션이 전해져 오는 것을 무방비하게 받아냈다. 클라우드의 입술이 미소지으며 멀어져 간다. 티파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새삼 심장의 고동은 의지와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클라우드는 정말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포션을 음미했다. 그리고 포션 속에 숨겨진 위화감을 포착했다. 이건-

금속?

손을 입에 넣어 위화감을 꺼내 확인한다.

반지?

티파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윽고 클라우드의 녹아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티파."

티파가 젖은 눈으로 클라우드를 바라본다. 몽롱하게 그 입술이 자아내는 말을 갈구한다.

"나와 결혼해줘."

티파가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로 흐려진 클라우드가 안전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티파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클라우드는 다만 영문을 모른 채 티파를 안아 다독여줄 뿐이었다.

.
.

당초 하루만 닫아 둘 예정이었던 세븐스 헤븐은 무려 3개월이나 휴무했다. 이를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 소문의 반 정도는 사랑의 도피였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티파는 돌아왔다. 그녀의 연인과 함께.

클라우드와 티파가 돌아온 날에 맞춰 그리운 얼굴들이 세븐즈 헤븐에 모였다. 말하자면 생략된 결혼식의, 그것도 신혼여행 이후에 이루어진 피로연이다. 순서가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메테오 낙하에 따른 중력장 역전 현상의 영향으로 고철더미가 되었던 3년전의 미드갈과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았다.

동료들의 앞에서 클라우드는 어설프게 웃었다. 티파에게 청혼하고 승낙받은 그 날부터 클라우드의 안면 근육은 이상한 타이밍에 주인을 배신하곤 했다. 그러고보니 그 날 티파는 내가 망가졌다고 했었지. 과연. 바로 그 말대로다.

"하 저 병신 웃는 것 좀 보게. 좋아서 낯짝 다 풀어진 꼴 좀 보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클라우드가 시드의 말투는 원래 거칠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동료들도 경쟁적으로 시드를 거들었다.

"클라우드. 지금 메테오 낙하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리브가 점잖게 클라우드를 나무랐다. 하얀 와이셔츠에 투버튼 정장. 수수하지만 고급스러운 구두. 언제나처럼 말끔한 차림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기품있게 규탄한다. 그만큼 더 무섭고 아프다.

"마린이 얼마나 티파를 걱정했는지 알긴 하냐? 다 큰 사내가 태도를 똑바로 하지 않으니까 저 조그만 애까지 걱정하잖아. 알아 들어? 마린이 엄청 걱정했다고."

바렛트도 툴툴거렸다. 바렛트는 언제나 화제가 마린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의 딸 사랑은 날이 갈 수록 한계가 없어졌다. 언제부터인지 마린의 걱정거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바렛트에게 있어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덴젤도 바렛트에게는 이미 어엿한 범죄자였다.

"하하하. 설마하니 내가 클라우드 따위에게 지다니."

레드 서틴- 나나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요새 그는 '걸프렌드'를 찾고 있다. 그 옛날 코스모 캐니언에서 독립해 잠적한 일족의 후예를. 흔해 빠진 이성친구 사귀기가 아니다. 위대한 일족의 대를 잇는 까마득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수명이 긴 나나키는 앞으로 천년 이상을 일족 찾기에 사용할 것이다. 클라우드가 나나키를 상대로 승리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변함없이 번거로운 남자라니까, 클라우드는.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저 멀리 우타이에서 시드의 비공정을 타고 날아온 유피는 멀미약 대신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클라우드가 그녀를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본다. 도저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게다가 아직 미성년자 아니었나?

"다들 클라우드에게 너무 엄격하군. 어쩔 수 없지. 클라우드는, 내가 구해주는 것으로 하겠다."

무려 빈센트가 클라우드의 변호에 나서 줄 모양이었다. 연애 면에서 찌질함의 결정체 같은 놈이 못하는 말이 없다. 클라우드가 그런 빈센트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닥쳐."

클라우드는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물러서는 일이 없는 초일류 전사지만, 그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동료 앞에서는 한없이 약자였다.

오늘까지만 참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낙관했던 클라우드는 전망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렇다. 티파를 3년이나 더 기다리게 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덧붙여 클라우드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티파는 편안한 얼굴로 연신 웃고 있었다. 동료들의 반응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오늘은 클라우드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숨이 나왔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것은 의외로 유피였다.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키며 혀가 반 쯤 꼬인 발음으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자 이제 그만하자~? 아저씨들이 시끄럽게 떠드니까 머리만 울려~ 슬슬 신부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하지만 난 아직 한 마디도 안했는데. 클라우드가 중얼거렸지만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이번에 삐죽머리한테 받은 반지야? 도대체 저 답답이 한테서 어떻게 받은 거야?"

그렇다해도 표현이 너무 과하다. 유피에게 술을 권한 건 대체 누구야?

"마린이 섞어준 거다! 알콜은 거의 안 들어가 있어! 불만있냐!"

그럴리가요 선생님.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안전합니다. 절대 범죄자가 아닙니다.

"아이 참. 우리 바보 커플 이야기 좀 들어보자고! 모두 조용히 해봐!"

유피가 판을 깔자 티파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여봐라는 듯이 클라우드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함으로써 동료들을 모두 소화불량 상태에 쳐박았다. 그 기세가 마치 메테오 드라이브 같았다.

물론 듣고 있는 클라우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대신 파이널 헤븐을 장타 러시의 수법으로 연거푸 얻어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동료들이 기어이 폭소를 터뜨릴 때 클라우드는 라이프 스트림 속을 마황 중독 상태로 헤메이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

지난 몇 개월 동안 클라우드는 대단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정해진 시간에 세븐스 헤븐에 드나들었고,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앉지 않게 된 바에 앉고, 가게 이름을 공유하는 칵테일을 마셨다. 티파에게 눈독 들이는 놈들에게 투기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피로스 조차 압도한 투기를 동네 청년들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귀중한 손님들이 자리를 뜨는 사태에 티파가 가끔 험한 눈 빛을 보냈지만 클라우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낮에는 주로 포션을 젤리 형태로 굳히는 연구를 수행했다. 포션 특유의 강한 소독향과 역한 맛을 억제하기 위해 수십가지도 넘는 향신료와 과일 시럽을 조합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맛을 발견했을 때 클라우드는 거의 종교적 성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맛의 구도자, 클라우드. 그대, 단 맛을 갈망하는가.

그리고 심야에는 지하에 틀어박혀 반지를 가공했다. 미스릴 주괴를 마황로에 넣어 불순물을 태웠다. 마황로에는 다름아닌 클라우드 자신이 체내에서 정제한 마황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티파에게 선물할 특별한 반지를 만들기에 이 이상 적절한 설비는 없으리라. 한없이 순도가 높아진 미스릴은 엄청난 강도를 자랑한다. 똑바로 된 원형을 구현하는 것만 해도 아득한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반지 안 쪽에 글귀를 새기는 일에는 초인적인 집중력이 필요했다. 실수는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클라우드는 마사무네를 받아 넘기는 이미지로 반지 제작에 전념했다.

클라우드는 이 모든 작업을 묵묵하게 수행했다. 누구에게도 상세를 알리는 일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제 남은 것은 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유리병 뿐이었다.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예쁜 병은 생각보다 금새 찾았다. 우연히 세븐스 헤븐의 엠블렘과 닮은 문양을 하고 있는 향수병을 발견한 것이다. 티파에겐 조금 둔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 문양이 세븐스 헤븐의 엠블렘과 닮았다는 사실 자체는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의하기 힘든 호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늘 보는 익숙함은 있을 테니까. 클라우드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잠시 방심한 사이 티파는 파란색 포션 젤리와 반지가 담긴 유리병을 강탈했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빛에 비춰 보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미스릴이 반지 모양의 빛을 반사할 테니까. 마황로에서 단련되는 동안 반지에 농축된 클라우드의 마황도 영롱한 녹색 빛을 낼 것이다. 클라우드는 진심으로 동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티파는 파란 포션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어디에 보관했었는지는 한 참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티파에게 파란 포션을 되찾을 방법을 궁리하며, 클라우드는 최후의 작업에 착수했다. 펜닐에 티파와 함께 탑승해 엔진을 시끄럽게 울리며 미드갈의 시내 구석구석을 이 잡듯 돌아다닌 것이다. 티파는 미드갈에서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유명인이다. 그녀를 등 뒤에 태웠다는 사실 자체가 데몬스트레이션 효과를 가져온다. 티파가 사랑의 도피로 세븐즈 헤븐을 방치했다는 소문의 절반 정도는 클라우드가 의도했던 셈이다. 계산대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실패는 곧 죽음이다.

소위 말하는 배수의 진을 편 것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나와 티파는-

-아니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티파에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으면 털어놓을 수록, 솔직해 질 수록- 이 프로포즈가 실패하면 끝날 뿐인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 티파가 없었다면 자신은 제노바 세포를 제어하거나 스스로를 되찾을 수 없었을 테고, 허무를 극복할 수도 없었으며, 삶의 방향도 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보답하기 위해 평생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티파가 너무 애틋하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배수의 진 따위가 아니다.

결국 3년 전과 똑같다.

클라우드는 티파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령 오늘 실패하더라도 그걸로 끝낼까 보냐. 아무리 꼴사나워도, 티파가 질색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고 말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클라우드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티파에 대한 프로포즈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에 부응하는 것처럼 파란 포션도 클라우드의 손에 되돌아 왔다. 보라고. 라이프스트림도 내 편이야.

그렇게 클라우드는 티파에게 마음을 전했다.

3년이나 걸려서, 티파에게 자신의 전부를 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티파는 다시 한 번 클라우드를 구원했다.

그녀가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

아련한 눈으로 티파를 바라보고 있는 클라우드에게 시드가 비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뱉어냈다.

"푸헐! 참내, 별.. 클라우드 이 자식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자빠졌구만.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죄 떼어주면 다음엔 뭘 주려고? 이 생초짜 새끼 이거 안되겠네."

전재산의 절반을 털어 하이윈드를 대신할 비공정을 만들고, 그 비공정에 연인의 이름을 붙이고, 기어코 청혼에까지 사용한 시드가 할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오늘 클라우드는 죄인이다. 속죄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 반론도 제기하기 않았다.

"클라우드씨 역시 할 땐 하는 남자였군여. 솔찬히 놀랐어여."

리브. 뭘 얼마나 마신거야? 캣시가 튀어나왔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둬. 갭이 엄청나다고.

"티파는 아바란치의 원로니까! 울리면 가만 안둬!"

바렛트가 호쾌하게 웃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새 유피와 의기투합하여 센 놈으로 몇 병이나 비운 것 같았다.

"잠깐! 원로라고 하면 내가 할머니같잖아!"

티파가 바렛트에게 항의한다. 그야 그렇지. 티파는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그 항의가 왠지 바렛트의 위험한 스위치를 켠 것 같았다. 바렛트가 클라우드와 티파를 번갈아 훑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위험을 감지한 클라우드가 날카롭게 제지했다.

"바렛트."

"아아?"

"성희롱하면 죽는다."

"뭐야, 벌써부터 남편 행세냐?"

"경고하는 거다. 당신은 아직 티파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 설마?"

"그래. 배가 쪼개지는 줄 알았지."

"클라우드!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 저 호구새끼 진짜. 마누라한테 쳐맞고 사냐?"

"휴! 첫 날부터 그런 플레이를? 역시 아바란치의 원로! 흥분했더니 기계팔이 다 떨리는군."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 그 땐 너무 놀라서!"

"티파, 모두들 그냥 놀리고 싶은 것 뿐이야. 굳이 반응하지마."

"어라아~? 티파한테 말할 때만 목소리가 바뀌네~?"

"유피! 넌 이제 그만 마셔!"

"클라우드. 폭력에 굴해선 안돼. 어쩔 수 없군. 내가 그 상황에서 구해주는 걸로 해주지."

"하하하하.. 닥치라고."

변변치 않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클라우드는 곧 자신 또한 마음 속 깊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합세해 아내를 놀려볼까 싶었지만 후환이 두렵다. 그것도 매우. 지금 토라지면 아무래도 고달프다. 정신, 육체 양면으로 거대한 시련이 찾아오리라.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된 일이었다.

"아 정말! 클라우드! 뭐라고 말 좀 해봐!"

하지만 유혹이 찾아온다. 그녀의 새초롬한 표정을 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티파."

티파는 아직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여기서 특대급으로 한 방 터뜨려 준다. 실은 골려준다기 보다, 단순한 사실의 확인일 뿐이다. 무죄인 것이다. 뜸을 들이는 클라우드를 티파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사랑해 티파."

일부러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클라우드의 의식이 멀어졌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다음 순간 클라우드는 자신이 긴 의자에 길게 누워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은 클라우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고 마시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클라우드를 돌봐야 하지만 자리는 떠날 수 없었던 티파가 긴 의자를 가지고 왔으리라.

클라우드가 좀 더 상황을 분석했다. 관자놀이에 둔중한 타격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급소를 노리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다. 지난 번의 전투도 그렇고, 티파는 평화로워진 뒤에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 아내지만 실로 살벌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목 뒤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살결은 분명히 티파의 허벅지인 것이다. 현세에 이런 사치가 있을 수 있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클라우드는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누워있는 방향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클라우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티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티파가 숨을 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올려다보니 티파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티파가 얼굴을 사과빛으로 물들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티파는 난처해 하면서도 클라우드를 밀어내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그것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졌다. 하지만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위치는 엘보가 들어오는 거리다. 그래서-

사랑해 티파.

클라우드는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나도.

티파도 활짝 웃으며 소리없이 답했다.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아아아앗~! 둘이서 비밀 이야기하고 있어~!"

그리고 유피가 그 기척을 간파했다. 술에 취해도 빈틈이 없다. 역시 유피. 과연 닌자 마스터. 재능 낭비가 엄청나다.

클라우드가 부활하자 분위기가 다시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티파가 세븐스 헤븐을 대량 생산했고, 이를 기다리는 동안 시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품있게 졸고 있는 리브를 바렛트가 흔들어 깨우고, 흥분한 나나키는 꼬리를 붕붕 휘둘렀다. 곧 빈센트의 잔에도 세븐스 헤븐이 채워졌고- 유피는 처음부터 풀 슬로틀로 달리고 있었다.

파티는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는다.

티파와 함께라면, 남은 모든 날이 축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