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9. 19:56
익숙한 적막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홀로 구속구에 전신을 묶인 채 상태로 독방에 구금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기사단장 4명과 특무대를 구성. 모두의 힘을 합해 악마신 아스모데우스를 토벌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혀를 찼다.

인류 최대의 숙적을 쓰러뜨린 특무대장을 이렇게 취급해도 괜찮은 건가.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죄인이니까.

게다가 그 전투 중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번에야말로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장차 신의 도구로 사역당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터.

"쓸모없어졌군."

그렇게 중얼거린 때였다. 독방의 문이 열렸다.

"당치 않습니다."

붉은 기사 정복에 딱 벌어진 어깨. 균형잡힌 몸매에 1.9 미터에 달하는 큰 키. 정돈되어 있는 기감. 등에 메고 있는 것은 가문의 주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창. 스쳐 지나가게 되면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될 법한 남자다.

"랜슬롯 경."

붉은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이란 칭호가 오늘처럼 부끄러웠던 날은 없습니다."

"괜찮다면 상황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대장이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지 3일 지났습니다. 신전과 기사단 설득에 시간이 걸려 모시러 오는 것이 늦었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방금 눈을 떴을 뿐입니다."

어느 새 다가온 붉은 기사가 구속구를 하나 하나 풀기 시작했다. 섬세한 손길이다. 부상자인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겠지. 죄인인 나에게 조차 그 성정을 바꾸지 않는다. 랜슬롯 경이 기사 중의 기사라 불리우는 이유다.

랜슬롯 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흠.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랜슬롯 경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대장은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어떻게 말입니까."

랜슬롯 경은 계속 구속구를 풀어내며 말했다.

"그 날의 전투 영상을 전부 일반 공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특무대 사이의 불협화음과 추태까지 전부."

랜슬롯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당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공개해 버려도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랬다면 대장은 지금쯤 마을 꼬마들 사이에서 신의 사도라 불리우고 있었겠지요. 안심하십시오. 원로회의 늙은이들도 그 영상이 공개되면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정말이지 아둔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해 주기로 했다.

"뒷 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각오한 바입니다."

"기사단장들의 반발이 있었을텐데요."

"만장일치였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상쇄될 정도의 공입니다. 공을 취해 나눈다면 넷이서 기사단의 중추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지 않은 일로 권력을 잡아봐야 그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경솔한 짓을 하셨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경은 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구속구를 풀어내는 손이 멈췄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 경고했다.

"제 몸에 걸려있는 금제는 그대로 입니다. 이는 신께서 아직 제 원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음을 증명합니다."

"그런 정도로 제가 일을 그르칠 거라 생각하십니까. 신께서 가라사대, 원죄를 거둘 수는 없으나, 사람으로써 사람의 법도를 따를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 신탁이 있다니. 너무 상황이 형편 좋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저는 대장의 원죄에는 관심 없습니다. 어차피 이 몸은 그 날 이미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당신이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면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구속구가 전부 풀렸다. 나는 땅에 내려섰다. 손목을 주물거리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그 날의 전투를 마음 속으로 다시 그려 본다. 랜슬롯 경이 곁에 있었고, 테스타롯사 경과 조르쥬 경이 지원해 주었다. 게다가 숨통을 끊은 것은 멜리나 경이다. 내 마지막 발차기는 그저 화풀이에 불과했다. 아스모데우스를 쓰러뜨린 것은 내가 아니다. 실로 그렇다.

내 말에 랜슬롯 경이 눈이 크게 떴다가, 가늘게 좁혔다가, 가볍게 탄성을 냈다. 뭔가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이다.

"과연. 대장 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대장이 없었다면 우린 전부 죽었습니다."

이 또한 모두가 인정한 사실입니다, 하고 랜슬롯 경이 덧붙였다. 늘 생각하지만 겸손함이 지나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랜슬롯 경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랜슬롯 경은 존경할 만한 기사다. 내가 특무대장이 되었을 때 경은 기사단장이면서도 나를 대등한 전사로 대우해 주었다.

심지어 죄인에 지나지 않는 나와 함께 전술을 연구하고, 창술을 연마했으며, 진심으로 나를 따라와 주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실력자란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가.

그랬다. 그에게 조금만 야심이 있었더라면. 아깝고도 아까운 인재다. 내가 입밖에 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랜슬롯 경의 표정이 신묘해졌다.

"그...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던가. 랜슬롯 경이 말하기 괴로운 것처럼 말했다.

"이제 대장에게 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박하고 완고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어가봐야 더이상 그에게 먹힐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방을 걸어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나에게 랜슬롯 경은 황송스럽게도 가문의 창을 빌려주었다. 랜스 오브 카인이 지팡이 대신으로 사용된 일은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리라. 심지어 나는 방금 전까지 공식적으로 죄인이었다.

"저에게 날붙이를 쥐어주시면 어찌합니까."

"무한한 영광입니다."

틀렸다. 아까부터 뭔가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방 바깥에는 세 명의 기사가 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멜리사 경. 테스타롯사 경. 조르쥬 경.

왕성이 자랑하는 4인의 기사단장이 모두 모인 것이다. 죄인인 내가 이 사람들을 이끌고 아스모데우스 토벌 특무대를 구성했다는 것이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테스타롯사 경. 무탈하셨습니까."

그는 검은 갑주를 입었던 쌍검 기사. 테스타롯사 가문의 가주. 나이는 이미 장년에 접어들었으나 갑주 착용자의 기량은 신체의 노쇠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수십년의 경험을 통해 쌍검 뿐만 아니라 투검, 박투 등 다방면에 걸쳐 전투 기술을 숙련해두고 있다.

다만 그의 갑주는 아스모데우스의 일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때는 미처 신경쓰지 못해 나에겐 다소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테스타롯사 경이 감개무량한 눈 빛으로 오른손을 쥐고 심장에 올려 붙였다.

"목숨을 빚졌소이다. 내 이 은혜는 평생을 통해 갚을 것이니."

전에는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아 주었기에, 이 태도의 변화가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무사해 보여 다행이다.

테스타롯사 경으로써도 아직 내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 였으리라.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와 교대하는 것처럼 근육질의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몸은 괜찮냐? 이런 비실비실한 놈이 아스모데우스와 일기토를 벌였다니."

키가 2미터를 훌쩍 넘는 궁기사 조르쥬 경이다. 기사답지 않은 언행은 그의 의복 같은 것이다. 그는 예의를 중시하는 기사단에서 단지 실적만으로 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스모데우스를 애꾸로 만든 강궁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한결 수월했습니다."

조르쥬 경의 푸른 갑주가 마음을 먹고 저격을 시작하면 그것은 천재지변에 가깝다. 누구도 그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켁. 그만둬 그만둬."

조르쥬 경은 손사래를 치고 뒤로 물러섰다.

"대장."

고개를 돌린 곳에는 멜리사 경이 있었다. 가벼운 예장에 허리춤에 얇은 레이피어를 차고 있을 뿐이지만 그 기백은 틀림없는 기사단장의 그것이다.

"멜리사 경."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저 무시무시한 노란 갑주의 장착자일 거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랜슬롯 경이나 테스타롯사 경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녀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일격에 목숨을 빚지고 있다.

그녀가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이건... 상상 이상이군요."

"?"

"마음에 직접 울리는 플러팅이라니."

"네? 지금 무슨 말씀을..."

등 뒤로 랜슬롯이 필사적으로 손사레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세로 손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니까.

조금 추울 정도였다. 슬슬 그만뒀으면 한다.

"뭐, 좋아요. 랜슬롯 경을 가장 존경하는 대장. 저도 대장에게 그 존경이란 걸 받고 싶네요."

어라. 내가 그런 말을 입밖에 냈던가.

"멜리사 경!"

랜슬롯 경이 그 답지 않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랜슬롯 경은 헛기침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대장을 숙소로 모십시다. 멜리사 경. 대장에게 간단한 회복 법술을 부탁합니다."

멜리사 경의 눈썹이 묘하게 휘어졌다.

"그런 것은 섬세하고 남자다운 기사 중의 기사께서 하셔야 할... 아, 네, 알았어요. 농입니다. 그리 노려보실 것까지야."

그리고 나는 전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