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8. 3. 27. 07:19
보라고! 저 얼굴.



우리 폐하, 너무 대단하지 않아?



.

검이란 곧, 왕께서 사용하는 무기.

이그니스 스키엔티아에게 검이란 그런 것이다.

이그니스가 아직 어렸을 때 강대한 시해가 인섬니아의 견고한 성벽을 한칼에 베고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레기스 폐하께서 직접 검을 들고 토벌에 나섰다.

그 때 이그니스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예복을 입고 나선 왕께선 산보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시해를 상대했다. 생전에는 상당한 검호였을 터인 그 시해는 왕국 수장의 스카프 한장 베지 못하고 토벌되었다. 이그니스가 레기스를 동경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치를 배우고 장차 그 지식을 통해 왕자를 보좌해야 할 이그니스는 자신이 왕자의 옥체까지 지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전사로써 장래가 촉망되기로 그 왼편에 설 자가 없다고 평가받는 글라디올러스가 차기 왕의 방패로써 왕자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했다. 그 답지 않은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

경위야 어떻든 레기스 폐하의 신위를 꿈에 그리며 착실하게 육체를 단련한 끝에 슬슬 무기를 들 수 있겠다고 자평한 이그니스는, 그러나 검의 스승을 찾지는 못했다. 언감생심 왕의 병장을 배운다는 행위가 불경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젊은 킹스 글레이브에게 부탁해 창과 단검을 익혔다.

이그니스는 정치보다 무예에 적성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급격히 강해졌다. 어느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재능은 불사장군조차 인정했을 정도였다. 잠시 코르의 동작을 살펴 본 것만으로 노련하게 카타나를 다루는 이그니스는 명백히 태생부터 전사였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그니스의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코르는 왕국군 추천을 목 아래에 삼켰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매우 가끔씩, 충동이 찾아온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레기스 폐하 이상으로 검의 극에 달한, 선택받은 왕과 고락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그랬다.

이제 검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은 레기스 폐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충동은 더이상 억누를 수 없어 이그니스를 삼켜 버리곤 한다. 그런 날이면 늘 그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그니스는 어깨를 드러내는 가벼운 복장으로 실내 단련실 중앙에 섰다. 이 시간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후로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그는 이런 고요한 장소를 마음 속 깊히 즐겼다.

수음이라도 하는 것 같군.

이그니스가 웃었다. 하지만 곧 그런 부끄러운 생각도 지워 버렸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후 이그니스는 정말 많은 것을 버렸다. 쓸데없는 것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버릇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이윽고 이그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그니스가 그리는 검의 궤적은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발 밑에서 피어오르는 먼지조차 양단하는 그 검이 베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가하면 그의 검은 유려하고 연속적이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 홀로 숙달한 이 검술로 이그니스는 스스로의 상상 속,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모든 가상 공격을 쳐냈다. 주위에 검사가 있었더라면 그 명료하고 이상적인 움직임을 통해 이그니스를 공격하는 그림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글라디올러스 아미티시아.

이그니스의 검무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제는 없어져 버린 왕 대신 왕국에 없어서는 안될 재상을 지키고 있는 방패.

그도 그런 달인 중 하나였다.

.

글라디오는 흐뭇한 얼굴로 그 검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떠냐. 내 친구 굉장하지.

친구의 기량을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던 글라디오는 이그니스가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프롬프토 마냥 이 검무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글라디오의 뇌리에 어떤 계획이 떠올랐다. 어떤 의미로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글라디오."

글라디오가 옳지 못한 상상을 펼치려는 때에 검무를 끝낸 이그니스가 뒤를 돌아 글라디오를 바라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지 십수년이 흘렀으나, 이그니스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시선을 맞춰온다. 글라디오는 이그니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가슴 한켠이 시리도록 아파온다.

그러나 글라디오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활짝 웃으며 사려깊은 친구를 맞이했다.

"여어. 여전히 화려하시구만."

"그냥 보통이지."

이그니스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 거만한 글레이브 놈들에게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흥. 입만 산 놈들."

글라디오가 슬쩍 본심을 드러냈다.

"별로 숨길 생각은 없지만."

이그니스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친구가 대신 화를 내줬거든. 넘칠 만큼. 그러니 나는 더 할일이 없더군."

글라디오가 코웃음을 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글라디오가 일을 거의 망칠 뻔 했다는 것을, 이그니스는 굳이 입밖에 내지 않았다.

.

왕의 힘을 빌어 전장을 누비던 전사들은 스스로를 더이상 킹스 글레이브라 부르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힘을 빌릴 왕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으나, 자중하는 의미도 있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킹스 글레이브의 절반은 왕을 배신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잃어버린 10년간 선택받은 왕께서 거하신 섬을 지켜왔던 그들의 영광스러운 리더, 글레이브 커맨더가 검신 바하무트에게 그 힘을 인정받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녀조차 그들에게서 배신자의 낙인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죄책감은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왕의 이름을 걸고 활동할 수는 없다.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긍지가 있었다.

시해의 군세를 상대로 10년이나 최전선에서 싸웠다. 레스탈룸을, 가디나 나루터를, 인류의 거점을 탈환하고 지켜왔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과거의 죗값은 모두 치뤘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으로 글레이브들은 만족했다.

만족했다고 생각했다.

불사장군이 왕의 최후를 지켜봤던 왕의 친구들- 글라디오, 이그니스, 프롬프토만을 굳이 킹스 글레이브라 부르며 존중하기 전까지는.

처음 그 소식을 듣게 된 글레이브들은 뭔가의 착오라고, 그 새파란 것들에게 왕의 칭호를 허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르는 그것이 선왕께서 가장 힘들 때 그와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라고 생각했다.

이를 심드렁하게 받아들인 것은, 코르 장군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글라디오 뿐이었다.

실은 이그니스나 프롬프토는 몇 번이나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사장군은 그들을 끝까지 킹스 글레이브로 대우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완고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는 글레이브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왕의 방패인 아미티시아 가의 장남은 차치하고서라도, 재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도 보이지 않는 병신이나 사진 따윌 찍으러 돌아다니기에 여념이 없는 경박한 제국놈을, 저 위대한 루시스 왕국이 낳은 전사 중의 전사를 의미하는 킹스 글레이브라 불러야 한다니. 이만저만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불만은 날이 갈 수록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았고, 사달이 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글라디오가 자신이 흘려듣던 비아냥을 친구들 또한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난 베히모스처럼 격분했던 것이다.

프롬프토가 있었다면 그 모든 비아냥을 웃어 넘기면서 글라디오를 다독였겠지만 그는 지금 여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입장 상 글라디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글라디오가 누굴 위해 화를 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글라디오는 글레이브들에게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며 폭언을 쏟아냈다.

"왕의 힘 없이는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반편이 놈들이. 같은 말을 내 앞에서도 해보지 그래."

성정이 격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글레이브들이 코웃음치며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요?" 글라디오의 분수를 바로 잡으려 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쩌시려오?" 그리고 글라디오는 그들을 전부 쓰러뜨렸다.

대련을 명목으로 하루에 다섯 씩, 많을 때는 수십을 상대했다. 글레이브들에게는 젊은 방패가 보여주는 치기를 야유할 틈도 없었다. 글라디오는 차 한잔 마시는 시간 이상은 할애하지 않으며 글레이브들을 하나하나 박살냈다.

글레이브들은 글라디오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으며, 그 추상같은 공격을 1분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그것은 역전의 용사로 이름 높은 리베르투스도 마찬가지였고, 그와 동기였던 베테랑들도 글라디오의 실력을 인정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어떤 글레이브들은 글라디오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칭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전처럼 왕께서 하사하신 마력만 사용할 수 있다면 저깟 놈 쯤은. 그렇게 생각하는 글레이브들이 태반을 넘었다.

그렇게 결국 글레이브 커맨더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글라디오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글라디오도 커맨더에게 만큼은 폭언을 뱉지 않았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결과는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글라디오는 단 일격에 커맨더를 거꾸러뜨렸다.

저 불사장군이라 한들, 붉은 용기사라 한들 이런 일격을 발할 수 있을 것인가.

커맨더는 땅에 몇 번이나 부딛히며 거의 10미터나 날아갔다. 방어에 사용한 단검은 격돌하는 순간 산산 조각나 그녀의 몸 곳곳에 파고 들었다. 이를 적출하려면 수술이 필요하리라.

드디어 글레이브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다. 왕의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저 글레이브 커맨더가 저렇게 한순간에 당할 리가 없다. 글레이브들이 웅성 거리다가, 이윽고 그 웅성거림이 사자후에 이르렀다.

사기다.

인정할 수 없다.

일촉즉발의 긴장.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

대규모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을 것 처럼 보였다.

이 때 만큼은 저 담대한 이그니스조차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글라디오는 다만 승자로써 당당하게 서 있었을 뿐이다.

그 때 커맨더가 피를 철철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손 짓 하나로 모든 불만을 잠재웠다. 계속 싸운다는 수신호였다. 글레이브들은 침묵했다. 커맨더가 이대로 승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바, 이를 지켜보는 것이 전사의 도리. 커맨더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일으켜 저 무도한 사내를 굴복시키는 장면을 상상하는 글레이브도 있었다.

그렇게 커맨더는 맨손으로 글라디오에게 달려들었다. 글라디오 또한 무기를 놓고 이에 응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커맨더는 글라디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커맨더의 발길질은 매섭고 날카로웠으나 글라디오의 견고한 방어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빠른 손놀림은 단검을 쥐고 있을 때에나 치명적일 수 있었다. 무기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맨손 박투가 되면 필연적으로 체격이 큰 쪽이 우위에 설 수 밖에 없다. 글라디오는 용서없이 글레이브 커맨더를 몰아쳤다. 커맨더는 수 없이 나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몇번이고 일어서서 싸웠다. 보다 못한 글레이브들이 패배를 인정했을 때 커맨더는겨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글레이브 커맨더로써의 비뚤어진 자존심이 아니다. 그녀는 완전한 패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글레이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중요한 시기에 격분한 글레이브들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척을 지게 되었을 터이다.

이그니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에 비해 이 아둔한 녀석은.

이그니스는 아까부터 실실 거리고 있는 글라디오의 분위기를 탐색했다.

그리고 곧 포기했다.

틀렸다. 이 친구에게 커맨더의 깊은 뜻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러므로 이그니스는 다 내려놓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빈약한 분야가 있는 법이다.

.

이그니스는 글라디오가 건낸 수건을 받아들고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 때... 커맨더에게 전력을 다했지? 글라디오."

글라디오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이그니스.

이래보여도 보는 눈이 있다. 글라디오는 자신이 생각해낸 역설적인 진실을 입밖에 내놓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잘도 알아챘네. 뭐, 전성기 땐 우리 셋이서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였어. 처음 일격으로 쓰러뜨리지 못했다면 승부가 어디로 굴러갔을지. 그녀는 빠르거든."

"글레이브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커맨더의 자리도 위태위태해 진 것 같더군."

"그릇들이 그것밖에 안되는 거야. 그것도 특수 부대라고."

"글레이브 커맨더는 만나러 가봤나? 병문안 말이다."

"켁. 내가 왜? 나 아직도 화 안풀렸다."

"글라디오. 여성을 그렇게 상처 입히고도."

"전사에게 실례다, 이그니스. 넌 그래서 안되는 거야."

"..."

"나 원참, 이런 놈에게 어째서 하이윈드 경이."

그 말 만큼은 흘려들을 수 없다.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말을 가로챘다.

"왜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글라디오도 지지 않았다. 눈을 치뜨고 이그니스가 범하고 있는 오류를 지적했다.

"글레이브 커맨더나 하이윈드 경 같은 전사에게 여성이라며 지켜주겠다는 말이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젠장, 내가 이런 놈에게 지다니."

하지만 이제껏 이그니스는 글라디오에게 한 마디도 져 본 일이 없다. 이그니스의 포문이 열렸다.

"글라디오. 하이윈드 경은 트로피가 아니야. 그리고."

이그니스는 신중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경이 선택한 것은 나다."

울컥한 글라디오가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를 드러냈다.

"젠장. 잘도 지껄였겠다."

아차.

이그니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한 판 붙자. 오래간만에."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정말로 분한 것 같았다.

이그니스는 괜한 도발을 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하이윈드 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겨루게 되는 것이 이번이 일곱 번째다. 이리 될 것을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엎질러진 물인가.

이그니스는 포기했다.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할까."

"흥. 바라는 바야."

글라디오는 바로 기세를 끌어올리려다 말고 움찔거렸다.

"글라디오?"

이그니스는 글라디오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것 참. 별 일도 다 있군.

글라디오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리 나와. 장소는 내가 정한다."

.

글라디오가 앞장 서고, 이그니스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조금 후 그들은 무기고에서 저마다 애병들을 찾아들고 야외 연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을 마지막으로 수행할 때 사용했던 무기들이다. 손질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이윽고 둘은 연병장에 도착했다.

저마다 훈련하고 있던 글레이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그니스는 오늘 완전히 구경거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글라디오와 마주 섰다.

글라디오가 연병장 바닥에 대검을 깊숙하게 꽂아 넣고, 방패를 검에 기울여 걸쳤다. 그가 오른 쪽 어깨를 빙글빙글 돌려 근육을 풀면서 말했다.

"이그니스. 전력을 다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그니스가 보이지 않는 눈을 치켜 떴다.

"진심이야, 글라디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잖아. 한 번에 다 해결하자고. 우리들 중 누가 강한지."

글라디오가 위험하게 웃었다.

"우리가 왜 킹스 글레이브라 불리는지."

이그니스는 양손에 쌍검을 쥐고 글라디오를 겨냥했다.

"그것도 좋겠지. 아라네아의 이야기가 나오면 결투하는 짓을 그만두는 게 조건이다."

아라네아라. 둘 만 있을 때에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나보군. 글라디오가 작게 으르렁 거렸다.

"오늘 따라 매우 꼴보기 싫으네."

그 직후, 이그니스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글레이브들은 녹티스 폐하의 마지막 친구들이 왜 킹스 글레이브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 처음 격돌을, 글레이브들은 육안으로 확인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거침이 없는 것일까. 이그니스의 단검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친구의 목 울대를 노렸다. 글라디오가 막지 않았더라면 즉사였다. 몇몇 글레이브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공격을 신호로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졌다.

글레이브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맹인 전사는 온몸에 불꽃과 뇌전, 얼음을 두르고 섬광처럼 움직이며 글라디오의 온갖 급소를 공격했다. 눈으로 따르기에도 벅찬 속도였다.

글라디오는 저 전설로 전해지는 길가메시의 태도를 추가로 소환해 쌍대검을 막대기 마냥 휘두르며 이에 대응. 그 검풍이 마치 용오름 같았다. 두 사람은 폭풍같은 기세를 조금도 갈무리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흩뿌렸다.

글레이브들은 숨을 쉬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이 싸움을 지켜 보았다.

엘리먼트.

무장소환.

틀림없다. 글라디오와 이그니스에게는 명백히 마력 사용이 허가되어 있었다. 왕이 사라진 지금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 싸움은 신화의 연장선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이 기량.

선왕께서 건재했을 때의 글레이브 커맨더조차 이와 같았을까. 모든 글레이브들은 무인이었다. 무인으로써 이들의 신위를 두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왕의 친구들에 대한 헤묵은 감정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글레이브들의 고함과 탄성 속에서 두 전사들의 싸움은 격렬함을 더해 갔다.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 같던 둘의 싸움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글라디오와 이그니스가 그 격전 속에서 저마다 비장의 기술을 준비할 때, 붉은 용기사 아라네아 하이윈드가 난입했기 때문이었다.

.

"너희들, 날 핑계로 장난질 하면 죽는다 그랬어 안그랬어?"

붉은 용기사는 의외의 사태에 일순 굳어버린 글라디오의 턱에는 신속한 돌려차기를, 쭈뼛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이그니스의 입에는 혀를 선물했다. 불의의 일격에 뇌진탕을 일으킨 글라디오는 힘없이 허물어졌고, 뒷머리를 붙잡힌 이그니스는 감히 그녀의 치명적이고 보드라운 병기에 상처입힐까 두려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 쉬이 대응하지 못했다. 연병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라네아의 입술이 떨어지자 이그니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라네아. 여성이 이런 곳에서 남성에게."

"아 오늘 나랑 씹할 놈 말 존나 많네."

글레이브들이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곱게 자란 이그니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폭언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그니스의 눈썹이 살짝 흔들린 순간 아라네아가 이그니스의 허리를 무정하게 꺾어 버렸다. 그리고 아라네아는 완전히 무력화된 이그니스의 입에 다시 한 번 그녀의 붉은 창을 꽂아 넣었다. 거신 타이탄인들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싶은 장절한 공격이었다.

글레이브들은 황망하게 끝난 신들의 싸움을 아쉬워 해야 할지, 신성한 연병장에서 연애질을 하고 있는 높으신 분들에게 지랄을 떨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곧 자신들은 이 박력 넘치는 용기사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의견에 뜻을 같이 했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글레이브들은 시해의 피를 삼킨 것 같은 얼굴로 뿔뿔히 흩어졌다.

두 입술은 마지막 남은 글레이브가 주섬주섬 사라질 때 쯤에야 떨어졌다. 두 사람의 타액이 길게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아, 아라네아."

이그니스는 허리가 끊어질 것 처럼 아팠지만 감히 내색할 수 없었다. 천하의 이그니스도 지금 포커 페이스를 유지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라네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씨익 웃었다.

"날 기다리게 한 벌이야. 얼른 가자."

이그니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네 방이지. 약속했잖아."

이그니스가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요리. 아아, 요리를 해주기로 했었지."

"그래.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아라네아는 이그니스의 팔을 움켜쥐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자타공인, 킹스 글레이브라 불리우는 기적의 전사도 이를 거부할 수 없었으니 이 자리에서 누가 진정 강자인지 결정된 셈이다. 그 와중에 아라네아는 글라디오에게 서슬 퍼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지, 그 눈 빛은?

하이윈드 경. 아라네아 씨.

아니야. 아니라고.

글라디오는 다만 글레이브들에게 친구를, 강하고 스타일리시한, 킹스 글레이브의 필두- 이그니스 스키엔티아를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 만큼은 결코 치정 싸움이 아닌 것이다.

글라디오는 뇌가 흔들려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뇌까렸다.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그런 글라디오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답받는 것은 먼 훗 날의 일이었다.

오늘은 아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