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nameless7777 2019. 1. 7. 12:21
녹트가 돌아온다면.

"녹트가 돌아온다면 역시 캠핑이지. 요즘에는 오프 로드카에 물건을 잔뜩 싣고 다니는 게 대세야. 아직도 밤엔 위험해서 칸나기의 수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좋아졌지. 어차피 뭐가 문제야. 루시스의 빛께서 함께 하시는데. 왕이 모는 차에 타고 캠핑하러 가다니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건 우리들 밖에 없을 거야."

"녹트가 돌아온다면 난 낚시를 배울 거다. 그동안 어째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내가 잡은 물고기가 더 많다면 녹트가 요리를 배울지도 모르지."

"녹트가 돌아온다면 같이 사진을 찍을거야! 녹트가 귀찮아해서 그렇지 감각은 있어. 어설픈 테크닉에 구애받지 않고 피사체 본연의 아름다움이랄까, 그걸 꾸밈없이 정확하게 프레임에 담아낸다구. 오싹하지. 나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으음."

"응? 글라디오?"

"조금 생각해봤는데, 역시 아니야. 원한다면 왕께선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아도 돼. 요즘 나오는 오프로드 카는 내가 앉아 있기에도 커. 운전 내가 하지 뭐. 그러다 길잃은 베히모스가 있으면 넓적다리 살을 좀 얻어서."

"또 컵라면인가."

"컵라면이 어디가 어때서 그래."

"흠. 그렇군. 나도 녹트에게 요리를 강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요리든 녹트가 가장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니까."

"이그니스는 이제 콩으로도 스테이크를 굽는다지. 미친. 시드할배가 어찌나 자랑하던지."

"맛은 그냥 보통이다."

"어련하시겠어. 군사님께서 만든 스타일리시한 콩 스테이크라니. 내 컵라면에 넣어줘도 좋아."

"글라디오 컵라면 진짜 좋아하는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그래.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이 200장도 안된단 말야.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않아? 그래도 단체 사진은 내가 제일 잘 찍으니까. 녹트가 너무 수고하지 않아도 돼."

"녹트에게 달렸지."

"응."

"맞아."

"..."

"..."

"..."

"...우리... 이길 수 있을거야. 그렇지?"

"물론이다. 내 방패에 걸고."

"반드시."

.

희끗희끗하게 눈이 흩날리는 밤, 코르는 비어있는 왕좌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왕좌의 주위는 꽃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까마득한 과거 연인 관계 였던 왕과 칸나기가 맺었다고 전해지는 영혼의 결혼식을 연출한 것이다. 녹티스님과 루나프레나님도 반드시 그러했을 것이다. 영혼의 합일을 이룬 그들은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인섬니아를 굽어 살필 것이다. 그렇게 소망하면서. 그래서 꽃들은 몹시 아름답고 허무했다. 114대 루시스 왕 그 자신처럼.

궁 바깥에서는 목전으로 다가온 시해 대군의 마지막 습격에 대비한 바리케이트와 대형 트랩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1년 전에 글라디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실무에서 벗어난 코르에게는 실질적으로 할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틈도 없다. 그리고 이제와서 뒤돌아 볼 수도 없다. 투쟁과 싸움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한 자기 위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코르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젊었을 때 그는 늘 초조했다. 결국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경호를 내팽겨친 뒤 초대 왕의 방패 길가메시에게 도전했다. 코르는 위대한 검성의 팔은 거두었음에도 승리하지 못했다. 돌아와 생각하면 이유는 명백하다. 치기어린 코르의 검에는 절박함이 부족했다.

왕의 방패가 누릴 수 있었던 명예도 그를 비켜갔다. 왕께서는 코르가 자신을 보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킹 레기스의 방패 클라루스. 그는 행복한 자다. 평생을 충실하게 살았다. 그래, 죽음 조차 그를 축복했다. 그는 모시는 왕의 눈 앞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으므로.

클라루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로, 코르는 스스로 글라디올러스의 이정표가 되었다. 아이리스가 어엿한 전사가 되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지켜 주었다. 글라디오는 젊은 나이에 이미 코르 장군을 넘어 검성 길가매시를 발 아래 두었고, 악마 살해자라 불리우는 아이리스의 명성도 그에 못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코르 그 자신의 명예가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코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군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시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정돈된 기감이 등 뒤로 느껴졌다. 코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 장소에 그 만큼 어울리지 않았던 자도 드물 것이다.

"제네럴 로키."

"코르 장군."

로키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 강한 그가 고개를 숙이는 상대는 코르가 유일하다. 결국 로키는 코르를 이길 수 없었다. 시해를 상대로 함께 싸우게 된 지금 더이상 코르와 겨룰 수도 없게 되었다. 코르에게 호승심을 가지고 있었던 로키는, 그러나 더이상 그 사실이 그렇게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그 코르 장군이 엄한 목소리로 로키를 맞이했다.

"왕께서 거하시는 자리요. 그에 맞는 경의를 요구하지."

"그 왕이 없어서야 의미가 없지 않겠소. 게다가 내 왕이 아닌 것을 어쩌겠소."

로키는 짐짓 무심한 척 코르의 심경을 건드렸다. 오랜 습관같은, 그러나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다.  코르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가자 로키는 이내 후회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빛을 가져오셨지. 경솔했소. 내 사과하리다."

로키가 순순히 사과하자 코르도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제네럴 로키야말로 이곳엔 무슨 일이신가."

"오랜 숙적이자 맹우가 와 있다는 데, 내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오래간만에 뵙소. 코르 장군."

"그만. 난 더 이상 장군이 아니니."

"그 무슨. 장군은 언제까지나 맹장이오 영걸이니. 다시는 그런 말씀 꺼내지 마시오."

로키는 아직 젊었다.

그러므로 그 언행이 몸에 맞지 않을 법도 했으나, 이제는 제법 태가 나는 것이 과연 제국 굴지의 가문을 이끄는 당주다웠다. 그 많은 시련들이 이 사내를 착실히 단련시켰던 것이다. 코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를 본 로키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불사장군께서 오셨으니 왕도 방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겠구려."

코르는 자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마음을 후벼 꺼내는 일은 있다.

불사장군.

그 빌어먹을 불사장군.

"나는 실패자다. 이제는 무엇하나 할 줄 모르고, 지금까지 무엇하나 이루지 못한."

불타오르는 것 같은 코르의 눈동자에 로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코르 장군이 평정을 잃었다? 그 냉철한 코르가?

이 내가 그 정도의 실수를 한건가?

아니다.

이상하다.

오늘 코르는 명백하게 이상하다.

"코르 장군...?"

"불사장군이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야. 아군의 시체로 쌓아올린 끔찍한 별명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래, 12년 전 그 날까지."

로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로키는 지금, 코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나는 그 운명의 날 왕께 주제넘게도, 새벽이 밝아오면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로키는 목울대에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로키의 침묵 속에 코르가 자신의 허물을 입에 담았다.

"새벽이 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처연한 목소리에 힘이, 분노가 서렸다.

"제네럴 로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물으셨나."

코르는 선언하는 것 처럼 말했다.

"나는 불사장군으로써가 아니라 전사로써 이곳에 왔다네. 이번에야말로 신명을 다해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야. 거짓된 조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기 위해. 왕께서 찾아 주신 빛을 잇기 위해. 그것을 왕께 고하러 왔을 뿐."

코르는 로키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로키는 왜 자신이 잠자코 코르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것은 유언이었다.

.

인섬니아의 전역에서는 레스탈툼으로의 피난이 한창이었다. 아이리스는 길게 늘어선 차량과 탑승 대기 중인 피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섬니아 시민들의 면면은 굳어있었고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으나 질서를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왕께서 탈환한 땅의 시민으로써 의식이 높았고, 왕궁 경비대가 체계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데몬 슬레이어로 이름높은 아이리스가 곁에서 호위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 데몬 슬레이어는 과연 늠름했다. 시민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을 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나 부관, 가령 글라디오나 탈코트라면 그 표정에 한 조각 회한이 떠올라 있음을 알아챘으리라.

아이리스는 자기 분석에 객관적인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지 똑바로 알고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다름아닌 코르에 대한 불만이다. 그의 검이 지금 그녀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렸다. 살짝만 꺼내보아도 눈부신 검신이 나타난다. 빈틈없이 손질되어 있는 검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것이 마치 코르를 상징하는 것 같아 화가 나면서도 흐뭇하다.

아이리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미소를 짓는 지난한 기술을 성공시켰다. 거울을 보면 스스로의 얼굴이 어떤 지경일지 상상하고 있을 무렵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이다.

"의외네. 좀 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데몬 슬레이어가 역전의 용사를 맞이했다.

"아라네아."

아라네아는 아이리스는 피난민들을 레스탈툼까지 지키며 호송하는 경비 대장을 맡았다는 보고를 듣고 발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아이리스는 시해를 맨손으로도 때려 죽이는, 그야말로 무문의 상징 아미티시아 가문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완력을 지닌 전사다. 이 실력에 이런 인선은 어떻게 봐도 차별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명하복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행히도 아이리스의 얼굴을 덮고 있는 그늘은 생각보다 옅어 보였다. 아라네아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리스."

용기사 아라네아를 보고 있으면 아이리스는 자신이 아직도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렇다. 아이리스는 아라네아의 강함, 늠름함, 배포, 포용력,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부러웠다. 아쉽지만 글라디올러스가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도 납득이 간다. 아니, 아쉬울 것이 무엇인가. 딱히 아이리스와 아라네아 사이에 달라질 것은 없다.

아라네아의 시선이 아이리스의 허리에 머물렀다.

"코르 장군이 주셨다던 검이구나. 이어받기로 결심했다더니."

"떠넘긴 거죠. 딸을 족쇄로 묶다니 이게 아버지가 할 일이야? 나같은 딸내미가 생겼으면 기뻐서 울어 보이지는 못할 망정."

그 날.

시해의 대규모 공습을 앞두고, 겨우 용기를 낸 아이리스가 코르에게 아버지라 불러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본 그 날.

잠시 아이리스를 응시하던 코르는 신중한 동작으로 검을 풀어 아이리스에게 건냈다. 엉겁결에 검을 받아든 아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저기, 코르... 아... 저씨?"

아.

인자한 눈이다.

아이리스가 코르의 표정을 알아보았다. 아이리스가 어리광을 부릴 때 늘 보여주는 얼굴이다.

코르가 답했다.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있는 선물이 달리 없구나. 내게 가장 소중했던 것이다."

명도 코테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선왕 레기스의 가호를 받았던 둘도 없는 검이다.

그런 검을 넘겨 받는다.

그 속의 의미를 몰라서야 전사로써의 자격이 없다. 아이리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코르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코르의 미소가 깊어졌다.

이것으로 둘의 관계는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코르는 모든 변변치 않은 아버지가 그러는 것 처럼 그녀의 감동을 단칼에 박살냈다.

"그 검에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전장에 나서는 것을 금지한다. 알겠니, 아이리스?"

표정은 자상한 아버지 그대로였다.

그는 진정으로 아이리스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없어.

나는 데몬 슬레이어다.

그딴 배려 따윈 필요없어!

그 날의 일을 떠올린 것만으로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분노로 넘실거렸다. 아라네아는 그 눈을 보고 알아챘다.

아차, 그렇구나.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아라네아는 자신이 정식으로 창을 배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너처럼 꽃같은 아가씨가, 그 가녀린 팔로, 우락부락하고 머저리같은 사내들 사이에서. 그래, 분명 그 때의 나는 지금 아이리스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라네아는 그런 아버지를 뿌리치는데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 머저리같은 사내들- 하이윈드가의 사병들을 모조리 거꾸러뜨려야 했던 것이다. 그 끔찍한 기억이 아라네아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내가 괜한 화제를 꺼낸 건 아닐까.

"그... 저기... 괜찮겠어?"

아라네아가 조심조심 물었다. 그녀의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을 보며 아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이럴 때 그렇게나 강단있는 용기사경은 본인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도 면목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이리스는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도 거리낄 것도 없다고 설명하는 대신 자세를 잡고 발도했다.

검을 뽑는 소리 대신, 지축을 울리는 기세와 소리를 가르는 충격파만 남는, 글레이브의 검기.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뿌려진 쾌검이 검집으로 납도되는 순간은 아라네아 정도 되는 전사가 아니면 인식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공간을 갈라버리는 검.

역전의 글레이브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피난민의 호위 대장은 탈코트가 맡기로 했어요. 시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쯤은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아이리스가 검을 놓고 팔짱을 끼며 진심을 드러냈다.

"내가 가긴 어딜가. 딸내미가 그간 뭘 연습하는지도 모르는 아빠 주제에 폼 잡긴. 내가 수염 다 뜯어버릴거야."

아이리스는 이미 검에 숙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선에 나설 수 있다.

싸울 심산인 것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다.

아라네아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리스를 껴안아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멋지고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는 팔짱낀 자세 그대로 아라네아의 상찬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아라네아가 아이리스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소박한 의문을 담았다.

"코르 경의 수염은 엄청 짧은데... 그걸 어떻게 뜯으려고?"

아이리스가 콧김을 후웅 내뱉었다.

"짧으면 좋죠. 더 아플테니."

아라네아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저 바다 건너에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에게 짧은 수염이 어울릴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

"웻지."

"빅스."

"뭐하는 거야, 이런 곳에서."

웻지는 턱끝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낚시대를 가리켰다.

"낚시? 잡히긴 하는 거야?"

크리스탈룸의 지하 수로. 그야 물이 흐르고 있긴 하지만, 문명의 때에 찌든 콘크리트로 둘러쌓여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이 곳에서 설마 낚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왕께서 발견한 낚시 스폿 중 하나라더군. 의외로 꽤 잡힌다는 거야. 이그니스경이 알려줬다."

"재상님이? 하하. 고마운 일이네."

"그래. 이그니스경이 장소를 말해주고 아가씨가 날 이리로 쫒아냈어."

"아아. 아가씨가. 그것 참."

기쁘고... 배알 꼴리는 일이네.

아무리 둘만 있고 싶었기로서니.

"아가씨는 정말 언제까지나 아가씨구나."

강한 자는 남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참지 않는다. 그리고 아라네아는 그들 중 가장 강하다.

"동감이다.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기분 탓이냐? 왠지 이를 갈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 아니다."

"이런, 웻지. 등을 밀어드린 건 우리야. 잊지마."

빅스의 너스레에 쿡, 하고 웻지가 웃었다. 무뚝뚝한 웻지에게 농담을 걸어주는 넉살좋은 녀석은 아라네아 용병단에서 빅스가 유일하다.

한숨을 내쉬며, 웻지가 회상했다.

"설마 10년이나 걸리다니. 아가씨가 못하는 게 다 있었지."

"그래... 그 용기사로 이름높은 전사 중의 전사가 꽃을 받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꼴하곤."

"이그니스경, 여기에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눈이 안보이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누가 아니래. 아가씨가 불에 타서 사라졌을 테니까 말야."

그런 아가씨가 지금은 완전한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아서, 도를 넘어선 애정 행각으로 사방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니.

처량하기 이를데 없는 웻지를 보며 빅스가 배를 잡고 과장되게 웃었다.

그 폭소가 잦아들었을 때 빅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웻지는 잠자코 빅스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이윽고 빅스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아가씨를... 지켜낼 수 있으려나? 내 감이 그래. 이번엔 정말 위험하다고."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이다. 고작 이 이야길 하려고 그렇게 빙빙 돌아오다니. 그러나 웻지는 빅스를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빅스의 이런 면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웻지는 담담하게 빅스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지 않나. 이미 오래전부터 아가씨는 우리 손을 떠났다."

아픈 곳을 찔린 빅스가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야 그렇지! 나도 알아. 그래도."

"아가씨는 아가씨다?"

"맞아, 그 뭐냐, 아버지의 마음? 같은 거?"

드디어 웻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한심한 녀석, 내가 잘 봐주려 해도.

"관둬, 죽는다."

웻지의 짧은 제지가 빅스를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아, 그렇지. 어르신과 사이가 안좋았지."

"딱 이 문제로."

"맞아. 우리들 전부 때려눕히고 어르신과는 그 자리에서 의절했지. 뭐야, 나 지금 죽을 뻔 했구나. 죽는 거 정말 쉽네."

"잘 아는 놈이."

"하하..."

실없이 웃기 시작한 빅스에게 눈을 한 번 흘겨준 웻지는 다시 한 번 낚시대를 바라보았다. 낚시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리 평온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큰 놈이 걸릴 모양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걱정하지 마라, 빅스."

"웻지?"

"마침 때가 됐군. 도착했을 거야. 물건을 보러 가자."

"물건?"

"네 걱정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물건."

"진짜? 진짜냐? 그런 게 있어?"

"허둥거리지 마라. 경망스럽긴."

"웻지!"

웻지는 조심스럽게 낚시대를 챙겼다. 왕이 낚시 초보일 때 사용했다던 귀중한 물건인 모양이다. 상하게 하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그니스가 신신당부했다. 그는 왕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예외없이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 처럼 행동했다. 아라네아의 눈 빛 공격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이 낚시대를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의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

웻지는 기회가 허락했을 때 왕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봐두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빈약하고 여리여리했지만 인상이 밝고 예쁘장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가 그의 감상이었을 뿐이다. 설마 그 선이 가는 청년이 이오스에 빛을 되돌려 줄 영웅왕이었을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웻지는 아라네아 용병단의 격납고로 방향을 잡고 느긋하게 걸었다. 그런 그를 보다못한 빅스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귀찮은 녀석이다.

.

붉게 물든 황혼의 노을과 함께 그들은 찾아왔다.

작은 놈들도 있고 큰놈들도 있었다. 땅을 파고 드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놈들도 있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은 생명체에 대한 집착과 분노와 살의를 두르고, 지평선을 새까맣게 채워 건재함을 과시했다.

지금껏 살아남아 시해를 상대해왔던 글레이브 이하 인섬니아의 병사들은 용맹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적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수문장이 죽고, 진형이 무너지고, 메인 게이트가 수비 기능을 상실하기까지 한시간으로 충분했다.

목숨을 잃은 전우들을 뒤로 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은 직감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오늘, 잠들지 않는 도시, 인섬니아는 멸망한다.

우리들은 전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