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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18 파판전력60분. 상처 (FF4)
posted by nameless7777 2016. 9. 18. 23:14
세실은 기본적으로 예의바르고 조심스럽고 성실한 남자였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세실을 알고 지낸 이후 근 30년 동안 로자는 그가 편한 복장을 입고 있거나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하물며, 벗은 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로자 스스로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암흑기사 시절, 기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세실은 잠들기 직전까지 갑주 차림을 고수하곤 했다. 로자가 가끔씩 그의 숙소에 방문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세실의 갑주를 벗겨내기 위해 어마무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 작업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곤 했다. 불 빛 하나 없는 세실의 침실에서 그의 몸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로자보다 일찍 일어났고, 그녀가 깨어날 때 쯤에는 이미 갑주를 완전히 착용해둔 상태로 대기함으로써 로자를 실망스럽게 만들었다.

왕이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왕으로써의 마음가짐은 정갈한 복장에서부터 비롯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생각이 거의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신하들의 태도에서 자명하게 드러났다. 로자나 세오도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에조차 세실은 빈틈이 없었다. 우아한 복장을 착용한 채 유려한 동작으로 홍차를 마시는 세실을 목도한 신하들은 그 빈틈없고 준비된 자세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휴식 시간을 방해받았음에도 자애로움 그 자체로 신하를 대하며 정무에 임하는 그는 그야말로 성왕. 세실을 상대로 정쟁을 일삼는 신하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누가 성왕의 성실함을 두고 감히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로자는 그녀의 반려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젊고 아름답지만, 세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예전에 즐겨 입던 각종 대담한 복장들은 참아야만 했다. 가끔은 예전처럼 화려한 복장을 입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세실이 진지한 얼굴로 손톱을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로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내인 자신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만큼은 좀 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게 아닌가. 하지만 세실은 이상하게 완고한 면이 있었다. 모든 단편적인 시도를 실패로 날려버린 로자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왕 전용 휴식 공간 창출 프로젝트. 왕과 그가 허락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인공 호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로자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이 안건을 내놓고, 그 근거와 상세 내용을 밝혔다.

1. 신하들의 무능과 횡포가 도를 넘어, 티타임을 즐기는 시간조차 온전히 왕을 쉬게 놔두질 않는다.

2. 몸을 돌보지 않고 정무에 골몰하는 왕에게 신하들의 방해없이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은 필수불가결하다.

3. 예산은 그 동안 비축해둔 왕비 품위 유지비를 사용하며, 따라서 추가 예산 편성은 불필요하다.

세실이 성왕이라면, 이럴 때 로자는 패왕이었다. 그녀가 나선 이상 승산은 없다. 신하들은 얼굴을 흙빛으로 바꾸며 만장일치로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치심 따위 애저녁에 내다 버렸다. 이제 곧 세실의 벗은 몸이 백일하에 들어날 것이다.

.

"응?"

"응, 벗어. 같이 호수에 들어가야지."

로자는 이미 겉 옷을 벗고 수영복 차림으로 세실 앞에 서 있었다. 예전의 백마도사 시절을 연상시키는 눈부신 몸매에 세실은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왕으로써의 위엄을 찾으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부인, 이렇게 갑자기-"

"부인이고 자시고. 얼른 벗어."

"으... 하지만... 왕의... 위엄이..."

세실은, 언제부턴가 로자를 안달나게 만들곤 했다. 나는 전장에서조차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는데, 세실이 나를 망쳐놨다. 로자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물쭈물하는 세실을 바라보며 로자가 말문을 열었다. 다시 열린 것은 왕비의 발언이었다.

"왕의 위엄이 흘러넘치는 폐하께오선."

"응?"

휙휙 급변하는 정세에 세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와의 정사가 계획되어 있는 날에도 정사를 오후 아홉시 까지 보시지요. 그렇게 해가 떨어진 후 들어오셔서, 아녀자에게 수치를 주지 않으려 먼저 방의 촛불을 모두 끄시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용케 미리 준비된 백탕을 찾아 어수를 씻으십니다. 제가 재촉하면, 여인의 은밀한 곳에 손을 대는데 청결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시고 손톱 사이사이까지 모두 닦아내시지요."

"..."

"그리곤 의복을 하나씩 벗고 개켜 침대 구석에 차곡차곡 쌓으시고, 그 이후에는 제 의복을 하나씩 벗기고 개켜 침대 구석에 차곡차곡"

"아, 그래, 알았어, 로자."

"정사를 시작하실 때에는..."

"미안. 알았어. 벗어. 당장 벗는다고."

진작 그럴 것이지. 로자가 표정을 풀고 약간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연애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에, 세실의 표정도 20년 전의 청년처럼 풀어진다.

그렇게 잠시 후 드러난 것은, 전혀 쇠락하지 않은 근육질의 건장한 육체. 4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 없다. 터질 것 처럼 팽팽한 대흉근, 꿈틀거리는 상완, 꽉 조여져 있는 복근과 둔근, 통나무같은 대퇴근.

그리고 로자는 왜 세실이 자신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실..."

그의 온 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언뜻 보더라도 세자리 수는 되는 것 같다. 물론 몸을 맞대고 있으면 그 몸에 나있는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지만 옷 아래 드러난 상처를 본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아군을 신경쓰고, 모든 치명적인 공격을 스스로 받아내며 싸워왔다. 상처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세실은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로자. 후유증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암흑기사 시절에 입었던 상처야. 로자와 함께 있을 때 얻은 상처는 네가 전부 고쳐줘서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았다.

"그런 건 나도 알아. 기사가 상처를 입은 게 뭐 어때서 그래. 숨길 필요는 없었잖아?"

"그건..."

"뼈가 드러나는 상처나, 육체가 결손되는 중상도 숱하게 봐 왔어. 내가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던 거야?"

"...맞아. 로자. 20년 전에는 네가 그런 걸 보면 큰일나는 줄 알았어. 걱정시킬 수 없다고... 내 상처는 나 혼자 전부 짊어지면 된다고. 바보같은 이야기였지."

최전선에서 회복을 담당했던 로자는,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는데.

세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암흑기사의 갑주... 세세한 구조는 잘 모르지? 입을 때 엄청 아프게 되어 있어. 익숙해지는 것 따윈 불가능해. 가능하면 벗고 싶지 않을 정도지. 육체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가까운 분노야말로 암흑기사가 가진 힘의 원천이거든. 그걸 끌어내기 위한 거야. 그래서 그걸 입을 때 내 표정... 로자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로자는 살며시 세실의 손을 잡고 호수로 이끌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와서 위로할 필요는 없다. 이 고백은 세실에게도 난처할 뿐 괴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20년전의, 세실이 가장 힘들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세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로자는 곧 그의 육체를 시각적으로 탐닉할 여유를 되찾았다. 밝은 낮에 그의 몸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간신히 쟁취한 기회를 날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과연 완벽한 육체다.

상처가 있음에도, 아니, 상처가 있기에 오히려.

자상한 아버지, 사려깊은 남편, 현명한 군주. 하지만 그 본질은 상처투성이의, 야만스러운, 전사 중의 전사. 그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 준하는 차이에 로자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로자가 다시금 세실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거야? 우리 결혼한 다음에 말야. 왜 지금까지 벗은 몸을 안보여줬어??"

로자가 이제 대놓고 재촉하자 세실 표정에서 난처함이 깊어졌다.

"그건... 계속 그러다보니 왠지. 봐, 난 사실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어. 그래서 바닥부터 제왕학을 배웠잖아. 그 중에 방중술도 있었다는 건데..."

세실은 자신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약간 멈칫했다. 그러나 오늘의 로자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왜 멈춰? 얼른 이야기해봐. 나 안달나게 하지 말고."

세실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왕이 왕비를 고풍스럽게 안아주는 방법이 말이야, 왕비를 아껴준다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계속 그 역할에 몰입했던 것 같아."

그야...

로자도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로자도 처음에는 그런 제왕학의 세실이 무척 생경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서 무척이나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연예기간까지 합해 20년이나 사랑하는 남성의 실루엣만 보고 밤을 지샜단 말이지.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거야.

잘 익은 사과 같은 로자의 얼굴을 본 세실이 겨우 여유를 되찾았다.

"그래서 여길 만든 거야? 고작 내 벗은 몸을 보려고?"

로자는 세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작이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는 거야. 이 차림 그대로 함께 해변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아마 이 남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세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둘은 호수에 몸을 천천히 담궜다. 물은 약간 차가웠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두 사람의 체온은 이미 적당히 달아올라 있었다.

로자가 세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세실은 팔을 둘러 로자를 감싸 안았다.

로자가 세실의 가슴에 대고 담담히 고백했다.

"세실, 난 말야, 항상 당신과 이렇게 하고 싶었어. 왕과 왕비라는 직책에 얽메이지 않고 말야. 세실은, 왕 같은 거 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실이 답했다.

녹아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로자. 1년만 지나면 세오도르도 20세가 돼. 그러면. 그 때가 되면."

로자가 세실을 가만히 올려다 봤다.

"난 세오도르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야. 그리고 우린 왕성에서 나가자. 비공정으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마음 가는데로 사는 거야. 어때?"

세실의 물음에 로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상관없다. 세실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어짜피 세실은 그 이후의 인생을 오롯하게 로자를 위해서만 쓰기로 다짐했으니까.

다만 잠시 후 세실은, 이후의 인생 설계와는 별개로, 로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로자? 당신, 수영복 어쨌어?"

로자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실은 그 이상 로자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실이 호수에서 나올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의 입술은 로자의 입술이나 그에 준하는 다른 것으로 막혀 있었다.

세실이 제왕학에서 배운 방중술은, 망극하게도 호수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물론, 세실은 로자가 기대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본질적으로 비할 바 없이 야만스러운 전사인 것을 스스로 증명해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