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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09 FF15. (1) 녹티스 2
posted by nameless7777 2017. 3. 9. 21:39





썩 꺼져라.





내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테니.





.

첫 인상은 사마귀였다.

그리고 녹티스는 곧 놈을 고작 사마귀 따위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사마귀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습격하지도 않는다.

녹티스는 놈의 얼굴을 응시했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조악한 표현이지만, 방금 지옥에서 뛰쳐 나온 것 같은 면상이다. 고교 시절 프롬프토와 집안의 불을 전부 꺼놓고 함께 봤던, 트라우마 레벨로 끔찍했던 공포 영화보다 그로테스크하다.

녹티스는 지금 당장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야. 난 그저 곤충을 싫어할 뿐이야. 너도 그렇지? 응? 프롬프토.

젠장.

젠장젠장젠장.

이제와서 그럴 수는 없다.

내 얼굴엔 왕자의 체면이라 하는 귀찮은 것이 발라져 있다. 이것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얼굴이 썪어나가기 시작할 터이다. 쿨하고 잘생긴 마스크에 패배자의 낙인이 찍힌다.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무섭다.

면상도 흉상이지만 우선 덩치가 크다.  높이만 해도 8 미터는 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크기 뿐만이라면, 놈보다 큰 몬스터도 잡아봤다. 마력을, 세계의 근간을 몸에 걸친 녹티스는 알 수 있었다. 놈의 힘은, 그 절망적일 정도의 힘은 완전히 격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기적적일 정도로.

문득 이 놈의 존재를 몰랐던 척, 알아채지 못한 척 애써 피해다녔던 과거가 떠올랐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놈인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소름이 돋고, 암담하고, 볼수록 공포가 깊어질 뿐이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 사마귀의 집게 발에 해당하는 앞 발이 몸통에 좌우 세 개 씩, 무려 여섯 개나 된다.  그 앞 발에 달려있는 손톱이랄까, 주먹이랄까. 애초에 저걸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방금 저 게젓갈 같은 놈이 세개의 왼팔과 함께 집게 같은 손톱을 휘두르자 제국 최신예 대량 학살형 마도 아머가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내가 맞는다면 아마 물렁뼈 하나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손톱을 발사하는 공격에 와서는 그저 소름이 돋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면 놈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걸로 내 허리는 절단나겠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 흉흉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글라디오의 하반신 보다도 훨씬 튼실해 보이는 4개의 다리이며, 몸체 뒷 편에는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훨씬 두꺼운 꼬리가 달려 있다. 녹티스는 곧 놈이 가볍게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건장한 마도병 셋이 장작개비 처럼 날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희들 아라네아 같구나. 노력하면 전설의 용기사가 될 수도 있겠어.

자기가 생각해낸 농담에 실없이 웃으며 녹티스는 괜히 우쭐해졌다. 언제 어느 때나 여유를 찾아내는 나의 이 그릇이야말로 왕의 덕목이지. 그렇게 자평해본다. 머릿 속에 세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만, 이 정도로만 하자.

슬슬 농담할 때가 아니니까.

이제 집중하지 않으면 아딘은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고를 덜게 될 것이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열심히 했다. 아직 그 정도 여유는 있다. 그렇게 믿으며, 녹티스는 놈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봤다. 나는 저 무도한 놈에게 마도병처럼 허리를 강제로 접히고 싶지 않으니까.

나굴파르.

사람을 먹고, 시해를 먹고,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그 힘을 흡수하는 존재. 저주스런 시해이면서도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류의 천적. 저 급하고 성질 더러운 리바이어선조차 저 녀석을 쉽게 어쩌지는 못하리라.

꼴 좋다.

내가 오늘 저 놈을 쓰러뜨릴 테니까, 잘 보고 나서 나에게 충성을 맹새하도록. 알았냐? 이 살찐 동갈치 자식아.

.

"정말 저거랑 싸우는 거야?"

프롬프토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탄환을 장전하고 있다. 일반인에 불과한 그도 전투를 거듭하며 썩 괜찮은 전사로 성장했다.

녹티스는 이 끈기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프롬프토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녹티스는 누구 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녹트에게 달렸지."

이것은 이그니스다. 안경을 고쳐쓴 왕의 참모는 약점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굴파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통찰력에 녹티스 일행은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척봐도 장난 아닌데. 그래도 물러설 수야 없지."

글라디오가 꿈틀거리는 근육을 갈무리했다. 아직 녹티스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글라디오는 나굴파르가 자신의 투지를 읽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방패. 녹티스가 검을 던지는 순간 뛰어나갈 준비를 해둘 뿐이다.

등 뒤에 있는 친구들을 느낀 녹트가 목소리에서 힘을 풀었다. 들켜도 어쩔 수 없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강한 왕자니까.

그런 걸로 되어 있으니까.

"저 놈 죽이고 등뼈라도 뽑아가면 되겠지."

엔진 블레이드를 소환하며 녹티스가 사소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 할아범, 정체가 뭐야? 왜 저런 걸 알고 있어?"

"내말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냥 뼈나 챙겨다 줘보자고."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을 담았다. 그 가벼운 어조에 녹티스의 어깨도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상대다. 마력이 없다하더라도 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텐데, 친구들은 겁을 먹거나 주눅든 기색이 없어 녹티스는 마냥 든든했다. 나도 좀 더 힘을 내서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고양감이 솟아났다.

할 수 있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쉿."

녹티스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이그니스가 왼손 검지를 입가에 세우며 주의를 촉구했다.

"놈의 등 뒤로 마도 아머가 접근하고 있어. 놈이 돌아서는 순간 돌격한다."

글라디오가 크게 어깨를 돌린다.

"좋아. 한 판 떠볼까."

프롬프토는 잘 숨겨둔 두 번째 총의 장전도 마쳤다.

"언제라도 좋아."

그리고 나굴파르와 마도아머의 교전을 확인. 마도아머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기대하며, 이그니스는 품안에서 꺼낸 마법병을 쥐어 부쉈다.

"가라, 녹트!"

녹티스가 정제하고 이그니스가 재련한 마법의 힘이 엔진 블레이드에 깃들었다. 녹티스는 마력으로 충만해진 엔진 블레이드를 나굴파르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 던졌다.

-그것은 처절한 사투였다.

이 때 녹티스가 사용한 포션과 엘릭서는 실로 48개.

녹티스는 그 외에도 일반인에게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인 제국 마도병 전용 근육 강화제, 흥분제와 같은 전투 약물도 8개나 사용했다.

소중한 엔진 블레이드는 이가 다 빠져 버렸고, 왕가의 힘은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이나 빌렸다.

승부가 났을 때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이그니스. 녹트는?"

"아직 자고 있어."

"어제도 굉장했지, 녹트."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녹티스는 나굴파르를 상대하는 동안 제대로 땅에 내려 서지도 않았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놈의 반격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나굴파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을 쉴 새 없이 이어갔고, 온갖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친구들을 지켜냈다. 방패를 소환해 막아내고, 얼굴을 직접 공격해 시선을 돌리고, 검을 휘둘러 나굴파르가 발사한 손톱들을 튕겨냈다.

과연 영웅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왕자의 형제들은 나굴파르의 힘을 피부로 느끼며 전율하면서도, 왕자의 비호 아래 움츠러드는 일 없이, 최강의 적을 상대로 완벽한 성과를 일궈냈다. 프롬프토의 저격은 나굴파르의 두 눈을 모두 터뜨렸고, 이그니스는 화염으로 놈의 외골격을 무력화시켰으며, 글라디오의 검격은 무방비가 된 몸통을 거의 반절이나 잘라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녹티스 왕자가 힘을 쥐어짜 왕가의 무기를 소환, 나굴파르를 섬멸하는 모습을- 여력을 남긴 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유롭거나 통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글라디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옳았어."

"그래."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라디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그니스의 표정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서.

"녹트가 소환한 왕의 무기는 틀림없이 열 세개였어."

"그래. 나도 다시 확인했다."

녹티스는 세 친구들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왕의 무기를 수집했다. 그 수량은 분명히 열 개일 터. 프롬프토가 굳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된거야? 설마 세 개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프롬프토다운 말이다.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그니스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중 하나는 '칸나기의 역모'. 루나프레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거야. 칸나기 취임식에서 계승하셨지."

글라디오가 이그니스의 말을 받았다.

"하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이런 젠장. 믿을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글라디오를 힐끗 바라봤다.

"못 알아볼 이유가 없어. 그건 선왕... 레기스 폐하의 검이다."

"말도 안 돼..."

프롬프토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분명히 라디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들었다. 폐하의 검은 분명히 제국이 가져갔다. 마치 전리품을 챙겨 가는 것 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 때 녹티스의 얼굴은- 프롬프토는 절대로 잊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글라디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자 초조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나쁜 버릇이다.

"녹트.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왜 우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거야."

이그니스가 글라디오의 허물을 조용히 질책했다.

"그만. 글라디오. 녹트는 인섬니아의 차기 왕이다. 우린 녹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그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마, 글라디올러스."

그 말에 프롬프토가 어깨를 움찔 거렸다. 이그니스가 가시돋친 말을 하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녹트가 마력을 넣으면 평범한 음료수가 생명의 물이 되지. 녹트가 축복한 지저분한 깃털 장식에 기원하면 죽어가던 사람도 되살아나. 녹트는 매일 이런 걸 산더미처럼 만들고 있어. 우리가 써야 하니까. 매일 수십개씩 사용하니까. 무거운 무기도 평소에는 녹트가 보관해 주고 있지. 캠핑 도구도, 텐트도 전부. 그리고 우리는 녹트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해."

감정을 드러낸 이그니스는 멈추지 않았다.

"녹트가 사용하는 순간 이동. 한꺼번에 소환하는 왕의 무기. 그것들 모두 엄청난 심력을 필요로 하지. 무사수행? 영광의 상처? 글라디올러스.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녹티스가, 차기왕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그 마지막 말.

그 마지막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글라디오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굴욕적이다. 이그니스."

글라디오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근육이 조여 꿈틀거리고, 얼굴을 길게 수놓은 상처가 일그러진다. 글리디오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잔뜩 억눌린 목소리를 새어나왔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아미시티아에게 감히. 레기스 폐하께서 어떤 심정으로 인섬니아를 지키고 계셨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방벽을 치고 계신 것을! 감히,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그 참된 아들이 짊어지고 있는 것을! 내가!"

마지막에는 거의 사자후와 같은 고함으로 변해 있었다. 글라디오가 자신의 특대검과 방패를 동시에 소환했다.

"따라와. 겁이 난다고는 하지 않겠지."

이그니스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창과 단검을 꺼내들었다.

"얼마든지."

일촉즉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두 사람에게서 여유를 앗아가고 있었다. 녹티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그니스를 격동시켰고, 글라디오의 민낯을 폭로했다.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조용히. 두 사람 모두 다행인 줄 알아."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거부할 수 없다. 상상 이상의 박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프롬프토가- 이토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처음 봤다.

프롬프토가 텐트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녹트의 귀가 잘 안들리게 된 것 말야."

프롬프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그랬으면 지금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봤을 테니까."

프롬프토가 흘린 청천벽력같은 말에 글라디오도 이그니스도 동시에 무기를 잃어버렸다. 집중력이 흩어져 무기를 현세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뭐?"

"지금, 뭐라고?"

당황한 두 사람에 비해 프롬프토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말한 대로야. 녹트, 귀가 점점 안들리고 있어. 어제도 왕의 힘을 엄청 사용했으니까, 아마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너희 둘은 그런 것도 몰랐나, 하는 비난의 어조가 아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 그 뿐이다.

하지만 글라디오와 이그니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녹트는 우리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하잖아?"

"어제의 움직임도 청각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하지만 프롬프토는 고개를 세로 젓지 않았다.

"녹트는 언제나 우리들을 신경쓰고 있어. 왕의 힘인지 뭔지로 어떻게든 하고 있겠지. 하지만 잠을 잘 때는 달라. 반응이 다르다고. 요즘에는 정말 죽은 듯이 자. 건드리지 않으면 뒤척이지도 않아."

"..."

"..."

짐작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녹티스는 요즘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차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아침잠도.

두 사람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프롬프토의 어조는 거의 타이르는 것처럼 바뀌었다.

"이그니스가 말했지. 어려운 일은 전부 녹트가 대신 해주고 있다고. 그 말이 맞다면, 녹트가 자는 동안에는 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는 것도 신중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잖아?"

"...미안하다."

"나에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냐."

면목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글라디오의 표정도 침울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슬슬 일어나야할 시간이야. 내가 녹트를 깨울테니까. 두 사람, 얼굴이 아직도 험악해. 좀 진정시키고 와. 그 다음부터는 평소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글라디오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그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쭈뼛쭈뼛 다가왔다.

"프롬프토. 미안하다. 너에게만..."

"응? 신경쓰지 마. 이런 건 나에게 맡겨."

어느 새 프롬프토가 예전처럼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이그니스는 겨우 눈치챘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간 프롬프토가 그대로 텐트 안으로 사라지더니, 언제나처럼 왁자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프롬프토! 하지마! 하지 말라고!" "우이! 드러!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네!" "너 임마!" "얼른 일어나 잠탱이 왕자님! 지금 몇 신줄 알아?" "아 진짜 바지 벗겨지잖아!" "오늘 초코보 보러 가자고! 어제 약속 했잖아!" "초코보 말고 거울로 니 머리털이나 보라고 이 화상아!" 화를 내며 텐트에서 기어나오는 녹트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프롬프토는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로 녹트와 어울리고 있었다.

당해낼 수가 없다.

결국 글라디오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놈은 당췌... 이길 수가 없군."

이그니스는 설핏 알아채고 있었다. 저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프롬프토는 그저 녹티스와, 우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프롬프토는 강하다. 어째서인지 절로 웃음이 흘러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정말이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겨우 여유를 발견한 글라디오가 얼마전에 새로 얻은 이마의 상처를 긁적였다. 마침 이그니스도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낸 글라디오가 한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그니스. 저기, 뭐냐."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그니스는 언제나 그렇듯, 글라디오보다 솔직하고 어른스러웠다.

"미안하다, 글라디오. 진실된 왕의 방패에게 내가 말이 심했다. 우리들 중 녹트가 가진 왕의 자질을 가장 믿고 있는 건 너였지."

글라디오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아버지나 불사장군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 참, 이 놈의 성질 어디가서 갈아마시던가 해야지."

"또 무사수행을 나가겠다고 하면 곤란한데."

"흐하하. 안가 안가. 저것들 두고 내가 어딜가."

녹트는 이제 프롬프토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었다. 땅바닥을 굴러 흙투성이가 된 프롬프토는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왕자의 겨드랑이 분비물을 조합하면 신경작용제를 만들 수 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녹트는 팔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넣었지만, 글라디오가 보기에는 여전히 젓가락 같았다. 언제까지나 빈약한 녀석이다.

그 장난질을 구경하며 이그니스도 간신히 감정을 정리했다. 이 여행, 정말이지 질릴 틈이 없다.

"식사다. 글라디오. 오늘은 채소가 없는 걸로 하지."

글라디오는 참모의 판단을 완전히 신뢰했다.

"찬성이다."

그리고 잠시 후 녹티스는 흔한 샐러드 한 조각 없이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특선 가루라 스테이크 두 덩어리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녹티스는 거의 사랑을 고백할 것 같은 눈으로 이그니스를 쳐다봤지만 이그니스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예상대로였다.

스테이크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

그리하여, 녹티스 왕자가 계획하고 있던 몬스터 토벌 미션은 모두 종료되었다. 녹티스와 그 동료 헌터들은 이오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베히모스를 쓰러뜨렸고, 몹시 끔찍한 용종과 뱀들을 차례로 사냥했으며, 귀찮게도 하늘로 도망치는 잡것들까지 전부 깔끔하게 처리했다.

마지막에는 임섬니아의 역대 왕들이 지하에 봉인한 모든 잠재적인 위협들을 제거함은 물론, 이 모든 존재들을 전부 합한 것 만큼이나 끔찍한 나굴파르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 망국의 왕자와 그가 목숨보다 아꼈던 세 명의 킹스 글레이브들이 해낸 일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의 추도식에서 밝혀지게 된다.